데이터 동기화 진행도: 42%
퍼니싱이 폭발한 지 오래됐다. 베라조차 그때의 일을 거의 잊을 만큼.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때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비켜주세요, 비켜주세요! 카트 먼저 지나가게 해주세요!
복도에 부상자가 얼마나 더 있지?
너무 많아서 파악이 안 돼요... 수술실 즉시 확보 가능한가요? 중증 환자들 상태가 위급해요!
재난 발생 이후, 폐기된 병원은 급박하게 임시 야전 병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수술대의 환자는... 한계점을 넘었어. 더 이상의 의료 조치는 무의미해.
환자 상태가 어떻길래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거야?
침식체가 환자의 장기를 관통했어. 지금까지 생명이 유지된 것도 기적이야. 당신은 환자와 어떤 관계지? 공중 정원에서 내려온 거야?
의사는 눈앞의 구조체를 빠르게 훑어봤다.
베라는 상자와 외투를 들고 있었다. 외투에 난 피투성이 구멍을 보니, 수술실의 환자가 얼마나 위중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최종 소견을 말하겠다. 두부 중상에, 복부 대출혈이 진행 중이야. 현재 의료 장비로는 지혈이 완전히 불가능해.
이곳은 임시 의료소일 뿐이야. 기본적인 의료 물자도 바닥났고, 중증 외상 처치는 불가능한 상황이야.
네가 제시한 방안은 실현 불가능해. 개조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야. 공중 정원 구조대와 즉각적인 연락이 이뤄진 후, 임시 의료소의 환자들을 일괄 이송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야.
……
여기 응급 의료 물품이 있어. 대형 외상 부위 지혈과 일시적 봉합이 가능해.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생체 징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
베라는 양손으로 상자를 들어 올려 의사 앞에 내밀었다. 상자의 표식을 확인한 의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건... 함부로 쓸 수 없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 당장 응급 처치를 시작해.
알았어.
의사는 붉은 머리 구조체를 잠시 주시했다. 하지만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상자의 출처를 더 캐묻지 않고, 상자를 들어 수술실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
문이 닫히기 전, 베라는 수술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고통에 찌든 환자의 얼굴이 악몽 속에서 떨고 있었다.
의식 불명의 환자는 현실 세계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악몽에 사로잡힌 채 체력이 서서히 바닥나고 있었다.
바이털사인 모니터에서 급박한 경고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침식체의 공격을 받기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왜 파오스의 팀과 헤어지게 된 걸까?
그때... 허리의 통신 장치가 갑자기 살아나더니, 비웃듯 차가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이, [player name], 30초나 늦었네.
목표 좌표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확인되는데, 왜 상황 보고가 없지? 설마 처음 지상에 나와서 겁먹은 거야?
단말기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흘러나왔다. 전파 방해 신호가 작동하는 듯, 화면이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기기를 조작하며 신호를 조정하자 화면이 점차 선명해졌고, 마침내 송신자의 영상이 또렷이 나타났다.
어이, 제법 멀쩡한데? 무슨 일 있어?
단말기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흘러나왔다. 전파 방해 신호가 작동하는 듯, 화면이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기기를 조작하며 신호를 조정하자 화면이 점차 선명해졌고, 마침내 송신자의 영상이 또렷이 나타났다.
나야, 왜? 날 보기 싫어?
……
바네사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모호한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집중력이 부족하다면 지금이라도 팀에서 빠져. 우연히 같은 팀이 되었고 내가 추첨으로 홍팀 지휘관을 맡게 됐지만, 학점을 위해 너 같은 무능한 팀원과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곳은 단순한 실전 훈련장이고, 주변 구역은 모두 수년간 안전이 검증된 정규 보육 구역이야. 만약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움직이지 말고 마지막 기도나 올리는 게 좋을 거야.
"분노"와 "질책"이 마무리되자, 바네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홍팀 전체에 작전 지시를 하달했다.
전원 분산 배치! 작전 속행!
청팀이 구역 내 다수의 함정을 설치했다는 정보를 받았어. 이상한 점 발견하면 바로 알려줘.
지금 우리 위치는 카퍼필드 그룹 폐허야. 곳곳이 검게 탄 흔적으로 뒤덮였어. [player name], 그쪽 진행 상황 보고해.
인간의 보고를 들은 후, 바네사의 지휘 채널에서 그간의 긴장이 풀리며 작은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실력자를 얻은 안도감이 무전 속 숨소리에 배어났다.
청팀의 깃발도 못 찾았으면서 이런 성과에 들떠있다고? 실력이 바닥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구나.
나와 [player name](이)가 같은 팀이라고 안심하는 거야? 실전 훈련은 팀 성적만으로 평가하지 않아. 교관이 너희 개개인의 행동을 모두 기록하고 있으니... 제대로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player name]도... 예외는 아니야. 그... 실력이라는 걸로... 누굴 깔보는 건지...
통신 주파수를 여러 번 조절했지만, 다른 채널에서도 잡음만 가득했다.
멀리서 이상한 진동이 감지되자 인간은 전술 헤드폰을 벗고 주변을 경계하듯 고개를 들었다.
침식체가 울타리 틈새로 파고들어, "손"을 이쪽으로 뻗어왔다.
반사적으로 제식 권총을 꺼내 들었다. 실전 훈련용 지상 기지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과 함께 침식체의 코어를 정확히 관통했다.
순간, 울타리 틈새로 붉은빛이 연이어 번뜩였다... 하나, 둘... 점점 더 많이...
인간은 총구를 흔들림 없이 겨눈 채, 틈새에서 번뜩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통제할 수 없이 심장이 요동쳤다. 지상 훈련 첫날부터 실제 침식체와 조우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교과서의 영상이나 공중 정원에서의 시뮬레이션은 지금 침식체들과 얼굴을 마주한 이 "첫 만남"과는 비교도 안 됐다.
이곳에... 비상 상황 발생... 침식체 출현!
긴급 철수... 요청...
손에 쥔 단말기에선 여전히 통신 장애음만 울렸다. 분명 다른 대원들도 이 기습 공격에 휘말린 듯했다.
인간은 급속도로 불어나는 침식체들을 앞에 두고 철수를 결정했다. 인근 보육 구역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눈앞의 역류가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줬다. 보육 구역마저 함락되었다.
인간은 혼돈 속에서 흩어지는 피난자들 사이로 목청을 높였지만,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들만이 메아리쳤다.
대규모 침식체 무리가 갑자기 출현했어! 철수 지시조차 불가능했다고!
당장 대피하라! 침식체 무리가 추격 중이다!
공포에 질린 피난자들의 회색 물결이 인간을 밀어냈고, 대지는 질식할 듯한 먼지로 뒤덮였다.
흩어지는 군중과 자욱한 먼지 너머로, 붉은 그림자가 보였다.
침식체가 바짝 추격해 오는데도, 저 형체는 공포로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박혀있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스읍...
!
붉은 형체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침식체가 인간의 복부를 관통했고, 숨이 멎는 고통 속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이 의식을 덮쳐왔다. 검은 안개가 시야를 집어삼키고, 피난자들의 절규마저 멀어져갔다.
인간은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누르려 했으나, 손바닥 사이로 뜨거운 피가 흘러넘쳤다.
제정신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암흑 속에서 분노한 함성이 폭발했다. 그 순간을 끝으로 의식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수술 직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인간이 의식을 되찾았다.
평소의 강도 높은 훈련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의료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환자의 초기 의식 상태가 양호했다. 깨어난 직후부터 선명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고,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복잡한 의료 장비들이 병실을 채우고 있었고, 온몸은 각종 의료용 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광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붉은 머리의 여성 구조체가 침대 옆에서 조용히 사과를 깎고 있었다.
이제 눈도 떴으니까 맞춰볼래? 천국이랑 지옥 중에 하나 골라봐.
극심한 갈증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건조한 입술을 겨우 움직여 말을 이으려 했다.
말하지 마. 지금은 무리야. 의료용 관이 아직 꽂혀있잖아.
유감이지만 말해주지. 여긴 지옥이 아냐. 불행하게도 넌 아직 살아있어.
그냥 "은인님"이라고 하면 돼. 여긴 지상의 임시 의료소야. 난 공중 정원 소속 구조체고, 혼돈 속에서 널 구했어, 기억나?
인간의 혼란스럽고 다소 불만스러운 눈빛을 읽었는지, 여성 구조체는 미소를 띠며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할게. 내 코드네임은 "하운드"야. 그렇게 불러줘.
과일 먹을래? 참고로 사과밖에 없어.
권하는 말과 동시에 "하운드"는 사과를 입가로 가져가 일부러 "우두둑" 소리를 내며 아삭하게 한입 베어 물었다.
인간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쳇, 재미없네.
며칠 회복하고 일반 병실로 옮긴 다음에 얘기하자고.
내가 귀중한 테스트 재료를 써가며 살려낸 건데, 헛수고 되면 곤란해. 임무도 못 마치고 네 목숨까지 잃으면 손해잖아.
수술 후 이틀째 되는 날, 인간은 다시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침대 옆에는 낯선 구조체가 사과를 깎고 있었다.
꽤 규칙적인 패턴이야. 어제도 딱 이맘때 눈을 떴었지.
인간의 입안은 여전히 바싹 말라 있었다. 마치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된 것만 같았다.
날 모르겠어?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는지는 기억나?
참 놀라워. 불행히도 또 살아났다는 사실에, 게다가 기억도 못 찾는다니... 이걸 축하해야 하는 걸까?
당분간은 조직으로 복귀 불가야. 의식이 있는 것 같으니 내 지시나 잘 따르도록 해. 난 널 담당하는 공중 정원 구조체고... 아, 이런 설명을 또 반복하네.
의사 소견으로는 네 머릿속에 혈종이 있다더군. 크기가 작아서 자연 치유가 가능하대. 그래서 개두술은 진행하지 않았어. 다만 일시적으로 신경 압박이 올 수 있다고 해. 간단히 말하자면, 당분간 네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야.
보아하니 기억상실증이군... 참 뻔한 전개라니까.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모르니까, 기억력 테스트나 해볼까. 마침 컨디션이 어제보다 나아 보이네.
여성 구조체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네 이름부터 말해봐. 어디서 왔지? 가장 마지막에 기억나는 게 뭐야? 서두르지 말고 떠올려 봐.
……
날 경계하지 않아도 되고, 상태가 좀 나아졌다고 농담할 필요도 없어. 다시 수술실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어떤 지상 실전 시뮬레이션 훈련에 참여한 것 같은데... 같은 팀 동료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의식이 두개골 속을 더듬어가다 기억에 닿으려는 순간, 머릿속이 폭발하듯 아파졌다.
기억이 희미한 구름처럼 모호했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도 어떻게 해도 붙잡을 수 없었다.
통증이 "구름" 같은 기억을 향해 뻗어가는 순간을 덮쳤고, 단 2초 만에 인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상 올라오기 전까지만 기억나는군. 이쯤에서 멈추자. 무리하게 기억을 쥐어짜 봐야 의미 없어.
상황을 설명해 줘야 할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네. 의사 소견으로는 기억 상실이 재발할 수 있다더군. 지금 설명해 줘도 내일이면 또 "초기화"될 테니까.
인간은 링거를 꽂은 팔을 들어 구석의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에는 여전히 파오스의 마크가 선명했다.
붉은 머리 구조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가방을 뒤적이다가, 이내 거미줄처럼 화면이 갈라진 "전투 파손 단말기"를 찾아 건넸다.
아직도 작동하네. 너희 단말기 성능이 예상외로 훌륭한걸.
단말기를 겨우 들고 진지하게 묻는 인간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여성 구조체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쥔 과도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파오스 쪽 애들은 다들 이렇게 웃긴 거야? 뭘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학점이라도 노리는 거야? 하하하하!
베라는 한바탕 웃느라 눈물까지 흘렸고, 그사이 손에 쥔 사과는 산화로 누렇게 변해갔다.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얘기해줄게... 네가 웃겨서 마음이 좀 바뀌었네!
내 본명은 "베라"야. 개인적인 자리에선 그렇게 불러도 돼.
단말기엔 기록하지 마.
공식 기록엔 코드네임 "하운드"만 써. 주변에 다른 이들 있을 땐 그렇게 불러줘.
난 공중 정원 소속 구조체야. 하지만 주로 지상에서 활동하지. 최근에 상부에서 파오스의 도련님 아가씨들 지상 실전 훈련을 지시했고, 나도 "애들 돌보기" 임무를 맡게 된 거야.
마음대로 해석해. 공중 정원이란 온실에서만 자란 꽃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질 못해. 내 "편견"이 싫다면,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겠지.
아하하하... 또 그렇게 순하게 받아들이고... 이 친구 정말 순진하네... 하하하하...
여기까지만 하고 마무리하자. 이후는 내일 네 상태를 살펴보고 진행할게. 이제 쉬는 시간이야.
알았어, 놀리지 않을게. 하하. 여기까지만 하고 마무리하자. 이후는 내일 네 상태를 살펴보고 진행할게. 이제 쉬는 시간이야.
베라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상대방의 이마를 짚고 마치 작은 동물을 달래듯 살살 쓰다듬었다.
인간은 입을 살짝 벌렸다.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망설이다 결국 그 말을 삼켜버렸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우리 "호기심 덩어리"가 왜 이렇다 저렇다 궁금해해도, 지금은 모두 내려놓자.
꿈나라로 돌아가. 지금은 푹 쉬는 게 제일 좋아. 얼른 회복해야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약물 때문일 수도 있고, 몸이 스스로 회복하려는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다시 졸음에 사로잡혔다.
상태가 좋아지면 내일은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겠지.
귀찮군... 공중 정원과 일부러 친해져야 한다니... 테스트 재료를 본부로 가져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됐다. 정말 의식의 바다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그걸 네 목숨을 살리는 데 쓰기로 하다니...
베라의 목소리가 서서히 희미해지며, 어둠이 가득한 물속 깊은 곳으로 함께 가라앉았다.
수술 후 3일째. 인간은 자신의 단말기 메모를 보고서야 수술 후 3일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인간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무사히 일반 병실로 옮겨졌음을 확인했다.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었다. 외상이든, 퍼니싱이든, 혹은 각종 감염이든 어떤 위협도 자신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베라가 사과가 담긴 봉지를 들고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러했다.
파오스에서 온 불운한 이는 아무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 거미줄처럼 금이 간 화면을 거울삼아 얼굴에 감긴 붕대와 거즈를 조심스레 만지고 있었다.
구조체가 병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인간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이런... 또 한 번 "초기화"됐나 보네.
베라는 잠시 멈칫했다. 마치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순간 스쳐 간 불편한 감각은 금세 의식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래도 기억하고 있네. 이거 다 네 단말기에 기록해 둔 거야? 어디 보자.
이것도 너희 학교 규정이야? 난 네 곁을 따라다니는 구조체인데, 나도 안 된다는 거야?
상부에서는 "지휘관과 구조체의 협동 전술"을 발전시키고 싶어 해. 이번 졸업 평가에서 예비 지휘관들에게 구조체를 배정한 것도 그 일환이고, 내가 여기에 배치된 이유도 그 때문이야. 그러니까 난 볼 권한이 있다고...
쳇, 네 눈빛을 보니 내가 볼 권한은 없다는 거네? 공중 정원에서는 구조체를 원래 이렇게 푸대접하는 거야?
그럼 네가 자는 동안 강제로 해킹하면?
"지휘관의 절대적 권리"라는 거지, 맞아?
베라는 병상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은 뒤, 천천히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머리 쓰기 귀찮아. 네가 알아서 처리해. 어제 약속했으니까, 상황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게.
좋아, 우선 이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말해보자.
베라의 시선이 인간의 옆구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우리는 실전 평가 중이었고, 막 본대와 합류하려던 참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이상 사태가 발생했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 침식체들이 실전 훈련용 기지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지. 그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두 개의 보육 구역도 무사하지 못했어.
우린 파오스의 팀과 갈라졌고, 넌 보육 구역 대피를 돕다가 중상을 입었어. 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널 데리고 이런 위험한 구역에 머물면서, 네 목숨부터 지키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 테스트 재료를 쓸 수밖에 없었어.
그래, 우리 실전 임무에서 확보해야 할 신형 치료 재료야. 아직 실험 단계지만, 퍼니싱을 "더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고", 인체와도 높은 친화성을 가진다고 하더라.
이 재료는 앞으로 방호복이나 수술 치료에 사용될 더 뛰어난 소재가 될 거야. 내가 일부러 쉽게 설명한 거지만, 이걸 보면 실제로 얼마나 귀중한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정말로 귀중한 재료야. 원래는 이걸 다음 기지로 전달하기만 하면 평가가 끝날 예정이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는 이걸 다음 기지로 전달하기만 하면 평가가 끝날 예정이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베라는 인간의 허리 쪽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여러 겹으로 감싸져 있던 상처 부위가 드러나며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이건 침식체가 남긴 깊은 상처야. 내가 "정말 귀중한 테스트 재료"로 네 상처를 메웠지.
자책하거나 겁먹을 필요 없어. 네 상태가 안정되면 너와 재료를 함께 인계할 거야.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면 전문가들이 테스트 재료를 제거해 줄 거고, 네 복부 상처도 더 철저히 치료받을 수 있을 거야.
베라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조금 전에도 외부와 연락하려고 했지? 내가 들어올 때 봤는데, 누구와 연결됐어?
그래, 이 근처 통신 신호는 전부 방해를 받고 있어. 네게 방법이 없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야.
좋은 소식이 있어.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어! 여기가 공중 정원의 임시 연결 지점이야. 우리가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돼.
베라는 손가락으로 좌표를 정확히 가리켰다.
"임시"라고 했잖아. 방금도 말했듯이, 이 근처에서 침식체 활동이 발생하면서 지점 배치가 여러 곳 바뀌었어.
(거짓말이야. 저건 사실 쿠로노의 지상 거점이야. 네가 나랑 함께 가서 재료를 넘겨줘야 해. 그래야만 내가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어.)
어때? 사흘이나 걸렸는데, 상황은 다 파악했어?
그럼 이제 네 상태가 빨리 회복되길 바라야겠네. 네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이 임시 의료소를 서둘러 떠나자. 이번 침식체의 이상 활동이 심상치 않아서 더 확산할 가능성이 커 보여. 만약 여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베라는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분명했다.
좋아, 중요한 얘기는 다 끝났으니... 사과 한 조각 먹어볼래?
베라는 사과를 조심스럽게 잘라 작은 조각 하나를 건넸다.
이틀 동안 계속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내가 사과를 먹을 때마다 네 시선이 사과에서 떨어지질 않더라. 이런 건 기록 안 했겠지.
오늘도 아직 제대로 먹진 못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녀는 과육을 살짝 눌러 메마른 입술 위로 달콤한 과즙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마치 단비처럼 스며들었다.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자, 베라도 미소를 지으며 따라 웃었다.
얼굴에 붕대를 이렇게 칭칭 감은 모습 좀 봐... [player name], 너한테도 코드네임 하나 만들어줄까?
꼬마 미라? 큰 미라? 자, 하나 골라봐!
마음에 든다고? 그럼 둘 다 안 부를래.
그냥 "꼬마 지휘관"이라고 부를게.
지금 네가 멍하니 있는 모습이랑은 안 어울리는데? 아직 머리가 완전히 괜찮지 않다는 거 잊지 마.
그래, "꼬마 지휘관"으로 정했어. 이걸로 결정!
……
"꼬마 지휘관"은 베라와 나눈 모든 대화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기록했다.
이렇게 매일 기억이 "초기화"되는 날들이 3일 더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의 회복 속도는 놀라웠다. 오늘은 벌써 침대 난간을 잡고 일어설 수 있게 됐다. 이건 베라조차 예상하지 못한 속도였다.
그리고 오늘, 인간의 기억은 지상에 도착하기 전으로 초기화되지 않았다.
오늘은 날 기억하네?
인간이 베라를 바라보자, 베라는 그 눈에서 어젯밤 그녀가 살짝 찡그렸던 표정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도 돼. 구조체도 악몽을 꿀 수 있어.
원래부터 별로 다르지 않아. 다들 그저 살아가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네가 지금까지 만난 구조체가 많지 않았던 것 같네.
그만하자. 자, 빌어봐. 그러면 과일을 먹게 해줄게.
베라는 다시 사과를 깎아 작은 조각으로 나눠 건넸다. 인간은 이제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됐다.
기억 유지 시간이 길어졌네. 두개골 혈종 상태도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해야 맞는 거지. 하지만 상태가 좋을 때,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볼래?
베라의 눈빛에 시험하려는 듯한 기색이 어른거렸다.
그럼 됐어, 전이랑 똑같네.
베라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그럼 네 얘기나 해볼래? 마침 나도 너에 대해 잘 모르잖아, 꼬마 지휘관.
음... 파오스에서의 생활이라든가, 주변에 어떤 선생님이나 친구가 있었는지 같은 이야기 말이야.
기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번 주 동안의 교류는 모두 단말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단말기를 손에 쥐고 있으면, 이 며칠간 구조체가 보여준 관심과 세심한 보살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인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 시점을 골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
병실 창밖의 태양이 점점 높이 올라가며, 창문을 통해 드리운 두 개의 그림자가 바닥 위를 서서히 옮겨 갔다.
인간은 지상에 도착한 후의 기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도 여기저기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베라도 파오스의 학교생활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늘 시험 성적 2등을 차지하던 은백색 머리의 소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구나. 지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공중 정원은 최소한 너희에게 평화로운 성장 환경을 제공했으니까. "공중 정원"... 너희를 온실 속 꽃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네.
이럴 땐, 내가 기대하고 있겠다고 맞장구를 쳐야 하는 건가?
타인의 평가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이 세계에서 편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아마 퍼니싱이 전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는 한 말이지. 하하.
나?
……
베라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던 채로 동작을 멈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마치 수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구조체가 되기 전, 그리고 사관학교를 졸업하기 훨씬 이전의 시절로...
베라는 자만으로 가득 찬 신경질적인 노인이 병상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는 비웃으며 "거짓말이지?"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때의 베라와 지금의 이 지휘관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비슷한 날카로움과 열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베라의 열정은 2160년 이후 퍼니싱이 남긴 얼음 같은 차가움과 냉혹함 속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베라는 눈을 한차례 깜빡였다. 늙고 쇠약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앞에는 군사학교에 다니는 "신세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거짓말"조차 어려웠다.
하...
베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평소처럼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알겠어... 네게 "관심"을 가진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이었나 봐.
아무것도 아니야. 듣고 싶다면 말해줄게. 정보 교환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방금 네가 많은 이야기를 털어놨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