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0년 12월 20일
밤
어둠이 내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베라는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군 병원 정문을 지났다. 모자챙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간 상태 확인하러 왔는데, 변화가 있어?
저녁 식사는 했지만, 식욕 부진이 계속돼. 여전히 하루 종일 식사와 수면을 반복할 뿐, 창밖만 응시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어.
음, 아직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군.
생체 징후는 모두 정상 범위로 돌아왔는데, 의학적 기준으로는 퇴원이 가능할 텐데... 계속 입원 관찰을 이어갈 생각이야?
적절한 이송지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어. 게다가 이송 전에 대화를 나누는 게 필요할 것 같아.
베라는 모자를 품에 안은 채 병원 복도를 걸었고, "특별 관리 대상"인 헤인스의 독실 창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독실의 중년 환자는 건강이 호전됐다. 전신을 뒤덮은 화상 흔적만이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공허한 눈빛은 어딘가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저 흉터들을 볼 때마다 끔찍해... 누군가가 복수나 과시를 위해 스스로를 화염 속에 던져넣을 만큼, 자기 육신까지 불태워버릴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베라는 무심히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동일한 화상 흔적을 쓸다가 시선을 들어 의사와 눈을 마주쳤다.
어깨에 남은 눈물방울 같은 눈송이와 함께, 그녀의 눈동자에도 차가운 겨울밤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내게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목적이 생긴다면, 나 역시 이런 화상 흔적을 감수할 수 있어.
안 돼, 베라.
안심해, 그웬니스. 내가 선택할 길은 저 사람과는 다를 테니까.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그는 무수한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선택을 했겠지. 하지만 난 그처럼 맹목적이진 않아. 자기 "희생"이란 명분 아래 타인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건 광기일 뿐이야.
무엇보다... 난 용의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아.
복도의 대화 소리를 감지했는지 남자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베라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
할 말이 있는 것 같네.
베라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흥분이 스쳐 지나갔고, 의사는 그 순간의 미세한 변화를 정확히 포착했다.
네 역할은 여기에서 용의자를 감시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을 텐데.
아무래도... 그와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베라를 마주한 의사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온전히 감지했다.
불타는 눈송이처럼 특별한 존재였지만, 강한 충격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의사의 마음에 불안감이 파고들었다. 베라와 용의자 사이에 형성될지 모를 예측 불가한 관계가 위험 신호로 다가왔다.
그녀는 베라를 제지하려 팔을 뻗었지만, 베라는 이미 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버렸다.
베라는 의사의 시선을 무시한 채 병실로 들어서며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
베라, 그만해.
걱정할 필요 없어. 단지 용의자의 상황을 더 파악하고 싶을 뿐이야.
딸깍.
베라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의사를 복도에 남긴 후, 본능적으로 문을 잠가 용의자와 단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또 왔구나...
그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날의 화재가 그의 음성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듯했다.
매일 마주치면서도 지금까지 침묵하더니, 오늘은 네가 먼저 입을 여는구나. 특이사항이라도 생긴 거야?
별거 아닌데, 사과가 먹고 싶어서. 이틀째 여기에 과일이 놓여있는데, 이 상태론 껍질을 깎을 수가 없어서 구경만 하고 있거든.
그의 시선이 탁자의 과일 그릇을 향했다.
쓸데없이 요구는 참 많네. 과일 하나 먹자고 껍질까지 깎아야 한다니.
베라는 병상 옆에 자리 잡고, 허리춤의 군용 칼을 꺼내 들었다. 마치 일상적인 돌봄인 듯 흥얼거리며 사과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226|153|170}~
그건 무슨 노래야?
내가 만든 건데, 신경 쓸 필요 없어.
……
쭉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화재 현장에서 날 구해준 은인인데,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할 기회가 없었거든.
화상의 고통을 모르진 않겠지. 두 달 동안, 이 병실에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
남자가 베라의 다친 팔을 가리켰다. 사과를 깎기 위해 올라간 소매 사이로 드러난 화상 흉터는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은 듯 날것 그대로였다.
넌 이 화상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거라 믿어.
베라는 남자를 흘깃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도 그녀의 손놀림은 바빴다. 능숙하게 과일 껍질을 벗기고, 사과를 단정하게 썰어 접시에 깔끔히 담아냈다.
알아서 먹어.
역시 넌 특별하군. 넌 도살장에 있으면서도 무차별적으로 돼지와 개를 죽이는 그들과는 달라.
하하하... 내가 사과 하나 깎아준 게 그렇게 특별한가? 이런 친절함을 베풀어준 사람이 없었나 보네.
없었지. 밖의 존재들은 전부 도살당할 운명의 가축이거나, 아니면 칼을 갈며 웃는 도살자뿐이야. 이런 작은 배려조차 기대할 수 없었어.
"황금시대"란 것이 네 눈엔 그저 추악하게만 보이는구나.
너도 그렇겠지?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이런 곳에 갇혀서...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유사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베라는 접시에서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천천히 씹었다. 입안에서 달콤함이 퍼지는 동안 남자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저울질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베라는 남자의 비밀을 더 파헤치고 싶었다. 지금은 대화를 이어갈 실마리가 필요했다.
난...
네 기대와는 달리, 난 아주 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어. 네가 경멸하는 황금시대의 무난한 삶 그대로였지.
부모님도, 성장 과정도, 받은 교육도 모두 무난했어. 성인이 되어서는 이곳으로 진학했고... 지금 네가 보는 그대로야.
가족들이 잘해줬어?
나를 진심으로 아껴줬지. 어린 시절부터 내 건강을 살피고 학업도 늘 챙겨줬어.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단순한 의무 이상이었어...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등굣길을 함께 걸어주고, 잠들기 전엔 늘 동화책을 읽어주었지.
머리도 빗겨줬어?
베라는 순간 멈칫하더니 0.5초의 간극을 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내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기도 했지.
부모가 학교 선생님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나?
매달 정기적으로 내 학교생활과 성적에 대해 상담했지.
남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거짓말이지?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지?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사관학교를 선택한 거고... 그때 네가 찾은 유일한 출구였나?
……
베라도 미소를 지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싶은 거야? 병실에 갇힌 신세로도 제법 당당하구나.
거짓말한 걸 반성할 필요 없어. 거짓은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굶주린 자가 진수성찬을 상상하지 못하듯, 네 이야기는 허술하기 그지없어.
너는 진정한 애정을 모르는 게 분명해.
……
보란 듯이 증명되었군. 우리 같은 부류는 서로의 존재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거든.
예전에 알던 친구가 너와 비슷한 일을 겪었어. 관심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데.
그는 베라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은 채, 손짓을 크게 하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베라의 허술한 이야기와는 달리, 그의 이야기는 디테일로 가득했다. 30분 동안 쉼 없이 흘러나온 내용엔 유년기의 상처, 청춘의 좌절, 무기력했던 젊은 시절이 담겨있었다. 끝없는 불공평과 깊은 원한으로 얼룩진 삶의 흔적들이었다.
평생을 부조리와 차별 속에서 버텨왔어. 세월이 흘러도 그 고통은 끝나지 않더군.
음... "친구 이야기"라...
베라는 그릇에 놓인 사과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과육을 바라보다 입안으로 가져갔다.
과거의 편견과 불공평했던 기억들을 묻으려 했지. 리스턴의 실험실에 들어가면서 모든 게 달라질 줄 알았거든... 젊은 나이에 이미 명성을 떨치던 그 천재 밑에서...
하지만 리스턴의 냉혹함은 그의 연구 성과만큼이나 빛났지. 자기 자신을 개조해놓고서는, 바깥에선 고상한 가면을 쓴 채 부와 명예를 쌓아갔어. 그를 증오했지만, 견뎌낼 수밖에 없었지. 그게 내 생존법이었으니까.
난 그런 "잡음"은 무시하면 그만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리스턴이 직접 찾아와 모든 걸 망쳐놓았어. 내 연구 성과를 부정하고, 연구자로서의 태도까지 문제 삼더니... 결국엔 모든 실험 샘플을 처분해버렸지.
베라는 사과를 씹다 말았다.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확보한 그 실험체들 말이야? 출처가 어디지?
겨우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경로를 찾아 샘플을 구했는데. 결국엔 리스턴이 나를 범죄자로 몰아붙이고, 샘플은 전부 압수해 버리더니, "생명 존중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며 훈계했지.
진화하기 위해선, "원칙"이야말로 가장 먼저 부숴야 할 족쇄였을 텐데.
……
남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두 팔을 내밀었다. 공감을 갈구하는 절박한 제스처였지만, 베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거리를 벌렸다.
연구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기뻐했었지. 그 모든 성과와 샘플들이 내 전부였는데... 리스턴은 그것마저 빼앗아갔어. 한 번도 아닌,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런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했어. 반드시 값을 치르게 해야만 했지.
그래서 마땅한 대가를 돌려줬어... 이제는 리스턴만이 남았군.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힐다가 말한 정보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베라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두 달간 침묵하던 남자가 오늘은 달랐다. 처음으로 입을 열어 자신의 동기와 범죄 행각을 모두 고백하려 들었다.
왜 이러는 거지?
뭐?
왜 갑자기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 거지, 헤인스?
그래, 네가 뭘 의심하고 있는지 알아. 넌 날 감시하러 왔고, 내 자백은 체포나 사형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왜 이런 말을 하냐고 묻는 거잖아...
미래의 결과보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게 더 소중해.
이렇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란 참 힘든 일이거든.
단순히 공감을 원해서? 내 이해심 하나로 이토록 결정적인 증언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
베라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두드렸다. 가슴 한쪽에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 위험을 감지할 때마다 느끼던 그 익숙한 신호였다.
그녀는 무심한 듯 과일 그릇 위의 군용 칼을 닦아 챙기며, 병실을 재확인했다. 책상과 의자, 침대는 평범했고, 의료기기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만이 환기를 위해 살짝 열려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창문이라... 두 달 동안 넌 묵묵히 그곳만 바라보았어.
뭘 보고 있었던 거야?
베라는 말을 이으며 창가로 향했다. 열린 창틈을 닫는 순간, 몇 개의 눈송이가 그녀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긴장된 신경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둠 속에서는 길가의 표시등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별한 곳을 보던 게 아니었어. 난 창밖으로 내가 꿈꾸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지.
어떤 "미래"?
인간 문명의 운명을 바꿀 기술적 전환점... "영점 에너지", 그리고 "에덴 계획". 너도 알고 있겠지? 거리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그 위대한 계획 말이야.
영점 에너지가 점화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인류의 운명이 걸린 갈림길이야...
찬란한 진화의 시작일까, 아니면 파멸로 향하는 마지막 발걸음일까?
……
너 자신의 눈빛은 볼 수 없겠지... 네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테니, 내가 말해주마.
남자는 떨리는 다리로 병상에서 일어섰다.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도,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면서도 창가의 베라에게 다가갔다.
네 눈은 야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어. 과거의 내 모습과 겹치는군. 그래서 널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넌 아직 모르겠지... 그 야망이라는 길의 끝에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는걸.
내가 창밖에서 본 미래란 바로 그것이었어... 모든 산업혁명이 치른 대가처럼, 영점 에너지 역시 인류에게 새로운 재앙이 될 거야.
새로운 혁명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인간들은 제자리에서 멸망을 기다리는 희생양이 될 뿐이야.
베라의 손이 차가운 창문을 짚었다. 그녀의 시야가 순간 흐려지며, 창밖의 어둠 속에서 붉은 섬광이 스쳐 갔다.
그러니까... 그 야망을 놓치지 마. 진화의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돼.
이를테면 이 나약한 육체를 개조하고, 불완전한 유전자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네 실험체들처럼 기형적인 존재로 만들자는 거야? 인간도 귀신도 아닌 그 기괴한 존재로? 아니면 너처럼... 자신을 파멸의 불길 속으로 던지자는 거야?
베라의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창밖을 스친 붉은 섬광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대답해. 왜 네 DNA는 "헤인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지?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거야?
그저 진화를 위한 첫 실험이었을 뿐이야. 넌 언제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어.
여기까지만 하지.
의미 없는 대화를 끝내고 베라는 문을 향해 걸었다. 이 모든 상황이 긴급 보고가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증거를 찾진 못했으나, 빌딩의 참사가 이 남자의 손끝에서 시작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헤인스에게 더 강력한 구속이 필요했다.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베라가 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그가 또 입을 열었다.
그 문을 열 용기가 있나? 각오는 됐고?
!
허리의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학교의 비상 소집령이 화면에 번쩍였고, 그 순간 병원의 경보음이 귀를 찢었다.
우우!
통신기의 짧은 메시지만으로는 상황 파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최고 위험 등급임을 직감했다.
학생들까지 전장으로 내보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뭔가 잘못됐어!
헤인스,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 움직였다간 무력 진압할 수밖에 없어!
복도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베라는 재빨리 문 옆으로 몸을 숨기며 헤인스가 병상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주시했다.
네가 한 짓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이런 허약한 몸으로 무슨 큰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내 예언이 맞아떨어졌군. "그 야망이라는 길의 끝에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잖아.
……
베라의 마음속에서 억눌려 있던 생각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잠들어 있던 영점 에너지가 불꽃처럼 점화되는 순간처럼, 그녀의 내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복도를 가르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그웬니스?!
베라는 단숨에 칼을 뽑아 들며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싸움이 시작됐다면, 지금 당장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갑자기 문밖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쓰러진 무언가가 문을 막아서며 베라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나오지 마... 베라, 나오지 마...!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여기는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인 군사 시설이잖아! 어떻게 이런 곳을 습격할 수 있다는 거지? 지금 당장 상황을 파악해야 해!
저 기계들이... 기계들이 미쳐버렸어.
으윽... 너무 아프잖아... 이제 끝이야...
어디 다쳤어? 어서 손 놓으라고! 내가 나갈 수 있게!
넌 창문으로 나가! 최대한 인파를 피해! 이건 바이러스가 분명해...
베라,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마...
넌 너무... 아아악!
베라는 관찰 창에 바짝 붙어 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의사가 말한 그대로, 폭주한 기계들이 붉은빛을 내뿜으며 의사의 몸을 다시 찢어버렸다.
안돼! 그웬니스!!
하하하하! 어때! 넌 결국 아무것도 못 했잖아!
제발! 제발 문 좀 열어줘!
의사의 몸이 한쪽으로 쓰러졌다. 베라의 손이 문고리에 닿기도 전에 "폭주한 기계들"이 문을 부숴댔다.
쿵쿵대는 충격에 병실 문이 비틀렸다. 이제 몇 초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베라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눈동자"가 공포를 담고 있었다.
창문! 창문으로 나가자!
하하하하하...
미친놈, 살고 싶으면 따라와!
베라는 남자의 옷깃을 움켜쥐고 창가로 돌진했다. 팔꿈치가 유리를 강타하자 창문이 산산조각 났다.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순간, 적색 광선을 토해내는 로봇들이 문을 박살 내며 쏟아져 들어왔다.
빨리!
베라가 남자의 옷깃을 힘껏 끌어당겼지만, 그는 창틀에서 버텼다.
지금 이 난리통에 어딜 도망친단 말이야?!
하하하... 도망가지 않을 테니, 한번 뒤돌아볼래.
창틀에 발을 디딘 베라가 마지막으로 방 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베라의 시선이 남자의 손으로 꽂혔다. 그의 목을 겨누는 건 군용 칼이 아닌, 미리 준비한 과도였다.
남자의 뒤로 광기에 물든 로봇 무리가 꿈틀거렸다. 후일 이 존재들은 "침식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의사의 붉은 피에 젖은 기계들이 떼를 지어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창가의 두 표적을 주시했다.
베라의 눈동자가 전율로 확대되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베라의 절망을 확인한 남자의 입술이 괴기스럽게 휘어졌다. 광기 어린 승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 봐... 인간의 야망은 이런 결말을 불러오지.
너의 날카로움도 결국은 이 비극적인 결말에서 무뎌질 수밖에 없어.
안돼!!
크아악!!
촤악.
짧은 몇 초가 무한히 늘어졌다... 칼날이 화상 자국이 남은 목을 파고들었고, 상처에서 붉은 피가 꽃처럼 번져나갔다.
뜨거운 피가 튀어 베라의 뺨에 닿았다. 그러나 순식간에 들이친 눈보라에 식어 차갑게 변했다.
……
…………
뚝뚝.
뚝뚝.
2160년, 종말의 장막이 찢겨 산산조각이 나 베라 앞에 흩어졌다.
튀어 오른 피, 깨진 창문으로 밀려드는 눈보라, 무리를 이룬 침식체들, 그리고 고요히 생을 마감한 시신 하나.
………………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뜨거운 무언가가 눈보라 속에서 서서히 식어갔다. 그것이 17살의 베라였을 수도, 한 소녀만의 야망이었을 수도, 혹은 한 시대의 영광이었을 수도 있었다.
항구
2161년
2161년, 항구.
갈매기가 낮게 맴돌며, 아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이게 마지막 화물이에요. 이것들을 모두 운반하고 나면, 이 항구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퍼니싱이 이 지역까지 확산하고 있다고 하네요. 여기도 곧 함락될 것이 분명해요... 전 세계의 방어망조차 뚫는 저 재앙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흥, 이 지옥 같은 세계, 끝날 때가 됐으면 끝나든가. 무슨 상관인가.
담당자가 마지막 물품 목록을 확인하며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오히려 운이 좋을지도 모르지. 종말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도 폐기된 배아 샘플 따위를 비싼 값에 사겠다는 의뢰처가 있으니 말이야.
그들의 의도야 알 바 아니지만... 어찌 됐든, 계약대로 이 화물들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운반해야겠어.
무슨 의뢰처인가요?
쿠로노라고 하던데.
그럼 뭐... 돈 많아서 할 일 없나 보네요.
예정대로 출항이 가능할 것 같아요. 함께 승선하시겠나요?
난 남겠네. 처자식이 이곳에 있어서... 저주받은 퍼니싱이 정말 이 도시를 집어삼킬 거라면, 가족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겠어.
……
그리고 말인데, 본부에서 오늘 아침에 특별 동승객이 있다고 통보가 왔더군. 신원 확인은 철저히 해야 할 거야. 지난번 본부 빌딩 방화 사태 같은 악몽이 되풀이되어선 안 되니까.
이름이 뭐죠?
어디 보자... "헤인스"? 맞아, 헤인스. 걔 왔어?
헤인스요? 바로 뒤에서 돌계단에 앉아 한참 동안 있었어요.
담당자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중년 남자의 얼굴과 마주쳤다.
갈매기 한 마리가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고, 중년 남자는 짧게 목례한 뒤 곧 떠나려는 배를 응시했다.
헤인스가 오늘 아침 도착했을 때, 화물... 그러니까 그 배아 샘플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어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라면서... "사랑"이란 단어를 읊조리더군요.
상태가 심상치 않은데... 정말 상부에서 승선 승인이 났다고요?
이게...
담당자의 시선이 중년 남자의 발목으로 향했다. 피부에 각인된 일련번호를 확인하자 상부에서 전달받은 코드와 정확히 일치했다.
확실히 헤인스군... 과학자 특유의 광기가 있더라니...
이미 무너져가는 세계야. 광기에 물든 한 명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이봐! 너! 헤인스?
……
중년 남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배 타! 가서 소중한 아이들 잘 지키라고!
배아 샘플에는 단순한 생명만이 담긴 게 아니야. 내 존재의 연장선이... 그 안에 있어. 절대 안전하게 지켜야 해.
알아서 하든가. 어서 타, 출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