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끝나면서 강당의 외벽이 뚫렸고, 사오토메 유우카는 옆 교실로 떨어졌다.
사방에 흩뿌려진 꽃잎들 대신 어둡고 칙칙한 낡은 공간이 펼쳐졌다.
먼지가 가득하고, 황폐하며 생기라곤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은 한때 학생들이 방과 후에 들르던 과외학습 장소였다.
수십 년이 지나고, 당시 철수할 때 가져가지 못했던 문구용품만이 남아있었다.
콜레도르가 준 힘을 모두 소진한 사오토메 유우카는 자신이 흘린 피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었다.
팔지...
새벽빛이 이 공간에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유우카를 비추기 직전에 멈췄다.
혼란과 당황이 뒤섞인 유우카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참이 지난 후, 유우카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시선을 다시 팔지에게로 돌렸다.
다행이야. 넌 도망쳐 나왔구나.
유우카는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
팔지는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더니,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억이 밀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절규가 부서질 듯한 말로 귓가에 들어왔다.
"팔지, 어서 도망쳐!"
팔지는 때맞춰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종말의 시대에서 마지막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다행이야. 넌 도망쳐 나왔구나."
팔지가 눈을 뜨자,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무슨 도망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그런 걸 신경 쓰는 거야?
예전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야.
유우카가 조용히 팔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보이던 집착과 광기는 적조의 힘과 함께 사라져 있었다.
무슨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라니?
다행이야. 이번에는 내 의식 투사에서 벗어났구나.
뭔가를 깨달은 듯한 팔지는 몸이 떨렸다.
너 지금 깨어난 게 아니지? 그동안 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는 거지?
맞아. 팔지. 난 모든 순간을 기억해.
내가 의식 투사를 펼쳤던 일도, 네게 적조에 합류하자고 했던 말도 모두 기억해.
유우카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야. 날 속일 수도 있었잖아. 적조가 네 의식의 바다를 압박했다거나, 콜레도르가 조종했다고 말이야.
그랬다면, 난 믿었을 거야. 차라리 그게 사실이길 바랐어.
적조가 내 의식의 바다를 압박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의식 투사만큼은 내 의지로 한 거야.
그게 가져오는 건 고통밖에 없잖아? 의식의 바다에도, 조종당한 이들에게도.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어. 처음 퍼니싱이 폭발했을 때는...
고개를 숙인 유우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퍼니싱으로 죽어간 이들의 비명과 분노,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어.
그래서 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들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했어.
박사님의 꿈처럼, 인간의 의식을 하나로 연결해서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려고 했어.
그러니 의식 투사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잖아?
…………
팔지, 알고 있었어?
퍼니싱이 폭발했던 그 겨울, 수국화 섬에 큰 눈이 내렸어.
외로운 건물들, 시든 꽃밭... 모든 것이 하얀 눈에 뒤덮였어.
세상에 나 혼자만...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위해 걸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난 그 큰 눈 속을 오랫동안 걸었어. 며칠, 몇 달, 몇 년? 알 수가 없었어. 그저 홀로 발걸음을 이어갈 뿐이었어.
내가 깨어난 그날까지 말이야.
팔지... 이제 알아야 해. 인간을 구하는 것, 모두의 의식을 연결하는 것,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그런 것들 중에...
구원받고 싶었던 건, 언제나 나 혼자였어.
유우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의식 투사를 한 것도, 이런 바람의 대체물일 뿐이었어.
유우카가 다시 고개를 들자, 검은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따라 손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유우카의 미소는 공허하고 슬펐다. 팔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유우카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적조의 힘으로 의식 투사를 하면, 아무리 해도 고통을 없앨 수 없어. 오히려...
투사 대상이 침식당하게 된다는 거지?
……
적조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것의 의지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건 내 집착을 계속 자극하면서, 그걸 통해 자신의 힘을 확장해.
유우카, 왜...
왜 적조를 받아들였냐고?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그 큰 눈 속에서 너무 외로웠으니까.
알아.
다시 살아가는 것 그리고 혼자가 되지 않는 것. 단지 그런 소박한 소망이었을 뿐이야.
난 항상 알고 있었어!
순환액이 유우카의 상처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그녀의 생명이 조용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왜... 마지막은 죽음으로 가야만 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거야?
팔지는 이미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희망의 실마리를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어. 빌려온 생명이니까, 이제 돌려줄 때가 됐어.
잔혹한 현실이 마지막 희망마저 부숴버리자, 팔지는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아팠다.
하지만 피웅덩이 속 유우카는 조용히 팔지를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
팔지,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
널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했어.
왜...
목이 메어 말할 수가 없었다.
왜 어렵게 만났는데,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걸까?
왜 모든 힘을 다했는데, 이런 결말만 얻을 수밖에 없는 걸까?
왜 나 같은 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걸까?
신랄하게 비웃어도 좋고, 절망하며 울어도 좋고, 처절하게 소리쳐도 좋아. 뭐든 좋으니까, 단 한 순간이라도 날 욕해줘.
난 널 구하지 못했어. 널 죽게 했어.
이렇게 나약하고, 무력하고...
팔지?
나...
널 만나고서야 알게 됐어. 의식 투사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을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의식을 연결해도 난 외로웠어.
적조의 힘이 사라져야만 내가 해방될 수 있었고, 우리가 진정으로 재회할 수 있었던 거야.
이건 온 힘을 다해야만 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이제 자책하지 마.
팔지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었다.
그래도 넌 떠나야 하잖아.
맞아. 내 생명은 이미 수년 전에 끝나야 했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건, 덤으로 주어진 시간일 뿐이야.
아쉬운 게 있다면,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거겠지.
팔지는 강당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유우카를 깊이 바라보았다.
작별, 작별... 팔지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팔지는 유우카에게 수없이 많은 작별 인사를 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억나? 난 모든 사람의 소원대로 꿈을 만들어줬어.
그 꿈속에서 어떤 이는 장교가 됐고, 어떤 이는 영웅이 됐고, 또 어떤 이는 군복을 벗고 평범한 삶을 살았어.
그런데 넌 정원 고등학교에 남아있었어.
정원 고등학교를 꿈꾼 게 잘못된 거야?
……
가장 좋은 꿈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어야 해.
!
유우카는 미련이 남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팔지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함께 보았다.
낡은 교실, 새로 자란 꽃과 풀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갈 것이었다.
팔지, 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넌 앞으로 나아가. 난 여기 남아있을게.
부드럽고 가냘픈 유우카의 목소리는 생명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 갔다.
춥다.
유우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힘겹게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유우카, 유우카!
여기...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유우카의 두 손이 힘없이 떨어지더니 몸이 기울어져 갔다.
!!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이렇게 멀었다.
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데도 닿을 수 없다.
팔지가 유우카를 받기 위해 달려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미 유우카를 받쳐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사님?
리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의아해하는 순간, 바렐리아의 통신도 연결되었다.
팔지, 아직 살아 있다면 어서 철수해. 적조가 곧 들이닥칠 거야.
적조? 아직도 멈추지 않은 거야?
헤바와 오블리크의 의식의 바다는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멈추지 않았어.
이상해. 유우카의 힘은 이미 사라졌잖아?
적조의 여인은 유우카에게 남아 있는 힘을 회수하려고 해.
리카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유우카의 어깨를 받쳐주며,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그러면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적조가 곧 들이닥친다고요.
팔지, 이게 내가 하려고 하는 마지막 실험이야.
박사님, 저 정말 화내고 싶지 않아요. 유우카가 이제 떠나려 하잖아요!
……
유우카가 아름다운 꿈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서도 왜 계속 고통 속에 있었는지 아나?
유우카는 의식 투사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잖아요.
그걸 시킨 건 박사님이잖아요.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해요?!
리카는 진지하게 팔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는 고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꿈을 만드는 사람은 꿈을 꿀 수 없기 때문이야.
!
"구원받고 싶었던 건, 언제나 나 혼자였어."
이게 바로 프로메테우스야.
의식 투사로 인간들의 의식을 교류하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려던 실험...
하지만 유독 그걸 주도하는 사람만은 행복하지 않았어. 우습지 않니?
팔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려한 옷차림의 리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유우카는 수십 년을 잠들어 있었어요. 박사님은 유우카가 아닌데, 어떻게 그녀의 감정을 알 수 있죠?
리카는 살짝 손을 뻗어 그들을 비추는 햇빛을 받았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구조체로 개조했는지 물어 본 적이 있지?
그건... 의식 투사 실험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야.
리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팔지의 마음속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이미 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유우카가 잠든 후, 스스로를 의식 투사의 실험체로 만든 거군요.
그래서 의식 투사가 유우카에게 어떤 고통을 줬는지 알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 내가 느낀 건 유우카가 겪은 것의 만분의 일도 안 돼.
리카는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유우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두 눈을 감은 채 생명이 시들어가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만들어줬지만, 유우카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
이게 내가 주도하는 마지막 1:1 의식 투사 실험이야.
깊게 숨을 들이쉰 팔지는 적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박사님...
팔지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현실에는 영웅이 없지만, 난 유우카를 위해 저 독수리를 쏴 죽일 거야.
땅이 흔들리는데도 동요하지 않은 리카는 평온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부탁드려요.
팔지는 다시 한번 유우카를 깊이 바라본 뒤, 바렐리아가 보내준 좌표로 몸을 돌렸다.
낡은 교실을 벗어나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의식의 바다에 다시 울렸다.
안녕... 팔지.
안녕.
팔지도 부드럽게 대답했다.
잘 가. 유우카.
팔지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