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늪지대를 걷고 있었고, 주변은 끝없이 이어진 바다였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먼 곳에서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밝은 자국이 끊임없이 빛의 흐름을 바깥으로 퍼뜨리고 있었다.
밝은 자국을 향해 걸음을 옮긴 팔지는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고통이 심해졌고, 마음도 무거워졌다.
슬픔의 감정이 소리도 없이 팔지의 의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희미한 빛에 휩싸인 유우카의 몸은 거의 투명해서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유우카에게 닿았을 때, 느껴진 것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와 절망 속의 아득한 희망이었다.
유우카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유우카인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팔지가 질문을 던지는 순간, 꿈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환자분. 안녕하세요. 이제 정신이 드세요?
여긴 어디야? 난 방금 전까지 육상부 축하 연회에 있었는데...
잠깐, 어젯밤 활동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환자분, 진정하세요. 심한 뇌진탕에서 방금 회복되셨어요. 아직은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심한 뇌진탕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젯밤 여러분이 활동실에서 축하 연회를 즐기고 계실 때...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면서 육상부 부원들 모두 기절하게 됐어요. 그래서...
말도 안 돼. 분명 누군가가 안내방송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뇌 손상으로 인한 환각이었을 거예요.
물리적 충격으로 인해 기억 혼란이 일시적으로 오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팔지는 병상에서 일어나 머리에 깔끔하게 감겨 있는 붕대를 벗었다
그리고 간호사의 소매를 잡고, 이를 악문 채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방금 한 말, 너도 믿지 않잖아!
죄... 죄송해요. 저도 다른 분들에게 들었어요.
환자분이 이러시니 솔직히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지난주에 이 병원에 실습을 왔어요. 당직 주임님이 알고 계시는 게 있다면...
아, 됐어.
팔지는 침대에서 내려와 주변 간호사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을 뛰쳐나왔다.
환자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팔지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속의 알 수 없는 충동이 팔지를 이 병원 어딘가로 이끌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팔지는 어느 모퉁이에서 걸음을 늦췄다.
왼쪽에 마침 반쯤 가려진 병실 문이 하나 있었고, 주변에 다른 병실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주위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팔지가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자, 1인실 병상에 낯익은 마른 소녀가 누워 있었다.
소리를 듣자 소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유우카?
팔지? 너도 여기 있었구나.
또 입원한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
미안.
뭐가 미안해? 아프다는 게 네 잘못도 아닌데.
그렇지 않아. 팔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널 여기까지 오게 해선 안 됐어.
나한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그래서 다시는 학교에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래서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어.
작은 속임수를 썼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내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우카? 전에 병세가 좋아졌다고 했었잖아?
그리고 꽃집 견습생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 와서 왜 그런 비관적인 말을 해!
이제 그런 건 필요 없어.
정신의 에덴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고 하더라.
정신의 에덴? 그게 뭐야? 갑자기 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그래?
팔지야. 내가 그곳에 수국화를 가득 심으면, 그때 날 찾아와 줘.
유우카는 몸을 옆으로 돌려, 침대 옆 수납장에 접어둔 종이 여우를 팔지의 손에 건넸다.
종이 여우?
줄만 한 게 별로 없어서, 이걸 이별 선물로 줄게. 내가 정신이 맑을 때 접은 거야.
언젠가 이 아이를 다시 보게 될 때, 우리의 약속을 잊지 말아줘.
종이 여우를 받아들인 팔지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이가 노크와 동시에 들어왔다. 분명 대화를 들은 듯했다.
팔지가 이곳에 있는 걸 보고도 그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냉담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면회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환자는 쉬어야 해요.
가능하다면 다음에 다시 와주세요.
팔지는 불만스럽게 일어섰다. 하지만 유우카가 팔지의 손을 잡은 뒤, 의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팔지. 다음에 다시 와.
내일 다시 올게. 꼭 다시 올 거야.
안녕. 팔지. 어서 학교로 돌아가.
팔지는 반신반의하며 돌아서서 복도로 나왔다. 그때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의사의 차가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기억해 내지 못했다.
시공간이 정지된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황혼의 빛이 창문을 통해 바닥에 조용히 비쳤고, 창밖의 새들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주위 풍경이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그림 속 완벽하게 정지된 풍경 같았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팔지의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 배후의 목소리를 알아챘다면, 그게 유우카가 보내는 구조 신호인 걸 알았더라면...
적어도, 유우카가 혼자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만 있진 않았을 거야.
결국,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리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어.
지금 네 모습조차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후회가 만들어낸 그림자일 뿐이야.
유우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퍼니싱이 폭발했던 그날, 유우카는 실험실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어.
구조대가 발표한 명단에서 유우카는 "사망자" 명단에 올라와 있었지.
수년이 지났지만,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다시 이곳에 오게 됐어.
그리고 추억과 환각을 통해 유우카를 다시 만났을 때, 난 깨달았어.
유우카의 비극은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라, 죽음으로 시작된 거였어.
죽음으로 시작됐다고?
수십 년이 지나서 버려진 정원에 유우카는 소리 없이 다시 나타났어.
진짜 유우카는 죽었고, 지금의 그녀는 뭔가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하지만, 그녀는 분명 유우카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게다가...
그녀가 어떤 존재라 해도, 난 절대 적으로 볼 수 없어.
유우카가 적이 된 거야?
유우카는 섬 전체와 공중 정원의 집행 소대를 통제한 뒤, 내 동료를 납치했어.
이게 적이 아니라면, 유우카는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어쩌면 널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넌 유우카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날 한 번 더 보고 싶었다고?
그 아이는 원래 남의 영향을 쉽게 받는 데다가 한창 사춘기를 겪을 때잖아.
사춘기?
그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뇌가 변화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사춘기 소녀와 다를 게 없겠지.
뇌도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고, 성격도 예민해. 세상에 대해 비현실적인 생각도 많고.
영원히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영혼이 이 학교에 갇혀버린 거야.
학교에 갇혀 버렸다라...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면...
너의 "마음"도 이곳에 갇혀 있는 거잖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유우카를 구하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된 거야.
그럼, 다시 구하면 되잖아?
다시 구한다고?
유우카가 스스로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가장 친한 친구인 팔지...
넌 유우카를 도와야 해. 어쩌면 유우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널 만나고 싶어 한 걸 거야. 너라면 유우카를 멈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유우카의 "박사님" 외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너밖에 없잖아. 팔지.
다시 시도해서 또 실패하면 어떡해?
실패할까 봐 시도조차 하지 않을 거야?
……
그때 육상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할까 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거야?
실패가 두려워서 경기에 임한다면, 결국 제대로 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잖아.
네가 했던 말 잊었어?
달리기에 몰입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 잊게 되고, 오직 자신의 달리기에만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잖아.
난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달린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 달렸어.
적은 늘 너 자신뿐이었어. 그리고 이 오랜 시간 동안 넌 네 마음속 악마를 이기지 못했던 거야.
일부러 피하고, 책임지길 거부했어. 그건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사실 그렇게 많은 걸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결과가 실패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솔직하게 끝까지 지켜봐야 해.
넌 유우카를 구하지 못한 것만 보고 있어. 하지만 그날 네가 무엇을 했는지 잊었어?
그때의 넌 무기력하게 있거나, 그저 죽음을 기다리기만 했어?
그때의 나는...
싸웠잖아.
목숨 걸고 싸웠잖아.
그때의 넌 힘이 부족했지만, 지금의 넌 그때의 팔지가 아니야.
난 더 이상 어제의 팔지가 아니야. 지금 여기 서 있는 건 더 강해진 나야.
이번엔 네가 유우카를 구할 차례야. 부탁해!
알겠어. 고마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연장전인데, 이번엔 절대 지지 않을 거야!
환영이 사라지면서 팔지는 명상에서 깨어났다.
다시 전장으로 끌려온 팔지가 있는 곳은 밤의 폐허가 된 학교 건물이었다.
좁은 복도에서 마주친 침식체 셋의 날카로운 발톱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0.5초 후면 그 발톱들이 팔지의 몸을 찢어발길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느려!
팔지는 반걸음 물러나 날아오는 발톱을 피하고 지나가려는 찰나...
가장 앞에 있는 침식체를 지지대 삼아 공중으로 뛰어올라, 형성된 포위망을 벗어났다.
날 얕보지 마.
옆으로 공중제비를 돈 팔지는 그 기세를 타고 침식체의 날카로운 발톱을 걷어찼다.
착지와 동시에 몸을 숙인 팔지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적을 두 동강 내버렸다.
이어서 축적한 힘으로 강력한 방사선을 방출했다.
그러자 눈부신 빛으로 어두운 복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을린 고철 조각과 해체된 부품들이 하나둘씩 팔지의 주변에 흩어졌다.
팔지는 기능을 잃은 침식체를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쓰러진 헤바를 발견했다.
팔지는 몸을 숙여 헤바를 흔들었다.
헤바, 헤바!
대답이 없었다.
헤바의 온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고, 두 눈은 굳게 감겨있었다.
하지만 이마에 있는 세 번째 "눈"이 아직도 희미한 녹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팔지는 그걸 보고 헤바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젠장, 깨어나질 않아. 유우카가 한 짓인가?
헤바를 납치한 자는 그녀를 복도에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다.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자는 쉽게 깨어나지 못한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침식체들이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어. 게다가 교란 신호의 강도도 높아지고 있어. 유우카, 설마 너 적조를 선택한 거야?
웅...
윽!
의식의 바다에 또다시 통증이 밀려왔다. 팔지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팔지, 팔이 여섯 개 달린 녀석아, 어떻게 된 거야? 성갑충에는 정상이 하나도 없는 거야?
눈이 세 개인 녀석아, 너야말로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긴 하냐!
이건 전장 분석과 신호 탐지 그리고 운명을 관측하기 위해서...
됐어. 내 여섯 개의 팔도 엄청 쓸모가 있어.
도망치는 건 제일 잘한다며, 어쩌다 도망도 못 가고 포위당한 거야?
침식체들이 몰려왔잖아. 뒤 봐줄 이가 없어서 도망칠 수 없었던 거야.
8시 방향에 고지가 있어. 돌파 준비해.
이 바보야, 왜 되돌아온 거야?
네가 돌아가지 못하면 슈트롤이 내 귀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잔소리할 거야.
성갑충에는 정상이 하나도 없어. 하지만 너희들은 모두 좋은 주파수를 내뿜고 있어.
팔지... 설령 슈트롤이 여기 있었더라도, 적조의 이상 징후 근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거야.
내 몸에서 나오는 주파수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뭔가...
입 다물어!
조용히 해. 닥쳐!
이 엉터리 점쟁이야, 잠들었으면 헛소리하지 마!
끼...
꺼져!
정신을 차린 팔지는 주먹으로 침식체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복도 끝 어둠 속에서 더욱 많은 이합 생물들이 물밀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슈트롤은 유령이 돼서도 내 옆에서 잔소리할 놈이야.
그러니까 슈트롤이 없더라도 반드시 널 데려갈 거야!
팔지는 몸을 숙여 헤바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등 뒤의 로봇 팔들이 크게 펼쳐졌다.
뭘 기다리는 거야? 다 같이 덤벼. 이 열등한 것들아.
몰려드는 이합 생물들을 마주한 팔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래야 제맛이지.
하지만, 한 가지를 잊지 마.
여긴 내 학교야. 너희들이 날뛸 곳이 아니라고!
귀가 찢어질 듯한 폭발음과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이합 생물들이 학교 건물에서 내던져졌다.
그리고 맹렬한 포격의 진동이 2층 계단 모퉁이에서 복도 끝까지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갔다.
이 틈을 타서, 공중 정원과 연락을 해야 해!
미친 듯이 내달린 팔지는 학교 건물 옥상에 도착했다.
능숙하게 통신 앵커 포인트를 설치한 팔지는 다시 헤바를 안고 그곳을 떠났다.
모든 게 정상이라면, 5분 후에 통신이 복구될 거야.
하지만 여기 오래 머물 시간이 없어. 유우카의 투사가 계속 강해지고 있어.
이대로 가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