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지, 정말 가려는 거야?
나 혼자 두고 어디 가려고?
겨우 네게 그럴듯한 학교생활을 만들어줬는데.
마음에 안 들어? 네 맘에 안 들어?
괜찮아. 다음엔 네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꿈을 조정해 줄게.
여긴 더 이상 우리 학교가 아니야. 그냥... 죽은 자들의 교정일 뿐이라고!
이렇게 과거를 떠도는 게 뭐가 그렇게 나빠?
아무런 고통 없이 영원히 살아가는 거야. 인생이란 원래 꿈과 같은 거잖아.
왜 깨어나려 하는 거야? 깨어난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기억났어. 이제 모든 게 기억났어.
기억은 고통만 더할 뿐이야. 팔지.
내가 이곳에 온 건 적조가 이 섬에 끼친 영향을 해결하기 위해서야.
내게 보여준 환각은 날 붙잡아두기 위한 거였고, 넌 계속 날 막으려 했어.
넌 나에게... 인간에게 적이 됐어.
유우카, 어서 말해줘. 헤바를 어디로 데려갔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그녀는 내 동료이자, 함께 싸우는 전우야.
그럼, 너희는... 친구야?
친구? 비슷해.
헤바는 네 친구고, 난 아니야?
지금 그런 얘기할 때야!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왜... 그냥 적조의 세계로 함께 가면 되는데.
걱정하지 마. 이제부터 천천히 기억나게 해줄게.
설득이 먹히지 않자, 팔지의 앞에 있던 유우카의 몸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아름다운 얼굴이 흐려지더니,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넌 진짜 유우카가 아니야. 그저 가짜일 뿐이야.
잠깐, 유우카, 그쪽을 선택하지 마!
적조를 선택하면 안 돼!
하하.
눈앞의 "유우카"가 붉은 액체로 변하더니 교실에서 사라졌다.
역시 이곳은 환각 속이었어.
꿈처럼 깨닫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하는구나.
교실 주변의 현실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벽면 곳곳에서 붉은 액체가 스며 나왔다.
땅에서는 진동이 계속해서 전해졌다. 그리고 수많은 잡음,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흘러갔다.
환상으로 만들어진 공간과 거짓된 물품들이 팔지의 현실 인식과 충돌하며...
서서히 팔지가 서 있는 곳으로 붕괴가 밀려왔다.
바닥에는 거미줄처럼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팔지는 몸을 돌려 교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떠날 때가 됐어!
팔지가 문손잡이를 돌리며 힘껏 문을 밀어젖히자, 그 순간...
팔지 주변의 광경이 바닥에 떨어진 퍼즐처럼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끝없는 어둠만이 남았다.
팔지의 앞에는 칠흑 같은 일방통행의 길만이 놓여있을 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팔지는 그 좁은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러다 길 앞쪽에 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출구가 나타났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 팔지는 문득 어떤 호기심이 생겼다.
모든 신화에서처럼, 팔지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거대한 노가쿠 가면이 팔지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렸다.
섬뜩한 이빨이 팔자를 삼키려는 찰나, 눈앞에는 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출구가 있었다.
팔지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하얀 빛이 모든 시야를 삼켜버렸다.
후!
공포와 당황함으로 두 눈을 크게 뜬 팔지는 어떤 장소에서 깨어났다.
팔지는 숨을 제어할 수 없이 헐떡였고, 환각이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구조체가 된 팔지에게 그것은 인간일 때의 습관이 남긴 환상통 같은 것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팔지는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는 먼지가 가득 쌓인 스피커 장비들이 놓여있었다.
팔지는 방음벽을 짚고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주변의 움직임을 살폈다.
팔지가 있는 곳은 학교 방송실인 것 같았다.
방금 환각 속에서 봤던 괴담 동아리 부원의 일기...
기억이 맞다면, 활동실에 이상한 기계가 숨겨져 있다고 했어.
학교에 왜 그런 게 있는 거지?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지금 이 건물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과 관련이 있는 걸까?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아.
잠깐, 그래. 그때 정원고 집단 실신 사건!
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가... 활동실... 맞아. 활동실이었어.
어찌 됐든, 조사해 봐야겠어.
팔지는 방송실 문을 열고 활동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던 중, 갑자기 머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환각이 또 나타났어.
팔지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불편함을 이겨내며 계속 전진했다.
팔지가 몽롱한 상태로 활동실에 도착했을 때, 의식은 이미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젠장...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반드시 활동실까지 버텨야 해.
팔지는 강한 의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고, 어제의 사람들과 일들 그리고 물건들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폐해진 복도가 일그러지면서 변형되기 시작했고, 이상한 빛과 그림자가 다시 한번 춤추기 시작했다.
죽은 기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팔지는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