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즈는 전갈형 괴물을 처치한 뒤, 비교적 깨끗한 곳을 찾아 누웠다.
그 순간, 누군가가 연구소의 신호 차단을 해제했고, 그제야 오랫동안 버려진 이 연구소가 모든 이의 시야에 드러났다.
반즈는 머리 위 부서진 만화경을 올려다보며, 단말기에서 띄엄띄엄 들려오는 차징 팔콘 내부 채널의 통신을 들었다.
그들까지 온 건가.
반즈는 근처에 모여든 차징 팔콘의 대원들 외에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다른 3명을 떠올렸다.
지난번엔 지휘관이 잠깐 이탈했을 뿐인데도 그렇게 걱정하더니.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네.
그리고 당신...
음, 무슨 일이야?
우리 지휘관님을...
그래, 알겠어.
반즈의 건성건성 한 대답에도 리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우리 지휘관님을 잘 지켜주세요.
반즈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체가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하아, 이번엔 반대가 됐네.
지휘관의 도움으로 의식의 바다가 안정되자, 쏟아지는 기억에 억눌려왔던 가지들이 광활한 의식의 바다 끝을 향해 뻗어갔다.
과거의 일은 이제 마무리가 되었고, 그간 불확실했던 선택들도 답을 찾았다.
……
좀 자야겠어.
연구소 전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전갈형 창조물이 적조 속으로 서서히 잠겼다.
강제로 그 껍데기 속에서 살아온 조각들은 이제 허무한 종착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더는 희망찬 귀환도, 끝없는 고통의 실험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반즈는 이렇게 편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반즈, 멜비 선생님이 네가 또 안 자는 걸 보면 소원 카드를 뺏어갈 거야.
블라인드 앞에 서 있던 반즈는 "스패로우"의 말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크면 소원 카드를 뺏어가는 걸 금지할 거야.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너도 꽤 졸린 것 같은데, 왜 매일 밤 이러는 거야?
……
악몽을 꿔.
어떤 악몽인데?
음, 잘 모르겠어.
반즈는 생각에 잠긴 채, 블라인드의 날개를 만지작거렸다. 그 사이로는 별들이 수 놓인 공중 정원의 인공 천막이 보였다.
그 꿈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반즈는 괴로워했다.
주사기, 시험관, 거대한 기계, 피가 묻은 실험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엄마가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던 건지, 반즈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반즈는 그 꿈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멜비 이모가 잊어버리면 된다고 했어.
우리가 크면, 어릴 때 기억을 잊을 수 있대.
마음대로 골라내서, 악몽은 전부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기억만 남기는 거야.
난 계속 기억하고 싶어. 내가 절단 수술 전의 기억을 잊어버리면,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모를 거잖아.
……
지금의 기억들이 너한테는 중요하지 않아? 왜 그렇게 잊으려 하는 거야?
"스패로우"의 말에 반즈는 순간 멈칫하며, 손톱으로 블라인드의 날개를 긁어 불쾌한 소음을 냈다.
그런 기억이 중요할까?
난 악몽을 잊고 싶을 뿐이야.
난 평온한 미래가 어서 왔으면 좋겠어.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주변에 친구들도 많이 있을 거야.
그때, 반즈는 블라인드 틈새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
반즈가 스패로우에게 말해주려 뒤돌아보았지만, 그의 병상은 텅 비어 있었고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반즈?
똑똑.
그곳에 존재할 리가 없는 누군가가 밖에서 창문을 두드렸다.
이제 일어나야 해.
엄마? 난 아직 잠들지 않았는데.
그때 다른 누군가가 반서의 옆을 비집고 들어와 창문을 두드렸다.
어서 일어나. 매번 그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벌써부터 생활 리듬이 엉망이니 키가 클 리가 있겠니!
……
창밖에는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보라색 머리의 페로, 케이론 교수 그리고 손목에 투영 장치를 찬 톰슨도 있었다.
어느새 반즈는 창가에 엎드려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으려 했다.
난 나갈 수 없어.
그리고 나가고 싶지도 않아.
모두를 조금만 더 보고 싶어. 나중엔 꿈에서조차 볼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
그때 한 큰 그림자가 다가왔다. 구조체였던 그는 튼튼해 보이는 팔을 들어 창문을 쾅 하고 내리쳤고, 곧이어 방 전체가 흔들렸다.
쯧, 여기서 잠들면 안 되지.
창문을 두드리던 구조체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이걸 부수긴 힘들겠군.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겠어.
누구한테?
네가 원하는 미래를 가진 사람한테 말이야.
슈트롤이 말을 마치자마자 지면이 크게 흔들렸고, 반즈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더니 병실의 벽과 창문이 산산조각 났다. 반즈는 눈을 찡그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다행히 눈 부신 빛이 그의 눈을 다치게 하진 않았다.
눈이 밝은 빛에 익숙해지자, 병실 밖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반즈는 숨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곳마다 전쟁의 불길과 재가 흩날렸다.
하지만 이 "미래"의 폐허 위에, 네 명의 구조체들이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때, 맨 앞에 선 하얀 구조체가 반즈를 향해 손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이게 내가 원하던 미래야.
반즈, 반즈!
누군가가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것 같더니, 또다시 덜컹거리는 곳에 눕혔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는 수년 전 폐허에서 구조됐을 때와 똑같았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충분히 잠을 잔 반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 제때 왔네.
우움?
반즈! 드디어 깨어났구나!!
반즈의 청각 모듈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얼굴을 들이민 금발의 구조체는 반즈 얼굴에 묻은 먼지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카무이?
다들 정말 걱정했다고! 그냥 잠든 거라고 지휘관이 말하지 않았다면, 대장이 무작정 널 공중 정원으로 호송하려 했다고!
반즈가 몸을 일으키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수송차가 날이 밝아오는 황야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뒷칸에 앉아 있던 차징 팔콘 전원과 지휘관의 시선이 반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휘관님의 말로는 임무 수행 중 의식의 바다에 봉인된 기억 데이터가 활성화됐다고 해.
하, 그 녀석이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카무이가 몇 년은 자책했을 거야.
의식의 바다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 지난번에 못 베개 일도 있었잖아! 내가 반즈의 머리를 어떻게 한 건 줄 알았다니까!
그게 살상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카무이가 다시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반즈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정말 괜찮아? 확실해?
걱정하지 마. 의식의 바다가 좀 어지러운 것 빼고는 다 괜찮아.
반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면증 같은 다른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어.
지휘관 일행이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자, 반즈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이야.
반즈가 말을 마치자, 모두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널 생명의 별로 보내 정밀 검사를 해야겠어.
알겠어.
그러고 보니, 다른 이들은?
새로운 임시 수용소라고? 두 보육 구역 모두 이송 작업이 끝난 거야?
반즈가 수송차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적조가 이미 버려진 연구소를 집어삼켜 버렸고, 곧 인간의 보육 구역 두 곳도 사라질 것이었다.
반즈가 다시 차분하게 수송차 안의 모두를 바라보았다.
……
퍼니싱이 삶의 터전을 집어삼켜 버리면서 이제는 "과거"가 될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곳에 집을 마련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갈 것이었다.
새로운 임시 수용소에 짐과 장비를 내려놓은 인간들에게는 다소 힘든 재건의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후에는 공중 정원에서도 건설을 돕기 위해 구조체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퍼니싱 여과탑을 세우고,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 것이었다.
좋아, 새로운 곳으로 가자.
해가 완전히 뜬 무렵, 임시로 설치된 군용 텐트 안팎에서 발걸음이 분주히 오갔다.
다행히 척후병이 조기에 적조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여, 이번 철수 작전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쩔 수 없는 재산 손실과 도중에 겪은 이합 생물의 습격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은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건설 작업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지휘관은 공중 정원에 간단히 보고를 마치고 나서야,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리브에게 응답할 여유가 생겼다.
왼손은 움직이지 마세요. 네, 그 자세를 유지해 주세요.
상처가 꽤 크게 찢어져 있지만, 일반 치료 젤은 응급 상황에만 써야 하니, 지금은 이런 방식으로 상처를 보호할게요. 통증이 있을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지휘관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 재빨리 의료용 붕대를 인간의 팔뚝에 감았다. 그러자 소독용 젤이 붕대에 눌려 상처로 스며들며 "타는 듯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지휘관님, 죄송해요. 잠시만 참아주세요.
지휘관님,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그때 제가 지휘관님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리브가 조금 낙담한 듯 고개를 숙였다.
리브는 초기에 철수한 소대와 함께 먼저 그곳을 떠났었다. 원래는 날이 밝기 전에 돌아와 합류하기로 했지만, 새벽이 되기도 전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지휘관이 새로운 작전 중 연락이 두절됐다는 소식을 받았다.
난민들을 안전하게 이송한 리브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즉시 지원에 나섰다.
소녀는 차징 팔콘 소대와 함께 무사히 돌아온 지휘관의 손을 붙잡기 전까지 내내 불안에 잠겨있었다.
루시아는 공중 정원에서 지휘관님의 귀환 소식을 기다리며 내내 가슴을 졸였다고 했어요.
로제타와 반즈가 함께 계셔서 다행이에요.
지휘관님!
그때 리가 텐트 안으로 뛰어 들어와, 순식간에 시각 모듈로 입구에 있던 지휘관과 리브를 포착했다.
비록 반즈와 리브가 상처를 빠짐없이 치료했지만, 리는 기기들이 남긴 구멍과 멍들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
리가 계속 말없이 지휘관을 바라보자, 텐트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에 지휘관은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대원들과 수많은 전투를 함께해온 지휘관은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알았기에, "자신을 소중히 하라."라는 신조를 열심히 지켜왔다.
그래요, 그러면 됐어요.
그 연구소는 다행히 승격자들과 배신자들의 "옛" 거점이었어요. 만약 위험한 녀석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면, 상황이 지금처럼 단순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지휘관은 이번 임무에 대해 상세히 보고해야 했으며, 반즈도 기억 데이터 추출에 협조해야 했다. 적조가 삼켜버린 연구소의 진실은 이제 반즈의 "기억"에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반즈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몇 명이 동시에 군용 텐트 구석을 바라보았다.
……
차징 팔콘 소대는 밖에서 다른 분들을 도와주고 계세요. 반즈는 일단 이곳에서 쉬시게 뒀고요.
주변이 이렇게 혼잡한데, 아직도 자는 거예요?
군용 텐트 안은 다소 소란스러웠고, 구조체들과 의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리가 그 말을 하며 옆으로 비켜선 것도 상자를 운반하는 구조체들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서였다.
반즈에 대한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입구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또 우는 거죠?
잘 안으라고. 몇 달밖에 안 된 아기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당장 쫓겨날 줄 알아.
안 돼요. 전 쫓겨나지 않을 거예요! 백로 소대에 꼭 남고 싶다고요!
아기의 울음소리와 소녀의 울상 짓는 목소리와 함께, 은백색 머리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텐트에 들어왔다.
오, 다 아는 얼굴들이네.
우와! 진짜 그레이 레이븐이에요!
백로 소대의 그 신입분이네요.
리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바네사 뒤에 있는 알록달록한 구조체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작은 손을 흔들고 있는 아기를 안은 채, 리브 앞까지 바짝 다가왔고, 리브조차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게 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전 이제 신입도 아니라고요! 리브 맞죠? 전에 바네사에게 들었어요! 옷깃이 정말 예쁜데, 어떤 재질로 만든 거예요? 단추도 반짝반짝하고...
하염없이 울던 아기가 작은 손을 뻗어 리브의 옷 단추를 잡으려 했다.
아, 저는...
라이어, 그만 망신 시키고 저쪽에나 가 있어.
바네사가 의자를 끌어와 지휘관의 앞에 앉았다.
라이어, 나는 아직 인사도 안 했다고. 크흠, 어쨌든 우리는 190번 보육 구역의 주민들을 수용소로 이송하자마자, 바로 당신이랑 그 임시 소대 대원들을 구하러 달려갔었어. 덕분에 공중 정원에 돌아가면 작성할 보고서가 더 두꺼워졌지.
그래서 말인데, 모두를 이렇게 고생시키고 자신도 이 꼴이 될 정도로 무슨 "대단한 공"이라도 세운 거야?
으아앙.
아기의 울음소리에 바네사가 준비했던 긴 잔소리가 중단된 것 같았다.
신경 쓸 거 없어. 저 아기를 꼭 구해야겠다고 자기가 울고불고 떼썼으니 자기가 책임져야지.
라이어랑 이틀 동안 같이 있어서 그런 건지 성격이 똑같네. 완전 껌딱지야. 꼭 누군가한테 달라붙어야 직성이 풀리나 봐.
응애응애, 딸꾹, 으아아앙!!
라이어, 좀 조용히 시킬 수 없어?
바네사가 여러 번 재촉했음에도 꿈쩍도 않던 라이어가 큰 소리로 반박했다.
저도 그러고 싶죠! 밥도 잘 먹었고, 다친 곳도 없는데... 왜 자꾸 우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요.
그것도 못 하겠으면 그 녀석한테 맡기던가.
안 돼요. 차라리 밤비나타한테 맡기지, 그녀만은 절대로 안 돼요. 애가 울 때마다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몇 번만 더 울면 잘못된 선택을 할 거예요.
백로 소대는 오랫동안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얼마 전의 한 훈련에서 다시 3명의 구조체로 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그 소식을 전하고 들은 모두는 무척 놀랐었다.
못 안겠어요. 자꾸 발버둥 쳐요.
바네사가 소란 속에서 눈을 질끈 감자, 모두가 그녀의 표정에서 "폭발" 직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바네사를 이렇게 오래 알아 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리브의 눈빛에도 라이어를 향한 일종의 경외심이 서렸다.
아기는 라이어의 품에서 쉴 새 없이 몸부림쳤다. 보육 구역 사람들이 영양 공급을 제대로 해준 듯, 튼튼한 두 다리로 포대기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안아볼게.
어느새 흰색 구조체가 뒤에서 나타나 아기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우움, 난 안 자고 있었어. 신생아과에서 일해본 적도 있으니까, 내가 맡을게.
정말 너무너무 감사해요!
반즈는 전문가다운 동작으로 아기를 받아 안았다.
반즈가 "폭탄"을 받자, 바네사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방금 우리는 로제타와 함께 행동했고, 원래 계획은 부상자들을 새로운 수용소로 데려가는 거였어.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지. 우리 수송차가 습격을 받았거든.
바네사가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부상은 거의 없었어.
그걸 보면 너는 운이 좋은 건지 뭔지... 난 네가 큰일이 날 줄 알았는데, 들어와서 보니까 대원들이 그 작은 상처 가지고 걱정하고 있더라. 너무 작아서 치료를 서두르지 않으면, 붕대를 감기도 전에 다 나아 버릴 텐데 어쩌나?
그렇게 조급해할 것 없어. 내가 계획을 바꿔서 로제타한테 실험 데이터랑 자료를 미리 공중 정원에 보내라고 했거든. 혹시 누가 지상에서는 엄폐하기 쉽다고 생각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니까.
아마 위에서는 이미 난리가 났을 거야.
그리고 반즈의 기억 데이터도 엄청 중요하다고 하던데, 너랑 반즈는 아직 공중 정원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은 안 받았지?
누가 숨기려 하는지, 누가 이용하려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어. 시간을 끌고 있는 자가 있긴 해도, 네 주변에는 엘리트 구조체가 이렇게 많으니,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또 운 좋게 살아났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 네가 죽으면 아마 정말 귀찮아질 거야.
바네사는 "축복의 말"을 던진 후, 라이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저 구조체한테나 감사하라고. 그가 제때 적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않았다면, 너랑 나 모두 보육 구역에서 세상을 떴을 거야. 그 뒤의 일은 꿈도 못 꿨겠지.
퍼니싱 위기로 사라진 거주지가 너무 많아. 난 공중 정원에서 자라서, 몇몇 일들은 지상에 오기 전까지 꿈에도 몰랐어.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던 바네사가 말을 더 이었다.
어쩌면 그도 지상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이 어떤 재난에서 비롯된 건지도 몰라.
흥. 귀찮은 아이들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네.
바네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분주한 이들 사이에서 아직도 아기를 달래고 있는 흰색 구조체가 있었다.
자장자장, 귀여운 아가~
잔잔히 흔들리는 작은 배 위에서 잠시라도 편안한 꿈을 꾸렴~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렴~
반즈가 아기의 머리를 살며시 받쳐, 조심스럽게 흔들어 달래자, 텐트를 가득 채운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아기의 작은 손이 허공을 휘젓자, 반즈는 말없이 얼굴을 가까이 대어 생체공학 피부를 느끼게 해주었다.
곧 아기는 구조체의 가슴에 기대어 곤히 잠들었다.
반즈의 의식의 바다에서 본 과거가 떠오른 지휘관은 이 평화로운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한걸음 물러섰다.
비켜주세요! 잠시만 비켜주세요!
하지만 그때, 구조체들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텐트에 들어와, 구석에 쌓인 물품들을 급하게 뒤졌다.
약이 어디 있지. 분명히 여기로 옮겼는데.
침착해. 다리가 달려서 도망가진 않았을 거잖아. 넌 저 선반을 찾아봐. 난 반대쪽을 볼게.
젊은 구조체가 아기를 안은 반즈의 곁을 빠르게 지나가 나무 상자를 뒤지더니, 곧바로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죄송해요. 발을 밟을 뻔했네요.
쉿, 나는 괜찮아.
구조체가 반즈의 품에서 잠든 아기를 보자, 놀란 듯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반즈가 고개를 들자, 구조체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
…………
응?
혹시, 의사 형이에요?
젊은 구조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황급히 반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이슨이에요. 저를 기억하시나요?
……
반즈는 수년 전 그날의 새벽으로 돌아간 듯, 이제는 잘 구분되지 않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때의 반즈는 연기 자욱한 폐허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에 그는 단 한 명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저희를 거점에서 구해주시지 않았거나, 당신이 주신 약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도...
네이슨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가는 동안, 반즈는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고, 품 안의 아기를 달래던 그의 손길도 조금씩 느려졌다.
이 아기는 190번 보육 구역에서 구하신 거죠? 제가 맡을게요. 제가 그곳 담당 주둔 구조체거든요.
반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기를 네이슨에게 건넸다.
그래, 수고해.
네이슨은 아기의 포대기를 다시 한번 잘 덮어주었고, 이내 꽃무늬가 그려진 작은 배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장자장, 귀여운 아가~
잔잔히 흔들리는 작은 배 위에서 잠시라도 편안한 꿈을 꾸렴~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