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netic=현재>수년 전</phonetic>.
<phonetic=기억 데이터>총알</phonetic>이 <phonetic=반즈>반서</phonetic>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phonetic=순환액>혈액</phonetic>이 쏟아져 나왔다.
……
처참한 방어전 속에서 한 군의관이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저격총을 내려놓고는 폐허 속에서 쓰러졌다.
……
버려진 연구소에 있던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서 <phonetic=교란>거대한 파도</phonetic>가 일어나, 복잡하게 얽힌 기억 데이터가 그의 의식의 바다를 산산조각 냈다.
……
"반즈"는 모두 죽었다.
의식 회수의 종착점이 허무인 것처럼, 반즈도 텅 빈 어둠으로 빠지고 있었다.
미안해, 또 실패했어.
반즈가 병실에 들어서자, 온갖 의료 "장비"에 둘러싸여 누워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켜볼 수밖에 없던 반즈는 그 아이가 자신이라는 걸 알았기에,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의식의 바다가 아직도 불안정해. 기준치까지 한참 모자라.
어떻게 해야 널 구할 수 있을까.
반즈는 반서가 간절한 마음으로 손가락 하나를 내미는 걸 보았다. 그리고 잠들어 있던 그 아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내 손가락을 잡기도 하고, 우리를 보고 웃기도 했잖아. 한 번만 더 그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니?
반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항상 온화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절망감이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진짜 의식의 바다라면 어떨까?
그녀는 "좋은 연구소"에 연락할 수 있는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희망과는 다른, 묘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가지 마.
그곳에는 죄 없는 고아들뿐이야. 그 실험은 진행되면 안 돼.
이건 반즈를 위해서야. 전부 다 그 애를 위해서.
……
반즈는 지금이 반서와의 마지막 순간이고, 그녀가 방금 건넨 말은 작별의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의 절망은 실체인 강물이 되어, 그의 인생을 따라 흘러갔다.
곧이어 반즈는 흐르는 강물이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았다. 그곳에는 짜증이 난 듯한 여자가 서툰 솜씨로 주방 기구들을 씻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주방은 폭풍이 휩쓸고 간 듯했고, 그 "폐허" 한가운데의 하늘색 도시락통에는 어설프게나마 완성된 간식이 담겨있었다.
휴, 드디어 성공했네. 이번엔 직접 가져다줘야겠어.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지, 메시지를 잔뜩 보냈네.
멜비는 "반즈"가 보낸 메시지들을 하나씩 읽은 후, 반즈의 것을 제외한 다른 메시지들은 전부 삭제했다.
지상에 가는 것도 계속 비밀로 해야 하나?
곧이어 청소년 육성 센터에 있던 한 소년이 처음으로 멜비의 독단적인 호의를 거절했다.
이 몇 년 동안 네가 보낸 57개의 메시지도 다 봤었어. 내가 네 선택의 자유를 뺏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네게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면 안 될까?
소년이 도시락을 멜비 앞으로 도로 밀어냈다.
안 돼, 거절하지 마.
멜비 이모는 네게 엄마만큼 소중하다고 말해. 소아과의 모든 아이, 심지어 페로까지 당신을 좋아한다고 제발 말해 줘.
더는 말썽 부리지 마. 불꽃놀이니 그런 것도 그만둬. 다 소용없다고. 그러다간 멜비 이모까지 잃게 될 거야.
결국 반즈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는 멜비의 마지막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맛없다면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반즈,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해야 해.
……
이것이 멜비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멜비는 반즈에게 공중 정원을 떠나는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반즈가 슈트롤을 따라 그녀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멜비가 떠난 뒤였다.
이번 의료 자원봉사자는 꽤 운이 좋았어. 나이가 제일 많으신 한 분만 희생되고, 거의 다 돌아왔잖아.
소아과 부주임님? 우리 애도 예전에 그분께 진료받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지상같이 위험한 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 돌아온 유품은 작은 꾸러미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아.
멜비 이모에게: 안녕.
아직도 보육 구역에 있으려나? 항상 평온하길 바라고, 푹 쉴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시험에 합격했어. 이제 생명의 별에 가서, 여러 과를 돌며 실습을 하게 될 거야. 처음에는 소아과에서 시작하려고.
그때 이모가 우리에게 나눠준 "소원 카드"를 아직 기억해. 그래서 나도 따라 만들어봤는데, 이모가 만든 것보다는 조잡해.
아이들이 소원 카드를 쓸 때마다, 부모님들이 "애들한테 함부로 간식을 주지 마세요."라며 뭐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튼 나는 열심히 일해서 모든 아이를 잘 돌볼 거야.
그들이 가져온 작은 가방을 받았어. 그 안에는 도시락 하나밖에 없더라고.
정말 고마워.
멜비는 이제 반즈의 메시지를 영영 읽을 수 없게 됐다. 전장에서 의료 자원봉사를 하던 그녀는 심각하게 침식된 아이를 구하려다, 퍼니싱과 침식체들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멜비는 그와 작별했다.
이제 반즈는 단말기를 움켜쥔 채, 전해지지 않을 메시지들을 보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반즈가 멜비의 마지막 순간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그 아이는 아직 살릴 수 있어. 내가 맡을게!
넌 아직 너무 어려. 어서 가!
멜비가 자신과 몇 살 차이 나지 않은 의료 자원봉사자를 밀쳤다.
내가 속죄해야 할 순간이 지금이라면, 조금도 후회하거나 망설이지 않을 거야.
멜비는 힘없이 쓰러진 아이를 감싸안자, 침식체들이 달려들어 인간의 피와 살을 집어삼켰다.
……
급류가 빨라지며 반즈의 앞에서 지난날의 광경들이 지나갔다.
페로의 명패를 본 순간과 공항 바닥에 순환액이 남아있는 광경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만. 더는 가기 싫어.
생명의 별에서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던 구조체 정비실, 정화 부대에 제압당한 지터, 호송차 안에서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던 교수의 광경까지도 그의 눈앞에서 지나갔다.
이제 지쳤어.
강물이 마지막으로 지나간 광경은 반서가 그에게 전해준 "기억들"이었다.
056번.
강제로 개조될 남자아이는 구속복에 묶인 채, 벌벌 떨며 창밖의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엄마의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그 남자아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고, 곧이어 진심 어린 한마디를 속삭였다.
사실 저도 좀 무서워요.
(엄마.)
그 건물 안에서 아이들은 자원이자 "실험체"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이나 편안함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마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진행된 개조에 테오도르는 구속복에 묶인 채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결국 그는 "착한 아이"가 아닌, 실패한 침식 구조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너무 아프고 무서워요.
▃▇█▄▄엄▂▆마? 제발▂▄▆▆▇▅▂가지마!!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즈와 작별했다. 평온하게 받아들이거나, 눈물과 떠나보내거나, 절규하는 이도 있었으며, 때로는 죽음으로 그와 작별하는 이도 있었다.
이별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반즈의 꿈에 나타났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악몽처럼 여기며 그 기억들을 묻어두었다.
그리고 지금, 반즈는 기억들에 "심판"을 받고 있었다.
퍼니싱이 몰고 온 재난으로 앞 세대의 사람들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의지와 관계없이 그들은 생사를 가르는 선택을 강요받았고, 목숨을 건 사랑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처절한 절규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너희를 구하고 싶었어. 곁에 두고 싶었다고.
반즈는 인간이었던 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진심 어린 고백과 사과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해준 강물을 따라,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억지로 그 강물에서 시선을 돌렸지만, 다음에 떠오를 기억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평범한 봄날이었다. 반즈는 새 기체로 교체를 마치자마자,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함께 적조가 닥치기 전 수색구조 및 조사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반즈는 그 임무를 통해 많은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슈트롤은 환상 속의 허상이 되어 필사적으로 아이들을 구하려 했고, 끝내 오지 않을 증원을 기다리며 후발대를 위한 단서를 남겼다.
또한 반즈의 기억 데이터가 다시 촉발된 것은 반서가 침식체에 탑재한 사전 설정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반즈가 잊는다면, 자신이 기억나게 해줄 거라는 반서의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반즈는 의식의 바다에 치명적인 편차가 생겨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
…………
내가 좀 더 빠르게 기억해 냈더라면, 연구소의 죄악은 더 일찍 밝혀졌을 거야. 그 침식체가 이렇게 떠돌 일도 없었을 테고, 톰슨이나 다른 이들도 희생되지 않았을 거라고.
멜비 이모 말대로 "미래 교환 계획"을 거절했다면, 그들도 살아있었을 텐데.
지터와 다른 이들에게 의식 회수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교수님도 처형당하지 않았을 거야.
보육 구역에서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반즈는 가슴 속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에게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았는지 생각했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절망의 강물에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 종착점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몸이 얼어붙자, 반즈는 이곳이 바로 예언 속에서 보았던 그 결말의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곧이어 절망의 강물은 천천히 얼어붙었고, 그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듯 얼음 위를 걸어갔다.
잠시 후, 반즈는 연구소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그곳에는 비인도적인 실험 따위는 없었고, 그저 단순한 영유아 보육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희망은 금방 깨져버렸다. 또 다른 가능성에서는 그날의 적조가 너무 빠르게 덮쳐왔고, 반즈조차 미처 보고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적조를 저지하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손을 맞잡고 서로의 몸을 방패 삼아, 밀려오는 "파도"로부터 뒤에 있는 아이들을 지키려 "시도"했다.
그때, 차징 팔콘 소대가 돌진해 와, 적조와 경주하듯 사람들을 구출하려 했다. 그중에는 반즈도 있었다.
그때의 반즈는 필사적으로 한 아기를 구하려 했으며, 모두가 서로 밀고 당기며 아기를 반즈에게 전해주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반즈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적조에 잠식됐다.
크롬이 죽을 때도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대장을 구하지는 못했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쓰러지기 직전, 카무이가 달려와 그 아기를 반즈에게 건넸다.
걱정하지 마, 반즈. 금방 돌아올게.
그 전투 기억나지? 우리 모두 폭발에 쓰러졌어도 결국 살아남았잖아.
자, 빨리 도망쳐!
카무이가 사라지자마자, 반즈가 이를 악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계속 앞으로 가야만 했다.
눈보라가 반즈의 인조 피부를 할퀴었고,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수많은 이들의 절규가 강풍 속에서 울려 퍼졌다.
전부 다 보고 들었어. 난 이제 모든 걸 알아.
반즈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얼음 조각이 되어버린 인간들과 널브러진 구조체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곧이어 그는 얼어붙은 강 끝자락의 건물에 다다랐고, 힘겹게 무거운 대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러자 죽은 영혼이 들어있는 관이 반즈의 앞에 나타났다.
관 속에서는 원망 가득한 소리가 들려왔고, 서리로 뒤덮인 수많은 손이 뻗어 나와, 반즈를 잡아당겼다.
이미 모든 감각이 무뎌진 상태였지만,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반즈는 순간 진정할 수 없었다.
한 인간의 손이 관 밖으로 뻗어 나왔다. 전술 장갑 아래로는 부식된 뼈와 살점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반즈는 단번에 그 주인을 알아보았다.
……
아.
그는 관 앞에 털썩 주저앉았고, 눈보라가 그의 뺨을 스치면서 물 자국을 남겼다.
반즈는 그 손을 잡고 싶었지만, 자칫하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아, 떨리는 손끝으로 겨우 스치듯 만지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
안 돼.
반즈는 이제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적어도 눈앞의 이 인간은 시체라도 남아있었기에,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었다.
꼭 구해줄게. 반드시 구해낼 거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감싸쥐고, 손바닥의 온기로 얼음을 녹이려 했다.
얼음이 조금씩 녹아내리며, 물방울이 한 방울씩 관의 가장자리에 떨어졌다.
이걸로는 부족해. 늦을지도 몰라!
반즈가 크롬에게 받은 난방 장치를 꺼내, 불을 피워 관 속의 인간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단단한 얼음이 녹자, 반즈는 그 손을 밖으로 끌어당겼고, 어떻게든 그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야만 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관 속의 죽음이 서로 얽혀있어, 쉽사리 이 인간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와, 나오라고!
미친 듯이 관을 발로 차던 반즈는 가슴 속에 쌓여있던 온갖 감정이 이 순간 폭발했다. 단 한 사람을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이보다 간절한 적이 없었으며,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구조체의 강력한 다리에 맞은 관이 갈라지자, 그 틈새로 수많은 시체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아직이야!
계속해서 걷어차던 그가 마침내 관을 두 동강 냈다.
반즈는 결국 인간을 관에서 끌어냈지만, 그는 숨을 쉬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인간은 대답이 없었고, 오직 눈보라만이 반즈에게 답할 뿐이었다.
응급처치와 체온 유지를 하면 아직 기회가 있어. 내게는 인간용 응급처치 장비가 있잖아.
제세동기.
허리 뒤에서 빨간 제세동기를 꺼내 마음속으로 시간을 세며 계속 구조를 시도했다.
정신 차려. 제발 깨어나 줘.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계속 구조를 시도하던 그 순간, 인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굳어있던 손이 천천히 반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인간은 생전에도 그랬듯이 구조체의 간절한 바람에 응답했다.
지휘관, 지휘관!
반즈는 인간이 듣지 못해 그를 잃게 될까 두려워, 계속해서 그 이름을 크게 외쳤다.
한 시간 전.
"머나먼" 현실 속에서, 이름이 불린 인간이 한 구조체를 구하기 위해 시각을 다투며 달리고 있었다.
둘이 양성 구역을 떠난 후, 앞서 정찰을 나갔던 반즈와 연락이 끊겼다.
지휘관과 로제타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수색에 나섰고, 흉측한 이합 생물 무리를 물리친 후, 끊어진 금속 다리 위에서 쓰러져있는 하얀 형체를 발견했다.
알았어! 지금 바로 합류할게.
미친 듯이 달려간 지휘관은 반즈의 의식의 바다 상태를 확인한 후, 빠르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중앙 실험실? 과거에 그들이 실험하던 곳을 말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지휘관이 전투 외골격을 작동시켜 반즈를 등에 업었다.
그때 반즈는 충격에 빠진 채, 부서진 관 앞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그 손을 바라만 보았다.
반즈는 밖에서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을 보았다. 이는 인간이 의식의 바다가 조각난 구조체를 등에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실험실로 걸어가 낡은 장비 앞에 선 광경이었다.
반즈는 "기억" 속에서 이 장비를 여러 번 봤었다.
인간이 낡은 연결선을 뽑아, 한참을 더듬어가며 사용법을 파악했다. 평소와는 달리 현재 상황에서는 이것보다 나은 조건이 없었다.
지휘관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성공한 건가?
구했구나.
반즈는 멍한 상태로 인간의 말을 따라 했다. 아직 방금 전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했다.
다시 시작이라고?
반즈가 문득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빙하 위에는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었고, 하나하나가 의식의 바다 혼란이 일어나 강제로 되돌아봐야 했던 과거였다.
그리고 반즈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뒤편에는 크고 작은 발자국이 더 많이 남아있었다. 이는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함께해 준 모든 이들의 발자국이었다.
빙하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녹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빙하 안에서 흐르는 것은 절망과 고통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