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즈가 구조체 정비과로 옮긴 지도 어느덧 몇 달이 지났다. 그날 저녁, 그는 케이론 교수와 함께 다음 구조체 정비 수술을 앞두고 방진복을 챙긴 후, 정비 도구들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반즈, 여기 일은 적응되어 가?
어제 소아과 주임님이 찾아오셨어. 네가 소아과 있을 때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면서, 이렇게 학생을 혹사시킬 거면 차라리 소아과로 돌려보내라고 하시더라고.
나는 이곳에서 적응 잘하고 있어. 그저 더 도움이 되고 싶은 것뿐이야. 게다가 구조체 정밀 정비 실습도 교수님들이 직접 가르쳐 주잖아. 바쁜 거로는 다른 교수님들이 나보다 더 바쁘지.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 너무 무리하지 마. 지금 이 순간의 열정도 좋지만, 몸을 망치면 그게 더 손해야.
케이론이 옷장 문에 팔을 기댔다.
가자. 오늘은 간단한 수술 두 건뿐이고, 다행히 환자들 상태도 심각하지 않아.
아, 맞다.
반즈가 파일 하나를 건넸다.
지난번에 자료 정리를 도왔을 때,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어서 따로 모아뒀어. 구조체 의식 회수와 관련된 것 같은데, 오늘 수술 끝나고 나서 알려주면 안 돼?
케이론이 눈살을 찌푸리며 파일을 받았다.
자료를 정리할 때,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니?
아니. 왜 그러는데?
케이론이 파일을 수납장에 넣고 문을 잠갔다.
이런 것들은 잊어버려.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런 표정 짓지 마. 공금 횡령이나 사익 추구 같은 게 아니라고. 넌 어떻게 이런 자료들을 "우연히" 찾아낸 거니?
4번 정비대는 네게 맡길 테니까 어서 가봐.
교수님!
조수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밖에 구조체 한 명이 왔는데요. 그녀가...
구체적인 상황은 어떤데?
사지가 심하게 손상됐고, 의식의 바다 편차 증상도 나타났어요. 직접 가서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던 조수는 말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낙천주의자였던 조수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반즈는 생각할 틈도 없이 당직자들과 함께 정비실로 달려갔다.
또 "특수 구조체"야.
"또"?
케이론의 한숨 소리와 함께, 뒤따라 들어선 반즈가 정비대 위의 구조체를 마주했다.
!
정비대 위에는 한 "소녀"가 누워있었다. 그녀의 사지는 전부 부러져 있었고, 흉부에는 긴 금속 파이프가 꽂혀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입가에서 흘러나온 순환액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반즈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으윽, 살려주세요.
걱정 마, 지금 바로 정비 장비를 연결할 거야. 우리가 구해줄게.
의사들이 정비실에서 분주히 움직이면서, 각종 케이블을 "소녀"의 기체에 연결했다.
반즈는 멜비에게서 이런 "특수한" 구조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야. 하지만 그들을 "만든" 사람들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그들은 비극의 "결과물"이야".
……
흡인기를 줘.
반즈가 손상 부위를 다시 살폈을 때, 정비대 위의 구조체는 이미 의식을 잃은 후였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었다.
너무 빨라.
구조체 의식의 바다 실시간 관측 장치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그러자 상상을 초월하는 파동에 현장의 모든 사람이 식은땀을 흘렸다.
일반적인 구조 방식으론 안 될 것 같아. 의식의 바다 편차가 이렇게 커진 걸 보면,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거야.
의식... 의식 회수는? 아직 회수를 시작할 시간 있잖아.
반즈가 무의식적으로 반자동 의식 회수 장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찰싹!
지금은 의식 회수를 하지 마!
케이론이 반즈의 손을 쳐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있는 자원으로는 그녀를 살릴 수 없어!
엄청난 자원 낭비는 차치하고라도, 지금 그녀의 의식의 바다로는 의식 회수를 감당할 수 없어. 작동시키는 순간 의식의 바다가 산산조각 날 거야.
……
지금은 "사망" 선고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야. 하아, 마지막 시도나 해보자.
안 돼. 다른 방법을 더 시도하게 해줘.
반즈가 또다시 익숙한 "안 돼."라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난번 같은 말을 했을 때는 페로가 이미 그의 눈앞에서 세상을 떠난 뒤였고,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어진 후였다.
그 후로 반즈는 매일 밤 그날의 순간들을 끝없이 되짚어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페로를 살릴 수 있던 것이었을까?
반즈는 잠 못 이루는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마다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다.
금속 파이프를 뽑고, 인공 심장을 꺼내!
네?
체외에서 인공 심장을 정비할 거야.
반즈는 수술 장갑을 단단히 고쳐 끼고, 관통된 인공 심장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나는 원래 임상의였어. 구조체 정비과와 소아과의 임상은 본질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교수님, 이건...
반즈에게 맡겨보자고. 다들 반즈를 도와줘.
부탁할게.
금속 파이프를 제거하자마자 흉골 정중앙의 절개부를 확장하고, 흉강 내의 순환액을 흡입해. 그래, 잘하고 있어.
그날 밤 당직이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반즈의 지시 아래, 처음 접해보는 "정비" 방식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대부분 의대에서 엄격한 실습과 시험을 거쳤음에도, 반즈의 말을 이해하고 수행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시도"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편차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고, 임계치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순환 시스템의 메인 회로를 분리하고, 체외 순환 준비해.
조수는 "소녀"의 흉부에 남은 구멍을 확장하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끔찍한 참상에 조수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육성 센터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케이론 교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절한 의료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다가, 결국 정비 도구를 내려놓았다.
너희에게 맡길게.
교수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다른 두 정비실의 상황을 보고 올게. 너희는 반즈의 지시에 따라 수술을 계속하고 있어.
교수님.
순환 시스템의 메인 회로 열고, 순환액을 보충해! 당신은 의식의 바다 파동을 실시간으로 보고해 줘!
네, 반즈 선생님.
케이론이 사무실을 나와 고요한 복도로 들어섰다. 사무 구역의 복도에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동작 감지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케이론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뒤로 불빛이 하나씩 꺼져갔다.
케이론은 문득 수년 전 응급실에서 한 아이가 수련의의 거짓말을 간파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의대 강의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아이는 놀랍게도 최상위권 학생이 되어 있었다.
또 그 아이는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구조체 정비과에 불쑥 나타나, 중상을 입은 구조체들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70%" 이상인 중상 환자들도 제발 살려줘.
그리고 다시 방금으로 돌아와...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라고 말했던 그 순간도 이제는 먼 기억이 되었구나.
언제부터 반즈 같은 그런 굳은 의지를 잃어버린 걸까?
불길이 창공을 물들이던 그날 오후였던가?
다행이야. 정말 잘됐어! 드디어 적합한 데이터를 얻었어!
케이론! 우리 팀은 이제 해체되지 않을 거고, 연구실도 지킬 수 있어.
눈앞의 동료는 감동의 눈물을 머금은 채, 최신 실험 데이터를 정신없이 분석했다. 케이론의 기억 속 그는 딸이 태어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았다.
너는 기쁘지 않아?
동료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의 등을 퍽하고 쳤다.
당연히 기쁘죠. 제가 당신의 조수로 그렇게 오래 일해왔는데...
케이론은 세게 등을 맞으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케이론은 사실 거창한 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연구 성과로 젤레노그라드 연구실을 "지킬" 기회를 얻었고, 그것으로 퍼니싱 폭발 초기의 혼란을 피한 것이었다.
중년이 된 지금, 그는 그저 안정된 곳에서 밥벌이나 하며 살고 싶을 뿐이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저는 이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떤 심정?
"인간을 위해 보탬이 될 수 있다."라는 이 심정 말이에요. 이제는 이해가 돼요.
그래.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의미가 있어. 이 위험하고 거대한 원거리 링크 시스템을 대체할 날도 곧 올 테고, 더 나아가 의식 회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도 이룰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가슴 아픈 것은 링크 시스템의 희생자들과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구조체들이 이날을 못 본다는 거지.
이 모든 건 가치가 있는 일이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지금 바로 이 데이터를 공중 정원으로 전송하자.
공중 정원으로의 정보 전송 작업은 한 달여의 시간을 넘어, 그 결정적인 날의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케이론은 평소대로 기록 장치를 챙겨 테스트존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칫, 운도 없지.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부모님?
아버지나 어머니의 성함이 뭐니? 혹시 길을 잃은 거야?
나는 엄마 아빠가 없어.
케이론이 벽 뒤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순간, 참혹한 진실이 드러났다. 아이의 몸은 구조체로 개조되어 있었으며, 다리를 옥죄고 있는 구속 벨트로 인해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케이론은 그제야 공포에 질린 아이의 떨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어린아이는 케이론을 적대시하는 듯, 말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와 반감이 가득했다.
왜 놀라는 건데? 다 당신들이 한 짓 아니야?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다 나쁜 놈들이야.
말도 안 돼. 누가 너를 여기로 데려온 거야?
모르겠어. 아무튼 누군가가 우리를 사들였대.
면역 혈청 4개에 나 같은 실험체 한 명을 구할 수 있다던데.
너희를 어디에 가뒀지?!
모든 것을 체념한 남자아이는 이제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다시 잡혀간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복도 반대편을 무심하게 가리켰다.
조수였던 케이론은 이 어두운 구석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공포와 불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거짓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케이론은 처음으로 그곳에 발을 들였다.
……
이럴 수가.
그곳에는 아이들이 웅크린 채, 한데 모여있었다. 황금시대 실험실의 실험용 쥐들과 다를 바 없었다.
흰 가운 놈들이 또 왔어. 어서 숨지 않으면 다음은 너희 차례야.
오늘도 의식의 바다 안정도 테스트를 한다고 했어. 게다가 저번에 데려간 애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케이론은 아이의 말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케이론?
당신은?! 이 실험체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 네게 권한이 없었을 뿐이야.
이 아이들은 하나하나가 귀중한 생명이에요! 감히 누가 이런 어린아이들을 실험체로 만들 자격을 준 겁니까!
지금같이 열악한 환경에서는 그들에게 인권이란 없어.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나 있나요? 그동안 당신의 조수로서 헌신했건만, 최근에 공중 정원으로 보낸 모든 성과물이 아동 실험으로 얻은 결과였다는 건가요?
그래서 "완벽한 결과", "성공적인 실험"의 진실이 이거였던 건가요?
이런 잔혹한 짓을... 인간 문명을 지키자면서, 미래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실험체로 만든다니요!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야.
케이론이 남자아이의 작은 손을 붙잡았지만, 아이는 격렬하게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으로 케이론을 노려보았다.
착한 척하지 마. 당신도 흰 가운 입은 사람이잖아.
……
그날의 실험은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케이론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중 정원의 연구원들이 그 "지나치게 완벽한" 데이터를 정말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묵인한 것인지를.
그러나 케이론은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결단적인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조연제의 도움으로 맹렬한 불길이 연구실 전체를 집어삼켰다.
모든 기기들과 함께, 잘못된 조작으로 침식된 "실험체"들의 방까지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때, 침식체들이 격리실에서 뛰쳐나와, 이제는 어느 안전장치도 없는 연구원들에게 달려들었다.
공중 정원의 구조대가 도착한 순간, 케이론은 확보한 데이터 단말기를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에 숨겼었다.
케이론은 늘 자신이 나약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 추문을 세상에 알리기로 한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담대하고 결연한 선택이었다.
그 후로 군인에게 끌려갔을 때도, 생명의 별 구조체 정비실로 발령받았을 때도, 그때처럼 뼛속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케이론은 멜비처럼 이 추문에 발목을 잡힌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리고 케이론의 구조체 정비과 발령 소식을 들은 멜비가 그를 찾아왔다.
멜비가 오는 것을 본 케이론은 자신 앞의 장비를 닫았다.
다 봤어요. 저도 당신처럼 마땅한 연구 성과가 없었지만, 몇몇 화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네요.
아직도 의식의 바다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저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 것뿐이에요.
의식 회수인가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게 실현되는 날이 오긴 할까요?
반서가 지상으로 갔다고는 들었어요. 네? 당신이 그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요? 설마 그걸 속죄의 일환이라 여기는 건 아니겠죠?
육아의 고충을 말하려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 찾아왔어요.
이 아이는 의대에 진학했으면 해요. 그때가 되면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부탁은 아닌 것 같네요.
맞아요. 모두 제 사심이에요. 공중 정원에서 의사로 사는 건 꽤 안정적이고 풍족하니까요. 무엇보다 그 아이는 재능이 있어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그 아이가 때가 되어도 의대에 가려 하지 않는다면, 추천서를 써줬으면 해요. 전 예전에 임시 보호자여서 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실습 자격을 얻게 되면, 구조체 정비과로 추천할까요?
아뇨, 그 과는 안 돼요. 그 아이는 평생 구조체나 의식의 바다 같은 것들과 엮이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은 지상에 가서 사람들을 구하고 희생해야만 마음속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 고민을 할 줄은 몰랐네요.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반서가 아이를 맡기기 전까지만 해도 지상 지원을 신청 해놓은 상태였죠.
하지만 아이... 아이들이 눈앞에 있으니, 생각이 바뀌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그들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어요. 케이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아이가 의식 회수가 실현되는 날을 보지 못할 거예요. 그렇기에 한 아이가 무사히 자라나는 걸 지켜보는 일은 제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 됐어요.
멜비가 좀처럼 보기 힘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론은 그녀가 소아과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늪에 빠져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 해도 상관없죠. 아이들의 미래는 밝아야 해요. 그들을 괴롭히고 미래를 짓밟으려는 자들은 다 망할 놈들이에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요. 우리가 아이들을 실험체로 전락시킨 순간부터, 인간은 후손을 포기했고 문명도 끝난 거예요. 그런데 "온실"이니 "정원"이니 그 세상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무슨 미래를 기대한단 말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은 이해 못 하겠지만...
언젠가는 자라난 반즈를 보게 될 거예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도 보게 될 거고요. 그때가 되면 이해하실 거예요.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아침.
생명의 별에 온 걸 환영해. 자네들은 모두 의대의 인재들이야.
우움.
반즈! 이런 중요한 날에도 조는 거야?
얼른 일어나서 학과 설명회에 집중해. 잘못해서 이상환 과를 고르면 안 되잖아.
나탈리가 반즈의 어깨를 세게 흔들자, 앞뒤 좌석의 사람들도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암. 어제 늦게까지 공부했거든. 넌 어디에 지원했어?
난 소아과에 가고 싶은데, 초급 수료 시험 성적이 높지 않아서 날 받아줄지 모르겠어. 아마 다른 과에서도 교대 근무해야 할 것 같아.
각 과의 교수들이 차례로 나와 실습 내용을 소개했다.
와, 직함이 엄청나. 나는 언제쯤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눈이 반짝이던 나탈리의 머리에는 육성 센터에서 받은 지 오래된 머리핀이 꽂혀있었다.
반즈는 단말기에 뭔가를 입력하는 중간중간 나탈리를 살폈다. 그러다 나탈리가 알아차리자, 말없이 단말기를 치웠다.
왜 자꾸 쳐다봐? 할 말 있으면 해!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같이 오자고 한 건 네가 어느 과에 가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어서야.
네가 궁금해서 물어봤을 리가. 넌 이미 위대한 의학의 길에 온 영혼을 바쳤잖아.
나탈리가 과장되게 "영혼 바치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도대체 누가 시킨 거야? 네가 우리 중에서 거짓말 제일 못한다는 거 누가 몰라? 거짓말할 때 어떤 표정 짓는지 다들 안다고.
사실 페로가 부탁했어.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
페로가 언제 너한테 시킨 건데?
반년 전.
반년... 6개월 전부터 내가 어디 가고 싶은지 알아보라고 했으면서, 나한테는 메시지 하나 안 보내는 거야? 지금까지 기껏해야 단체 메시지 몇 개 받은 게 전부라고.
페로는 요즘 바빠. 엘리트 소대에서 또 구조체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하려 한대.
됐어. 넌 멜비 이모 때문에 생명의 별에 들어가려고 바쁜 거지만, 걔가 바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페로는...
알아, 더 말하지 마.
계속 교수님 말씀이나 듣자.
마지막으로 한 교수가 천천히 단상에 올라와, 새로운 얼굴들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구조체 정비과의 주임교수 케이론이야.
학생들의 시선이 마른 체격의 교수에게 집중되었다.
구조체 정비과에서 실습하고 싶은 학생이 있다면, 각오를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 익숙해질 준비가 필요하고, 구조체보다도 강인한 정신력을 가져야 할 거야.
……
케이론은 앉아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젊은 눈동자들이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구조체의 세계를 아직 알지 못했다.
케이론은 자신을 찾아오는 학생이 없을 거로 생각했다.
구조체 정비과는 결코 좋은 학과가 아니었다. 올해도 아마 지원자가 없을 테고, 그저 후속 조정 명단을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질문이 있어.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케이론은 자리에서 계속 친구와 속삭이던 한 청년을 발견했다.
케이론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그 청년은 작년 진로 상담 때, 분노에 찬 채 추천서를 돌려주었던 그 학생이었다.
눈매는 한결 순해졌고, 어깨는 더 넓어져, 예전의 앳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케이론은 반즈의 달라진 모습을 유심히 살피며, 그는 더 이상 반서를 찾아 지상으로 가려던 소년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 청년이 손을 높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의대 교재 집필자 중 한 명인 케이론 교수님에게 질문이 있어. 예년과 달리 올해는 최신 구조체 모델의 치료 방안이 갱신되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네가 올해 초급 수료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니?
맞아.
올해는 교재 편찬 절차가 바뀌었어.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내 사무실로 와.
케이론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설명이 끝나고 문을 나설 때까지도 열정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케이론의 사무실을 찾아와, 구조체 정비에 대한 최신 지식을 물어보았다.
반즈, 난 자네가 생명의 별에서 실습을 했으면 좋겠어.
어느 과에 가고 싶어? 구조체 정비과는 말고.
구조체 정비과 말고?
1지망이 우리 과라는 거야?
청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대답했다.
맞아. 1지망으로 구조체 정비과를 선택했어. 2지망은 소아과야. 사실 이전에 신생아과에서 실습 경험도 있었지만, 모두를 도울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난 생명의 별에 가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반즈의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케이론은 멜비가 했던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앞길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지만, 이 아이들은 눈앞의 일들을 굳건히 해내고 있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밝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힘차게 개척해 나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늪에 빠져도" 구해줄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었다.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밤이었다.
케이론은 과 사무실 복도를 몇 시간째 배회하다, 깊은 고민 끝에 다시 정비실로 향했다. 그는 반즈의 결정이 그 "소녀"에게 기적을 가져다주었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케이론이 모퉁이를 돌자, 이번에는 구속 벨트에 묶인 "실험체" 대신에 복도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의사 서너 명이 보였다.
반즈, 구조체 정비실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군의 지원을 받으려는 이들도 있고, 세계 중공업 진출의 발판을 삼으려는 이들도 있죠. 구조체를 살리려 온 사람도 많았지만, 그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예요.
응, 알아.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죠. 어린아이가 구조체인 어머니를 깨워달라고 울며 애원했는데, 그걸 본 직원이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날로 바로 부서 이동을 신청했어요.
조수는 고개를 숙이며 반즈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그날의 절망적인 상황이 생생했다. 보라색 머리를 한 그 아이가 언젠가 다시 찾아와 "어머니"를 돌려달라고 할까 봐, 그는 지금까지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도 결국 구조체가 된 어머니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구조체들은 늘 전장의 최전방에 있잖아요. 우리가 맡는 구조체들은 일반 의사들이 보는 환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끔찍한 상태예요. 이런 상황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요.
그래서 당신 같은 분은 저희도 처음 본다는 거예요.
대우 좋은 소아과를 포기한 것도 그렇고, 당신은 진심으로 구조체 "정비"를 "치료"로 여기는 것 같아요.
오늘 밤만 해도 그래요. 원래는 다들 포기하려고 했잖아요. 심지어는 케이론 교수님까지도 포기하려 하셨다고요.
언젠가 구조체들이 인간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될 날이 온다면, 당신은 그 변화를 만드는 데 큰 의지를 보인 주역 중 한 명이 될 거예요.
반즈는 조수의 말을 조용히 끝까지 들었다.
난 당신들 말처럼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 난 그저 모두를 구하고 싶을 뿐이야.
반즈?
아직 안 갔구나.
의사들은 교수가 다가오자 일제히 대화를 멈췄다.
부상자는 어때?
순식간에 피곤한 얼굴들이 들뜬 표정으로 바뀌면서, 저마다 뒤편의 정비실을 가리켰다.
정비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의료기기의 규칙적인 "삐삐"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살리는 데 성공했어. 남은 건 각 모듈의 수리뿐이고, 그건 다음 당직 의료진에게 맡겼어.
이런 특이 케이스는 처음이라 저희는 이만 쉬러 가보겠습니다. 근데 이거 논문감인 것 같은데... 반즈, 나중에 논문 쓸 때 저도 공저자로 넣어줄 수 있나요?
……
조명 아래에서 자세히 보니, 조수를 제외하고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즈와 나이대가 비슷했다. 모두 공중 정원이라는 "온실"에서 자란 새로운 세대였다.
케이론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그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자신은 절망적인 미래가 다가올 거라고 여겼지만, 오래전 잃어버린 확신, 용기 그리고 신뢰가 다시 희망의 씨앗이 되어 자라나고 있다고 말해야 했던 걸까?
멜비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상에 넘쳐나고,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다음 세대를 키워내며, "자신이 늪에 빠지더라도" 후대들을 구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해야 했던 걸까?
케이론의 머릿속에서 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케이론은 공중 정원을 위해 의식 회수의 비밀을 숨겨왔다. 그리고 수년간의 검증 끝에 그가 마주한 진실은 하나뿐이었다. 의식 회수는 "허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모든 게 헛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즈는 케이론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아이였다.
만약 반즈에게 "새로운 미래"를 찾아보도록 맡긴다면...
반즈는 과연 그들과 같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인가?
모든 갈림길 앞에서 반즈도 결국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반즈도 그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
교수님도 이제 돌아가세요. 저희도 잠깐 앉아 있다가 기숙사로 돌아갈 거예요.
조수와 다른 사람들은 먼저 일어난 뒤, 아직도 바닥에 앉아 있는 반즈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잠깐, 반즈는 남아있어.
응?
할 얘기가 있으니, 내 사무실로 잠깐 올래?
케이론이 반즈를 데리고 길고도 조용한 밤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는 길고도 조용한 밤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기밀 누설자 체포 완료. 현재 포로로 잡힌 사람의 부상 상태를 점검 중이다.
교수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다니.
케이론은 호송차 안에 앉은 채, 공중 투하대를 벗어난 반즈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는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 "쉿"하라는 손짓을 했다.
"기밀 누설"이라는 죄목은 반즈가 아닌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케이론은 그날 사무실에서 의식 회수의 실체를 반즈에게 말해주었지만, 반즈는 그 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충격에 휩싸여 케이론의 마지막 설명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의식 회수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폐기됐고, 관련 팀들은 모두 해체됐어. 지금까지 "의식 회수는 성공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 안정을 위해 꾸며낸 거짓말을 하는 것뿐이야.
반즈.
너는 갓 태어난 생명처럼 순수하고 솔직해.
"넌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존재야.", 멜비가 그렇게 말했었지? 난 네게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니라, 네가 어디까지 가능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마지막 방에 들어서자, 밝은 빛이 케이론을 비추었다.
아.
케이론은 눈앞의 강렬한 빛과 고조되는 흥분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그날 젤레노그라드 연구실을 삼켰던 붉은 불길 속으로 다시 뛰어드는 듯했다.
"정말 티 없이 밝은 날이네".
그때 "작업자" 몇 명이 방으로 들어와, 의식 회수의 진실을 폭로하려 했던 이 반역자를 차갑게 응시했다.
내 사인은 뭐가 될까?
과로사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