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08 기나긴 이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ER08-15 흐릿함

>

오늘 또 신입들이 온다네요. 교수님은 신입만 오면 기대에 부푸시던데요?

당연하지. 의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넘치는 신세대들을 볼 수 있잖아. 퇴직하기 전에 이런 광경을 실컷 봐둬야지. 나중엔 이런 기회가 없을 거라고.

그게 교수님이 젊음을 유지하시는 비결인가요? 어! 안녕! 반즈 선생님! 오늘도 다크서클이 심하네!

갑자기 이름을 불린 "반즈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며 쑥스럽게 웃었다.

좋은 아침. 그리고 "선생님"이란 호칭은 아직 수습 중인 내게는 과분해.

의사니까 반즈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잘못된 거야? 자격증만 따면 정식으로 "반즈 의사"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생명의 별에서 수습 기간이 꽤 길었는데, 자격증은 언제 따려고? 전공과는 정했어?

음, 나도 잘 모르겠어. 아직 고민 중이야.

히포크라테스가 반즈의 명찰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네가 그 모든 과에서 탐낸다는 우수생이구나? "멀티태스킹 괴물", "시험의 신"이라면서 잠도 안 자고 공부한다고 하던데? 이름이 반즈 맞지?

그런 중2병 같은 별명을 당사자 앞에서 말씀하시면 안 되죠!

?

다른 것도 있던데. "자습실 수호자", "요구를 들어주는 소원기"였나?

내가?

반즈는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이 아니야. 요즘에 소아과 지도교수님을 따라다닌다면서? 그게 네 최종 선택과 관련된 거라면, 다시 한번 고민해 봐. 소아과는 너무 힘들어.

……

그리고 공부도 적절한 휴식이 필요해. 이렇게 계속 무리하다간 금방 늙어버릴 거야.

음,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단순히 "무리"하는 게 아니야. 예전에 이곳에서 날 돌봐주던 의사 선생님도 이렇게 했었거든.

이제 일 보러 가봐.

더 이야기하다간 네 지도교수님이 날 찾아오겠어.

하얀 가운 차림의 반즈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자리를 떴고, 그 뒤로 히포크라테스도 자신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화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네요. 교수님, 반즈 어떠세요? 의대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학생이잖아요.

특별한 점은 없는 것 같네. 내 눈에는 단지 조급한 마음에 지나치게 노력하는 아이일 뿐이야.

뭐가 그렇게 조급한 걸까요?

반즈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조급한 것이었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반즈는 짙어진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반즈도 자신이 지식에 굶주린 듯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반즈가 서둘러 멜비 같은 소아과 의사가 되려는 것은 과거의 아쉬움에 "보답"하고, "계승"하고 싶어서일까?

어쩌면 병동의 아이들에게서 어린 날의 자신을 보아, 그들의 건강한 미래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긴장이 느슨해질 때마다 페로와 다른 이들이 지상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떠올려서였을까?

그 이유를 반즈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슈트롤의 조언만은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눈앞의 일부터 잘 해봐.

네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해. 의대에 진학해서 의술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거지. 평생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하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환자들을 돌봐야 하니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을 거야.

……

일단 앞으로 나아가, 우선 의사가 되는 거야. 멜비보다 더 훌륭한 의사가 되는 걸 목표로 해보라고.

반즈에게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의사가 되어 환자들의 병실 문을 여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즈가 병실 문을 열었다.

어! 반즈 오빠다!

내가 먼저 왔어! 반즈 형, 난 어제 소원 카드를 두 장이나 모았다! 근데 아직 뭘로 바꿀지는 못 정했어.

나도 한 장 받았어! 나는 새로 나온 로봇 소녀 스티커로 바꿀 거야!

적막했던 병실이 금세 "생기"를 되찾았고, 걸을 수 있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내가 없는 동안 누가 소원 카드를 준 거야?

한 간호사가 반즈에게 다가왔다.

네가 오랜만에 휴일을 보내는 동안, 아이들이 얌전히 있어서 당직 선생님께서 소원 카드를 나눠주셨어. 마카도 두 장을 받았고.

반즈가 병실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베개 옆의 소원 카드 두 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카는 링거 맞을 때 얌전히 잘 참았고, 간호사한테 약품 치우는 걸 잊지 말라고 알려주기까지 했어. 비비안도 약속대로 로봇 소녀를 두 편만 보고 쉬러 갔다고.

고마워, 수고했어.

나탈리가 떠난 후, 반즈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병실을 한 바퀴 돌더니, 마카의 침대 앞에 멈춰 섰다.

누가 제일 말을 잘 들었는지 한번 볼까? 앤디? 비비안? 아니면 마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던 반즈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모두 빨리 낫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상으로 사탕 하나씩 줄게.

반즈가 "보물 상자"같은 주머니에서 여러 맛의 사탕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먼저 마카의 베개 옆에 한 알을 놓았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가라고 했다.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꽃에 반즈도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

정해진 목표가 없다면, 가운을 입고, 병실 문을 연 후, 아이들에게 작은 행복을 전하는 것처럼, 우선 눈앞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나 더 가져도 돼?

마카가 작은 목소리로 반즈에게 말했다.

……

반즈 형?

마카의 질문에 반즈가 정신을 차렸다.

당연하지. 간호사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네가 어제 제일 얌전했다며? 하나 더 가져가. 어떤 맛으로 가져갈래?

반즈 형은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아빠도 고민 있을 때, 형이랑 똑같은 표정 지어.

아, 나는...

최근에 마카의 상태가 좋지 않아.

나탈리가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 조용했던 진료실은 졸음이 밀려오는 분위기였지만, 옆에서 "마카"의 진료 기록을 살펴보던 반즈는 이례적으로 하품 한 번 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허약한 데다가, 여러 번의 수술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어. 다음 수술 전까지는 격렬한 활동을 피해야 해.

현대 의료 기술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는" 질병이 존재해.

다른 방도가 없으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겠지. 후우.

이 아이는 교수님께서 담당하고 계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야간 당직까지 해야 하는데, 좀 쉬어.

괜찮아. 교수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갈게. 교수님이 준비한 마카의 치료 방안을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거든.

교수님께서 너는 휴식을 좀 취해야 한다고 특별히 당부하셨다고. 며칠 전에도 진료실 의자에서 잠들었다면서? 또 며칠이나 밤을 새운 거야?

반즈는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고, 차분히 마지막 페이지까지 기록을 검토했다.

마카의 가정 형편은 어때? 부모님이 공중 정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

앞으로 입원비랑 수술비로 많은 비용이 들 텐데, 이 상태가 꽤 오래갈 것 같아.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어.

만약 집안 형편이 어렵다면, 내가 비용 감면 신청을 도와줄 수도 있어.

마카는 보호자는 아버지 한 분뿐이야. 그런데 아버지는 자진해서 개조를 받고, 지상 전투에 참전하셨어.

군용 구조체의 파손율은 낮아진 적이 한 순간도 없었잖아. 만약 아버지마저 잃으면 마카는 청소년 육성 센터에 보내질 거야.

……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는 수밖에 없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마카.

나도 반즈 형을 돕고 싶어. 어제도 간호사 누나가 단말기를 찾았는데, 내가 척척 알아듣고 단숨에 가져다 주기도 했다고.

좋아. 그럼, 내 "조수"를 해볼래?

"조수"가 되면, 반즈 형이 소원 카드를 더 많이 주는 거야?

소원 카드가 많이 필요한가 보네?

반즈는 점점 불안해하는 마카의 모습을 보며, 이 아이가 오랫동안 "소원 들어주기 카드"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아빠의 "장기 임무"가 끝나서, 며칠 있다가 이곳으로 온다고 했어. 소원 카드 몇 장이면 하루 동안 밖에 나갈 수 있어? 하루만이라도 아빠랑 밖에서 놀고 싶어. 이걸로도 부족하면 나중에 받을걸 "미리" 쓰면 안 될까?

마카는 주머니에서 여러 색깔의 소원 카드들을 조심스레 꺼내었다. 모서리 하나 구겨짐 없이 소중히 간직해온 흔적이 엿보였다

이 일에 대해서 아빠랑 상의해 봤어? 이번 주에 수술받아야 하는데, 그 후에는 한동안 회복 기간이 필요할 거야.

아니.

……

반즈가 허리를 굽혀 마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런 방법은 어떨까? 아빠가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렸다가, 언제 밖에 나갈 수 있을지 같이 상의해 보자. 그동안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말을 잘 따르면서 회복에 집중하면, 금방 아빠랑 같이 밖에 나갈 수 있을 거야.

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아.

반즈가 마카의 손에서 카드 몇 장만 골라 가져간 뒤, 남은 카드 뭉치를 마카의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반즈는 마카에게 받은 소원 카드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후, 다른 아이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갑자기 단말기에서 알림음이 울렸고, 스크린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이름이 나타났다.

페로??

페로는 오랫동안 지상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즈는 갑작스러운 통신에 조금 불안해했다.

반즈는 바로 통신을 받았지만, 반대편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페로? 무슨 일이야?

페로

지지직, 너...

뭐라고? 잘 안 들려.

페로는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뒤섞인 잡음 때문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곧이어 통신은 강제로 끊어졌다.

……

반즈가 다시 통신을 시도하려는 순간, 나탈리가 뛰어 들어왔다.

반즈, 여기 있어?

나탈리? 방금...

반즈는 단말기를 들어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나탈리가 그의 말을 끊었고, 곧이어 어두운 안색으로 병상에 있는 마카를 바라보았다.

반즈, 잠깐 나 좀 봐!

뭐라고?

마카의 아버지! 몇 시간 전에 아버지가 속하신 소대에서 대규모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고!

구체적인 상황은 어떤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구조체 정비과 쪽은 숨 돌림 틈도 없이 바빠서, 지금은 상황 설명조차 힘들다고 해.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며칠 뒤면 장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다고 신나있었어. 심지어는 엄청 들떠서 여행 계획까지 세워뒀다고.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내가 가볼 테니까 교수님에게 돌아와 달라고 연락 좀 해줘.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에 반즈는 생명의 별의 응급실을 향해 달려갔다.

반즈는 긴 복도를 가로질러 비상계단실로 뛰어들었고, 그 경로는 반즈가 아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오늘도 인공 햇빛은 따스했고, 어릴 적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보였던 그 창문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반즈는 그 창문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의 다른 모습"을 엿봤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구조체들과 의사들,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진 구조체들의 모습은 그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진 걸까?

그날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반즈가 다시 한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굼뜬 난민들을 구하느라 침식체의 공격을 받은 거잖아! 다른 소대와 합류하자마자 이 지경이 되다니. 이제 모든 게 물거품이 됐어!

우리가 지상에서 얼마나 오래 죽어라 버텨왔는데! 드디어 공중 정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건만, 이렇게 될 줄이야. 결국 이 몇 명밖에 안 남았다고!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구조체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깊이 새겨진 분노와 절망 그리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정비과 의사들은 반즈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모든 게 그때와 똑같았다.

이 모델의 구조체와 관련된 상세 자료를 가져와. 내부의 공간이 손상됐는지 확인해야 해.

자동 정비 키트로 외상을 처치하고, 최대한 빨리 순환액 유출을 막아. 아니야, 상태가 심각하니 바로 순환액 보충 준비해.

교수님! 현재 보유한 순환액으론 턱없이 부족해요!

6번 정비실, 사망 선고한다. 장비를 정리하고 즉시 다음 환자 받을 준비해.

밖에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교수의 얼굴에 피로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중상자 우선이야. 파손율이 40% 이상 70% 미만인 환자를 먼저 응급처치하자.

더 심각한 환자들도 있어요.

자원이 부족하니까 더 심각한 환자는 받지 마. 여기가 사형 집행장은 아니니까.

내가 도울게!

흰 가운을 입은 젊은이가 6번 정비실 앞에 서서, 안에 있는 교수와 조수를 향해 외쳤다.

……

하지만 정비실의 교수는 환자 처치에 집중한 채, 반즈를 흘깃 보고는 다시 구조 작업에 몰두했다.

연결선.

조수가 재빨리 교수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건넸다.

난 구조체 정비 과정을 이수했어. 그리고 구조체 정비 초급 시험은 당신이 직접 통과시켜 줬잖아.

원격 정비로 두 환자의 응급 처치를 동시에 할 수도 있어. 의료 장비로 수없이 연습했다고!

흡인기.

교수님, 저 의사는 제가 알아요. 비록 의료 시뮬레이션 장비로만 경험해 봤지만, 구조체 정비 성적도 우수했어요.

알고 있어.

응급실 입구에서 반즈는 다급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순간 그는 어릴 적, 흰 가운이 시야를 가득 채운 채, 어른들의 다리에 둘러싸여 있던 아이로 돌아간 듯했다.

……

그곳에는 또 다른 "페로"가 있을 수 있었으며, 이번에는 마카일지도 몰랐다.

……

케이론, 정비실은 사용하지 않을게. 밖에서 치료하면 되니까, 경상 구조체라도 치료하게 해줘.

그리고 "70%" 이상인 중상 환자들도 제발 살려줘.

케이론 교수는 다시 한번 반즈에게 1초를 "낭비"했다.

원격 정비 세트 하나 가동해 줘. 그리고 밖에서 앉아 있을 수 있는 구조체들도 데려와.

네!

반즈는 그날 얼마나 많은 정비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반즈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온몸에 순환액이 튀었었다.

원격 정비 세트의 연결선에서 뇌를 찌르는 듯한 격통이 몰아쳤지만, 이내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서면 또 다른 환자가 고통 속에 누워있었다. 그렇게 치료하고, 응급처치하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실 구조체도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생체공학 피부가 찢어지면 "피범벅"이 되는 건 똑같았다.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너무 아파.

걱정하지 마, 내가 치료해 줄게.

넌 이해 못 할 거야. 이 빌어먹을 곳에 올 때마다 난... 아악!

순간 반즈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 동시에 손놀림이 잠시 흔들려 상처 부위에서 다시 순환액이 터져 나왔고, 원격 정비 세트를 잘못 조작한 탓에 구조체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연결 해제해!

머릿속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반즈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

됐어. 이제 그만해.

아직이야.

반즈의 고집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공항과 이어진 통로에서 새로운 부상자를 실은 구조체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3분만 있으면 돼. 조금만 쉬면 다시 정비 세트에 연결할 수 있어.

반즈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바닥을 짚고 일어나 새로 온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러 달려갔다.

흉부를 들어 올리고, 경부는 건드리지 마! 조심해.

부상자는 얼굴 전체가 상처로 뒤덮여 있었지만, 젊었을 때 개조를 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조심히 들어야 해.

반즈?

부상자를 안고 있던 구조체가 조심스레 반즈의 이름을 불렀다.

션?

반즈는 그 구조체를 알아봤다. 션은 페로의 부모님과 같은 소대였으며, 그들이 전사한 후에도 페로를 많이 돌봐줬던 구조체였다.

날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션은 고통스러워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또한 상태가 위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또 임무에 문제가 생긴 거야?

"또"라... 그래, 맞아. 또 이런 일이 벌어졌어. 이번엔 그 애 차례인 거지.

?

반즈는 잠시 멍해졌다가 바로 고개를 숙여, 폐기 직전인 구조체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흘러나온 순환액에 인조 머리카락이 흥건히 젖어, 원래의 머리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

……

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

…………

갑작스러운 비명이 인파 사이에서 터져 나오자, 케이론이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구조체가 충격에 빠진 채 주저앉아 있었고, 그의 품에 있던 중증 부상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백발의 의사가 부상자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주위 사람에게 정비 장비를 가져다 달라고 소리치며, 부상자의 절단된 다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정비 도구 가져와!

이미 늦었어요.

반즈는 의료 장비를 건네받았지만, 페로의 온몸을 뒤덮은 상처들 앞에서 절망감에 휩싸였다. 오래된 상처든 새로 생긴 상처든, 하나하나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젊으니까 의식 회수는 어때? 그거라면 가능할 거야!

생명 징후가 끊겼어요.

안 돼, 분명히 뭔가...

반즈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는 선명해지기는커녕, 눈가에 순환액만 묻어버렸다.

눈앞의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양손은 경련을 일으키는 듯 떨렸지만, 이제 무엇을 해도 소용없었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진 구조체를 보며, 반즈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이 병원에서 처음 페로를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페로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오열했고, 반즈는 철없이 젊은 의사의 거짓말을 들추어냈었다.

네 어머니는 괜찮아. 다만 심한 부상을 입어서 휴면이 필요한 거야.

휴면? 구조체가 휴면을 한다고?

그래, 지금의 의료 기술로는 어머니를 치료할 수 없어. 그래서 어느 정도 휴면을 취한 후, 치료를 받아야 해.

얼마나 걸리는데?

아마 몇 년 정도? 네가 다 클 때쯤이면... 지금 몇 살이니?

몇 달만 있으면 8살이야.

그럼 8년... 아니, 8년 반 정도? 네가 16살이 될 때쯤이면 깨어나실 거야.

……

기다릴 수 있어.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던 반즈가 페로의 상처를 압박하던 손을 놓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흘러나올 순환액도 없었다.

16살.

페로가 개조를 받을 때는 그보다도 어렸어.

왜 그걸 이제 안 거지.

"폭발"도 해봤고, 소란도 충분히 피워봤잖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소용없으니, 이제 끝내자. 난 이번 달에 개조를 받을 거야.

왜? 그냥 지상으로 가는 것뿐인데, 굳이 개조까지 받을 필요는 없잖아. 더구나 급하지도 않은...

아니! 급해!

?

빠를수록 좋아, 난 이제 못 기다리겠다고.

……

결국 16살이 되지 못했어.

페로는 거짓말이 밝혀지는 날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것만이 희망을 품고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던 것 같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션은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절망에 빠져있었고, 곧이어 의식의 바다 편차 경고음이 울렸다. 그러자 주변의 구조체들이 조심스럽게 션을 옮겼다.

반즈는 션이 방을 떠나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땀과 순환액으로 젖은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기도라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가 나에게 거짓말이라도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