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즈와의 만남 이후, 멜비는 구조체 정비과 사무실 문을 열고, 케이론의 책상 위에 자료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연구소에 대해 알고 있나요?
황금시대 말기에 다른 상업 그룹이 투자해서 지은 연구소예요. 10년 전까지도 누군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결국 퍼니싱을 막아내지 못해서 파괴됐다더군요.
이게 당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거였나요?
네,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구소죠. 문제는 제가 이걸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연구소의 존재를 알고 계셨는지 먼저 대답해 주세요.
케이론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조수였을 뿐이에요.
당신이 과거에 어떤 위치에 있었든,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죠. 당신도 오랫동안 의식 회수에 매달렸던 거 아닌가요?
……
당신은 분명 그 메모리를 제출하기 전에 내용을 전부 봤을 텐데요. 정말 이 장소를 본 적 없나요?
처음 보는 곳이에요.
알겠어요.
멜비가 종이 서류를 쓰레기통에 던진 뒤 불을 붙였다.
뭐 하는 거죠??
가장 원초적이면서 깔끔하게 기밀을 유지하는 거죠. 당신도 이렇게 해오지 않았나요?
……
전 당신을 비꼬려고 온 게 아니에요. 공중 정원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데이터와 네트워크로 뭔가를 조사하려 하면 바로 발각되니, 이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네요.
예전보다 많이 과격해지셨네요.
그때는 제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죠.
멜비는 점점 더 거세지는 불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황금시대 말기부터 그곳은 당신들이 있던 젤레노그라드 연구실과 협력 관계였어요.
하지만 퍼니싱이 폭발한 직후, 젤레노그라드 연구실은 그곳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폐기하고, 공중 정원의 의식 회수 연구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죠.
오랜 침묵 끝에 케이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제가 폐기한 자료는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나 보네요.
그 실험실에서 빼돌린 실험의 "유산"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당신이 지른 불로는 더러운 비밀을 모두 태워버리지 못했어요. 표면의 흔적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 뿌리는 더 깊숙이 퍼져나갔으니까요.
정말 가증스럽네요.
이미 인류애가 사라진 지 오래돼서, 이제는 그런 비밀에 관심도 없어요.
저는 지상의 의료 자원봉사자팀에 다시 지원했어요.
그곳은 위험해요.
이제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반즈의 문제를 설명해 줄 만한 뭔가를 찾을 수도 있겠죠.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전에 봤을 때는 반항적이긴 해도 활기차 보이던데요.
멜비는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예요.
나중에 반즈를 만나게 되더라도, 제가 지상에 간 진짜 이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겨우 설득해서 공중 정원에 머물게 했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네요.
멜비가 쓰레기통을 보니 재만 남아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케이론.
저는 아직도 장난감 총이 저와 반즈를 겨누고 있는 것만 같아요. 만약 반즈에게서 어떤 "희망" 혹은 "우려"를 찾는 순간, 그들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길 거예요.
멜비는 그 온화했던 의사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뭔가를 알고 있을 거예요.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겠죠. 위험한 길이란 걸 알지만, 전 이미 결심했어요.
오랜 세월 진실을 찾아 헤맨 결과는 이 작은 실마리뿐이네요. 그 오랫동안 반즈에게 진실을 숨기고, 결국 반즈마저 저를 미워하게 됐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정말로 뭔가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게다가 제가 지상에서 죽으면, 반즈 주변에 남아있는 과거 프로젝트의 마지막 흔적도 사라지는 셈이 되겠네요.
한편, 멜비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반즈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페로와 다른 친구들이 성적 재검사 때문에 조용할 틈이 없었을 때도, 반즈는 혼자서만 다녔다. 매일 일어나면 사라져 버려서 무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슈트롤 쪽에서도 소식이 없자, 결국 참지 못한 페로는 하품하며 기숙사 방에서 나오던 반즈를 붙잡았다.
야, 너 요즘 왜 그래? 멜비 이모랑 싸운 거야? 왜 그렇게 하루 종일 우울해 있냐고!
……
그냥 이대로 흘러가면 되는 거잖아. 그 어린 나이에 의대에 갈 수 있다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나도 놀고만 있는 건 아니라고. 그냥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너는 어때?
페로는 반즈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반즈는 매우 진지해 보였다.
"우리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한 건" 게슈탈트가 아니었다고 슈트롤이 말했잖아.
기계, 인공지능, 알고리즘이랑은 전혀 상관없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사람들이 한 짓이고, 그들은 나중에 육성 센터를 나쁜 목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그때 슈트롤이 우리를 막아서 그들의 뜻대로 되진 않았지.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우리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희생양이 됐어.
……
그들에게는 이미 끝난 일일 뿐이고, 지금 우리가 조급해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다시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이끌어줄 사람도,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래서? 너도 나보고 이런 결말을 받아들이라는 거야?
아니. 방금도 말했잖아. 난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반즈가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의무실 창고 권한 카드야.
"좋은 걸" 창고에 숨겨뒀어. 당분간은 아무도 발견 못 할 거야.
아마 난 의대에 가게 되겠지. 모든 사람이 "날 위해서"라거나 자기들 목적을 위해서 내 앞길을 정해놓았어.
내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
그럼...
슈트롤이 당분간 "말썽"부리지 말라고 했지만, 대중이 우리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하려면, 결국 어떤 소리를 내야 할 거야.
페로의 눈이 서서히 반짝였다.
맞아. 네 말이 맞아! 그놈들이 우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게 둘 순 없지!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우선 내가 다른 애들도 불러올게.
게슈탈트를 폭파시킬 거야.
좋아, 문제 없...
?
슈트롤은 구조체 정비과의 작업대 옆에 앉아, 션의 기체를 바쁘게 살피는 의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정비가 마지막이니, 이제 곧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페로를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이는 잘 지내나요? 의대 진학은 문제없겠죠?
아마 문제없을 거야.
"아마"라뇨? 제게 뭘 숨기고 계신 건가요?
슈트롤은 멍하니 자신의 단말기 스크린을 조작했다.
정보부에서 수상한 예고 메시지를 발견했어. 지금 조사 중이니,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그동안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줄게.
예고 메시지라뇨?
오늘 밤 누군가가 게슈탈트를 파괴하겠다고 하네.
?
네? 장난 전화 같은 거 아니에요?
나도 확실한 건 없어. 누군가의 멍청한 장난일 수도 있지만, 게슈탈트와 관련된 문제다 보니, 나랑 다른 구조체 둘을 배치해서 지켜보라고 했어. 이 사건이 마무리되면, 의회에서도 게슈탈트 보안 대책을 새로 논의하게 될 것 같아.
슈트롤은 지쳤다는 듯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착각이었으면 좋겠네. 세상이 점점 더 미쳐가는 것 같아.
게슈탈트
22:00
그걸 안으로 옮겨.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면 위험하니까 조심해.
뭐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해.
나탈리는 페로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도둑"들은 두 명씩 조를 이뤄 상자를 품에 안고서, 뒷문을 통해 슬그머니 목표 지점으로 들어갔다.
여긴 분명 감시기가 엄청 많을 텐데.
그건 신경 쓰지 마. 오히려 다 찍히는 게 좋지 않겠어?
응, 이제 우리가 직접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하, 드디어 터뜨려버리는구나. 이제 그 지긋지긋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안 봐도 되겠네. 쟤는 매년 똑같은 말만 하잖아!
그, 그래도 조심해 얘들아.
뭘 조심해, 어차피 우리는 잡힐 거고,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잖아.
목표 지점에 도착했어.
반즈가 조명기로 앞을 비추자, 분위기를 압도하는 게슈탈트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그들은 지혜의 결집체인 이 거대한 창조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게슈탈트를 둘러서 폭약을 설치해. 뒤쪽에 있는 데이터 케이블 쪽에는 상자를 더 많이 놔둬.
아이들이 안전선을 넘어 게슈탈트 아래에 폭약을 설치했다.
반즈는 제자리에 서서 게슈탈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폭약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네.
거대한 게슈탈트 앞에서 폭약 상자들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이 정도 폭약으로는 게슈탈트의 외벽조차 파괴하기 힘들어 보였고, 폭발력이 기단부까지 미칠지도 의문이었다.
게슈탈트와 비교하면, 반즈 일행은 바닥을 기어다니는 "쥐"처럼 보였다.
거대한 컴퓨터의 차가운 금속 외벽 안에는 인간의 기술이 도달한 최고의 연산 체계가 있었다. 완벽한 "객관성"을 지닌 그것의 계산 결과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우리의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하려 한다면, 게슈탈트를 이용해 이곳을 보게 할 거야.
반즈는 마음을 굳혔다.
다 설치했으면 뒤로 물러나.
반즈가 폭발물을 한 번에 터뜨릴 수 있는 제어기를 꺼냈다.
게슈탈트
22:18
후.
공중 정원 최상층에는 초병들 외에도 슈트롤이 투입되어 수송 리프트를 감시하고 있었다. 적막한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직 슈트롤의 마스크에서 나는 거친 숨소리와 체내 순환 시스템의 기계음뿐이었다.
슈트롤의 뒤에는 게슈탈트가 있었다. 오늘 밤 그의 임무는 수송 리프트를 감시하며, 수상한 인물이 출입하지 않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예고에서 말한 10시 20분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수상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누가 게슈탈트를 폭파하겠어. 총의회당이 바로 뒤에 있는 데다가, 최고 등급의 보안 시스템까지 있다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도 이층에 위협이 되지는 못해.
역시 장난이었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조금 긴장한 슈트롤은 전투 단말기를 확인하며, 마음속으로 시간을 셌다.
2분 남았군.
게슈탈트
22:19
게슈탈트의 도움으로 지금 공중 정원의 교육 체계는 꽤 공정해.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젊은이들 한명 한명에게 가장 적합한 진로를 제시한다."라고들 하지.
하지만 많은 "인위적인 개입"이 반영되지 않았어. 우리에게 관념을 주입하려는 자원봉사자, 무작정 부모의 길을 따르라고 추천하는 전문가, 심지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사람까지. 많은 요소가 있었잖아.
이런 공정한 제도 아래서도, 후회하게 될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최대 피해자"는 아마도 우리 같은 "기숙사생"일 거야.
육성 센터는 공중 정원의 극히 일부일 뿐이야. 고아들이 많을 리가 없어.
그들은 작은 모래알 같은 존재였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다른 학생들과 달라요. 여러분의 부모님 대부분은 최전선에서 목숨을 바치셨고, 그분들의 전우와 공중 정원이 이곳에 맡긴 거예요. 보살핌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는지 반드시 기억하세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조금만 더 보초를 섰었어도, 사상자가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이의 어머니도 무사했겠죠.
아빠도 여기 들어왔다가 다시는 못 봤는데, 이번엔 엄마까지 데려가려는 거야? 당장 비켜!
우리 부모님은 피해자야. 나는 구조체 정비과에서 휴면하게 되는 미래를 절대로 맞이하지 않을 거야.
"구조체가 되어 가족과 친구를 위해 싸울 거야".
그건 선전물의 문구잖아. 너도 가족과 친구를 위한 거로 생각해?
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지 않는 거지?
너 역시 내 속죄의 수단일 뿐이야. 난 네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이렇게 강압적인 방식으로 널 지켜왔지.
그들은 자신의 길을 직접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거나, 뻔한 뉴스거리로 전락하거나, 이용당했다가 버려질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어떤 이들의 눈에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어린아이들일 뿐이었다.
반즈, 버튼을 눌러.
다른 방법도 없으니, 우리의 모든 "무모함"을 걸고 한판 승부를 해 보자고.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분풀이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더욱 파격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소년 소녀들의 눈길 속에서 반즈가 폭발 버튼을 들어 올렸다.
10, 9, 8, 7...
아이들이 폭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게슈탈트
22:19
공중 정원 최상층의 어른들도 미간을 찌푸린 채 초를 세고 있었다.
슈트롤이 자리에서 일어나, 게슈탈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평온무사"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어 보였다.
6, 5, 4...
3, 2, 1.
22:20
반즈가 힘껏 붉은 버튼을 눌렀다.
"폭약"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눈부신 빛줄기를 쏘아 올렸고, "게슈탈트"의 외벽에 부딪히며 불꽃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반즈 일행이 눈을 찡그렸다.
폭죽이 터지며 "게슈탈트" 전시관을 환하게 비추었다. 형형색색의 불꽃들은 "게슈탈트" 전시품 외벽 위에서 춤을 추다, 전시관 곳곳으로 흩어져 내렸다.
전시관에 경보가 울리고, 경비 로봇들이 사방에서 달려왔다.
진짜 눌러버렸어!!
어때! "황금시대의 폭발 장치"에 폭약을 엄청 많이 연결했다고!
귀를 막은 채 서로를 향해 소리치던 반즈 일행은 눈빛이 반짝였다.
실내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으려나.
어떡해! 경비 로봇들이 여기로 오고 있어!
반즈, 이제 어떡해?
지금.
모두가 귀를 막은 채, 폭죽을 보고 있는 반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반즈는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망가!
아이들이 정신없이 달렸다. 게슈탈트 모형의 안전선 넘어, 폭죽으로 환해진 복도를 지나, 결국 출구로 뛰쳐나왔다.
반즈는 선두에서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처음 의료 보조기의 도움으로 걸음을 뗐을 때와 같은 격렬한 고동이었다.
빨리 뛰어! 언론사가 오기도 전에 저 로봇들한테 잡히면 안 되잖아! 헉헉, 반즈가 이렇게 잘 뛰는 줄 몰랐네. 왜 아무도 파오스를 추천하지 않은 거야.
쥐 떼처럼 흩어져 "도망치는" 아이들은 각자에게 가까운 수송 리프트를 향해 달렸다.
수송 리프트가 때마침 멈췄고, 헐떡이며 지켜보던 반즈의 눈앞에서 구조체들이 뛰쳐나왔다.
!
전시관에서 폭죽을 터트린 게 이 아이들이야?!
어처구니없네. 우선 경비 로봇부터 멈추고, 아이들을 어서 데려가! 그리고 누가 보호자한테 연락 좀 해봐.
제복을 보니 육성 센터의 아이들인 것 같은데?
슈트롤과 또 다른 구조체가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반즈는 그가 션이라는 걸 곳바로 알아차렸다.
몸에는 정비 케이블이 달려있던 션은 정비과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것 같았다.
페로는 어디 있지?
슈트롤이 곧장 반즈의 앞으로 와, 아직은 너무 마른 그의 어깨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문제에 휩쓸리지 말라고 했잖아.
아무도 우리를 부추기지 않았어. 우리가 스스로 한 거야.
……
네가 그랬잖아. 우리가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그래서 이렇게라도 해본 거야. 페로와 다른 아이들이 원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야. 그저 이 정도뿐이라고.
……
옆에서 페로가 발버둥 치기 시작했고, 션은 다소 지친 듯했다.
왜 처벌받아야 하는 건데? 누가 성적을 조작했다고! 우리는 그저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거고, 이게 우리가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야!
당신들과 육성 센터 사람들이 허구한 날 확인만 한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기나 해? 벌써 며칠이 지난 거냐고!
이러다간 나는 지상으로 가게 될 거야. 다른 학교들도 이제 곧 개학이고, 그때가 되면 너무 늦는다고!
다른 아이들도 같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너희들...
슈트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육성 센터 담당자와 함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주려 했다고.
이제 그들에게 말해 주세요.
……
아무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 이 일을 아는 어른들은 모두 발 벗고 나섰고, 육성 센터 담당자도 너희가 제기한 의혹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하지만 페로 그리고 너희들은...
슈트롤이 파일 하나를 꺼내며, 성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던 다른 아이들을 가리켰다.
성적 재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너희들은 "정말로" 기준 미달이야.
새로운 결과는 원래 성적보다도 낮아.
……
페로가 발버둥을 멈췄다.
뭐?
우리가 너희를 믿지 않는 게 아니야. 계속 이의를 제기해도 좋고,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증명하려 해도 좋아. 그리고 지금 지상으로 간다고 해도 나중에 공중 정원으로 돌아올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페로.
반즈는 아직도 슈트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모든 일을 덮은 거 아니야? 그럼, 침입 단말기는 또 어떻게 설명할 건데?
자신들이 꾸민 장난이라고 통학생 몇 명이 육성 센터 담당자에게 자백했어. 그들은 처벌받게 될 거야.
……
모두의 얼굴에 난감함과 피로가 가득했다. 마치 수년 전,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리던 반즈와 페로를 보던 그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
나는...
전시관에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들의 항의는 폭죽처럼 요란하게 터져 올랐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찰나의 반짝임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전시관 소동으로 아이들은 꾸중을 단단히 들었지만, 다행히도 앞으로의 학업 생활에는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반즈는 며칠 동안 불안에 떨었다. 멜비가 곧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육성 센터에 나타날 것만 같았기에 그는 메시지조차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감금 처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멜비의 소식은 끝까지 없었다
반즈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동안, 페로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갑자기 구조체 개조를 받겠다고 했다.
뭐라고?
"폭발"도 해봤고, 소란도 충분히 피워봤잖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소용없으니, 이제 끝내자. 난 이번 달에 개조를 받을 거야.
왜? 그냥 지상으로 가는 것뿐인데, 굳이 개조까지 받을 필요는 없잖아. 더구나 급하지도 않은...
아니! 급해!
빠를수록 좋아, 난 이제 못 기다리겠다고.
페로의 차가운 시선이 반즈를 향했다.
넌 절대 이해 못 할 거야.
반즈는 페로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그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당신들이 멜비 의사 선생님의 가족인가요?
한 의사가 슈트롤과 반즈를 이상하다는 듯 훑어보았다.
내가 아니라 이 아이야. 난 그저 데려온 것뿐이라고.
슈트롤이 지목한 소년은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멜비 이모가 언제 지상으로 내려간 거야?!
지상 의료 자원봉사자로 지원하실 때, 네게 알려주지 않으셨니?
반즈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얼어붙었다.
나는 멜비 이모가 예전에 오랫동안 돌봐줬던 환자야. 그리고 이모는 다른 가족이 없어.
잠시만 기다려볼래? 네게 줄 게 있어.
당직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 아직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반즈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이번 의료 자원봉사자는 꽤 운이 좋았어. 나이가 제일 많으신 한 분만 희생되고, 거의 다 돌아왔잖아.
소아과 부주임님? 우리 애도 예전에 그분께 진료받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지상같이 위험한 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 돌아온 유품은 작은 꾸러미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아.
……
당직 의사가 멜비의 유품을 반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는 멜비가 어떤 물건들을 남겼을지 상상해 보았었다.
반즈가 받은 꾸러미 안에는 파란색 도시락 하나뿐이었다.
육성 센터로 돌아가는 동안 슈트롤은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말들은 반즈의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반즈의 머릿속은 멜비에게 보내려 했던 "미완성" 편지로 가득했다.
반즈는 그 편지에서 이런 거창한 말을 적었었다. "오랫동안 나를 돌봐줘서 정말 고마워. 언젠가는 내가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어".
반즈는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했다.
반즈가 그 자리에 멈춰 서자, 슈트롤도 발걸음을 멈췄다.
멜비 이모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
페로 일도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우리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
모두가 너무 멀리 가버려서 쫓아갈 수가 없어.
슈트롤이 다시 한번 반즈의 곱슬머리를 헝클었다.
……
엄마를 찾으려던 희망은 접었어. 하지만 멜비 이모와 페로만큼은 지키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어.
그럼, 넌 이제 뭘 가장 하고 싶은데?
모르겠어.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이 세상에 네가 할 수 없는 일은 많아. 그렇다고 평생 이렇게 허송세월 보낼 순 없잖아? 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내가 위로를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넌 지금 타조 같아.
"타조"가 고개를 더 푹 숙였다.
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눈앞의 일부터 잘 해봐.
…………
네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해. 의대에 진학해서 의술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거지. 평생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하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환자들을 돌봐야 하니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날, 어떤 일을 계기로 새로운 목표가 뭔지 알게 될 거야.
새로운 목표.
인생이란 여러 단계로 이어진 여정이야. 각각의 갈림길에 도달하면, 우리는 어느새 그때 해야 할 선택을 깨닫게 되지.
슈트롤이 반즈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 우선 의사가 되는 거야. 멜비보다 더 훌륭한 의사가 되는 걸 목표로 해보라고.
보름 뒤, 페로의 구조체 개조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새롭게" 태어난 구조체가 전장으로 향하는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나탈리는 반즈와 함께 의대에 입학했고, 프랭크는 공대로 갔다.
세 달 후, 페로는 처음으로 육성 센터의 옛 친구들에게 사진들을 첨부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는 이름 모를 새가 꽃이 만발한 언덕을 날아다니는 사진이었다.
"이런 새가 실제로 있었다니. 난 구조체들이 반즈를 띠워주려고 인조 깃털을 가져다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진은 찍기 꽤 힘들었어. 주변이 전부 붕괴 직전의 폐허이고, 침식체들이 득실거리는 지역뿐이거든".
"나탈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봐 줘. 하지만 그 애한테는 절대 말하지는 마".
그 후로 페로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갔지만, 반즈만큼은 시간이 한없이 천천히 흘렀다.
매일 밤, 반즈는 자습 단말기를 끄고 난 뒤에도 의사 자격시험과 생명의 별 실습생 모집일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자신을 떠난 사람들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반즈는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가고 싶었다. 슈트롤이 말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음 갈림길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반즈는 자신에게 다른 생각이 들 틈을 주지 않았다. 매일 밤 탈진할 때까지 공부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