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기가 안정적으로 비행했다.
기내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피로에 지쳐 눈을 감고 쉬고 있었지만, 멜비는 대각선 쪽에 앉은 여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구룡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은백색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았고, 품에는 작은 포대기를 안고 있었다.
멜비에게는 퍼니싱 재앙으로 실종된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기가 이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자장자장.
은백색 생머리의 여자는 부드럽게 포대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가볍게 토닥이기 시작했는데, 그 동작이 어딘가 어색했다.
(아이를 처음 돌보나?)
멜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안녕하세요.
……
대각선 쪽에 앉은 여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말없이 멜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좀 쉬고 싶으시면 제가 잠깐 아기를 봐 드릴 까요? 저희 집에도 동생들이 있거든요.
전 멜비라고 해요. 수송기 탑승 전부터 계속 안고 계시던데...
감사합니다만, 괜찮... 윽!
갑자기 수송기가 크게 흔들리면서 탑승객들이 이리저리 휘청거렸고, 아이를 꽉 붙잡고 있던 여자는 안전벨트가 몸을 당겨주었다.
품속의 포대기가 흐트러지면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마도 가족과 함께 폭발 사고를 겪은 듯했다. 몸에는 자갈 바닥에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고, 상처 없는 피부도 열이 심하게 올라, 건강하지 못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건?!
멜비의 목소리에 수송기 안의 시선이 그녀들을 향했다.
은백색 머리의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천을 다시 덮었다.
상처는 수송기에 타기 전에 다 처치했어요. 이 아이는 중병에 걸린 것뿐이에요.
아직 숨을 쉬고 있어요, 그 누구의 자격을 차지하지도 않았고... 아이 아버지의 자격으로 비행기에 탑승한 겁니다.
여자는 기진맥진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 아이는 꼭 공중 정원에 가야만 해요.
제발 아이를 구할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
멜비는 수송기에서 만났던 그 어머니를 벌써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안녕하세요. 저는 코케 생물 연구소의 멜비예요.
멜비가 새 명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스태프들이 신원을 확인하게 했다.
다른 창백한 손이 뻗어와, 명찰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구룡 부희 연구소, 반서.
당신은? 저번에 수송기에서 만났었죠? 당신도 구조체 관련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나요?
반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구룡 사람인 거죠? 구룡에 구조체 관련 연구 프로젝트가 많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를 연구하고 있나요?
인간의 뇌 그리고 구조체 의식의 바다 연결 분야예요.
멜비는 반서의 얼굴에서 익숙한 피곤함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으려 했지만, 그날 본 아기가 자꾸 떠올랐다.
아기를 돌봐줄 분을 구했나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반서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이는 생명의 별에 있고,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요.
너무 어려서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반서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작업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퍼니싱이 폭발한 이후, 인간의 전선은 계속해서 밀려났다. 그들의 육체는 퍼니싱의 침식을 막아낼 수 없었으며, 전장에 투입할 강력한 전투력이 절실했다.
과학자들은 희망의 등불을 들어 올리며, 황금시대 말기에 제안된 연구 주제인 "구조체" 대해 연구하기로 했다.
큰 진전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등불처럼 어두운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캐논 박사는 그 방향을 따라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앞장서서 학생들을 이끌고 달에 올랐고, 달 기지에서 구조체의 코어 "역원 장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 외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식의 바다 관련 기술이 있었으며, 이는 연구원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분야였다.
그 해, 전 세계에서 모인 연구원들은 가장 안전한 에덴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과학 이사회는 지상에 있는 연구소들과 협력하여, 구조체와 의식의 바다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를 착수했다.
연구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의식, 의식 데이터 전환, 구조체 의식의 바다, 의식 복제 그리고 의식 회수에 이르기까지, 선구자들은 동굴 속에 "석각"을 새겨 넣었다.
이 "석각"들은 결국 역사가 되어, 초기 구조체 기술의 개발 과정을 후대에게 넘겨주었다.
전장에서 구조체 자원의 손실이 막대합니다. 이 데이터를 보면, 일반 구조체가 실전 투입된 후, 한 달 동안의 평균 파손율이 43%에 달한다고 합니다.
구조체가 일반 인간 병사보다 전투력이 더 뛰어나지만, 이렇게 파손율이 높으면 우리가 투자한 비용이 낭비될 뿐입니다. 또한 퍼니싱 침식과 의식의 바다 편차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적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원거리 링크 시스템도 시도해 봤지만, 의식의 바다 안정 효과가 극히 제한적이었고, 연결된 인원 중 일부는 심각한 의식 손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퍼니싱에 대한 역원 장치의 저항력 강화, 기체가 파손된 구조체의 의식 데이터 보존, 구조체 연결 제어의 안전성과 효율성까지. 이 모든 것이 지상 전투에서 시급히 필요로 하는 기술 개선 사항입니다.
의원이 다른 한 구석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과학 이사회 대표가 앉아 있었다.
역원 장치는 둘째치고, 구조체 의식의 바다 분야만 해도 과학 이사회가 오랜 시간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과학 이사회는 현재 연구 진행 상황과 단계별 성과를 우리에게 공개해 주십쇼.
의식 회수만 예로 들어봐도, 제가 알기로 당장 가능한 것은 의식의 바다 분리가 최대치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마저도 범용성이 없고, "회수"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프로젝트들은 어떻습니까?
반서, 우리가 지금 "난관"에 봉착한 거 맞죠?
적절한 실험체가 없어서죠. 지금 수집한 데이터만으로는 뭔가를 더 얻을 수 없을 거예요.
반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에 3팀에서 "특수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상태를 살펴봤는데, 몇 가지 발견한 게 있대요.
"특수 구조체"라고요?
반서가 한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아마 처음 들어볼 거예요. "특수 구조체"는 어렸을 때 개조된 구조체를 뜻하는 거죠. 지난번 교류회에서 실험 세부 사항과 데이터를 가져왔는데, 한번 볼래요?
네?
그들 대부분은 개조될 당시에 뇌 발달이 미성숙한 상태였어요.
3팀에서 링크 시스템으로 이들과 연결 실험을 진행했는데,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인위적으로 동기화된 데이터에 대한 "거부 반응"이 더 적고, 연결도 더 안정적이더라고요.
그들의 의식의 바다는 새로운 연결 방식이나, 편차의 치료 같은 여러 연구 방향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관련 가설도 나왔고요.
그들이 현재로선 가장 우수한 실험체예요.
멜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안 돼요. 당신 설마...
반서가 데이터 자료를 닫았다.
뭘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일부러 실험체를 만들어낼 정도까진 아니에요.
현재 프로젝트팀이 접근할 수 있는 "특수 구조체"들은 전부 공중 정원이 지상에서 수용한 아동 구조체들이에요. 대부분 정서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고요.
학습을 통해 보충한다 해도, 대부분은 의식의 바다 편차를 막기 위해, 평생 그런 몸으로 살아야 해요. 아마 다 큰 후에도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 거예요.
과학 이사회는 이런 비인도적 개조를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이미 관련된 모든 실험 방향도 기각됐고요.
작은 해프닝일 뿐이에요. 다른 실험 방식을 고민해 봐야겠네요.
우리는 그날을 보지 못할 거예요. 기적이 일어나거나, 실험에 진전이 생기지 않는 한, 팀 전체와 지상의 관련 실험실이 모두 해체될 거예요. 이미 지난 회의에서 우리의 예산을 전액 삭감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요.
정말 해체된다면, 어느 팀으로 갈 생각이에요?
어디든 상관없어요. 어디로 가든 의식의 바다 연구만 계속할 수 있으면 돼요.
의식의 바다 실험에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반즈를 위해서예요.
반서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반즈"요? 아들을 말하는 건가요?
멜비는 반서를 알게 된 이후, 두 번째로 그녀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며, 이번에 처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멜비는 한 가지 생각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혹시 그 실험을 통해서 아이를 깨워보려는 건가요?
……
하지만 그게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와 무슨 관련이 있죠? 인간 의학 쪽 사람들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반서가 일어나 뒤편의 조작 콘솔로 걸어갔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죠. 이제 할 일을 해야겠어요.
정식으로 해체되기 전에 각 지상 연구소에서 보내온 실험 데이터라도 정리해 두죠.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미래의 누군가에겐 참고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반서와 잡담을 나눈 후로 몇 달이 더 지났다.
과학 연구는 순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지막 몇 달 동안 기대했던 "기적 같은 돌파구"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실험에 진전이 없다는 사실만 확실해질 뿐이었다
"실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팀이 곧 해체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스스로 그곳을 떠나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지상도 상황이 심각했다. 지상에 있는 연구소들은 대부분 자구책을 마련했음도, 결국 퍼니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공중 정원과 연락을 유지할 수 있는 지상 연구소는 점차 줄어들었다.
점점 줄어드는 회신 데이터만 봐도, 그 연구소들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어떤 연구소가 갑자기 현재까지의 데이터 자료를 업로드하면, 곧이어 멜비에게 그 연구소의 전원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다.
우울한 기운이 남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반서예요. 이건 오늘의 마지막 연락이며, 곧 지상에 있는 각 연구소의 데이터 자료를 회수할게요.
반서가 몇 개 남지 않은 지상 연구소와 연결했다. 이제는 인력이 부족해서, 각 연구소와의 소통도 그녀가 직접 해야 했다.
통신 채널에서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만 들려왔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묵묵히 마지막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멜비가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와, 반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반서, 북극 항로 연합 변두리에 있는 연구소와 연락이 두절됐어요. 관련 정보를 보냈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
이 좌표에서 침식체의 습격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방금 시도한 몇 차례의 통신이 전부 실패했어요.
군부에서 통지를 안 했을 수도 있어요. 일단 이번 달에 그들이 전송한 모든 실험 데이터를 불러와 보세요.
그들의 연구실 데이터는 제가 수집하고 처리했어요. 최근의 데이터는 계속 좋은 결과를 보여줬거든요. 남은 연구실 중에서 가장 좋았어요.
멜비가 데이터 보고서 몇 개를 꺼내자, 반서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부분에서 잠시 멈추었다.
?
반서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보다가 다시 앞부분의 구체적인 데이터를 확인했다.
그들의 실험체들은 의식의 바다가 모두 안정적이네요. 실험 결과가 엄청 우수해요. 심지어 우리가 새로운 연결 방식을 실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됐어요.
최근에 몇 안 되는 좋은 소식이네요.
그들은 어떻게 실험체를 구한 거죠?
동의서에 서명하고, 자발적으로 온 거겠죠.
……
반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반서가 멜비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이 데이터들은 잘 보관해 주세요. 나중에 쓸 수 있을 거예요.
알겠어요. 전 그들이 안전한 건지 계속 확인해 볼게요.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요. 멜비.
그때, 공중 정원 내부 통신으로 연락이 왔다. 이 통신 채널로는 좋은 소식이 온 적이 없었다.
지상 정찰 인원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북극 항로 연합의 한 연구소가 침식체의 습격을 받아, 내부의 실험체들이 모두 침식되었으며, 현재는 정화를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연구원 또한 모두...
"정화를 완료했다."라는 말에 멜비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내부 자료는 회수할 수 있나요?
전이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어, 정찰 소대가 연구소에서 한 명만 데려왔습니다. 수송기가 방금 착륙했는데. 어? 그가 공항을 떠났다고? 소독은 제대로 한 거야?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당장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 이봐!! 내가 진작부터 공항의 출입 검사에 큰 허점이 있다고 했잖아!
멜비, 통신을 종료해요. 우선은 연구소에서 실험체에 대한 세부 자료를 보낸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볼래요?
실험체요? 아마 있을 텐데, 제가 찾아볼게요. 그런데 실험체는 왜요?
실험실 해체를 면하려고 거짓 데이터를 만든 게 아니라면, 저런 데이터는 특수 구조체에서만 나올 수 있어요.
……
뭐라고요??
반서가 말을 마치자, 멜비와 몇몇 연구원이 반서를 쳐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반서가 옷깃을 정리하고는 나갈 준비를 했다.
정찰 소대가 데려온 그 사람을 만나봐야겠어요.
제가 그 연구원이에요.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 들어왔고, 뒤따라 그의 신분을 승인하려던 스태프가 황급히 뛰어왔다.
남자는 원래 흰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공항에서 안전을 위해 압수하였고, 지금은 너덜너덜한 보온복만 입은 채,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다.
그가 손에 쥔 물건을 내밀었다. 그것은 온전히 보존된 메모리였고, 혈액인지 순환액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검붉은 액체가 묻어있었다.
저는 케이론이라고 해요. 젤레노그라드 연구실의 마지막 생존자죠.
……
케이론의 표정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모습이었다. 반서는 그를 몇 초간 응시한 후, 곧바로 질문했다.
그 실험체들은 어떻게 구한 거죠?
당신들이 허가하지 않았나요?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니까 발을 빼려는 건가요?
그건...
케이론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멜비를 흘깃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죠? 처음 듣는다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이런 일은 언제든지 막을 수 있었잖아요.
케이론이 메모리를 들어 올렸다.
실험은 진전이 없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해체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실험에는 안정적인 의식의 바다 재료가 필요했죠. 그래서 우리는 가장 빠른 해결책을 선택한 거예요.
우리는 당신들이 이전에 제출한 아동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관찰 데이터를 바탕으로, 10세 이하의 아동들을 개조해서, 인간의 의식을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에 적용하려 했어요.
멜비는 믿기 힘든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0세 이하의 아동"이라고요? 아동 구조체는 애초에 잘못된 거였어요. 우리가 실험 관찰을 한 것은 결코 당신들보고 이런 실험체를 만들라는 게 아니었다고요!
우리의 진정한 의도는 도움을 주려고...
당신들의 "진정한 의도"가 우리 손에 칼을 쥐여준 거예요.
……
이 안에는 우리가 자행한 비인도적 실험의 증거가 모두 담겨 있어요. 이건 제가 직접 과학 이사회에 제출할 것이고, 확인이 어려운 세부 사항은 제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설명해 드릴게요.
연구실의 해체는 시간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일을 폭로한 이상, 단순한 해체로는 쉽게 끝나지 않겠죠.
제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성공이 아니라, 제 눈앞에서... 제 두 손으로 만든 도살장이에요.
케이론이 너덜너덜해진 옷을 정리했다. 그 모습은 마지막으로 남은 양심을 지키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영광스럽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겠죠. 그리고 과학 이사회가 이걸 공개한다면, 비난도 감수해야 할 거예요.
4팀 소속의 젤레노그라드 연구실은 이미 파괴됐고, 아이들의 개조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도 모두 사망했어요.
저는 극히 일부에만 참여한 조수일 뿐이고, 당신들 같은 일반 연구원들도 그럭저럭 넘어갈 테지만...
케이론이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반서를 바라보았다.
저는 책임을 질 거예요. 그전에 당신은 이 질문에 잘 대답해야 할 거예요.
말하세요.
젤레노그라드 연구실 근처에서 침식체의 대규모 습격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아요. 설마 침식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이 당신의 연구실 내부는 아니겠죠?
……
당신들이 벌인 일이군요.
하, 제 탓이라는 건가요?
제가 어떤 실험에 가담했는지 깨달은 순간부터, 전 이미 죄인이었어요. 이제 와서 다른 죄명이 더해져도 상관없어요.
케이론은 헝클어진 옷깃을 그대로 두고, 도착한 군인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한 달 후, 반서는 생명의 별 복도 끝에 있는 병실 앞에서 다가오는 멜비와 마주쳤다.
멜비는 안색이 좋지 않았고,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았다.
생명의 별로 전입하려 한다면서요?
네, 하지만 그리 쉽진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을 구해서 그 마음속의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건가요?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요.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죠? 제가 조금만 더 깊이 알았다면, 당신이 가져온 그 데이터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라고요.
케이론이 가져온 영상 자료를 봤어요. 영상 속 그 아이들은 구조체로 개조된 뒤, 연결 실험 중에 세상을 떠났어요.
더 좋은 실험 결과를 위해서 아이들을 강제로 구조체로 개조했다니. 우리가 했던 모든 실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였잖아요.
아이들의 미래를 짓밟아놓았는데, 그게 인간의 존속을 위한 거라고요?
멜비의 말에 반서는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저는 이대로 내려놓을 수 없어요.
우리와 프로젝트팀을 포함해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속죄해야 해요.
……
멜비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만하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근데 이곳은 무슨 일이에요? 단순히 제 근황을 물어보려는 건 아닐 텐데요.
전 공중 정원을 떠나기로 했어요. 지상의 한 연구소에서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하자고 제안이 왔거든요.
그래서 반즈를 멜비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멜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절 생명의 별로 부른 거군요. 저 안에 반즈가 있는 건가요?
반서가 병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서 한번 봐봐요.
멜비가 창문을 통해 인공 햇빛이 비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아...
아이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질병과 외상으로 뜯겨나간 피부와 살점은 자라나 있었고, 온갖 의료기기가 아이의 몸에 꽂혀, 생명 징후를 유지해 주었다.
그 아이는 연약한 생명체였다.
크기도 맞지 않는 호흡기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패치가 붙어 있었고, 이는 멜비에게 익숙한 장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숨을 쉬긴 해요. 하지만 수송기에서 봤다시피, 생명의 별 사람들 말로는 평생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요.
의료 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도 방법이 없다고요?
맞아요. 지금으로서는 어떤 기술로도 이 아이를 구할 수 없어요. 제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이 아이는 결국 몸만 남아 있던 거예요.
저는 이대로 내려버릴 수 없어요.
반서가 멜비와 비슷한 말을 했다.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기도가 통한 건지,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고, 아이에게 시도해 보았어요.
반서가 병상 옆에 설치된 장비를 가리켰다.
익숙하지 않아요?
설마 이 원거리 링크 시스템 같은 것과 저 관 그리고 머리에 붙어있는 패치들까지 전부 당신이 만든 건가요?
맞아요.
정말로 의식의 바다 연구를 통해서 아이를 살리려 한 거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죠? 그를 구조체로 개조할 생각이에요?
아니요. 저 상태로 개조 같은 건 불가능해요.
멜비가 쓸쓸한 표정으로 반서를 바라보았다.
실현하려 했던 게, 이런 형태의 "의식 회수"인가요?
……
반서의 침묵에 멜비는 충격을 받았다.
미쳤어요? 상태가 더 나빠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럴 여유는 없어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요. 멜비, 제가 반즈에게 한 모든 건 모두 최후의 수단이었어요.
무슨 원리인 거죠? 효과는 있나요?
미안하지만,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전부 추측일 뿐이고, 아직 검증이 필요하거든요.
의식 회수 프로젝트팀에는 이제 들어갈 수 없게 돼서, 지상에 있는 연구소의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요.
……
만약 반즈가 깨어난다면, 그건 제가 성공했다는 거겠죠. 계속 잠든 채로 있다면, 저도 돌아오지 않을 거고요.
제발 멜비만이라도 그를 포기하지 말아줘요.
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말하는 거죠?
정말로 돌아올 생각이 없거든요. 저는 이번 일에 제 목숨을 걸었어요. 미안하지만 더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어요.
……
멜비는 문득 그날 수송기에서 반서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직 숨을 쉬고 있어요.
제발 아이를 구할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반서는 절벽 끝에 선 사람처럼, 멜비에게 애원하였다.
멜비도 한때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녀 또한 가족이 퍼니싱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아마 지금의 반서처럼 누군가에게, 또는 운명에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멜비는 수송기에서 그 아이를 받아서 들었을 때, 오랜만에 느낀 그 따스함에 눈물을 흘렸다.
뭘 하면 되는지 알려줘요.
……
그녀가 네게 정확히 뭘 했는지는 나도 몰라. 그저 그녀가 부탁한 대로 장비들을 관리했을 뿐이야. 내가 네 보호자로 가장 적합했던 건, 실험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장비들을 아는 의사가 나밖에 없었거든.
그렇게 그녀가 떠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네가 깨어났어.
그럼 깨어나기 전의 내 기억은...
맞아, 처음부터 끝까지 난 널 속인 적 없어.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야. 그저 그녀가 만들어 준 "꿈"이었던 거라고.
깨어나자마자 또래 아이들처럼 말하고, 상식도 배우는 널 보고 처음엔 충격받았어. 그녀가 정말로 어떤 의식 회수를 성공한 건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심어준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곧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어졌지.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네가 더 잘 알 거고.
반즈의 뇌리에 자신을 겨눴던 그 총이 떠올랐다.
거기다 네가 말했던 그 악몽들은 분명 침식체에 대한 거였어. 그래서 반서가 한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지. 반서는 널 깨우는 동시에 위험도 끌어안게 된 거야.
의식 회수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널 주시하는 것도 모자라, 내 배경을 조사하는 사람까지 생겼어. 결국 내가 반서와 한 팀에 있었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되자 나까지 감시하기 시작했고, 이 모든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지.
그래서 난 결심했어.
멜비는 아직도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즈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 아니야. 가족도 지키지 못했고, 연구 성과도 없었어. 게다가 내 부주의로 무고한 아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어.
심지어 반서의 속마음조차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어. 결국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
그때 나는 너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그저 공중 정원의 다른 아이들처럼 네가 평범하게 살길 바랐거든.
모든 게 꿈이었다고 거짓말하고, 아무 말도 못 하게 한 건, 널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어. 나와 반서를 멀리해야 하더라도, 널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
미안해.
아직 어렸던 그때는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사실 난 의무감으로 생명을 구하는 소아과 의사가 아니었어. 내가 한 모든 일은 속죄였을 뿐이야. 아이들을 살릴 때마다, 내 죄책감이 조금씩 덜어지는 것 같았거든.
너 역시 내 속죄의 수단일 뿐이야. 난 네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이렇게 강압적인 방식으로 널 지켜왔지.
나는 위대하지도 않고, 거창한 이유도 없어.
난 그저 속죄가 필요했던 거야. 반서의 부탁으로 죄책감을 덜어내려 한 것뿐이라고.
멜비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로 다행히 끝이 보이는 것 같아.
?
나는 생명의 별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 의식 회수 프로젝트에는 접근할 수는 없었지만, 들은 바로는 의식 회수는 아마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고, 조만간 널리 보급될 거라고 해.
이제 사람들도 그 프로젝트에 매달리지 않을 거야. "최초의 특별한 의식 회수 성공 케이스 후보자"로서 네가 받았던 집착도 서서히 사라질 거고.
난 널 꾸짖으러 온 게 아니야.
이 몇 년 동안 네가 보낸 57개의 메시지도 다 봤었어. 내가 네 선택의 자유를 뺏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멜비의 첫 마디를 듣자마자 반즈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네게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면 안 될까?
멜비는 할 말이 많은 듯 간절한 눈빛으로 반즈를 바라보았다.
넌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존재야.
반서가 한 모든 일은 오직 네가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어. 이제는 너를 위한 이 기적을 편안하게 받아들여도 돼. 생명의 별에서 깨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건 반서가 너에게 준 두 번째 생명이야.
내 생각도 같아. 난 네가 특별한 무언가를 해내길 바란 게 아니야. 그저 평온한 삶을 사는 걸로 충분해.
이제 너도 어른이 되어가니까,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 이 기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위해 애써서 만든 걸 너도 알지? 부디 소중히 여기고, 위험한 일은 멀리했으면 좋겠어. 알았지?
이모도, 슈트롤도 그렇게 말했어.
육성 센터에 이의신청을 냈다고 들었어. 내가 케이론 교수님께 부탁해서 추천서를 준비했으니까 철회해.
…………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관여하지 마. 네가 걷는 이 길이 옳다는 것, 그리고 이 길은 널 위해 기꺼이 희생한 사람들이 만들어줬다는 것, 그것만 기억하면 돼.
멜비가 익숙한 도시락을 반즈 앞으로 밀었다.
반즈는 뚜껑을 열고, 여러 해 동안 변함없던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남기면 안 돼.
멜비가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반즈는 그녀의 요리 실력에 대한 진실을 숨겨왔다. 반즈가 만난 사람 중에서 멜비만큼 고집 센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반즈는 평소처럼 억지로 삼키려 하지 않으며, 도시락을 도로 밀어냈다.
맛없다면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반즈, 이게 내 마지막 조언이니까 잘 들어.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해야 해.
멜비는 그것이 성장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소년의 반항을 눈감아주었다.
도시락을 집어 든 멜비가 다시 작별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