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똑.
끝없는 어둠 속에서 귓가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해체"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뼈대의 지지가 없어진 살점들은 떨어지기도 전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온몸이 더러움 속에 빠진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깊은숨을 쉬려 시도했지만, 문득 이 새로운 신체는 "호흡"을 할 수 없다는 걸 발견했다. 그렇게 손끝이라도 움직여 보려 하였고, 결국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과 발가락의 "한 마디"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새로운 머리를 들어 올리자 관절 틈새로 붉은빛이 반짝였다.
▃▇█▄▄엄▂▆마?
아이가 고개를 들자, 모든 어른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얀 방호복을 입고 있었고, 틈 하나 없이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잠깐, 아직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마. 퍼니싱 농도가 한계치를 넘려고 해. 아니! 이미 넘었어!
한 기기의 바늘이 안전 구역을 빠르게 넘어서자, 계기판을 지켜보고 있던 남성이 즉시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남자아이는 갑자기 "질식" 상태가 되었다. 공기를 통해 끊임없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던 힘이 다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괴로운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곧이어 아이의 몸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금속 장치들도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새로운 "팔"에 힘을 주었고, 한 어른의 외침과 함께 튼튼해 보이던 구속 장치가 산산이 부서졌다.
응급 방안 실패! 제어할 수 없어!
멈춰! 당장 멈추고, 모두 대피해!
어른들은 남자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듯했고, 일제히 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밖의 사람들도 소리치고 있었다.
문 열지 마! 그 안의 퍼니싱 농도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었어. 저 아이는 제어 불가 상태라고.
속박에서 풀려난 남자아이는 창밖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방 안의 어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실험체를 포기하고, 나머지 인원은 모두 철수해! 이 실험실에 접근하지 마!
▁█▄▆▂윽!
가지▂▄▆▆▇▅▂마...
아악!!
호흡기도 공포에 찬 아이의 비명을 막지 못했다. 반즈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옆 병상의 "스패로우"가 놀라서 움찔했고, 일상적인 회진을 돌던 멜비도 반즈 쪽을 쳐다보았다.
넋이 나간 아이는 병상에서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또 그것들이야. 그건 나인 건가?
윽...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야.
또 "악몽"을 꾼 거니?
멜비는 이미 익숙한 듯,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아이들의 병상 카드에 계속 서명했다.
그런데 서명을 끝내고 뒤돌아보니, 눈물이 글썽한 반즈가 보였다. 이를 본 멜비는 잠시 멈칫했다.
……
멜비가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화려한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반즈의 베개 옆에 놓았다.
악몽을 꾸고도 울지 않았으니까, 소원 카드를 하나 줄게.
반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베개 밑에 모아둔 카드들을 모두 멜비에게 건넸다.
지금 교환할래. 오늘 하루 멜비 이모를 따라다니게 해줘.
안 돼. 일이 너무 많아서 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멜비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게다가 반즈는 "임무"가 있잖아. 잘 쉬고, 재활 치료도 잘 받아야지.
반즈가 계속 말이 없자, 멜비가 반즈에게 권한 카드 한 장을 쥐여줬다.
이렇게 하자, 오늘 VR 재활실에서 게임을 더 하게 해줄게. 그럼 반즈가 제일 좋아하는 <보물 찾기>를 할 수 있겠네? 자, 카드를 줄 테니까, 가서 거기 있는 의사 선생님한테 말씀드려.
싫어.
왜? 상품도 얻을 수 있고, 재활 치료도 되잖아.
재활은 싫어.
반즈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느 게 악몽이고, 어느 게 진짜지?
반즈는 꿈을 꿀 때마다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열심히 받아들이려 했지만, 매번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즈는 자신의 것이 아닌 여러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꿈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반즈는 꿈에 대해 멜비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멜비도 그에 대해 마땅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는 수년간 혼수 상태였던 아이의 지능이 전혀 뒤처지지 않은 이유를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반즈의 모습에 멜비는 조금 더 함께 있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고는 반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즈, 그건 다 잊어버려. 그냥 악몽일 뿐이야. 잠에서 깨면 모두 사라질 거야.
엄마도 꿈이야?
멜비가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반즈, 잘 들어. 넌 그냥 아팠던 거야. 뇌가 환각을 일으켜서 많은 꿈을 만들어냈어. 그 꿈속에 네 엄마도 있었고, 네가 말한 그런 광경들도 있었던 거지.
떠올리려 하지만 않으면, 뇌가 그 기억들을 불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해, 천천히 "정리"해 버릴 거야.
그때, 멜비의 단말기에서 알림음이 울렸고, 그녀가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생겨서 가볼게. 저녁에 다시 올 거야. 다른 의사 선생님들이 오지 않으면 여기서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 알았지?
……
또 하면 안 되는 말을 해서 미안해, 멜비 이모.
멜비 이모 말대로 할게. 다 잊어버리고, 정리해 버릴게.
반즈가 다시 몸을 웅크리는 걸 보고, 멜비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단말기 너머의 재촉에 멜비는 사탕 두 개만 남긴 채 병실을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옆 병상의 "스패로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너한테는 정말 잘해주는구나. 매일 너를 보러 오기도 하고, 간식도 챙겨주잖아.
"스패로우"가 자신의 텅 빈 바짓가랑이를 가리켰다.
나는 이렇게 됐는데도, 집에서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아.
사탕 먹을래? 몇 개 나눠줄게.
"스패로우"는 반즈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과일 맛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잘해주는 게 꼭 좋은 것도 아니야. 어차피 병이 나으면 이곳을 떠나야 할 거잖아. 너도 마찬가지고.
?
여기서 평생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거야? 우리는 병만 나으면 생명의 별의 청소년 육성 센터로 보내진대.
청소년 육성 센터가 뭐야?
엄마가 없는 애들은 다 거기로 보내진다던데.
"스패로우"가 좀 심술이 난 듯이 과일 맛 사탕을 와작하고 부셔 먹었다.
거기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어야 한대. 심지어는 밥도 못 먹게 하고, 잠도 못 자게 하고, 늙은 마녀가 때리기도 한대!
정말이야?
믿든 말든 네 맘대로 해. 아무튼 이곳에 있는 게 더 좋을 거야. 빨리 나으면, 의사 선생님들이 널 그곳으로 보내버릴 거라고.
차라리 오늘 VR 재활을 안 가는 게 어때? 그냥 이대로 호흡기랑 다리 보조기를 차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멜비 이모가 날 이곳에 남게 해주지 않을까?
그럴 것 같아?
멜비 선생님이 네 엄마야? 아니면 너 혼자만 담당하는 의사 선생님이야? 멜비 선생님은 셀 수도 없이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한다고. 조금 전 단말기가 울렸을 때도 그래, 멜비 선생님은 너와 환자 중에 누구를 선택했었지?
……
"스패로우"의 재잘거림에 기분이 상한 반즈가 머리 뒤의 휴대용 호흡기 끈을 꽉 조인 후,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디 가?
엄마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엄마는 내가 찾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분명 찾을 수 있어.
반즈는 멜비의 권한 카드를 손에 꽉 쥐었다. 이 카드로는 VR 재활실 말고도 다른 곳에도 갈 수 있었다.
"에덴"에서 못 찾으면, 지상으로 가서 찾을 거야. 지상에서도 못 찾으면 그냥 안 돌아올래. 어차피 무슨 육성 센터 같은 데는 안 갈 거니까.
멜비가 어떤 방 안에서 작업복을 입은 누군가에게 종이 파일 하나를 건넸다.
반즈의 파일이에요. 구룡에서 태어난 것 같은데, 공중 정원에는 출생 기록이 없고 다른 파일들만 있네요.
어디 보자. 이 아이는 꽤 오랫동안 재활 치료를 받았군요. 돌보시느라 정말 힘드셨겠어요.
괜찮아요.
멜비는 "꽤 오랫동안"이란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반즈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녀가 시간을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금방 문제를 눈치챌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반즈를 위협하는 것은 장난감 권총이 아닐 거였다.
지금까지도 멜비는 쿠로노 히사카와가 총을 꺼냈을 때의 공포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피 그리고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즈!!
!!
이리 와!
멜비는 반즈가 비틀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간호사 스테이션에서도 멜비쪽의 소란을 눈치챈 것 같았다.
반즈는 겁에 질려있었다.
미안해. 내가 말실수했어.
네 잘못 아니야!
대체 뭘 하려는 거죠!
남자는 멜비의 분노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반즈에게 질문을 던졌다.
반즈, 이거 기억나니?
기억 안 나는데. 으읍!
멜비가 반즈의 입을 막자, 쿠로노 히사카와가 다시 한번 눈앞에서 권총을 흔들었다. 사실 그 권총은 장난감이었다.
장난감일 뿐이야.
쿠로노 히사카와가 장난감 총을 건네기도 전에 화가 치밀어오른 멜비가 이를 채갔다.
뭘 기억하길 바라는 거예요? 총을 들이댔던 건 아예 잊었나 보죠?
음, 어쩌면 그런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죠.
쿠로노 히사카와의 시선은 계속해서 반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뭔가 다른 점을 찾아내려는 듯, 반즈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
멜비가 뭔가를 눈치챈 듯 말을 멈췄다.
옆에서 상황을 살피러 온 간호사와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멜비? 무슨 일이에요? 방금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그리고 이분은 누구죠?
괜찮으니, 먼저 반즈를 데려가 주세요. 오늘 밤은 제가 반즈와 함께 당직을 설게요.
쿠로노 히사카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반즈가 간호사와 함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제없는 것 같군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려는 것뿐이에요. 저는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전 이미 그 아이를 의식 회수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반서를 포함해서... 아니, 반서라면 더더욱...
당신이 무엇을 확인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문제없다고 했으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그 아이에겐 자신만의 인생이 있어요. 누구도 그 아이에게 짐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돼요. 그저 공중 정원의 평범한 주민으로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해요.
다시 당신을 보게 되면, 경보를 울릴 거예요.
검사가 끝났어요. 기록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네요. 오늘 바로 육성 센터로 이송할 수 있는데, 다른 수속은 다 마치셨나요?
네, 다 끝냈어요.
좋아요. 그럼 "임시 보호자" 란에 서명해 주세요.
한 달 동안 고생하더니 결국 이날이 오긴 하네요. 공중 정원의 복지 시스템은 정말 까다롭다니까요. 하지만 이해하시죠? 아이들의 권익과 관련된 일이라 엄격하게 다뤄야 하거든요.
네, 알고 있어요.
그나저나, 아이의 어머니와 특별한 관계도 아닌데, 왜 임시보호권을 당신에게 맡긴 거죠?
……
제 동료였어요.
프로젝트 특성상 자료에는 자세히 적혀있지 않을 거예요.
멜비는 종이 파일에 서명했다.
한편, 반즈가 병실에서 나왔다. 멜비가 준 권한 카드를 꽉 쥔 손에는 긴장한 탓에 땀이 흥건했다.
반즈는 "스패로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결국 선택을 내렸다. 그는 더 이상 재활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반즈는 자신이 "재활을 늦출" 기회가 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멜비는 반즈의 재활이 성공하여 정상적인 아이들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반즈는 있지도 않은 길을 찾은 것이었다.
반즈는 병원 복도를 걸어 다니고 있었고, 많은 의사는 그런 반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반즈가 아이 중에서 규칙을 가장 잘 지킨다는 걸 알았기에, 그의 자유로운 행동을 묵인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디서 엄마를 찾아야 할까?", "멜비 이모가 말한 "꿈"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허황한 꿈에 불과할지라도, 반즈는 찾아내고 싶었다.
그 꿈 마저 없으면, 반즈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반즈가 달리기 시작했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는 지난주에야 겨우 뛸 수 있었다.
바람이 반즈의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 많은 "보호자"들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이런 어른들이 보기 싫어진 반즈는 계속 달렸다. 어른들의 목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렇게 반즈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구석에 멈춰 섰다.
블라인드 틈새로 인공 햇빛이 들어왔다. 반즈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갔고, 까치발을 들어 블라인드를 들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반즈는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보았다.
"공항" 근처의 플랫폼에서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것을 옮기고 있었다. 들것 위에는 움직이지 않는 "누군가"가 누워있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거기 앞에, 좀 더 빨리 움직여요!
일부러 늦게 왔다는 거예요?! 수송기에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다고요!
여러 명이 들것을 들고 반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감정이 격해진 구조체는 얼굴을 감싸쥐고 제자리에서 두 바퀴를 돌더니, 주위를 바삐 지나가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반즈가 그들의 과장된 동작을 보던 그때, 구조체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즈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창가에 몸을 숨겼고, 호흡기에서 울리는 자신의 숨소리는 유난히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반즈가 다시 조심스럽게 창밖을 보았다.
플랫폼에는 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고, 바닥에는 혈액이 아닌 처음 보는 액체로 흥건했었다.
반즈가 뒤를 돌아 계단을 바라보았고, 그 계단이 "세상의 또 다른 면"으로 통한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
1분 후, 계단에서 어린아이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온몸의 순환 시스템이 망가졌어.
예비 연결선과 보충할 순환액을 가져올게요! 6호 정비실에 남은 게 있을 거예요!
필요 없어. 이미 늦었어.
……
두 의사가 복도에 서서 생명 징후가 멈춘 구조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았고, 그들은 곧바로 정비기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지상 전장에서 일어난 대규모 전투로, 구조체 정비과의 자원이 부족해졌다. 이는 많은 구조체가 정비실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녀의 동료에게도 전달해 줘. 그리고 12번 정비실이 비었으니 서둘러서 수술을 준비해. 손을 깨끗이 씻는 것도 잊지 마.
그녀의 전우들이 공중 정원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미 연락했대요.
연락만 닿으면 됐어. 멍하니 있지 말고, 계속해.
의사가 새 가운으로 갈아입으려다 다리에 뭔가 부딪혔다.
?
호흡기를 찬 아이가 손이 순환액 범벅인 의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웬 아이가 여기에... 빨리 데리고 나가.
커다란 구조체가 다가와 반즈의 눈을 가렸다.
이 아이도 가족인가? 조금 전 밖에서도 한 명이 우리를 계속 붙잡아뒀는데.
아닐 거예요. 소아과 입원 환자 팔찌를 하고 있어요.
응축액으로 머리가 젖어있는 또 다른 구조체가 다가와, 반즈를 데리고 나가겠다는 몸짓을 했다.
잘못 들어온 것 같아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너는 이곳에 오면 안 돼.
션, 이쪽은 내가 지킬 테니, 입원실 쪽에 미아가 있는지 물어봐. 아직 정비대에 몇 명이 남아 있어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
알겠습니다.
혼란 속에서 불안해하는 구조체가 반즈의 양팔을 잡아, 작은 동물을 들 듯 응급실 밖으로 이끌고 나갔다.
윽, 이거 놔.
반즈는 "스패로우"의 단말기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스크린 속 납치당한 사람들은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고, "이거 놔!"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에 반즈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얌전하게 말했다.
한편, 복도 끝에서는 다른 남자아이가 소리치며 올바른 시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놔! 건들지 말라고!! 이런 **, 당장 내려놓지 못해!
아...
션은 밖에서 들리는 고함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생명 징후가 멈춘 여성 구조체를 바라보며, 반즈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반즈를 데리고 다른 방향으로 가려 했다.
그때, 보라색 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달려와 션의 다리를 붙잡았고, 쉴 틈이 없던 의사들도 그들에게 주의가 끌렸다.
엄마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
이 아이의 어머니는 어디 있지?
조금 전 그 구조체의 가족이야. 부부가 구조체가 되어 입대한 후, 아이를 공중 정원으로 보냈다고 해.
가망이 없어. 저 정도의 중상이면 정비실의 모든 의료 자원을 다 써도 역부족이라고.
제 잘못이에요.
제가 조금만 더 보초를 섰었어도, 사상자가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빠도 여기 들어왔다가 다시는 못 봤는데, 이번엔 엄마까지 데려가려는 거야? 당장 비켜!
새로 온 수련의가 얽혀있는 의료기기의 선들을 지나, 남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응급실의 한쪽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그 수련의를 조용히 지켜보며,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지 귀 기울였다.
네 어머니는 괜찮아. 다만 심한 부상을 입어서 휴면이 필요한 거야.
휴면? 구조체가 휴면을 한다고?
그래, 지금의 의료 기술로는 어머니를 치료할 수 없어. 그래서 어느 정도 휴면을 취한 후, 치료를 받아야 해.
얼마나 걸리는데?
아마 몇 년 정도? 네가 다 클 때쯤이면... 지금 몇 살이니?
수련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몇 달만 있으면 8살이야.
그럼 8년... 아니, 8년 반 정도? 네가 16살이 될 때쯤이면 깨어나실 거야.
……
그 말에 남자아이의 눈빛에서 분노와 슬픔이 사그라들고, 희망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힘겹게 불씨를 키워가는 작은 불꽃 같았다
8년 반이라면 기다릴 수 있어.
그렇지?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볼 수도 있잖아. 의대에 가서 구조체 의사가 되는 건 어때? 그리고 여기 와서 어머니를 깨우는 방법을 연구해 보는 거야.
요즘은 진로 결정도 일찍 하잖아. 내 주변에도 어린 나이에 생명의 별에서 실습하는 젊은 애들도 많아. 아, 나 말고. 나는 나이가 좀 있지.
지금 무슨 말을...
연구하는 것도 좋아! 과학자가 되거나... 아니다, 과학자는 좀 위험하네. 어떤 과학자들은 공부하다 보면 이상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구조체가 되는 건 어때? 안 돼, 구조체도 안 돼. 더 위험하잖아.
수련의의 손은 아직 씻지 못한 채였고, 순환액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만해. 반나절 휴가를 줄 테니 가서 푹 자고 와.
어불성설인 말을 하던 의사와 남자아이는 함께 머나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이는 자든, 속는 자든 상관없이 그 둘은 이 모든 것이 실현될 거라 진심으로 믿는 것 같았다.
다른 의사들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맡은 구조체의 응급 처치에 다시 집중했다.
구조체 정비과 전체에 이상한 평화로움이 감돌았다.
하지만 또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그 모든 것을 깨뜨렸다.
아니야,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
……
돌아가셨다고. 다들 너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
남자아이의 눈빛에서 희망의 불빛이 꺼져갔고,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즈는 그 후 어떻게 소아과로 돌아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반즈는 당시의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남자아이의 울음소리와 어른들의 부산한 움직임 속에서 빠져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찾아 헤매던 멜비와 마주쳤던 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반즈가 달려오는 환자 운반기에 치이지 않게, 멜비가 사람들 사이에서 반즈를 안아 올렸다.
그다음은?
그 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던 멜비가 반즈를 소아과로 데려갔다.
왜 몰래 나간 거니? 널 그렇게 믿었는데, 어떻게 내 권한 카드를...
짜증이 난 멜비가 말을 이어가지도 않고 이마를 탁 쳤다.
아니, 내 잘못이지. 너한테 권한 카드를 주면 안 됐어!
미안해.
반즈는 자신이 또 실수했다는 건 알았지만, 수련의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의사가 거짓말하고, 나중에 의사가 되라고 했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했고, 멜비 이모도 나한테 거짓말하라고 했어. 근데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는 건 나쁜 거 아니야?
……
…………
멜비는 빈방의 창가에 서서, 생명의 별 응급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 응급 상황임을 알리는 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인공 햇빛도 슬슬 약해지고 있었지만, 부상 입은 전사들을 실은 수송기는 계속해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려나.
창밖을 보던 멜비가 몸을 돌리고 쪼그려 앉아, 반즈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아직 삶의 짐을 지기에는 너무 작은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거짓말은 나쁜 거야. 하지만 세상에는 좋고 나쁨으로 나눌 수 없는 일들이 많아. 때로는 거짓말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거라고.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 거야. 반즈는 아직 어리고, 이곳에 온 지도 얼마 안 됐잖아.
반즈는 지금 같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이런 방식으로 내 말을 이해하길 원치 않아.
멜비가 반즈의 곱슬머리를 쓸어올리며,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멜비 이모?
다음 주면 반즈는 육성 센터로 가게 될 거야. 그곳은 새로운 환경이고, 새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될 거야. 너를 돌봐줄 선생님들도 많이 계실 거고.
……
멜비 이모, 내가 잘못했어.
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날 버리지 마. 계속 이대로 이모 옆에 있으면 안 돼?
……
멜비가 팔을 벌려 반즈를 안아주었다.
우리가 반즈를 신경 써주지도 못하고 너무 많은 걸 떠맡겼구나.
내가 이 잘못들을 바로잡을게. 그 잘못들이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살게 해줄 거야. 정상적인 삶 말이야.
공중 정원 청소년 육성 센터의 생활은 편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반즈가 멜비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탓에 멜비 곁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
반즈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울다가 잠들었던 것까지도.
그다음은?
반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일주일 후, 결국 그는 청소년 육성 센터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