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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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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02-21 벗어난 속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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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가 남쪽 3호 거점에 발을 디딘 건, 다음날 정오였다.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 쓰던 책갈피는 배꽃으로 바뀌었다.

나가서 좀 걷겠다고 한 게, 꽃을 따려고 간 거였어?

그런 셈이지.

배나무를 찾았어!?

소식은?

음...

벨라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노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는 3년 전에 질병으로 열차에서 세상을 떠나셨대. 그때 그 혁명도 못 보고 돌아가셨어.

이 일기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신 건데, 다른 유품들과 함께 어머니 친구에게 줬대.

벨라는 얇은 노트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어머니는 혁명에서 승리하면, 모든 것이 좋아져서, 하층 칸에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음식과 화장실을 서로 뺏지 않아도 될 거라고 믿으셨어.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용기를 내어 베테에게 가, 날 찾아올 거라고도 하셨대.

……………

있잖아... 어머니의 소원이 이뤄진 걸까? 아니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걸까?

벨라는 목소리의 울먹임을 억눌렀다.

울지 마. 눈물은 가장 쓸모없는 물건이야, 아무도 구할 수 없어.

좀... 우리 어머니랑 똑같은 말은 하지 마. 그리고 울고 있는 사람은 너잖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년도 울먹이고 있었다.

같은 말이면 어때서? 그렇다는 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치라는 건데.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 이치일 수도 있고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일 수도 있거든.

네가 온종일 봤던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스토리보다는 나아. 일반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가면 기사"같은 만능 영웅이 될 수는 없어.

가면 기사도 만능이 아니거든. 어려움이 있으니까 스토리가 재밌어지는 거라고.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각자 조금 전의 슬픔을 삼켜버렸다.

현실과 스토리는 달라서, 매번 주인공처럼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설 수 없어.

너도 알고는 있네. 네가 좋아하는 그 책에 적힌 구절처럼 "고난은 자신을 단련시킬 뿐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줄 알았어.

어려움은 항상 치명적이야. 다만 어려움이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어.

그건 일방적인 자기 위안이야.

자기 위안을 하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 관대해.

처음 만났을 때, 넌 자주 웃었는데, 지금 네 표정을 봐. 그건 다 자신을 위로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야.

항상 정색하던 사람이 나한테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벨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날 열차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이곳까지 오면서 다른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나?

그건 그들이 말한 이야기고, 네가 한 게 아니잖아. 슈렉이란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니지?

진짜 이름인지 아닌지에 의미가 있나?

당연하지. 이름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니까.

어떤 과거는 문제만 일으킬 뿐이야. 난 어딜 가든 타인에게 나 자신에 대한 설명과 증명을 하고 싶지 않아.

아직도 그걸 신경 쓴다는 건, 네가 아직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거야.

…………

내가 과거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해. 그리고 너도 나한테 털어놓지 않은 일이 많잖아.

넌 물어본 적도 없잖아.

그럼 지금 질문하면 알려줄 거야?

싫어.

그럼 나도 싫어.

…………

파트너로서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그냥 예전처럼 지내도 좋지 않나? 어차피 책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잖아.

대화가 통할 수 있을까? 넌 유감스러운 과거를 넘기는 법을 배워야 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시간이 필요한 거고.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대화가 난국에 빠지자, 얼굴을 찌푸린 벨라는 화제를 바꿨다.

넌 오셀럼호로 돌아갈 계획이니?

돌아가서 뭘 하게?

하긴, 오슬란과 그 사람들이 아직 열차에 있는 한, 돌아갈 수 없겠지. 아니면 나랑 같이 계속 움직이지 않을래?

넌 어디로 갈 생각이야?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새로운 목적지를 생각해 보려 해. 어차피 어딜 가든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야.

네가 인생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축복이 깃든 이름을 지어줄게.

필요 없어.

난 이미 인생의 밑바닥을 봐서 이제 더 나빠질 여지가 없어. 그래서 앞으로 내딛는 모든 걸음은 지금보다 좋을 거야.

적조의 허상

…………

슈렉

하지만 어디까지 떨어져야 진정한 바닥인지 어떻게 알아?

그렇게 큰 재난이나 재앙이 아니었어. 넌 우리와 같은 스캐빈저를 막지 못해서 떠났지.

…………

고마워. 벨라.

진작에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넌 내가 가장 막막할 때, 날 찾아줬고, 그 여정도 내게 큰 도움을 줬어.

넌 가끔 사람을 정말 화나게 해... 물론 우린 피차일반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너와 재회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무사하게 여기 서 있는 거야.

그래서 고마워. 그리고 마지막까지 너에게 솔직하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

"봄은 올 거고, 네가 좋아하는 꽃도 다시 필 거야"라고 말했을 때, 난 문득 너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어.

내 책에 꽂혀있던 그 배꽃잎에 대해서 말이야.

우린 항상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있었지. 그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주로 취미인 책을 화제 삼을 수밖에 없었고.

만약 네가 살아남았다면, 나와 함께 망각자의 교환상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언젠가... 진정한 친구가 됐을지도...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네.

어머니, 레이첼 대장님, 펠드, 세나, 신야, 위란, 에드 할아버지, 힐 아주머니 그리고 열차 칸의 식구들... 모두 다 내 곁을 떠났어.

적조의 허상

넌... 오셀럼호로 돌아갈 계획이니?

허상의 그림자는 벨라가 생전에 했던 말을 계속 무질서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익숙한 목소리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슈렉

돌아갈 필요 없어.

몇 달 전, 망각자의 거점 근처에서 마이크를 만났는데 신야도 그곳을 떠났다고 알려줬어.

마이크가 말해 주기론...

신야 대장님의 몸에 있던 오랜 상처가 후유증을 남겨서, 요 몇 년 동안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됐어. 그런 상태로 지난달에 잠들고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어.

신야 대장님은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내가 아딜레를 떠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대장님은 나한테 네 물건을 돌려주라고 부탁했었어.

신야 대장님이 그러더라, 자기마저 죽으면 열차에는 네 물건을 보관해 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마이크는 익숙한 가방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 안에는 노안이 남긴 물건들이 담겨있었다.

노안이 즐겨 쓰던 단검, 레이첼이 선물한 무기 설계도, 펠드의 노트 그리고 책갈피가 끼워진 반쯤 읽은 만화책이었다.

원래는 사탕 하나를 너에게 주려고 했는데, 오는 길에 잃어버렸어.

사탕이요?

네 11살 생일 때, 선물 받은 사탕을 내 조카딸에게 줬었지?

엄청 오래전 일이잖아요.

마이크에게 오셀럼호의 일을 물어본 뒤에야 알았어. 이제 오슬란은 없다고.

열차 안의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어쩌면 몇 년 후 하층 칸에 네 어머니가 바라던 초등학교도 생길 수도 있어.

신야 대장님은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했어.

고개를 돌린 청년은 생각에 잠긴 채, 옆에 있는 목양견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마이크는 아딜레를 탈퇴하고 새로운 여정을 떠나기로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떠난 이후로 난 독학으로 외과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좋아, 난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과거처럼 사람들 속에 남고 싶었거든.

그래서 난 망각자와 협력해서 교환상이 됐어.

하지만 풀리아 삼림 공원 유적의 그 재난이 덮친 후, 적조가 다시 도시를 뒤덮었고,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지.

적조에 있는 허상의 그림자를 본 노안은 잠시 침묵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한대도, 그들은 항쟁을 포기하지 않았어. 난 그들이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열차에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어.

…………

오셀럼호를 떠난 후에도, 난 여전히 내 선택과 혁명의 결말에 확신이 없었어.

모두가 바라던 미래가 온다고 해도, 그들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난에 맞서 싸우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본 후에야 깨달았어. 그날, 오슬란에게 단말기를 주지 않은 게 옳은 선택이라는걸.

타협은 그들에 대한 배신이며, 타협이야말로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었어.

네가 말한 것처럼... 따뜻한 봄은 분명히 올 거야.

다만...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있었던 건, 누군가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눈과 얼음을 녹였기 때문이겠지.

고개를 든 노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매 순간 재난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이 목숨으로 방어선을 만들었기에 제방이 무너지지 않았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난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할 거야.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맡긴 모든 걸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난 그들과 동일한 선택을 해서 미래로 가는 승차권을 타인에게 양보할 것 같아.

안녕, 벨라. 난 성냥을 가지고 망각자의 거점으로 갈 거야. 사람들이 내가 혈청을 가져다주길 기다리고 있거든.

지인의 목소리를 들어서 기쁘지만, 그래도 적조를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해.

맞아. 기억났어.

045호 보육 구역, 그레이 레이븐 소대 그리고 아직 혼수상태였던 지휘관까지. 난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어.

망각자들을 따라 다시 열차로 돌아왔을 때, 난 확실히 같은 선택을 했다.

그 소년 구조체는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밀라는 기억하고 있었어.

난 후회하지 않아.

이번 생에서 난 많은 생명의 시혜를 받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의 미래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싶다.

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우리의 죽음과 부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밤을 밝히는 화염이 됐다.

반딧불처럼 약한 불빛일지라도, 희망의 도화선을 점화하기는 충분하다.

잠에서 답안을 찾은 청년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모든 기억이 그의 마음속으로 돌아왔다. 몸에 금이 가고, 속박되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지라도, 청년은 더 이상 막막해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