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사의 간섭으로 청년은 다시 한번 괴롭힘과 환생의 틈에 빠졌다.
노안은 기나긴 꿈을 꾸었다. 그 꿈은 과거의 모든 순간을 겪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시간에 비해, 이 꿈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는 거품과 같이 겨우 21년만 지났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피가 떨어지는 소리와 터무니없는 풍경은 잔잔한 물결을 따라 허구의 꿈에 퍼져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 속삭임, 갈망은 쇠사슬이 되어 노안의 영혼을 찢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발버둥 쳤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방황하던 몸은 점차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붉은 바다가 자신을 가져가도록 내맡겼다.
이렇게 기억을 잃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뚝... 뚝.
기억의 조각이 혈흔과 함께 뺨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노안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 힘 때문에, 그들의 졸개가 되지 못한 걸 후회한다면, 그건 희생한 전사들을 배신하는 거고 모독하는 거야!"
후회?
아니야. 난 후회하지 않았어.
열차에서 던져진 이후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노안의 기억에는 아직 빠진 부분이 있었다.
노안, 노안?
일어나.
……?
네가 무사해서 참 다행이야.
펠드?
어디서 또 사고를 저지른 거니? 온몸이 상처잖아!
어머니.
몸은 좀 괜찮아?
몸이요?
노안은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자신이 심한 통증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말했잖아. 내 말을 듣고, 오슬란에게 증거를 넘기라고.
죄송해요.
일이 이렇게 되버렸잖아, 네 어머니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되냐고?
자신의 무능함에 타협할 줄도 알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남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도리를 넌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거니?
하지만 이제 다들 제 곁에 없잖아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죠?
…………
하지, 어머니, 레이첼 대장님, 아주머니...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
어떻게... 해야... 할까?
도와줘.
그럼, 우선 깨어나야 해. 노안.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꿈에선 모두 죽었어...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니. 이것만은 꿈이 아니란다.
이 말은 꿈꾸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어 깨우는 것과 같았다.
무한한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뜬 노안은 크게 숨을 쉬려고 했다. 하지만 가슴에서 전해지는 파열의 통증으로, 오열하는 듯한 신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의사! 얘 깨어났어!
운이 정말 좋네요.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
그래. 내가 널 살렸다고.
운이 좋았어. 네 몸에 묶인 밧줄이 끊어졌을 때, 그 위에 있던 기둥에 걸려서 충격을 좀 덜어줬어, 그리고 또 마침 눈더미에 떨어졌어.
가슴의 총상도 반딧불이 장난감이 막아줬어.
그래도 총알의 충격으로 뼈가 부러졌고 또 다른 부상까지 있으니 적어도 3개월 이상은 누워 있어야 할 거야.
왜 날 구해준 거야?
네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게 된 것에는 황족의 책임도 있으니까.
리더가 지금은 공개적으로는 널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이 몇 년 동안 하층 칸을 돕고 싶어 했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어.
…………
리더가 그랬어. 모든 사람을 위해 힘쓴 사람이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적어도 널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어.
이곳의 비용은 내가 대신 전부 지불했으니 넌 몸 관리 잘하고, 우리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
좋은 소식?
리더는 모두가 목숨 바쳐 개척한 길을 헛되지 않게 할 거라고 했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이미...
"천지는 마치 나그네를 맞이하는 객잔과도 같은 곳, 티끌 같은 삶을 한목소리로 함께 슬퍼하네"라는 시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어?
난 그 구절을 이렇게 이해했어. 이 세상의 모든 건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과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무의미해, 중요한 건 과정이야.
과연 이 시간 동안,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는 너 자신에게 달려 있어.
…………
맞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소년 구조체는 몸을 숙여, 노안의 귓가에 접근했다.
내가 널 구하러 갔을 때, 너무 급하게 내려왔거든. 오슬란이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추측해낼 수도 있어.
넌 도로변에 누워 있던 무고한 행인이라고 거점 사람들에게 말해놨어. 그리고 입막음 비용도 줬으니, 넌 알아서 조심히 행동해.
난 리더에게 돌아가 봐야 하니, 먼저 갈게. 기회가 되면 또 보자.
안녕.
노안은 힘없이 작별 인사를 하고는 다시 꿈속에 빠졌다.
끝없이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땅에는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 인간의 온전하지 않은 신체가 있는 꿈이었다.
수많은 검은 그림자에 쫓기던 노안은 좁고 으슥한 길로 도망쳤다.
다음 순간, 노안은 갑자기 붉은 늪으로 떨어졌다.
노안은 자신에게 날지 못하는 날개가 생겨난 걸 목격했고 온갖 추한 방식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수많은 분노의 손이 노안의 몸을 끌어당겨 그를 끝없는 심연으로 가라앉게 했다.
쫓기고 도망치며, 추락하는 꿈들이 계속 반복됐다.
노안은 종종 자정에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고, 낯설고 칠흑 같은 방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그러면서 치료되지 않은 고통을 안고, 곤경에 몰리는 꿈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이 꿈에서 죽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노안은 죽음과 자신을 괴롭히는 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렇게 가시가 가득 솟아난 꿈마저도, 현재보다는 이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꿈의 경계선은 교차하는 낮과 밤 속에서 흐릿해졌다.
반복되는 몽롱함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됐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꿈에 있던 지난날들의 온기를 갈망하며, 끝없는 수면에 몸을 맡겼다.
먼 방에서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에게 밴 음식과 땀 냄새가 병원 안으로 들어오자, 차가운 공기가 온기로 바뀌었다.
의사는 웃으며, 개나리 한 송이를 노안의 침대 머리맡에 놨다. 그제야 노안은 자신이 기다림 속에서 창백하게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차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소년 구조체가 말했던 "좋은 소식"은 얼마나 걸리는 걸까?
노안은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허약한 목소리로 지나가는 거점 근무자를 불러세웠다.
혹시 최근 오셀럼호에 관한 소식이 있나요?
그 사고 소식을 말하는 건가요?
네.
얼마 전에 오셀럼호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위적인 거라고 공식 발표가 있었어요.
……
수송팀이 아딜레의 상층 관리에 불복해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해요.
하지만 팀 내부에는 첩자가 있었고, 미리 계획을 누설했대요. 첩자 때문에 궁지에 몰린 수송팀은 결국 열차를 폭파했다고 해요. 이게 사건의 전말이라고 해요.
이게 공식 발표인가요?
맞아요.
그 첩자의 이름은 아사고, 자기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그들의 수송팀 대장 곁에서 10년 넘게 잠복했다고 들었어요.
이런 시기에 일부러 정보를 누설해서 수송 부대 전체를 아사의 부모님과 순장시키게 된 거죠.
아니에요. 수송팀 대장 곁에 있던 첩자의 이름은 노안이에요. 사람 이름을 잘못 기억하지 마세요. 정식 발표는 아니지만, 어제 그 수송 부대의 대원이 직접 말한 거예요.
…………
수송 부대는 최근에야 재구성하기 시작했어요. 계속 사람을 모집하고 있고, 안에는 착하고 나쁜 사람들이 뒤섞여 있어서, 소식이 그렇게 정확하진 않아요.
됐어요. 이름이 중요한가요? 그래서 그 첩자는 결국 어떻게 됐대요?
누구는 죽었다고 했고, 누구는 살아있다고 했어요. 아는 게 있으면 초병이 올 때 알려주세요. 어쩌면 물자를 바꿔줄지도 몰라요.
그들은 즐겁다는 듯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떴다. 병상 옆에는 얇은 담요를 꼭 싸맨 한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은 온기 속에서 홀로 떨고 있었다.
두 눈을 뜬 노안은 다시 텅 빈 열차 칸으로 돌아왔다.
석양빛에 물든 창밖의 풍경이 열차가 운행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이곳의 모든 것이 소위 말하는 현실보다 더 선명하고 익숙했다.
요즘은 어때?
요즘이요?
그래. 네가 지지난번에 왔을 때, 봄이 왔다고 내게 알려줬잖아.
지난번에는 많이 회복돼서, 거점에서 임시직을 구했다고 했잖아.
요즘은 어때?
음.
그는 이런 꿈을 대체 몇 번이나 꾼 걸까?
수송 부대의 소식은 있나?
수송 부대는 계속 새로운 사람을 모집하고 있어요.
그래야지. 수송 부대는 많은 사람이 필요해.
수송 대원에게 들은 걸로는 열차의 환경이 이전보다 좋아졌다고 해요.
그래?
환경이 좋아졌으니, 돌아갈 건가?
전 돌아갈 수 없어요. 오슬란이 여전히 절 찾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젠 그곳에 안식처가 없는걸요.
노안이 흔들리는 열차 칸에서 고개를 숙이자, 지난날들의 망령들도 침묵에 잠겼다.
우린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한 걸까?
오셀럼호의 환경이 바뀌고 있고, 모두가 기대하는 미래가 언젠가 실현되겠지...
하지만 당신들이 없는데...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노안은 앞에 있는 환영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봤다.
이제 당신들을... 찾으러 가야 할까?
넌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지 않나?
네?
아직 날 찾으러 오지 않았잖아.
노안, 난 아직 074호 도시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내가 자료와 경로를 다 줬잖아.
하지.
응?
알려줘. 넌 정말로 살아있는 거야?
난 항상 여기 있어.
하지만 난 알고 있어...
이건... 꿈일 뿐이야.
왜 또 눈 위의 상처를 만지는 건가요?
…………
이 상처는 1년이 다 돼가는데, 좋아지려고만 하면 다시 만지니 회복이 안 되잖아요. 계속 그러면 시력을 잃게 될 거예요.
벌써 1년이 돼가나요?
그래요.
당신은 정신과 의사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매번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깨어있는지 확인한다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 거예요.
죄송해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인사부 직원이 저한테 부탁했거든요, 당신과 얘기를 좀 나누라고, 다른 사람보다는 잘 아는 사이니까요.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돼 가네요.
거점 의사는 다시 한번 시간을 강조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계속 임시직만 할 수는 없잖아요.
…………
노안은 그 소년 구조체가 대신 지불한 약값으로 거점에서 반년 동안 휴식을 취했다.
회복된 후, 과거 일벌 대원처럼 거점의 잡일을 도맡아 했다.
온실에서 채소를 돌보는 걸 도우고 거점 청소도 했다. 그리고 파손된 집을 수리하거나, 밖으로 나가 물건을 주워 폐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부품을 분해한 뒤 노동자에게 주곤 했다.
기술과 정밀도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은 일이라면 아무리 지저분해도 노안은 모두 받아들이고 제때에 완성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근데 저 녀석 말이에요, 좀 이상하지 않나요?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죠?
저도 기억이 안 나요. 의사가 데려온 환자 같은데, 병이 나은 뒤 이곳에서 도움을 주고 있어요.
도움이라고요? 확실히 "도움"을 주긴 했죠. 건조식품을 제외하면 보수를 받지 않고 있고, 잡일을 도맡아 하는 바람에 요한의 일이 크게 줄었어요. 들어갈 수 있는 거점을 찾지 못한다면, 밖에서 죽게 될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거점의 대장이 그가 혼자서 4인분을 한다고,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사부에서 몇 명 더 뽑으려고 해도 뽑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당연하죠. 이렇게 일을 잘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저라도 나이가 든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거예요.
수송팀에서 아직 사람을 모집하고 있는데, 아무리 기술이 없다고 해도, 왜 열차에서 일하지 않는 걸까요?
화물을 호송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겁쟁이인가 보네요.
정규직 자리가 아직 비어있긴 하지만, 경력이 많은 전문가가 필요해요.
당신은 아직 젊어요. 갈 길이 없는 노인분들처럼, 임시직으로 생활하는 것 말고, 더 좋고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어요.
…………
그 소년 구조체가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을 때, 소년 구조체는 길에서 당신을 만났을 뿐이라고 했어요. 열차에 부상자를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고만 했고요. 당신이 다 나은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건가요?
…………
전 당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계획이 있는지 묻고 싶은 것뿐이에요. 정말 계획이 없다면, 여기에 머물러도 돼요.
알고 있어요. 감사해요. 의사 선생님.
어디로 갈지 결정했나요?
네. 내일 떠날 거예요.
벌써요? 홧김에 한다거나 아니면 강제로 하는 건 아니죠?
네. 아니에요.
그럼 잊지 말고, 내일 인사부에 가서 반년치 보수를 받으세요. 보수가 얼마 되지 않고, 받기 싫더라도 꼭 받아서 가는 길에 드세요.
그리고 어디에 있든 눈에 난 상처를 건드리면 안 돼요. 알겠죠?
네, 감사해요.
다음 날, 노안은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진 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여정을 떠났다.
노안은 스캐빈저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도시의 폐허 사이를 돌아다니며, 펠드가 사라진 074호 도시를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눈이 다시 녹고, 날씨가 조금씩 따뜻해질 때, 노안은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뜻밖의 지인을 만나게 됐다.
아직 살아 있었구나.
……?
기억 안 나? 이게 우리 두 번째 만남이잖아.
…………
오랜만이네. 열차에서 일은 들었어. 같은 편인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전투를 강행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오슬란이 아직 살아있는 핵심 멤버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네 모습을 보니 돌아가기 힘들겠지?
…………
노안은 돌아갈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넌? 왜 거점에 남지 않는 거야? 베테...
더 이상 그렇게 날 부르지 마!
벨라의 안색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베테 그 늙은 짐승 같은 놈! 몇 년 동안이나 날 속였으면서 내 할아버지라고 거짓말을 했었어!
베테 어르신이 네 할아버지가 아니었어? 많이 닮은 것 같은데...
그만! 난 이제 베테랑은 상관없어. 원래부터 없었어야 했으니, 더 이상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벨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나도 돌아가지 못해. 그리고 더 이상 그 거점과 연관되고 싶지도 않아.
그럼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건야?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어머니를 찾으러 가고 싶어.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 늙은 짐승에게서 도망치셔서,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몰라.
넌? 어디로 갈 거야?
074호 도시로 가려고.
걸어가려고? 너 미쳤구나.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1년 아니면 2년 정도 걸리겠지.
됐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을 것 같네.
나랑 함께 가지 않을래? 나도 가는 길에 사람을 찾아야 하거든. 두 명이 서로를 봐줄 수도 있잖아.
…………
그리고 난 아직 네 이름을 몰라.
계속 수송팀과 접촉해 왔으면서 내 이름을 모른다고?
그들이 널 "대장", "안경잡이", "신출귀몰" 혹은 "레이첼 대장이 키운 녀석"이라고만 불렀어.
신출귀몰은 또 언제 생긴 별명이지?
수송팀에는 사람이 엄청 많고, 호칭도 복잡한데, 네 이름을 외울 수 있었을 리가 없지.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공식 발표"에 적힌 "주모자"의 이름뿐이야. 그곳엔 아사, 바바리, 노안 그리고 레이첼까지 있었어. 이 중에 네 이름이 있니?
…………
난 이름이 없어.
게임에서 가장 레벨이 낮은 몬스터도 "슬라임"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어떻게 이름이 없을 수 있어?
그럼, 슬라임이라고 불러줘.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버리려 한대, 너도 그래?
한숨을 내쉰 벨라는 이 말이 자신에게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열차에서 있던 그 재난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해도, 너와 함께했던 추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걸 잊지 마.
추억...
노안, 사람들이 널 어떻게 부르는지 알지만, 괴물이 못생기고 불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도, 난 네가...
그래. <슈렉>처럼 주인공이 돼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슈렉이라는 이름이 어때요? 제 어머니가 예전에 절 이렇게 부르시곤 하셨어요.
좋아.
벨라는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캐묻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한 사람의 과거와 미래는 혹한에 묻혀, 더 이상 영혼의 희비가 있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은 분노하며 24년 동안 속아온 치욕을 숨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언급되고 싶지 않아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가진 채, 074호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지금 이러는 거...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동행한 지 25일째 되는 날, 더 이상 영혼에 희비가 없을 줄 알았던 사람은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왜 그래?
지금 내 목표는 25일 내내 이곳에 앉아서 당신 추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아니라, 074호 도시로 가는 거야.
난 어머니를 찾고 싶지만, 사진이 없으니 네게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게 잘못된 거야? 게다가 넌 나한테 빚이 있잖아.
난 수송팀에 가입한 이후로 그림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의 요구가 너무 높아서 완성할 수가 없어.
난 그냥 너한테 이 초상화의 눈썹을 좀 더 높게 수정하라고 했을 뿐이야.
5분 전까지만 해도 눈썹을 좀 낮추라고 했잖아.
조금 높이는 동시에 더 낮출 수는 없는 거야? 내 요구를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
화를 삭인 노안은 펜을 잡고 눈썹을 다시 수정했다.
지금은 어때?
이것도 아닌 것 같아. 눈썹은 우선 신경 쓰지 말고, 눈은 왼쪽을 보는 동시에 조금 오른쪽을 보는 걸로 수정해 줄래.
?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잘 익은 포도의 덩굴처럼, 온화하고 풍성한 기품이 있었어.
?
눈빛도 호수의 잔물결처럼, 파동이 일어나는 느낌이 있어야 해.
…………
노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가 그림 그릴 줄 안다는 소식을 누구한테서 들었어?
레이첼.
있잖아. 그건 레이첼 대장님이 그냥 던진 농담일 뿐이야. 사실 난 정말 그림을 그릴 줄 모르거든.
그럴 리 없어. 레이첼의 지갑에는 네 어릴 적 그렸던 작품이 끼워져 있었거든.
그리고 외모를 설명하는 그 단어들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니?
벨라는 손에 든 책을 흔들었다. 그 책은 인생의 깨달음을 묘사한 산문집으로, 여주인공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가득 쓰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연기의 입맞춤을 겪은 사과와도 같았는데, 대열을 이탈한 기러기가 놓친 황혼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액자 속 정체된 모나리자의 쓸쓸함과 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노안은 책을 "탁"하고 덮은 뒤, 공손하게 벨라에게 돌려줬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아.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에 타협할 줄 알아야 해.
난 오늘부로 창작 활동을 그만두기로 결정했어. 이제부터 그림 그리기에 대해 어떤 다른 감정도 담지 않기로 했어.
넌 창작할 때마다 그렇게 고통을 느끼는 거야? 아니면 미숙할 때만 그러는 거야?
난 항상 이래.
하지만 넌 내게 진 빚이 있잖아. 그리고 레이첼도 그랬어, 네가 수송팀을 떠난 후에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네게 종이와 팬을 제공해서 꿈을 이루게 해줬잖아. 그럼 잘 된 거 아니야?
…………
좀 더 연습하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수! 정! 해!
함께한 지 50일이 되던 날, 노안은 마침내 벨라가 마음에 들어 하는 초상화를 그려냈다.
네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
진작에 "눈이 왼쪽을 보는 동시에 살짝 오른쪽을 보는 것처럼 그려" 대신에 "두 눈 간격을 좀 더 넓게 그려줘"라고 말하고, 또 "잘 익은 포도의 덩굴처럼, 온화하고 풍성한 기품이 있게 그려"를 "곱슬머리"라고만 설명했어도, 이렇게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거야.
잘못된 게 있어? 내 생각엔 네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침울해 보이지 않고, 감정도 예전보다 훨씬 풍부해진 것 같은데.
화가 나서 정신이 든다는 게 이런 느낌이군. 알게 해줘서 고마워.
노안은 펜을 내려놓고, 자신의 뻐근한 손가락을 풀어줬다.
불평하지 말고, 마음가짐을 좀 좋게 먹으라고. 자, 이제 가자!
벨라는 소탈하게 손을 흔들며, 50일 전에 예정했던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
여정을 떠나자, 시간은 빠르게 부는 바람같이 지나갔다.
노안과 벨라는 스캐빈저의 일원이 되어, 각자의 능력에 의지해 물자를 찾았다. 이와 동시에 소식도 찾으면서, 서로 도우며 나아갔다.
지난날의 아픔은 마음속에 잘 묻어뒀다. 그렇게 서로 절대 꺼내지 않는 비밀이 됐고,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새해의 겨울이 되어서야, 책의 내용에 관한 대화로 인해 풀어졌다.
한 사람은 만화에, 한 사람은 긍정적인 산문집에 열중했었다. 책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각자 선호하는 것이 달랐다. 하지만 이 화제를 빌려, 두 사람은 조금씩 대화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서 벨라가 "성장이 더디다"라고 했던 소년이 조금씩 성장해 청년의 체격을 갖게 됐다. 하지만 노안은 옛꿈에 갇혀, 얼굴의 상처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았다.
벨라는 감염이 악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근시 고글을 노안에게 줬다. 그래서 기존의 깨진 안경을 대체하게 했다. 자신도 모르게 안경 너머로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노안을 보며 벨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동물이 상처 긁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 커버를 착용하는 걸 본 적 있어?
네 긍정적인 산문집에 "언어의 예술" 같은 강좌는 없는 건가?
벨라는 호의였지만, 깨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단을 잃은 노안은 수면을 두려워하게 됐다. 다시 지난날에 빠져들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했다.
노안은 이런 불안을 안은 채, 날이 밝을 때까지 혼자 앉아 있곤 했다. 이렇게 수면이 부족한 날이 지속된다면, 노안의 낮 여정은 버티기 힘들게 될 것이었다.
벨라는 노안이 도중에 의식을 잃게 된 후로, 잠에 들게끔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되는 걸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네. 다른 사람이 걱정하지 않게 할 수는 없는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난 전 수송팀의 대장처럼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 잘 대처하지 못해. 네가 죽으면 내 생존 난도가 얼마나 높아지는지 알아?
더 이상 벨라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노안은 벨라가 걱정하지 않도록, 잠에 들지 못하더라도 코를 고는 연기를 했다.
벨라가 마음 놓고 잠든 뒤에야, 노안은 평온한 긴 밤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단한 여정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들은 수많은 황혼의 폐허를 지나, 외롭고 어두운 빈 골목에서 인적을 탐색했다.
여름밤의 반딧불이 다시 숲을 감싸자,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눌려 있던 멜로디가 다시 울려 퍼졌다.
노안은 그 로봇 반딧불이의 도움으로, 자신이 꿈속에 있는지 확인하는 법을 배웠다. 마침내 이 긴 고통을 잠재워 줄 진정제를 찾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