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홀로 붉은 순환액과 적조가 가득한 도로를 떠났다.
먼 골목길에서 누군가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스산한 바람에 실려 전해왔다. 마치 생존자들의 처량한 현실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적조가 이곳을 삼켜 버릴 게 분명했다.
노안은 철수한 사람들을 따라가서 무사한 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또 다른 재앙을 불러와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
…………
기체의 균열이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리고 순환액이 가슴의 상처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랜 전투에서 침식체가 부상자의 위치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속수무책의 "승격자"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취약한 갑옷은 여러 차례 충격을 받아 파손됐고 기체 내부의 구조를 드러냈다.
청년은 상처를 통해 자신의 내부 구조가 공기에 드러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공격을 한 번 더 받게 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적조의 양분이 될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노안, 장래희망이 뭐야?
…………
장래?
그래. 미래의 꿈이나 계획,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대 같은 거 말이야.
나중에 난...
환상과 전설을 그리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
부지런하고 착실히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공정하고 믿음직한 의사가 됐으면 해.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모두의 발목을 잡지 않을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난 이런 절망적인 환경을 바꾸고 싶어.
어머니와 레이첼 대장님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혼자서도 살아남을 거야.
정말?
응?
정말 이런 미래를 꿈꾸는 거라면,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
어쩌면... 실현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네.
내가 아는 노안은 어렵다고 자신의 소원을 포기하지 않아.
그리고 넌 영웅이 되고 싶은 거잖아?
그럴 리가...
하지만 노안은 항상 이곳의 환경을 바꾸길 바랐고, 사람들을 돕고 싶어 했잖아. 이렇게 영혼에 새겨진 일을 포기할 리가 없어.
내 영혼에 그런 게 새겨져 있어?
응. 영혼에서부터 피부까지 스며들어서 얼굴에 다 적혀있어. 그래서 그것만 생각하면 웃음도 안 나올 정도야.
…………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노안,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장래에...
난...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영웅"이 되고 싶어.
단 하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현실과 꿈은 서로 어긋나 버렸다. 지금의 노안은 그때 타협한 소원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영웅"을 동경하던 그 아이는 무고한 자를 해치는 죄인이 됐다.
혹사, 근처에 있는 거지?
탤버트는 목숨을 잃을 때까지도, 승격자의 힘이 모두를 도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레이첼은 그 단말기가 노안을 살리고, 수송 부대를 재구성해 다시 항쟁할 수 있다고 죽는 순간까지 믿고 있었다.
과거의 노안은 레이첼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반항하는 걸 택했고 모두의 희생과 소원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지금 과거의 잘못을 다시 반복해야 할까?
무엇이든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노안은 영혼에 새겨진 소원과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고, 증오했던 길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노안은 이 마지막 위안을 가진 채, 으스스한 숲속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이 길에 들어서도 바꿀 수 없다면 어떡해야 할까?
여기까지 오면서 보고 들은 것, 적조 속에 가라앉은 생명... 이 모든 건 "선별을 진행하고 약자를 버린다"라는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참여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 결정권이 주어질지 아주 뻔한 일이었다.
예전의 레이첼처럼, 거역할 수 없는 권력과 협력하기를 선택한다면, 권력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칫하면 레이첼처럼 사람을 해쳐서 평생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라고.
┘ ┘!!
……?
뒤에서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승격자 ┘ ┘ ┘--?!
그 목소리는 초조하게 무언가 묻고 있었다.
승격자...
처참한 현장과 후방에서 습격당한 사람들을 본 다음, 현장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사람을 주범으로 의심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멈춰!! 내려놔┘┘!!
상대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쫓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노안은 더욱 멈출 수 없었다. 몸의 "이상"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다. 이것이 제어 불가인지 아니면 능력이 무효화된 건지 전혀 규칙을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타인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빨리 움직여야 했다. 눈앞의 가로등을 지나가면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고, 미지의 장소에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추지 말아야 했고, 멈추면 안 됐다. 하지만 뒤편에 총알이 그 흐릿한 말들을 대신해, 노안의 팔을 스쳐 지나가면서 2개의 혈흔을 남겼다.
노안은 새로운 고통 때문에 혼란스러운 의식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뒤에서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 경고야. 멈춰!!
…………
마지막 경고?
승격자가 있는 곳에 가는 거라면, 난 사격할 수밖에 없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노안이 배신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겠지.
청년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슴에 있는 헐렁한 갑옷을 힘껏 잡아당겼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웃음과 함께, 노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라고 했으니, 다음번엔 좀 정확히 조준해.
기억 속에서 잠들어 있던 후회들이 눈앞에 있는 "이상(异常)"의 범행과 함께 침전물이 되어, 미래로 향하는 길을 가득 메웠다.
이상(理想)을 포기한 영혼은 죽었다. 남은 건 몸이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악을 없애는 걸 사명으로 여기는 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왜? 총 쏠 생각이 없는 건가?
그래.
내게... 질문하는 거야?
내가 사실을 말할 거라고 믿는 건가?
…………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이상을 앞에 있는 사람에게 들려줬다.
응.
하지만 난 이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 몸에 제어할 수 없는 이상이 계속 존재하는 한, 타인을 또 다치게 할 수도 있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난...
사실... 원래는 그 승격자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이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
과학자라...
선택의 기회?
그것도 "선택의 기회"라고 할 수 있을까?
…………
내가 당신을 따라 돌아가서 당신이나 당신의 동료를 다치게 하는 건 두렵지 않나?
…………
통찰력이 참 좋네.
그럼, 질문 하나 해도 될까?
당신 말대로 공중 정원으로 갔다가, 그곳의 연구자들도 방법이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난 승격자가 될 기회를 놓치게 되고, 탤버트나 다른 "배신자"가 기대했던 것처럼, 퍼니싱을 제어하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없게 될 텐데.
마음속 "바른길"을 위해, 변화를 가져올 힘을 포기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
응.
하지만 이 답이 가져올 결과 때문에 막막했던 적이 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막막하다고 느껴져.
설령 이 논리를 깨우쳤다 해도, 가슴에 쌓인 빙산같이 무거운 옛꿈은 쉽게 녹을 수 없었다.
물론 동의할 수 없지. 난 평범한 생명도 자신만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 또 각자의 의지에 따라, 생존과 죽음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생명체의 생존 자격은 타인이 규칙을 정해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고 믿어.
…………
메모?
노안은 어렴풋이 출발 전 감사를 전하는 메모를 남겼던 게 기억났다.
노안은 메모의 끝에 이런 말을 적었다.
"난 당신의 초대를 저버리기 싫어. 기억을 되찾은 후, 당신과 날 믿어줬던 사람들에게 내 신분을 솔직하게 설명할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이 대답을 들은 청년은 조용히 웃었다.
좋아.
공중 정원으로 가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걱정과 의혹이 많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않은 상황에서 노안은 영혼이 이끄는 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당신과 함께 공중 정원으로 갈게.
노안은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인간 지휘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노안이 어둑어둑한 가로등을 건너, 지휘관의 두 손을 잡으려 할 때, 등 쪽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윽!
붉은 순환액이 노안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청년은 상처투성이의 어깨를 힘겹게 돌린 후에야, 보랏빛을 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혹사, 당신...
…………
도대체 왜...
안돼. 이런 시기에 날 떠나지 마.
혹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노안의 뒤에 숨어서 전방에 있는 지휘관을 계속 훑어봤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
넌 인간이구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인간 지휘관인 건가? 레븐쉬?
레븐쉬,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하아.
혹사는 청년의 신체에 박힌 단도를 빠르게 뽑은 후, 인간에게 다가갔다.
혹사, 멈춰!
노안은 혹사를 잡으려고 했지만, 상처투성이 기체 때문에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네 기체는 원래부터 많은 것이 부족했었어. 지금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야.
이런 건 소용없어.
혹사는 총알의 궤적을 안다는 듯, 손쉽게 위험에서 벗어났다.
취약한 무장을 한 인간이 알 수 없는 구조체와 싸우려 하자, 익숙한 그림자가 질풍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로 적의 움직임을 막았다.
혹사!
루시아는 혹사의 신분, 이름 그리고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차 없이 "가냘파" 보이는 몸을 향해 차가운 공격을 끊임없이 퍼부어서, 혹사를 후퇴하게끔 몰아붙였다.
루시아?
어째서인지 혹사는 기쁜 듯이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니지. 넌 이미...
지휘관님,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그가 바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전임 지휘관인 레븐쉬에게 연결했던 승격자예요.
맞아요. 혹사가 레븐쉬와 고위층들을 계속 농락하지만 않았다면, 그때 그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맞아요. 전에 그와 만났을 때,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윽.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옆에 있던 청년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복장과 목소리만 바뀐 거예요.
루시아는 혹사의 목에 있는 "장식"을 가리켰다.
저것 외에는 얼굴과 기체 모두 그대로입니다.
그때 당신이 죽었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건 제 실수였죠.
죽지 않은 거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닐까?
방금 생각 났어.
승격자가 된 루시아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넌...
우린 모두 같은 방식으로 깨어났잖아. 너와 다른 게 있다면, 또 다른 난 죽은 것뿐이야.
루시아,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우린 구조 요청을 받았거든요.
그뒤로 몰려든 침식체들도 당신 짓이였죠?
네가... 그들을 구한 거야?
당연하죠! 근처 거점 사람들도 모두 와서 도와줬어요. 당신이 왜 그들에게 손을 댔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부상자는 모두 치료를 받았고 무사히 다른 곳으로 이동됐어요.
상관없어... 여기까지 왔으니 그들은 더 이상 필요 없어.
당신이 뭘 계획하고 있든, 오늘 당신을 그냥 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 "종이학"도 근처에 있겠죠?
아직 "그녀"를 기억하는구나.
어서 그 물건을 불러내죠. 제가 한 번에 다 처리해 줄게요.
아니. 날 용서해 줘. 루시아.
난 인간과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어. 그래서 다시는 그때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야.
방법이요? 어떤 방법인데요?
그건 아직 비밀이야.
난 지금 이 "방법"을 위해, 함께할 동료를 찾고 있어.
계획이 완료되면, 난 얌전히 세상을 떠날 거야.
더 이상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네 손에 죽는다 해도, 난 같은 방식으로 깨어날 거야.
그러니까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좀 피하지 않을래?
도망칠 생각은 거두시죠!
루시아가 전방으로 달려가 혹사를 찌르려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갑자기 붕괴됐고 마치 수많은 조명이 갑자기 반짝이는 것 같았다.
주위의 그림자가 흐트러지면서 루시아는 조준할 수 없게 됐다.
시각 모듈을 교란을 받고 있어요!
내가 말했잖아. 이따위 소용없는 공격은 집어치워.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혹사는 날아오는 총알을 다시 한번 가볍게 피했다.
이런 상태에 빠진 건, 시각 모듈이 교란받아서 그런 거였어?
내가 만든 꿈에서 잠들도록 해!
칠흑 같은 환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수많은 잔해가 지면에서 두 손을 뻗으며 앞으로 가려는 루시아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거대한 뱀 모양의 로봇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커다란 의자로 빠르게 변한 뒤, 혹사와 청년을 받쳐 들었다.
"종이학"의 소린가요? 지휘관님,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난 너희를 해치지 않아.
나중에 또 만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신임 지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