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02 고후위등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ER02-17 지록위마

>

오후가 되자, 큰 눈은 만신창이가 된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텅 빈 풍경 아래, 피 묻은 그림자가 상층 칸의 지붕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마이크를 비롯해 중상을 입은 신야와 대부분 평민은 하층 칸에 남았다. 레이첼과 다른 수송 대원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노안은 홀로 5km의 설원을 지나, 레이첼이 있던 상층 칸으로 되돌아갔다.

하얀 눈에도 가려지지 않는 시체와 핏자국 속에서 노안은 마침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을 찾아냈다.

레이첼 대장님!

노안?

레이첼의 왼손은 절단되어 있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노안은 이 여성이 이렇게 허약해져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장님의 손이... 이곳에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나요?

아무도 남지 않았어. 우린 실패했어.

오슬란이 그런 구형 로봇을 여러 대 더 숨기고 있었어.

결국 우린 상층 귀족들의 내전을 통해서만, 숨을 돌릴 수 있었어.

내전이라면, 자밀라 왕녀와 오슬란 말인가요?

맞아. 자밀라 왕녀도 승리하지 못했어. 그녀의 친위대도 이 눈처럼 조용해졌거든.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라면, 오슬란이 모든 비장의 카드를 다 써버려서, 결국 높은 자리에서 실각했다는 것이지.

제가 밖에 있는 거점으로 대장님을 모시고 가서 의사를 찾아볼게요. 조금만 버티세요!

아니. 이미 늦었어.

레이첼은 피로해 보이는 쓴웃음을 힘겹게 지으며, 자신의 단말기를 노안의 손에 쥐여줬다.

레이첼 대장님!

내 마지막 말을 똑똑히 잘 들어.

내 단말기를 가져가. 이건 나와 오슬란이 거래한 내용 중 하나야...

거래요?

오슬란이... 널 살려뒀으면 좋겠네.

이 단말기에는 나랑 오슬란이 거래한 기록이 많이 담겨 있어. 오슬란이 보고 싶지 않은 물건이지.

오슬란에게 이 단말기와 내 머리를 가져가기만 한다면, 넌 폭동을 제압한 영웅이 될 거고, 그럼 많은 상층 귀족에게 인정받아 새로운 수송 부대를 총지휘하는 대장이 될 수 있을 거야.

뭐라고요?

난 이미 힘이 다 빠졌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왜 절 이런 방식으로 대장님을 대신하게 하는 건가요?!

우리가 실패했으니까. 계속 힘을 키워야만,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어.

네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어떡하지?

그들은 받아줄 거점이 없어서, 열차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예전과 같이 귀족들에게 피해만 보게 될 거야.

오슬란은 자신이 가진 모든 비장의 카드를 다 잃었다고 했잖아요. 지금이야말로 오슬란을 쓰러뜨릴 기회라고요!

일이 그렇게 쉬웠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근데 귀족 간의 관계를 굳건하게 만드는 건 이러한 무력만이 아니거든.

수송팀의 혁명이 성공했다 해도, 첫걸음일 뿐이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겠지만, 우린 실패했으니, 다시 시작할 수밖에.

고개를 숙인 레이첼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잘 들어봐. 누군가가 지붕에 올라와 수색하려고 해. 움직이지 않고 계속 미룬다면 시기를 놓칠 수 있어.

안 돼요. 레이첼 대장님!

안 되는 건 없어!

레이첼은 쇠약하게 소리를 지르며, 노안에게 자신의 총을 쥐라고 강요했다.

레이첼

잘 잡아! 놓으면 안 돼!

넌 계속 펠드를 찾으러 가고 싶어 했잖아? 단말기에 펠드의 자료가 있어. 네가 이곳에서 살아남고, 배후에 있는 사람에게 살해당하지 않아야 펠드를 찾으러 갈 수 있다고!

수송 부대를 총지휘하는 대장으로서... 난 많은 잘못을 했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줬어.

진심을 다한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고, 판단 착오로 아사 같은 놈도 믿었지.

아사는 부하들이 소대의 물건을 훔치는 묵인했고, 난 다 알고 있었지만... 그걸 허락했어. 왜냐하면 아사는 그중의 절반을 내게 나누어줬거든, 그리고 난 그걸 이용해 무기를 교환했어.

노안

그럼, 밴크로프트 아저씨의 일은...

레이첼

맞아. 아사가 펠드에게 G54호 창고에 대한 소식을 알려줬고 그를 화물 상자에 숨어들게 꼬신 거야. 그러니 날 미워해도 돼.

사격해, 날 죽이고, 넌 살아남아!

네 생각대로 수송 부대를 재편성하고, 나랑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거라!

어서. 오슬란의 부하들이 올라오려고 해!

노안

하지만 수송 부대에는 생존자가 거의 남지 않았어요. 대장님이 틀렸다고 해도, 제 선생님이잖아요! 어떻게 쏠 수 있겠어요?!

레이첼

그럼, 내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해. 노안.

난 네 어머니에게 속죄하고 싶었거든.

내가 줄리를 해쳤어. 그러니까 줄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널 살리는 거야.

레이첼은 자기 손으로 노안의 손을 덮었다. 노안이 온기를 잃은 레이첼의 손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레이첼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노안

레이첼 대장님, 뭘 하시려는 거죠?!

레이첼

지금까지도 난 줄리에게 깊은...

총구에서 분출한 불빛과 굉음이 레이첼의 마지막 말을 집어삼켰다.

끝없이 하얀 설원 속에 오직 노안만이 홀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노안

…………

레이첼이 죽은 뒤, 노안은 곧 어머니가 갇혔던 감방으로 끌려가, 수많은 감시 속에서 14일간의 옥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초병들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채, 감방의 바깥쪽을 어슬렁거렸다. 그중에는 오슬란 쪽 사람과 잘 보지 못했던 황족의 친위대도 있었다. 심지어는 다친 소년 구조체 1명도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진실을 갈망하고 있거나,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행동을 제약했다. 이로 인해 노안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임시 "회의"로 끌려가기 전날 밤까지 근처를 배회하던 그 소년 구조체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노안의 감방 앞에 갑자기 앉았다.

리더가 네게 사과하라고 했어.

레이첼을 돕지 않은 게 아니라, 현재 황실의 힘이 약해져서, 마지막 병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했어.

…………

그리고 리더는 네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대. 리더는 네가 레이첼의 단말기를 가지고 있지만, 계속 그것을 건네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맞지?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다음 날 아침, 노안은 초병들의 감시 아래, 임시로 마련된 "회의장"에 들어섰다. 주변에는 구경하는 수많은 평민이 서 있었고, 그 사고와 몇 안 되는 생존자들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토론하고 있었다.

황족과 그의 친위대는 높은 계단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각기 다른 표정을 한 귀족들이 가득 둘러싸고 있었고, 가장 우측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귀빈"들이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공중 정원의 구조체 같아 보였다. 노안은 수송 임무 과정에서 이런 구조체를 여러 번 봤지만, 거래 내용 외에는 별다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오셀럼호의 사고는 아딜레 상업 연맹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어요. 공중 정원은 저희의 협력 동료로서, 이 심판의 방청을 요구했어요.

공중 정원과 아딜레 상업 연맹은 물론이고, 하층 칸의 수송 부대와 일벌 부대는 모두 지구를 탈환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원이에요. 그래서 전 이 평민들을 모아, 우리의 회의를 볼 수 있도록 했어요. 평민들은 알 권리가 있어요.

괜찮으시죠?

당연히 괜찮지.

오슬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 사흘 동안, 오슬란은 온갖 방식의 수사와 고문을 통해 레이첼의 단말기가 노안의 손에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매력적인 조건과 비열한 협박도 많이 내뱉었다.

노안이 하층 칸에 익숙한 것을 이용해 단말기를 숨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슬란이 보낸 초병은 노안에게 거듭 강조했었다.

이 사고를 레이첼과 황족의 음모로 돌리기만 하면, 노안은 "반란을 잠재운" 영웅의 왕관을 쓰게 될 것이고, 새로운 수송 부대의 대장이 되어 각 항목을 배당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노안이 시나리오대로 하지 않는다면, 단 하나의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노안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며, 수송 부대가 보호하려던 평민들도 열차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었다.

그럼, 폭동을 가장 먼저 발견한 쪽에서 진술을 시작하겠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내 충실한 초병이 물건을 검사할 때, 레이첼이 화물칸에 출처를 알 수 없고, 규격에도 맞지 않는 무기를 대량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초병은 레이첼에게 무기의 출처와 용도에 대해 평화롭게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수송 부대의 사람에게 갑자기 공격받게 됐다.

오슬란은 우렁찬 목소리로 옷깃에 숨겨진 도청 장치, 열차에서 던져져 목숨을 잃은 아사 그리고 초병의 협박에 피해를 본 평민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후속 조사에서 수송 부대 핵심 멤버 중 한 명을 결정적인 증인으로 보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오슬란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노안에게 집중됐다.

…………

노안의 증언에 따르면, 레이첼은 장기간 황족과 연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수송 부대가 상층 칸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묵인했다.

말도 안 돼! 레이첼이 귀족과 손을 잡았을 리가 없어요!

레이첼을 모함하지 마세요!

레이첼은 진실을 솔직하게 밝힌 적이 없었고, 이런 어두운 협력 관계는 모두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라고만 말했었다.

현실을 직시해! 이 더러운 평민들 같으니! 수송 부대가 황족의 묵인하에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오슬란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황족이 계속해서 권리를 남용해 민생을 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중 정원처럼 황족을 완전히 폐지하고, 의회를 설립해, 진정으로 권리와 책임을 이행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권리를 나눌 것을 건의한다.

귀족들

동의합니다!

동료들과 예행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서 귀족과 부하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오슬란 씨, 당신은 황족이 수송 부대의 어떤 것을 묵인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송 부대가 규격에 맞지 않는 무기를 비축했고, 폭력 사건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을 묵인했다.

확실한 증거의 유무와 상관없이, 충돌이 있던 당일에 수많은 군용 살상 로봇 무기를 동원했는데, 무기에 대한 사용 권한이 있으셨나요?

우리는 기술자들을 보내서, 레이첼의 것이었던 군용 살상 로봇 무기의 통제권을 빼앗았을 뿐이다.

그런가요? 여기 제가 받은 증거 1개가 있어요.

바바리라는 후방 지원 관리 인원이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바바리는 곧 입막음을 당할 것이라며, 장부를 첨부했어요.

……?

당신은 여러 차례 바바리의 도움을 받아, 얻어서는 안 될 물자를 손에 넣었죠.

편지는 누구나 위조할 수 있어. 그리고 장부도 마찬가지지.

바바리는 이미 죽었어. 애스턴, 네가 증거를 위조하고, 바바리를 죽여서 증명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알아?

귀족1

오슬란 님의 말씀이 맞아!

귀족의 부하1

직무에 충실한 분에게 더 이상 죄를 전가하지 마라! 이 비열한 황족 같으니!

오슬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바로 오슬란의 발언에 이어, 애스턴을 큰소리로 꾸짖었다.

(바바리가 죽었다니, 바바리가 아사의 도청 기록을 넘겼는데도 살아남지 못한 건가?)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증인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이 소년이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다! 노안은 레이첼에게서 자랐지만, 자기 손으로 레이첼을 죽임으로써 이 비극을 끝냈다!

이 말을 듣자, 뒤편에 있던 평민들로부터 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층 평민1

저 사람이 뭐라는 거야? 저놈이 레이첼을 죽였다고?!

하층 평민2

레이첼 옆에 항상 붙어 다니던 그 녀석 맞지??

하층 평민3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모두가 최선을 다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층 평민4

배신자! 이 배신자야!!

조용!!

오슬란은 의기양양하게 손을 저으며, 초병에게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명령했다.

회의장이 다시 조용해지자, 뒷짐 진 오슬란은 여유롭게 노안을 향해 걸어갔다.

자, 모두에게 말해보거라. 레이첼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지?

레이첼 대장님은...

오셀럼호는 항상 혼란에 빠져 있었고, 지옥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린 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어.

레이첼을 믿어 봐. 그녀는 상층 칸 귀족들의 억압을 타파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

레이첼은 모두의 리더가 되려고 하는 건가요? 책 속의 영웅처럼요?

그래. 내가 도와주고 있어. 레이첼의 수단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난 뭐라고 할 자격이 없어.

오늘부터 넌 내 제자야,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게.

여러 번 말했듯이, 행운의 박스를 거절하면, 상층 칸에서 다른 협력사를 찾을 것이고, 우리의 처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그동안 파업과 항의를 했었지만, 열차는 결국 그들의 것이었지. 귀족을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더 많은 사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면, 난 기꺼이 범죄자가 될 것이고, 그 대가를 치를 거야.

무기를 바꿀 물자? 난 나만의 방법이 있어.

뒷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아요. 하층 칸은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간,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도망갈 수 없게 될 거예요.

난 펠드가 왜 실종됐는지 몰라.

이 모든 희생은 사람들이 앞으로 좋은 나날들을 보내기 위한 거야!

레이첼

난 네 어머니에게 속죄하고 싶었거든.

네 생각대로 수송 부대를 재편성하고, 나랑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마!

…………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레이첼 대장님은 오슬란과 협력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마지막 순간까지 레이첼은 자신보다 더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힘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그 힘이 노안을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레이첼 대장은 애초에 우리를 조금도 믿지 않았어요. 무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레이첼 대장은 권유를 듣지 않는 폭군처럼 변했어요.

레이첼 대장은 바꿀 수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봤었고, 구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너무 많이 포기해서, 더 이상 누구를 자신 곁에 둘 수 있을지 믿을 수 없게 됐을 뿐이야.

노안은 "왜 이렇게 된 걸까?"라고 자신에게 되물었다.

왜냐하면 난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

그럼, 지금 노안에게는 어떤 선택이 있을까?

수송팀은 우리에게 피해를 줬어. 하지만 오슬란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이 기회를 주셨으니, 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사처럼 열차에서 내던져져서 궤도에 끌리다 죽고 싶은 거야? 너 혼자 죽으면 다행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쩔 건데?

정말 그럴까?

회의장에 도착한 순간, 노안은 자밀라 왕녀의 애써 높인 목소리를 들었다.

공중 정원과 아딜레 상업 연맹은 물론이고, 하층 칸의 수송 부대와 일벌 부대는 모두 지구를 탈환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원이에요. 그래서 전 이 평민들을 모아, 우리의 회의를 볼 수 있도록 했어요. 평민들은 알 권리가 있어요.

자밀라 왕녀는 준비를 못 한 것이 아니었다. 자밀라는 자신만의 은밀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평민들은 매우 중요하고, 공중 정원에서 협력하는 동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상인에게 있어서, 소중한 물건이라면 결코 버려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왜 그러지?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다.

오슬란은 주위에서 속삭이는 사람들이 성가시다는 듯 바라보며, 노안 앞에 놓인 테이블을 두드렸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노안은 오래전에 펠드가 자신에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노안, 장래희망이 뭐야?

노안은 고개를 들어 주변의 시선을 바라봤다. 노안을 쳐다보는 시선이 회의장 중앙에 있는 노안을 꿰뚫을 것 같았지만, 노안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미래"를 선택할 때였으며, 그 선택을 함으로써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송 부대의 오랜 소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 선택은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아쉬움만 남을 것 같았다.

레이첼 대장님은 하층 칸에 있는 사람들이 평등한 권리를 얻으며, 행운의 박스와 불합리한 제도에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도록, 그 무기들을 비축했을 뿐이에요.

그중에서 모두를 가장 심하게 억압했던 사람은 오슬란과 그의 부하들이에요.

이번에도 오슬란은 자신이 숨겨 논 군용 살상 로봇 무기로 수송 부대의 멤버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초병을 보내 끊어진 열차 칸 안의 평민들을 추격하게 했어요.

이 내용은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모두 증명할 수 있어요.

그들은 그 재난의 생존자였고, 진짜 원인은 알지 못하더라도, 오슬란 일당들의 행동을 직접 목격했어요.

뒤편에 모여 있던 평민들이 바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노안의 말에 동조하며,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질타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오슬란은 비웃기만 할 뿐,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우리 증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돼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 것 같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에게 물어보지. 우리가 오셀럼호의 제작 당시에 투자한 최초의 바람은 무엇인가?

맞아. 사랑과 희망이지. 세계 각지에 전하는 사랑과 희망 말이야. 수송 부대의 행위는 우리가 바란 최초의 바람과 부합하는가?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지구를 탈환하고, 황금시대의 영광을 재건하기 위해선 개인의 수고가 불가피하지. 단지 힘들다는 것 때문에 오셀럼호를 폭파하다니, 얼마나 수치스럽고 이기적인 행동인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개체의 고통도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17년 동안 하층 칸 모든 사람의 발악과 고생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면, 노안도 이 귀족들처럼 강 건너 불 보듯 했을 것이었다.

정해진 박수와 갈채가 울리기 전에, 노안은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레이첼 대장님의 단말기가 아직 제게 있어요.

뭐?!

전 대장님의 단말기에 기록된 내용을 봤어요. 지난 20년 동안의 장부, 보고서, 통신 기록, 계약서 그리고 회의 감시 기록까지 대장님은 하나도 삭제한 적이 없어요.

이것만 있으면, 오슬란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또 누가 모두를 억압했는지, 오슬란에게 반항하려는 귀족을 누가 암암리에 죽였는지 증명할 수 있어요!

당연히 네놈이지.

네?!

넌 줄리의 아이잖아? 네 아버지도 예전에 내 부하였어.

네 아버지의 범행 기록은 아직 남아있어. 네 아버지가 처벌받기 전에 레이첼이 보복하기 위해 먼저 죽였을 뿐이야.

그 말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네 어머니 줄리가 계속 원한을 품고, 레이첼을 도와 장부를 수정했다. 그리고 물자를 횡령했다는 명확한 심문 기록을 가지고 있어.

넌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레이첼의 곁에 잠복했어. 그리고 기회를 잡아 레이첼을 직접 죽이기 위해, 때아닌 폭동을 일으키도록 레이첼을 부추겼어!

상층 귀족1

사실은 수송 부대의 내분이었던 걸까?

상층 귀족2

열차 칸을 점거한 평민들은 사고를 일으키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상층 귀족3

평민들은 다 똑같아! 교양과 품위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 폭력만 쓸 줄 알지!

귀족의 부하1

맞습니다!

귀족의 부하2

정말이지. 무섭기 짝이 없네요!

오슬란이 이전의 발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또 다른 논리로 노안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하더라도, 귀족과 그들의 부하들은 오슬란을 열렬히 지지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오슬란은 지금까지 어떠한 증거를 내놓지도 못했어요! 당신들은 왜 오슬란을 지지하는 거죠?!

노안이 큰 소리로 외쳤음에도, 사람들은 노안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슬란이 이끄는 대로 토론했다.

상층 귀족1

범죄만 일으키는 평민들을 쫓아내자!

상층 귀족2

우리는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다!

그거 아나?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말 중에 "지록위마"라는 말이 있지.

오슬란은 침착하게 노안에게 다가가, 귓가에서 작은 소리로 비웃었다.

지록위마의 뜻은 한 승상이 왕위를 빼앗으려 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왕을 따르는지 모르는 거야. 그래서 승상이 왕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고는 그걸 말이라고 우겼지.

왕은 당연히 믿지 않았지. 그래서 신하들에게 물어봤어. "이것이 사슴인가, 아니면 말인가?"라고 말이야. 네 생각에는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많은 신하가 말이라고 대답했어.

넌 사슴을 말이라고 한 사람들을 바보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라고 한 사람들이 똑똑하다는 거야. 사실을 말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거니까.

…………

오늘은 공중 정원에서 귀빈도 왔으니, 일을 너무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단말기를 내놔.

…………

단말기를 쥔 노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폭로했는데, "일을 너무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라고요?

공중 정원의 구조체들은 예전부터 나와 협력하는 관계다. 나중에 그들을 "위로"하고,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하기만 하면, 그들은 기꺼이 떠나게 될 거야.

합리적이라고요?

노안은 자밀라 왕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자밀라는 그 말을 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겁이라도 먹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옆 사람과 작은 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노안은 그 이름 모를 소년 구조체와 애스턴을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근처의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어서 도움을 청하는 눈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이 거센 물결 속에서 노안은 책에 있던 황금시대의 질서와 법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혼란스러운 종말 아래, 실권을 쥐고 있는 "수장"만이 준수해야 할 규칙을 정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불타오르도록 소리쳐도, 이 어두운 사회를 불태울 수 없었다.

그래도, 노안은 마지막으로 시도해 보려고 했다.

저기!

……?!

단말기를 쥔 손을 든 노안은 소년 구조체가 있는 방향에 전력으로 던졌다.

다음 순간...

수많은 총알이 사람들의 그림자 속에서 날라왔다. 그리고 미처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노안에게 명중했다.

윽!!!

그 순간, 가슴과 복부의 극심한 통증이 노안의 의식을 앗아갈 뻔했다.

이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추억을 통해 미래에서 과거로 질문을 던지려는 것처럼,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안

의미?

노안은 힘을 내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오슬란이 정한 규칙을 입을 모아 강조하기만 할 뿐이었다.

다음 총알의 표적이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주위 사람들의 외침에 초병은 그 소년 구조체를 에워쌌고, 방금 건네받은 증거물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구조체 소년은 자밀라 왕녀의 입장에 제약받아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헛된 노력이야. 너의 선택은 잘못됐어.

노안

모두의 소원이라면...

그 "증거"가 수송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가 비웃는 소리를 냈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시선 속에서 노안은 소년 구조체가 들고 있던 단말기가 총알에 명중되는 것을 봤다.

노안

…………?

잔해들이 바닥에 널브러졌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멋대로 이를 밟고 지나갔다.

네 선택은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했어.

노안

안 돼.

노안은 떨리는 손으로 잔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노안의 손가락까지 그 잔해들과 함께 발밑에 밟혔다.

노안

돌려줘!

심장을 뚫고, 뼈를 도려내는 가슴의 아픔이 영혼을 내리쳤다.

노안이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레이첼의 말을 듣고, 오슬란에게 모든 것을 줬어야 했던 걸까?

아니. 그건 노안이 바라는 길이 아니야.

그럼, 지금이 네가 바라던 길인가?

노안

아니. 난 단지...

난 하층 칸 사람들이 더 이상 굶어 죽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평등한 보상과 생존 공간을 얻을 수 있길 바랄 뿐이야!

이 소리 없는 외침도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에 묻혔다. 만 명에 가까운 하층 칸 사람들의 숙원도 꺼진 불꽃처럼 끝없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슈렉, 후회하니?

아직 살아있네.

노안을 열차 밖으로 던져버려.

후회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