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사의 두 손을 잡는 순간, 봉쇄된 수문이 와르르 무너졌다.
먼지로 뒤덮인 옛날과 최근의 혼란이 맞물렸다. 그리고 서로 갈기갈기 찢으며, 무질서한 나선을 이뤘다.
하, 난 그의 말대로 오슬란 앞잡이 일을 해왔어.
오슬란과 협력하기로 결정한 뒤, 무기를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을 때부터, 난 성공할 수 없었던 거야.
그들이 모두 죽었다고? 어째서? 왜?
네 사과 따윈 필요 없어! 네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 그들과 다르다고 했잖아! 네가 승격자의 옆에 섰을 때부터!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었어!
온통 핏빛인 붉은색과 수많은 비명이 그의 앞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노력하고 기대해 온 결과라면, 이보다 처참할 순 없겠어.
혼란스러운 기억은 흩날리는 큰 눈으로 변해, 감당할 수 없는 눈사태를 일으켰다.
우리가 틀렸어. 아무도 선별을 통과할 수 없었어.
이게 바로 대가겠지.
추억의 끝에는 차가운 눈 속에 누워있는 유일한 생존자가 칠흑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격 네트워크의 은혜를 받아들여.
무한한 어둠 속에서 내리는 눈이 슬픔이 섞인 비웃음을 내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야.
나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것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네?
정신을 차린 노안은 자신이 레이첼의 칸막이 방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은 새벽 1시였고, 노안은 레이첼의 지시에 따라, 벨라·베테가 운반해 온 마지막 무기를 G 열차 저장 칸에 숨겼다.
노안은 상층 초병과의 전투가 7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기억했다.
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해. 방금 네가 레이첼 대장에게 왜 오슬란과 협력했는지 물어봤잖아?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했어요. 다시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어차피 곧 전투가 시작될 텐데,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해봐, 다 대답해 줄게.
레이첼은 손에 든 잔을 들어, 양조주 한 모금을 마셨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것밖에 없어.
레이첼은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당시 수송 부대는 오합지졸이었어. 더 많은 배당을 받기 위해, 더욱 안전한 도시로 가기 위해, 소대끼리 충돌하는 일도 잦았지.
난 이런 상황을 바꾸고 싶었지만, 주먹 외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폭력은 반드시 사람을 단결시킬 거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기만 했어.
그런 무식한 생각은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 내가 무슨 일을 좀 벌이려고 할 때마다, 귀족에게 대가를 강요당했고, 귀족이 날 열차에서 내던져지려고 했을 때, 줄리가 날 구해줬어.
어머니가요?
응. 줄리는 그때 네 아버지와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됐는데, 능력이 출중해서 네 아버지의 비서 중 한 명으로 있었어.
줄리는 하층 칸의 혼란을 지켜볼 수 없어서 내게 손을 내밀었어. 우리는 반복 의논한 끝에,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찾았어. 그게 바로 오슬란이었지.
말하자면, 네 아버지가 날 오슬란에게 추천해 줬어. 그래서 난 황족을 대신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오슬란을 만나게 됐어. 그리고 거래도 성사시켰지.
난 하층 칸의 무장 폭동에 참여해서 협조하지 않는 귀족들을 협박하는 걸 도왔어. 그 대가로 오슬란은 연줄을 통해 내게 물자를 제공했는데 나더러 상층에 대한 반항을 이용해 모두의 마음을 모으라고 지시했어.
여러 차례 반항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모두가 날 "만능 영웅"으로 여겼고 날 수송 부대 총책임자로 내세웠어.
그 누구든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도움을 청했지, 내 배후에 실권을 잡은 귀족이 있었으니...
참 아이러니하지? 하지만 그때의 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었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어.
걱정하지 마. 넌 해결할 수 있어. 이 침식체들은 모두 네 명령을 들을 거야.
눈앞의 장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하얀 안개가 자욱한 항구로 옮겨졌다. 혹사는 옆에 있는 청년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인내심 있게 청년의 행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건 노안이 구조체로서 막 깨어났을 때의 기억으로, 자신의 신분과 승격자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곁에 있었으면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알려준 이 사람을 쭉 믿고 있을 뿐이었다.
도전해 봐. 넌 저것들을 황금시대의 질서로 되돌려서, 물건을 옮기고, 폐허를 재건하게 할 수도 있어.
습관이 되기 전까지는 많은 양을 제어할 수는 없을 거야.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저것들은 내 명령에 잘 따르지 않는 것 같은데.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노안의 손목을 잡은 혹사는 비틀거리는 구조체를 향해 가리키게 했다.
침식된 구조체들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고, 구하고 싶은 사람을 구하게 해봐.
고통스러운 무력감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웅"이 돼 봐.
…………
왜 그래?
넌 이런 힘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경각심은 분명히 "상인"의 영혼에 깃든 천성이었다.
난 네가 우리의 동료가 되기를 바랄 뿐이야. 선별을 통과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아. 그래서 네가 정말 소중하거든. 여기 남았으면 좋겠어.
네 동료가 된 후에는? 넌 내가 뭘 해줬으면 하는데?
내게 충분한 "지원"을 제공한 후, 오슬란이 내게 지시하는 일도 점점 많아졌어.
눈앞의 광경이 다시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그날 밤으로 전환됐다. 레이첼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술잔을 보며 자조 섞인 냉소를 지었다.
과거의 장면을 본 청년은 불안 속에서 어떤 위험을 감지했다. 기억에 따르면,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불과 7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그녀는 아사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걸까?
처음에는 악질 녀석들을 처리하는 거였는데... 그 뒤로부터 무고한 사람들이 조금씩 연루되기 시작했어.
그러던 어느 날, 오슬란은 네 아버지를 처리하라고 지시했어, 그 이유는... 그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미안해.
근데 오슬란이 우리 말고도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녀석들을 더 고용할 줄은 몰랐어. 정작 알았으면 작전을 포기하더라도 줄리나 네 아버지를 제대로 지켰을 텐데...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지. 결국 줄리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배 속에 있는 너와 함께 하층 칸으로 전락했어.
그 이후로 줄리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어. 예전에 즐겨 보던 책과 영화 그리고 굳게 믿었던 꿈까지 가면 아래에 숨겼고 다시는 드러내지 않았어.
대항할 기회를 얻고, 오슬란의 통제에서 수송팀을 벗어나게 하려고, 줄리는 제 제안을 수락했어요. 장부에 속임수를 써서, 수송팀의 무기를 조달하는 데 지원해 줬어요.
이 일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귀띔해 줬을 수도 있고.
응, 사람들이 알려줬어.
그럴 줄 알았어. 세나와 위란 그 녀석들이 널 속일 수는 없을 거 같았거든.
레이첼은 술잔 속의 탁한 액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는 나랑 아사와 달리, 악당이 될 소질이 없었어. 장부를 고치기 시작한 이후, 줄리는 계속 극심한 긴장상태를 유지했어.
말로는 너더러 우리랑 같이 있으라고 하지만, 혹여 네가 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자기 시선 범위를 벗어나면 엄청 불안했어.
그래서 제가 도서 보관창고에 출입하는 걸 허락했던 건가요?
맞아. 원래는 "그렇게 걱정되면, 아이를 데리고 다녀"라고 말했는데, 줄리는 너랑 너무 가까워진 다음, 언젠가 자신의 죄가 발각됐을 때, 네가 범죄를 저지른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어.
줄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이건 모두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라고 자기암시를 하듯 반복했어. 그리고 나서 또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 넌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했어.
당신이 그림에 시간을 너무 낭비해서 살아남지 못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에, 항상 당신에게 엄격했던 거예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살기를 기도했어. 독서를 하거나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랑 어울리거나... 또는 그림을 그린다던가.
어머니는 제게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남아"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럼 나도 당부 한마디 할게. 네가 원하는 미래가 어떻든 간에, 날 따라 배우지는 마.
어머니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레이첼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웃었다.
레이첼 대장님?
그래. 어떤 일은 처음부터 틀려먹은 건데...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계속 틀릴 수밖에...
이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 이렇게 잘못될 수밖에 없어.
첫 번째 기억상실이 있고 난 후, 다시 깨어난 것은 어느 오후였다.
혹사는 끝없이 펼쳐진 적조 앞에 서 있으면서, 품에 안은 유리병을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난 모두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퍼니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뒤, 어떻게 하면 퍼니싱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 왔어.
네 표정은 마치 승격자인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네.
혹사는 손에 든 유리병을 들고, 슬픈 표정으로 내용물을 바라봤다.
이건 모두 내 "가족"들의 유품이야.
난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자랐어.
아이에겐 지옥이지만 어른에겐 낙원이었던 곳이었어. 그 안에서의 생활은 매 순간이 너무 힘들었지만, 아이들과 "어머니"는 서로를 보호하며 살아왔지.
난 비열한 사람을 봤고 사심이 없는 사람도 봤어,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도움을 받기도 했지. 인간에 대해 난 단순한 사랑이나 한을 품고 있는 게 아니야. 좀 더 복잡한 감정이고, 이 점은 퍼니싱도 마찬가지야.
재난의 폭발하자 견고한 우리 같았던 보육원은 허물어졌어. 그리고 나와 내 형제자매는 "어머니"의 안내로 그곳에서 탈출하게 됐고,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었어.
그래서... 이 재난에 감사한 적이 있었어.
퍼니싱이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하나씩 빼앗아 가기 전까지는 말이야.
이제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어?
…………
난 모두를 보호하고, 남아 있는 모든 동료를 보호하고 싶을 뿐이야.
두려워하지 마. 적조는 그렇게 잔혹한 산물이 아니야. 적조에 들어간 사람들은 더 이상 개체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다시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거야.
이게 제일 나은 선택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어.
무엇으로든 남을 수만 있다면, 그들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해도, 진정한 죽음보다는 나을 거야.
완전히 죽으면, 남겨진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만 그녀의 그림자를 다시 볼 수 있어.
혹사는 누군가의 가장 소중했던 유품을 쓰다듬는 것처럼, 자신의 긴 보랏빛 머리를 손으로 넋을 잃은 채 쓰다듬었다.
허상이 된 "조각"보다는 진짜 사람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면, 배신을 당하게 될 거야. 절대적인 우세와 힘을 손에 쥐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보호하고 싶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어.
난 이런 교훈을 충분히 겪었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수송 부대의 최후를 아직 기억하니?
최후?
기억 안 나? 하긴, 처음으로 기억을 잃은 게 아니니까.
그럼, 지금 기억을 떠올려 봐. 그런 다음에 네 선택을 알려줘.
그건 우리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잖아!
뒤엉킨 사고와 잡음은 다시 한번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날 밤으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무기상들이 열정만으로 너에게 무기를 지원할 수는 없잖아?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야. 더군다나 행운의 박스가 생긴 뒤, 수송 부대의 신뢰도도 예전 같지 않아. 그래서 빈손으로 가면, 아무도 네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난 항상 레이첼과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오슬란과 협력해서 행운의 박스 수익의 일부를 나눠 갖는 것에 대해선 레이첼이 옳았다고 생각해.
오래전부터 행운의 박스를 팔지 않았는데, 최근 물자들은 어디에서 온 건가요?
그리고 바바리도.
어머니의 직위를 대신하는 사람 말인가요?
그래. 내 아내 말이야. 바바리는 예전에 요리사였어. 그래서 요리를 엄청나게 잘해.
하지만 대장님은...
난 바바리를 믿을 수 없어. 아사와 바바리는 뒤에서 계속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 같아. 그리고 여러 차례 "식중독"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어. 난 바바리가 저질렀다고 의심하지만,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고.
아사가 우리에게 협력하는 건, 상층 칸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만일 상황이 좋았다면, 분명히 우리의 처지를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
그걸 알면서도, 대장님은 왜 아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건가요?
아사는 수송팀과 상층 모두에 인맥이 있어. 그래서 아사는 내게도 이용 가치가 있지.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안정적인 물자 출처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이게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녀가 장부를 조작해서 얻은 물자는 수송 부대와 일벌 부대에 대한 보수였어. 따지고 보면 우리 것이었지.
배고픈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서 아무나 물게 될 거야.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녀석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결국엔 적을 도와 우릴 와해시킬 것 같아.
얼마나 됐든, 발견하면 열차에서 던져버리면 돼!
그때, 밴크로프트도 그렇게 한 건가요?
…………
네가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알코올이 효과를 좀 발휘한 건지 아니면 질문받는 거에 지쳐서인지, 아사는 이번엔 그렇게까지 단호한 부인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일부러 밴크로프트를 괴롭혔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밴크로프트의 아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된 건지는 나도 몰라.
어쨌든, 밴크로프트와 같은 골칫거리가 아들을 찾기 위해 사라진 게 난 기뻐. 그리고 굳이 힘들여서 밴크로프트를 다시 찾아오고 싶지도 않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밴을 해쳤다는 건 아냐. 알겠어?
…………
노안, 곧 18살이지?
네.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죠?
펠드가 실종된 지도 5년 정도 됐네.
…………
네가 074호 도시에 가서 펠드를 찾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수송팀 임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지. 그리고 그곳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넌 단서조차 찾지 못한 것도 알고 있어.
사실 나도 같아. 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펠드의 소식에 대해 알아봤어. 소식이 조금씩 들어오긴 했지만, 펠드의 소식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매번 너에게 말하지 못했어.
정말요? 대장님은 펠드의 소식을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말했잖아. 펠드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열차의 일이 일단락되면, 수송팀을 떠나 직접 펠드를 찾아보도록 해.
저더러 수송팀을 떠나라고요?
응. 대부분 사람은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노안, 넌 그들과 달리 아직 젊으니, 열차를 떠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레이첼, 언제 행동할 거야?
빠를수록 좋아. 무기가 열차 칸 안에 쌓여 있어서, 시간을 더 끌면 더 위험해져. 며칠 후에 두 소대가 돌아오면, 계획을 배정할 거야.
남은 술을 삼킨 레이첼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놨다. 노안은 그때야 일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첼 대장님, 오늘 술을 얼마나 드신 거죠?
하하, 한 잔만 마셨어. 그리고 레이첼의 주량이라면 10분 정도만 버틸 수 있을걸.
몇 모금으로 취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지, 술이 그렇게 비싼데.
빨리 정보도 확인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이대로라면...
오늘 밤은 괜찮아. 부대는 그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을 거야. 우선은 너에게 맡긴 "숙제"를 보여줘. 에너지 검은 다 조립됐나?
네.
노안은 레이첼에게 에너지 검을 건네줬다. 레이첼은 흐릿한 불빛에 비추면서 꼼꼼히 살폈다.
잘했어. 독학 능력이 아주 뛰어나군.
각각의 부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내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어요.
인내심 있게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해. 이런 일을 아사나 그의 부하 녀석들에게 맡겼다면...
하하,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내 부하들은 그 부품을 술로 교환해 올 거야.
…………
전에 어머니는 "책을 태워 몸을 녹이는 바보가 되지 말거라."라고 하셨어요. 책을 통해 배움을 얻은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요.
"책을 태워 몸을 녹이는 바보가 되지 말거라."
맞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태워 몸을 녹이는 사람은 확실히 바보가 맞지.
레이첼은 술잔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증오의 표정을 지었다.
가끔은 널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 줄리가 한 말 중에 대부분이 맞구나 싶어.
고개를 숙인 레이첼은 말문이라도 열린 듯 끊임없이 말을 했다.
어르신들은 종종 "태도가 인생을 결정한다"라고 하셨지. 넌 인내심 있게 이해하고 배웠으니, 스스로 흙 속에 누운 대다수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셈이야.
줄리는 네가 아홉 살이 됐을 때, 널 수송팀에 보내려고 했잖아.
사실 줄리가 워낙 마음이 급해서 그랬던 거야. 줄리의 건강이 계속 안 좋았거든, 게다가 또 그런 일까지 있었지... 자신이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떠나고 너 홀로 살아남기 어려울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
…………
어머니는 그런 일들을 저에게 말해주지 않으려 했어요. 그때 대장님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편찮으셨다는 걸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전에는 그냥 자주 기침하는 정도로만 알았거든요.
아니, 넌 줄리를 잘 알아, 나중에 거울 찾아서 한번 봐, 지금의 넌 줄리와 거의 똑같으니까.
레이첼의 두 눈은 취기에 흐트러져 있었다.
저랑... 같다고요?
그래. 줄리가 그 가면을 쓰기 전, 지금의 너랑 키도 비슷했고 너랑 똑같이 고집스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어.
머리랑 옷은 까맣고, 걸음 걸을 땐 고양이처럼 소릴 내지 않았어. 밤에 불을 켜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가끔 네가 반딧불이를 어깨에 놓고 다녔으면 좋겠어. 야간 화물을 수송할 때, 바로 찾을 수 있게 말이야.
전 가능한 한 소리를 낸 거예요.
싸움 나면 어떤 게 네 목소리인지 구분이 안 될 것 같아.
노안의 검은 머리를 바라본 레이첼은 어떤 웃긴 장면이 생각난 듯,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니면 그냥 머리카락을 무지개색으로 염색하는 건 어때?
남 괴롭힐 힘이 있으면, 네 야맹증부터 치료해.
나한테 야맹증이 있을 리가!
없긴 왜 없어? 작년에 의사가 비타민 A를 처방해 줬잖아. 올해까지 먹었는데도 반병 남아서, 결국 다른 사람에게 줬잖아.
게다가 지금 염색할 여유가 어디 있어. 노안이 구조체가 된다면 또 모를까.
그렇게 쉽게 구조체가 될 수 있었으면, 우리도 여기서 목숨 걸고 있지 않을 거야.
노안은 아직 적응성 테스트받지 않았지?
무슨 적응성이요?
탄탈 뭐라고 했는데, 까먹었어. 적응성만 있으면, 구조체가 될 수 있대.
개조를 받을 때, 횡사할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됐어. 이런 일들은 나중에 알아서 찾아보라고 해. 젊으니까 아직 기회는 많아.
취기가 오른 레이첼은 손을 저었다.
어떻게든 난 널 살아남게 할 거니까.
어떻게든? 무슨 뜻이죠?
무슨 뜻이냐고?
모든 게 끝나면 알려줄게. 지금은... 어떤 일도...
확신할 수 없어서 말이야.
레이첼은 테이블 위에 털썩 쓰러졌다.
레이첼 대장님?!
그냥 자게 둬~ 어떤 일들은 마음속에 오래 묵혀두면 안 돼서 털어놔야 해.
게다가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대장은 슈퍼맨이 아니니까 술기운을 빌려서 풀게 해준 거야.
…………
대장님을 누울 수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하시죠.
그래~
레이첼을 눕힌 후, 노안은 담요를 구해 덮어주려고 했지만, 칸막이 방에는 의자에 걸려있는 코트밖에 없었다.
가져가지 마. 그건 내 옷이야.
죄송해요.
노안이 아사에게 코트를 돌려주려고 했을 때, 옷깃이 접혀 있는 곳을 의도치 않게 만지게 됐다. 그때 노안은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
왜 그래?
당신의 옷에...
옷깃을 뒤집어 자세히 검사한 노안은 접힌 부분에 잘 보이지 않는 수선 흔적을 발견했다.
노안이 조심스럽게 봉합선을 뜯어보자, 그 안에서 얇은 소형 기계가 떨어졌다.
이거 도청기잖아요? 언제부터 도청기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
아사 씨!
그게...
눈을 피하면서 잠시 망설인 아사는 옷을 빼앗고는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됐어. 몇 시간 정도만이야.
코트를 평소에 잘 입지 않기는 한데, 어제 바바리가 선물로 줬어.
그동안 우린 후속 계획과 무기가 열차에 옮겨진 것에 관해 이야기를 계속해 왔어요. 그리고 레이첼 대장님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안 된다고도 말했어요.
바바리는 내가 밖에서 새 애인이 생기지 않았는지, 통신 기록엔 뭐가 있는지, 만나는 여자 모두를 알고 싶어서 그런 거야. 무기엔 전혀 관심 없어.
걱정하지 마. 나랑 레이첼은 계속 바바리가 해주는 밥을 먹었어. 게다가 바바리는 예전부터 우릴 도와서 장부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모두 한배에 탄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의심하는 거야?
내가 지금 바바리한테 가서 외부에 누설하지 말라고 할게. 그럼 됐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지금에 와서 어떡할 건데? 레이첼은 술에 취하면 적어도 5시간은 자야 하니깐, 5시간 동안은 깨울 생각하지 마. 신야와 세나도 아침이나 돼야 열차로 돌아올 거야.
너 아직 밥 안 먹었지? 테이블 위에 통조림이 좀 남았을 거야. 통조림 먹고, 집에 가서 좀 자도록 해. 레이첼이 일어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안 돼요. 이건 너무 위험해요.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넌 왜 레이첼처럼 아무도 믿지 않는 건데? 바바리는 수송팀을 도와서 정말 오랫동안 물자를 조달해 왔어. 발각되면 바바리에 무슨 이득이 있는 건데? 우리 부부의 사생활이라고 했잖아. 뭘 그렇게 많이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보지 마.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어서 바바리에게 돌아가야 해. 쓸데없이 떠벌여서 망신 주면, 나중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왠지 모르게, 노안은 아사의 뒷모습을 보며 밴크로프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사 씨!!
지금의 아사는 당시의 밴크로프트처럼 다급해 보였다.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발걸음은 무겁게 휘청거렸다. 그렇게 열차 칸을 뛰쳐나간 아사는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