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격자?!
전투에서 철수한 구조체는 마침내 지원 인력과 합류했다.
우리 거점이 습격당한 것도 네가 한 짓이야?
아,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내가 있던 09호 의료 구역이 습격받으면서 주변이 적조로 둘러싸였어. 통신 신호마저 차단된 상태라, 다른 사람들은 방호복이 있어야 이동할 수 있어. 그래서 내가...
승격자의 말을 누가 믿어!
난 승격자가 아니야! 단지...
나도 지금 내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러니 날 경계해도 좋아, 다만 내 말을 꼭 믿어줘!
09호 의료 구역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남았어. 여과탑의 효율에 한계가 있어서, 더 이상 지체했다간 사고가 날게 분명해.
네가 우릴 속여서 죽이려는 게 아닌지 어떻게 알아!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믿어줄 수 있는 건데?
네가 뭘 해도 널 믿지 않을 거야!!
각자의 무기를 꺼낸 구조체는 노안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칼과 총알이 노안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여러 개의 혈흔을 남겼지만, 노안은 끝내 반격하지 않았다.
피하기만 하지 마!
여성 구조체는 끊어진 돌계단을 훌쩍 뛰어넘었고, 높이 차이를 이용해 손에 든 장검을 노안에게 휘둘렀다.
도망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거야?
난 09호 의료 구역 사람들을 대신해서 구조 요청을 하러 온 거야.
승격자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군!
아니라고!
해명을 마치기도 전에,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노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고, 조금씩 구조체의 포위망에 들어가게 됐다.
죽여!
구조체의 명령에 따라, 폐허 속에 잠복해 있던 구조체들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그리고 노안이 탈출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봉쇄했다.
구조체들이 노안을 찌르려는 순간, 공기 중의 퍼니싱 농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그리고 노안의 발밑에서 제어가 되지 않는 수많은 선홍빛 가시가 구조체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조심해!
가시가 최전방의 구조체를 찌르려는 걸 본 노안은 급하게 맨손으로 가시를 잡았다. 하지만 가시는 제어가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노안의 손바닥을 꿰뚫어버렸다.
……!
이러고도 네가 승격자가 아니야?
포기하지 않은 구조체가 다시 무기를 들고 노안을 찔렀다. 하지만 가시들은 화살로 구성된 포대처럼, 언제든 공격할 준비가 돼 있었다.
미안해. 난 이 힘을 제어할 줄 몰라. 그러니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도대체...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야. 난 조금도 너희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
난 구조 요청하러 왔어. 09호 의료 구역 사람들이 적조에 갇혀있어. 이것만이라도 믿어줘.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여성 구조체가 단말기에 통신 요청을 보냈다.
어떻게 됐어?
승격자가 말한 것과 같이, 09호 의료 구역에 응답이 없어.
이게 함정이라면, 우린 죽게 될 거야.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구조대를 불러서 같이 가보는 건 어때? 인원이 많으면 안전성도 높아질 거야.
지금 다른 거점도 우리와 같은 상황이야!
배신자를 조사하러 내려온 엘리트 소대가 아직 근처에 있을 텐데,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
일단 요청을 전송해 봐.
고마워.
쟨 어떻게 할까? 자료에 있던 승격자와는 달라 보여.
엘리트 소대에게 맡길까?
엘리트 소대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 되니 상관없겠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는 누가 올지에 따라 다를 거야.
그럼, 난 이곳에 남아 있을게. 필요하다면 감시해도 돼. 난 09호 의료 구역이 지원만 받을 수 있으면 돼.
…………
구조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잠시 낮은 목소리로 의논했다.
구조 요청은 전송했어. 엘리트 소대와 합류한 후, 우리도 함께 09호 의료 구역으로 이동할 거야.
고마워.
널 감시하는 건 의미가 없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네가 방금 보여준 전투 능력으로 볼 때, 네가 맘만 먹으면 우리 몇 명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을 거 같아.
그럼, 난 이곳에 남을게.
…………
정말로 믿어도 되는 거지?
날 믿어줘.
…………
여러 가지 의심이 들긴 했지만, 구조체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트 소대에 맡기자. 곧 그들이 올 거야.
…………
모두가 떠나는걸, 눈으로 배웅한 노안은 곁에 있는 날카로운 적색 응집체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난 대체...
승격자나 수격자가 아니더라도, 노안의 몸에선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의 적이 되고 싶지 않아. 이 힘을 제어할 수 없다면, 구조체들이 말한 엘리트 소대에 날...
잠깐만...
갑자기 깊숙한 골목에서 누군가의 허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사? 어떻게 이곳에 온 거지? 넌 저 적조들을 건널 수 있어?
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괜찮아. 그리고 내가 구조 요청을 해놨어. 그런데 아직 내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어.
노안의 손을 걱정스럽게 바라본 혹사는 그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손에 상처가 있어.
잠깐만. 오지 마. 난 아직 이 가시들을 제어할 수 없어. 난 아마도...
승격자일 거라고?
…………
날 다치게 하고 싶어?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난 제어가 안 돼.
그럼, 넌 그걸 제어하고 싶어?
어.
그러면 승격자를 찾아가 볼래? 승격자만이 이 힘을 제어할 수 있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어?
배신한 구조체를 많이 봤었거든.
무슨 뜻이야? 너도 배신자였어?
혹사는 대답하지 않고 노안의 두 눈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노안에게 다가갔다.
혹사, 다가오지 마.
괜찮아. 난 다치지 않고, 그걸 제어할 수 있어.
혹사의 말대로 그녀가 노안의 다친 손을 잡을 때까지 가시들은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넌 도대체 누구야? 나한테 알려 줄 수 있어?
알겠어. 알려줄게. 하지만 우선은 네 상처부터 치료하자.
혹사는 간단한 도구를 꺼내, 부드럽게 청년의 손에 생긴 상처를 치료해 줬다.
이런 "이상"들을 무서워하지 마. 이걸 받아들이고, 제어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을 해치지 않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할 수도 있어.
구한다고? 널 만났을 때, 옆에 있던 동료는 왜 그렇게 된 거야?
그들은 거절해선 안 될 일을 거절해서 벌받은 거야.
벌?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반드시 벌받아야 해.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어둠으로 덮여 있던 시간에 흐릿한 조명이 밝혀진 듯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그리고 가느다란 실마리를 통해 막혀있던 사고가 풀려나갔다.
조수처럼 밀려오는 기억 속에서 노안은 눈앞의 혹사를 자세히 바라봤다. 그리고 노안의 표정은 걱정과 곤혹스러움 그리고 깨달음을 거친 다음,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혹사, 넌...
응?
망설임과 호기심을 여러 번 반복한 노안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입 밖에 꺼내기로 했다.
너 남자지?
…………
기억났구나.
맞아. 그때, 날 구조체로 개조한 게 너 맞지?
맞아.
왜 거짓말을 했지? 음, 그게 아니고.
처음에 널 만났을 땐 내가 기억을 잃은 거야. 넌 성별을 숨기지 않았어.
고개를 돌린 혹사는 한탄의 비웃음을 터뜨렸다.
중점은 그게 아니야. 애초에 우리 곁에 잠복해 있던 승격자가 바로 너였구나?
그래. 맞아. 난 네가 자신을 제어할 수 없고, 또 날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이렇게 곁에 있을 수밖에 없었어.
나와 함께 돌아가자. 네 "이상"이 몸에 뿌릴 내리고, 싹을 틔웠어. 내가 이 힘을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
노안은 다시 한번 완전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 봤다. 예전에 완강히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답변했다가는 "혹사"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안 돼. 난 아직 기억을 다 되찾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말한 것 중에서 어떤 게 사실인지 판단할 수 없어.
이전의 일을 추억하는 건, 너한테 좋을 게 없어.
내 기억이니, 내가 알아서 판단할게.
전에 많은 사람에게 포위돼서 토벌당했던 것까지 생각나길 바라는 거야?
뭐?
넌 벌써 4번이나 기억이 제거됐었어. 저번에도 지금처럼 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서, 승격자의 힘을 제어하지 못했어. 제어 불가 상태가 되면, 걸어 다니는 표적처럼 많은 사람이 비난하는 대상으로 변해버릴 거야.
널 보호하기 위해서 난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뭐라고?!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넌 많은 사람이 죽는 것만 보면 의식의 바다에 혼란이 생겨버렸어. 이런 일들이 기억나지 않아?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아직도 모든 기억을 되찾은 후에 결정하기를 원하는 거야?
맞아.
알았어. 지난번과 지지난번에도 넌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항상 대답하기 전에 의식의 바다가 혼란에 빠지곤 했지.
그래도 괜찮아. 기억을 되찾고 싶다 하니까, 네 소원을 들어줄게.
이리 와. 슈렉.
노안은 조용히 자기 손을 내밀었다.
네가 날 이해해 주고, 나와 가족이 되는 순간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