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천천히 흘러, 또 2년이 지났다.
소년이 13살이 되었을 때, 평민 칸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아졌다.
일벌 부대의 멤버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아딜레 상업 연맹이 모든 하청을 맡더라도, 여전히 일부에게만 분배될 수 있었다.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졌지만, 그들이 받게 되는 보수는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작업 중에 사망자가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화제가 아니었으며, 사람들은 무감각해지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질병에 걸려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제정신인 사람들은 이런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저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심사를 통해 하층 칸의 정식 부대에 가입해, 자기 기술이나 무력으로 생계를 꾸리는가 하면, 귀족들에게 은밀히 뇌물을 주어, 상층 초병의 일원이 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뇌물을 준 사람들의 능력은 다른 초병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거지만, "그런" 연결고리가 있는 한, 아무도 그들에게 상처 주지는 못할 것이었다.
지낼 곳을 찾은 "생존자"들 외에도, 많은 사람이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아딜레 상업 연맹을 떠났다.
하지만,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더욱 많았고, 그들은 행운의 박스를 위해 몇 안 되는 물자를 다 써버렸기에, 더더욱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일어나. 곧 역에 도착할 거야. 잠시 후 "자라 진상" 초병이 또 와서 재촉하게 만들지 마.
아사는 상층 초병의 필터 마스크가 뾰족해서 자라(鳖)의 머리처럼 보인다고 하며 상층 초병을 "자라 진상"이라 불렀다.
이번 임무도 역시 행운의 박스를 파는 거야. 한 묶음 5000개, 총 10묶음이야. 그래서 중간에 10 군데를 돌아다녀야 하고, 다 팔아야 돌아올 거야.
뭐? 5000개, 10묶음? 너무 많잖아. 저번보다 배로 많은데!
위에서 내린 임무야. 나한테 불평하지 마. 소용없어.
이번엔 뭘로 바꾸는 건데?
저번처럼 약품 위주야. 자, 교환 가격표는 컨테이너 위에 붙였어.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누가 이렇게 약을 많이 가지고 있냐고? 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뭐든 못 바꿀까.
저번에도 다 팔았잖아? 항상 귀신에 홀린 사람이 있어. 자신이 약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달라고" 할 거야. 그건 신경 쓰지 마.
계속 다투면, "자라 진상"이 또 와서 한바탕할 것 같아.
에이 ***, 뻑하면 트집 잡는 그 몇몇은 행운의 박스를 사서 승차한 일벌 부대 대원이었는데, 지금 신분 상승했다고 전에 쌓았던 원한을 열 배로 복수하고 싶어서 그러나 봐.
이게 무슨 복수인가요? "현장 감독"을 한다는 거잖아요?
하하하.
신야는 웃다가 정색한 뒤, 위란의 뺨을 토닥였다.
재미 없거든.
오래전부터 아사가 "자라 진상"이라고 부르는 상층 칸 초병은 "업무 효율"을 감독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하층 칸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가혹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초병은 판매와 회수를 관행적으로 검열하는 것 외에도, 폭력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억눌렀고, 이에 따라 군중들이 종종 유혈 충돌을 일으켰지만, 레이첼은 좀처럼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위에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으니, 좀 더 숨겨야 해. 지금 그들과 충돌하는 것은 고통을 자초할 뿐이야.
이렇게 놔두면 안 돼. 다들 주먹 꽉 쥐고 있어. 저 사람들 좀 봐. 매일 와서 위세를 부리고, 규정도 엉망으로 수정했잖아!
공업 칸에서 일하면, 기존에는 양에 따라 결산하고, 한 만큼 물자를 결산 받았잖아. 나중에는 하루 성과를 미달하게 되면, 아무것도 안 준다고 했어. 그래서 그날은 헛수고만 하게 됐어.
지금은 한 사람만 성과에 미달해도 모두 보수가 없는 걸로 됐고, 근무 환경도 이전보다 백배는 나빠졌어!
아사가 말한 것처럼, "자라 진상" 초병은 매일 아침 무기를 든 채 하층 칸을 지나다니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골라서 공업 칸으로 데려가 일을 시켰다.
12시간의 연속 근무에도, 식사 두 끼와 추가로 음식 교환권 한 장만을 보수로 내줬다. 그래도 사람들은 보기 힘든 "안전한 일"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선발된 사람은 다른 50여 명과 함께, "자라 진상"의 감시 아래 원료와 부품이 가득 쌓인 공업 칸으로 이동해야 했다.
조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대부분 사람의 두 끼는 인스턴트 영양 수프 한 잔이었으며, 화장실과 빗물 여과 장치가 열차 칸 구석에 설치돼 있어서, 두 걸음만 걸어도 찾을 수 있었다.
변기는 어떤 덮개도 없어서 계속 냄새를 풍겼고, 빗물 여과 장치는 고장이 잦았다. 소년은 퍼니싱 함량이 너무 높은 물을 마시고, 죽는 사람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이 교환권이 후방 지원 부서에서 쓴 차용증으로만 교환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음식 교환권을 위해, 땀 냄새와 배설물로 가득 찬 열차 칸에서 12시간 동안 계속 일해야 했다.
조금만 태만해져도, "자라 진상" 초병은 손에 든 튼튼한 막대기와 기관단총을 휘둘렀댔다.
수송팀이 출발하지 못하면, 모든 사람이 보수를 받지 못한다!
한 사람의 피로가 모든 사람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군중 속의 증오는 제멋대로 자라나게 된다.
과거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물자를 얻을 수 있도록 제작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갈등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귀족들은 이 점을 노려, 지금까지도 이 방식을 쓰고 있었다.
이건 더 많은 사람을 돌보기 위한 것이야. 너희가 노약자와 장애인에게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디서 물자를 얻을 수 있겠어?
정말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서라면,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전원이 무급"이라는 규칙이 왜 필요했을까?
상층의 규정이 이래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날 원망하지 마. 난 단지 그들에게 목숨을 바쳐 일하는 것뿐이야. 서로 이해해 주자고.
상층 칸은 지금도 초병을 모집하고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입해서 이걸 바꿔봐. 상층 칸에 들어올 능력이 없다면, 너보다 뛰어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닌, 더 노력하도록 해!
네가 분투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네가 원한다면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너 자신을 믿어! 힘내!
성공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지. 실패를 위한 핑계를 대지 마! 인생이란 이런 거야.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어.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지. 고통은 경험이 될 수 있고, 밥에 바퀴벌레가 있다는 건 풍년이 가져다준 선물이야.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대응하면서 초병의 말솜씨는 능수능란해졌다.
모든 것을 바쳐 열차에 오를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대처할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됐을 때, 이들의 증오심은 웃으며 "행운의 박스"를 홍보했던, 수송 대원들에게로 옮겨갔다.
입주 심의에 통과하지 못하셨나요? 모든 것을 걸고, 열차에 오르세요! 아딜레 상업 연맹은 행운의 협력 동료를 모집합니다! 승차권 한 장이 당첨되는 게, 독학으로 심사를 통과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수송 대원들도 얼마 남지 않은 생존 공간을 빼앗겼을 때, 자신을 증오했다.
내가 뭘 선택할 수 있겠어?! 그들은 나보고 일하거나 꺼지라고 하는데, 내가 어떡할 수 있겠어?! 난 어린 동생도 있단 말이야! 지금 동생을 데리고, 어딜 갈 수 있겠어?
군중의 분노가 한데 모였음에도 풀리지 않자, 모두가 위험한 칼로 변했다.
대원들마다 자신의 고충이 있어, 그리고 모든 사람의 감정을 함부로 제어하길 강요하면 안 돼.
이 원한의 끝이 어디에 있든, 이곳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조건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현 상황을 바꾸기 어려웠다.
왔다 갔다 하는 건 너희들 자유야. 누구도 너희에게 여기서 일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어.
노숙자가 어디에 갈 수 있었을까? 이 혼란스럽고 황폐한 세계는 포화 상태가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많은 생명이 어쩔 수 없는 방랑의 길을 오르게 됐다.
정말 짜증 나! "그래. 알겠어. 확인했어."라고 말할 때마다, 화가 나서 가버리고 싶어!
하지만 짐을 쌀 때면, 수송 대원으로서 싸우는 것과 보초를 서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 공중합체 적응성이란 것도 없어서, 구조체가 될 수 없고, 어디로 갈 수 있을지도 도무지 모르겠어!
사람들은 분노, 공황, 불안을 겪으면서도 바꿀 수 없는 이별을 마주해야 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 어떤 무기를 들 수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결국에 크고 작은 항쟁들은 모두 실패했다.
연명하는 사람들은 윗사람과 다른 사람을 원망했고, 그보다도 자신의 무력함을 더 원망했다.
소년도 원망한 적이 있었지만, 그 원망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레이첼이 제대로 제어했다.
[--], 그들을 원망하지 마. 잘못은 계급과 규칙이 겹겹이 쌓여있는 아딜레와 문명을 무너뜨린 퍼니싱이지, 틈새에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
이럴 때일수록, 우린 하나로 뭉쳐야 해. 그것만 깰 수 있다면...
됐어. 모두 얼굴을 찡그리지 마!
…………
조금만 참으면, 레이첼이 곧 준비를 마칠 거야.
지금은 우선 일어나서, 정리하고, 행운의 박스를 상자에 담아!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좁은 "우리"를 뚫고 나와, 눅눅한 수건을 들고는 번갈아 사용하며,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숙인 채, 주변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옷들을 찾았다.
[--], 네 옷은 내가 다 꿰맸어.
감사해요. 힐 아주머니.
소년은 중지와 약지가 없는 노부인이 꿰맨 옷을 받아 든 후, 힐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아니야. 내가 고맙지. 네가 지난번에 날 도와서 그 박스를 더 접지 않았다면, 난 모두에게 폐를 끼쳤을 거야.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힐의 상처는 침식체로부터 도망쳤을 때 생긴 상처였는데, 그날부터 힐은 피와 충돌에 예민하게 됐다.
나도 이제 늙어서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네가 원한다면,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게.
힐이 자신의 부탁을 이어가려 하자, 갑자기 열차 칸의 안내방송에서 노랫소리가 울렸다.
참, 또 시작이네. 그들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모를까 봐 저러는 거야?
사람들의 힘없는 불평은 높은 여자 목소리에 눌렸고, 그녀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황금시대에 작사 및 각색한 고전 명곡을 노래했다.
오슬란인가?
누가 알아!! 상층 칸의 귀족들은 다 똑같아!
…………
가끔, 하층 칸에서는 지금처럼 안내방송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사는 "음악이 희망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라고 주장하는 상층 칸의 귀족들이 연회를 여는 중에, 연회의 현장 공연을 하층 칸에 중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년은 노래를 들을 때마다 하층의 사람들이 분노했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노래를 낙으로 삼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오셀럼호의 상층과 하층 칸이 모두 연결돼 있고, 지금 귀족과 평민이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처지는 영원히 같을 수 없었다.
망할, 또 <장송곡>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상층 칸에서 귀족이 죽었다고 생각해.
그럼 좋고.
지금에서야 온 거야?
올라가서 임무 보고하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어.
레이첼은 들고 있던 화물 목록을 내려놓고, 성난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자, 우리도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모든 상층 칸의 귀족들을 먼 길로 보내드립시다!
레이첼은 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와 여자의 노랫소리에 맞춰, 욕설로 리듬과 운율을 무시한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열차 칸은 곧바로 그녀의 노랫소리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웃음과 욕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바쁘게 일을 하면서도, 이 혼란스러운 노래에 동참했다.
[그가 말하는 구원은~ 전부 **같은 **이고~ 언젠간 네 **까지도 뒤집어 버릴 거야~]
[** 같은 귀족~ 모두 기생충 같으니라고~]
[수송팀이 파업하면~ 너희들은 모두 끝이야~ 으쌰~ 모두~ %#&되는 거야~ 으쌰~]
[이게 바로~ 우리의 노래~ 우리의 분노야~ 우리는 생존해서~ 내일의 희망을 향해 나아갈 거야~ 우리는 살아남아~ 희망이 있는 내일을 살아갈 거야~!]
너희 뭐 하는 짓들이야?!
열차 칸의 앞쪽에서 갑자기 초병이 나타났고, 때마침 문 앞에 서 있던 소년을 세게 한 대 때렸다.
앗!
추억에서 깨어난 청년은 자신이 의료 구역의 검진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금 붕대를 다시 감아줬던 어린 남자아이는 어느새 그의 등에 엎드려서 청년의 흰 머리를 잡아당겼다.
형, 우리 엄마가 젊은 사람의 흰머리는 무조건 뽑아야 한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점점 더 많아진대요.
남자아이는 정성스럽게 뽑은 일곱 가닥 정도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건네줬다.
고마워.
그럼, 다른 흰머리까지 뽑을게요.
잠깐, 잠깐만. 다른 흰머리는 하얗게 보이지만, 원래 색깔을 잊어버렸을 뿐, 흰머리가 생긴 건 아니니까 뽑지 마.
엥?
이 말은 어떻게 생각해도 농담이었지만, 청년의 진지한 표정에 남자아이는 반신반의하며 손을 뗐다.
머리카락은 얌전히 여기에 남아 있으면 되니까, 뽑지 않아도 돼.
네, 알겠어요.
아이가 얌전하게 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서야,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픈 머리를 다시 주물렀다.
검사를 하는 동안, 당신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서, 제가 남자아이에게 당신을 깨워달라고 부탁했어요. 괜찮나요?
기술자는 청년 앞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청년은 고개를 돌려, 방금 "행운의 박스"에 관한 얘기를 하는 난민들을 봤다.
저 사람들은 원래 아딜레 상업 연맹의 멤버였나요?
네, 얼마 전 오셀럼호가 위험한 구조에 참여하면서, 완전히 무너졌어요.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보육 구역과 거점 혹은 의료 구역 등 사방으로 흩어져, 어딜 가나 볼 수 있죠.
…………
참, 방금 한 의식의 바다 검사는 완료됐나요?
네, 결과적으로 당신이 가진 의식의 바다는 인위적으로 교란을 받은 것 같아요.
인위적이요?
네. 예전에 심각한 의식의 바다 이탈이 한 번 있었던 거 같고, 인위적인 교란의 흔적도 발견했어요. 기억 데이터가 손상되지 않은 게 기적이에요.
기술자의 말을 들은 후, 청년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 사람인 걸까?
겸사겸사 간단한 치료도 했어요. 완벽하진 않지만, 기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감사해요. 방금 몇 가지 일이 떠올랐어요.
효과가 이렇게나 빨리 나타난다고요? 당신이 가진 의식의 바다는 매우 안정적인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어휴, 오늘 아침에 기계가 갑자기 고장 나지만 않았더라도, 좀 더 노력해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
됐어요. 당신은 사람을 찾으러 가려는 거 아니었나요?
네, 제가 나가서 그들을 봐볼게요.
가지 마.
이름 모를 소녀가 망토 한 쪽을 꼭 움켜쥔 채, 겁에 질린 두 눈으로 애원했다.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그녀의 신체가 땅바닥에 넘어질 것만 같았다.
가지 마.
뭐라고?
날 이곳에 혼자 내버려 두지 마.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은걸.
청년은 당황한 듯 주변을 가리켰다. 어딜 봐도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상태여서, 앞에 있는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돼. 그들에게...
소녀는 청년의 두 눈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
소녀는 소리 없이 흐느끼며, 상처투성이인 자기 손을 천천히 풀고는 머리를 양팔에 파묻었다. 그리고 소녀의 어깨는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들썩이고 있었다.
…………
청년은 상대방의 눈물에 약간 동요됐다.
그녀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걸까?
과거에 무엇을 겪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방금 동료를 잃었기에 완전히 낯선 환경에 머물고 싶지 않은 걸까?
(나도 낯선 사람인데)
(하지만 그건 탤버트에게도 마찬가지고, 내가 쫓아간다 해요 뭘 할 수 있을까?)
청년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게.
정말? 고마워.
넌 이름이 뭐니?
혹사, 내 이름은 혹사야.
이번엔 더 이상 울먹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너는?
기억이 안 나.
그렇구나.
혹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두 눈을 내려 자신의 슬픔에 빠졌고, 청년도 그 침묵 속에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었다.
09호 의료 구역에서는 한결같은 특유의 분주함이 이어졌다.
왼쪽의 구조체는 부러진 다리를 정비하려 했고, 옆자리에 앉은 인간은 자신의 단말기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식실에는 의식을 잃은 중상 환자가 누워 있었고, 구조체 두 명이 그 옆에 앉아 카드를 하고 있었다.
복도 바깥쪽에는 사람들이 모여,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쪽의 거점도 사라졌어. 구조체가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모든 의료 시설과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수비했지만, 실험용 논과 온실은 결국 지키지 못했어.
왕 누나는?
왕 누나는 구조체를 도와 이합 생물과 싸우다가, 입고 있는 방호복이 찢어졌어. 결국 갈아입을 방호복이 없어서, 침식돼 죽었어.
왕 누나보다 2살 어린 연인도, 모든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버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을까? 혼자서도 지낼 수 있었잖아.
어떻게 지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건데? 어디를 가도 죽게 될 수밖에 없잖아. 왕 누나는 단지 그의 마지막 지푸라기였을 뿐이야.
내가 전에 머물렀던 기지도 같아. 우리가 그곳에 있던 물자와 채소 종자를 회수해 수경재배를 하려 했는데, 이송 도중에 두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손이 잘렸어.
몇 명이 죽었다는 통보를 보면서,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눈앞에서 피와 순환액 냄새가 코를 찌르니, 실감이 되더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구조체의 전투력이 좋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그들도 어찌할 방법이 없잖아. 그 괴물들이 무한한 인해 전술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정말로 그들이 평소에 토론하던 대로, 이 괴물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야 해결될지도 몰라.
그래. 적응성이 있어서 구조체가 됐다면, 나도 도전해 보고 싶긴 해. 아무래도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곧 무너질 건물을 잇달아 복원하고, 곧 죽을 사람을 잇달아 구해. 그리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괴물을 잇달아 죽이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바위로 된 게 아니야. 이런 처지에 사는데,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
이틀 전, 뒤쪽 숲에서 보초를 서는 구조체가 울고 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방금 자기 동료를 직접 죽였다고 말했어.
어떻게 된 거야?
배신한 거지. 그러고는 침식체가 돼서 돌아온 거고.
후우.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린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오히려 평범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없기에, 더 무력감에 떠밀려 나쁜 길로 가기 쉬울 것 같아요.
…………
내가 보기에 안될 것 같아. 승격자의 힘을 바랄 순 없어.
모든 희망을 한 사람에게 맡기는 건 원래도 믿음직스럽지 못했어. 만약 그가 죽거나, 잘못된 길을 걸으면 남은 사람은 어떻게 될 거 같아?
그 당시, 수송팀 대장이었던 레이첼을 생각해 봐. 누가 아프거나, 먹고, 입는 것이 부족하다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지. 나중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 챙길 수도 없었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곧 우릴 데리고 혁명을 이끌 거라고 믿었어.
결국에는...
레이첼...
…………
성공하지 못했어도, 그녀가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이미 죽은 건가?
그래! 실패해서 전사한 거라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을 거야! 레이첼이 자기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
그 짐승 같은 놈. **, 그 녀석의 아버지는 귀족의 짐승 같은 놈이었고, 어머니 줄리는 장부를 바꿔서 물자를 횡령했음에도, 레이첼은 과거의 나쁜 감정을 잊고 그를 입양했건만, 이런 꼴을 당하게 됐을 줄이야!
…………?
요 몇 년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물건을 횡령했는지는 하늘이나 알겠지. 전부 그 어머니에게서 배운 거야! 마지막에는 레이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도 했어!
난 그 녀석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라!
알아봤자 뭐 하겠어. 어차피 이미 열차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레이첼이 그를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노안이랬나?
노안?
주워 담기 싫었던 장면이 끄집어져,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청년이 채우기를 거절했던 공허한 기억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노안, 난 네가 잘 자라서 종말의 "생존자"가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남으렴...
됐어. 노안. 소문내지 마.
노안, 쳐다보지 말고. 우리도 빨리 박스를 접자.
…………
방금 그 총소리는... 이 녀석이 쏜 거야? 정말로 그 짓을 하다니.
오슬란이 말한 대로네. 살기 위해 자신의 스승님까지 죽이다니.
그를 데려가. 우리의 임무는 끝났어.
노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노안이 우리를 배신했어! 저놈이야말로 열차에 매달아 궤도 위를 끌고 다녀야 할 놈이야!
눈앞의 장면이 뿔뿔이 흩어졌다.
기억상실이 있기 전부터, 자기 이름을 싫어했나 보네요.
주변의 소리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면서, 견딜 수 없게 됐다.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버리려 한대, 너도 그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의식의 바다가 심각해요.
그런 거였구나. 드디어 알겠어.
그는 어느 소대인가요? 어째서 갑자기...
내가 이 이름을 잊게 된 이유는...
미안해. 나도..
난 증오했던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노안...
강제 휴면상태로 만들어줘!
난 널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