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자, 거점 불빛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마침내 테이블을 떠나 각자의 이부자리로 돌아갔다.
청년은 그 고요함을 틈타, 조용히 테이블에 앉아, 소녀가 테이블 위에 남긴 종이를 봤다. 그 종이 위에는 앳된 필체로 쓴 일기가 있었다.
…………
과거의 나도 이런 습관이 있었던 걸까?
청년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종이에 뭔가를 써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얬다.
기억나는 게 있으면, 우선 적어 보라는 건가? 무엇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청년은 두 눈을 감고, 더욱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손에 쥔 펜은 한없이 그리운 따뜻함을 발산하고 있었고, 두근거림과 함께 감지 속에 어두컴컴한 구석을 두드렸다.
난...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자기 암시를 하듯 청년은 펜을 꼭 쥔 채, 나지막이 이 말을 되풀이했다.
난 분명히 기억해 낼 수 있을 거야.
자기 암시를 반복하며, 신체에 잔류된 관성에 따라 종이 위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몇 획을 남겼다.
그러다 뒤죽박죽인 선들이 점차 모여들며 원을 이뤘다.
원형과 불규칙한 모양을 조합을 이루었고 작은 의자에 앉아있는 소년을 그려냈다.
곧이어 그림 속 소년 앞에는 초라한 모닥불이, 발밑에는 초원이 펼쳐졌다.
마치 여러 번 그려본 것처럼 이 화면을 능숙하게 구현했다.
과거의 난 그림을 그릴 줄 아는구나...
그리고?
그럼 그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소장했을까?
산더미처럼 쌓인 연습장이 됐을까?
아니면...
생각났다.
어머니, 제 그림...
어릴 적부터, 이 그림들의 결말은 단 하나였다.
그건 바로...
갈기갈기 찢어진 연료와 쓰레기가 되는 것이었다.
셋을 셀 동안, 남은 그림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네 펜까지 부러뜨려 버릴 거야.
제발! 안 돼요!
하나.
어머니가 어제 가르쳐 주신 글자도 다 배웠고, 집안일도 다 했어요!
둘.
제가 찢어진 옷도 스스로 수선했는데, 왜 그러세요?!
셋.
그냥 자기 전에 잠깐 그린 거예요. 어머니!!
펜이 부러지고 뺨을 후려치는 큰 소리와 함께, 소년의 절규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곧이어 옆방에서 고막이 터질 듯한 노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워 죽겠네! 늙은 마녀 같으니! 네 아들은 내일 아침에나 때려!
…………
내 옷 잡지 마. 똑바로 서. [--].
앞에 서 있던 여성이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지만, 그 발음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
내가 여러 번 말했지. 그림을 그리는 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 네 눈만 나빠지게 할 뿐이야.
네가 매일 구석에 숨어서 그림을 그리니까, 이렇게 어린 나이에 근시가 된 거 아냐.
네게 이 안경을 맞춰주는데, 1년 동안 내가 모아둔 물자를 썼어. 이게 무슨 뜻인지나 아니?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사과할 필요 없어, 그리고 토 달지 마.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미래를 망치고 있다는 걸 명심해.
이제는 학교가 없으니 혼자 공부해야 하고 기술을 익혀야만, 보육 구역이나 의료 구역처럼 안전한 곳에 들어갈 수 있어.
네가 오셀럼호의 하층 칸에서 평생을 보낸 다고 해도,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수단은 꼭 있어야 해.
…………
바닥에 있는 종잇조각 깨끗이 치우고, 내일은 레이첼 이모를 따라나가.
밖에서 퍼니싱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만나봐야, 내가 왜 무조건 널 여과탑이 있는 곳에 남게 하려는지,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전 화물을 운반하러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뭘 하고 싶은 거니? 그림? 아니면 계속 H 열차 칸에 있는 사람이나, 상층에 있는 초병과 싸울 거니?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모르겠니? 레이첼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쯤 죽었을 거야!
하지만 그들과 싸운 건...
그들이 어머니를 욕했기 때문이다.
소년의 목에 걸린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
그녀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가볍게 기침을 몇 번 했다.
넌 이제 9살이야. 난 널 평생 키울 수 없어.
이 시대가 워낙 혼란스러워서 넌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해. 용감한 건 좋지만, 사소한 충돌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용감한 게 아니라 바보야.
레이첼을 따라 바깥 세계를 봐야 좀 더 신중해질 수 있겠구나!
……………
소년은 애절한 눈빛으로 차가운 가면을 쓴 어머니에게 애원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피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을 마주쳤음에도, 아무런 정서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포기한 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이 가면을 쓰고 있었고, 소년은 그녀가 가면을 벗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여태껏 아들 앞에서 밥을 먹거나 씻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앞에서 잠든 적도 매우 드물었다.
소년이 호기심에 사로잡혀, 기회를 틈타 어머니가 일하는 칸막이 방에 몰래 들어갈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꾸중뿐이었다.
소년은 입이 가벼운 일꾼들에게서 엿들은 것이 있었다. 어머니의 가면과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된 건 모두 한차례의 폭동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그 기획된 사고가 아니었다면, 소년은 상층 칸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옛날 인맥에 의지해, 겨우 하층 칸에서 두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일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지만 단지 그 일이 그녀의 가면만큼이나 탐탁지 않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것밖에 안 주는 거야? 내가 윗사람들이랑 어떤 사이인지 알기나 해? 어?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퉤! 네 가면과 함께, 관짝에 박혀버려라!
늙은 마녀 같으니! 내가 이 신청서를 당신한테 제출했잖아! 그럴 리가! 14일에 술을 마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난 정확히 기억한다고!
네가 뭔데 조 씨를 내쫓는 거야? 그가 아무리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도, 내 형제란 말이야! 초병한테 가서 마녀와 네가 키우는 꼬맹이 괴물을 모두 없애달라고 해야겠어!
얼씨구, 얘 마녀네 꼬맹이 괴물 아니야? 네 엄마 말이야, 어제저녁 야근하고 아침에 여러 남자랑 같이 나오던데, 누가 네 친아빠인지 알기나 하냐? 하하하하!
——!!
그만!
…………
어머니는 아무리 심한 협박과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대로, 소년이 어머니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계획 밖의 일은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늘과 나무 열매 외에, 정신적 위안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묵묵부답의 큰 나무 같았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정상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하층 칸 수송 부대를 총 담당하는 레이첼 대장이었다.
레이첼은 어머니의 친구이자, 모두의 친구였다. 그리고 먼지가 날리는 하층 칸의 모든 사람이 레이첼을 존경했다.
줄리가 너더러 수송팀 따라오라고 한 건, 어제 일 때문이지?
…………
왜? 내가 줄리한테 그 일을 말해서?
아니요.
아니면 줄리가 널 이해하지 못하고, 심한 말을 한 건가?
레이첼 이모.
어제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아? H 열의 나쁜 놈들이었으면 정말 싸워도 넌 쉽게 도망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상층 칸의 귀족 초병들은 달라. 진짜 총과 실탄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명분은 하층 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감시하고 있거든.
오셀럼호가 여전히 귀족들의 물건인 한, 우린 그들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가 여기서 널 죽였다 해도, 네 어머니에게 보상 물자만 지급하겠지.
죄송해요.
자, 이후로 좀 더 신중하면 돼. 널 탓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안전이 걱정돼서 그래.
네.
그리고 H 열 그 녀석들도 내가 너 대신 혼내줬어.
정말요?
내가 언제 널 속인 적 있니? 그들이 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어. 진작에 혼내줬어야 했는데, 이 일은 네 탓 아니야.
네!
소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이야. 열차 칸 안에 있는 그 성가신 놈들 때문에, 하루 종일 뚱해 있어서는 안 돼. 그저께 저녁에 힐 아주머니가 먼저 인사했는데, 넌 대답도 안 했지? 화가 잔뜩 난 채 가버려서 아주머니도 깜짝 놀랐어.
가뜩이나 N 열차 칸에 줄리와 너에게 말 걸어주는 사람이 몇 명 없는데, 어떻게 힐 아주머니까지 화나게 하니?
죄송해요.
이 말은 네가 직접 힐에게 하는 게 좋을 거야.
…………
싫어?
H 열차 칸에서 그놈들과 사람들과 싸울 때, 힐 아주머니는 계속 보기만 하고, 절 도와주지 않았어요.
[--], 모든 사람이 나쁜 사람과 맞설 수 있는 능력이나 용기가 있는 게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단지 무서워서 오지 못할 뿐이지, 그런 행동에 찬성하는 건 아니에요.
…………
알겠어요.
저녁에 힐 아주머니께 사과하러 갈게요.
좋아. 착한 아이로군.
이제 이모랑 함께 수송팀에 가는 건가요?
아니. 너에게 더 좋은 일자리를 주려고.
좋은 일자리요?
위에 있는 통풍 파이프 봤니? 네가 올라가서, 수리 부대를 도와 안에 수리할 것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해.
하지만 전 어디를 수리해야 하는지 모르는걸요.
괜찮아. 파이프를 따라 끝까지 기어올라가서 그 안을 지키고 있으면 돼. 저녁에 내가 널 부르면, 그때 다시 나와.
그거면 돼요?
아니면? 9살짜리인 너에게 우리와 함께 화물 운반을 시킬 줄 알았니?
레이첼은 그에게 눈치를 줬다.
알았어요. 감사해요.
하하, 감사하다는 말은 아직 이른걸.
……?
레이첼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소년은 그녀가 가리킨 통풍 파이프를 따라 쭉 기어서 내려갔다.
소년의 앞에 펼쳐진 것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좁은 터널이 아닌, 꿈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낙원이었다.
도서 보관창고??
P 열 화물칸의 08호 화물 창고. 이곳에는 상품으로 팔려고 내놓은 종이책이 대량으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전자책과 자료를 따로 보관한 단말기도 있었다.
소설, 시집, 역사, 신화 등등의 글로 가득 찬 책을 제외하고도, 9살짜리 아이가 좋아할 만한 그림책과 만화도 있었다.
소년은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벼처럼 기뻐하며, 주위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조심스럽게 주워 들고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힘든 하루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던 소년은 결국 가방에 들고 있던 건조식품도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워했다.
펼쳐진 페이지와 함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약속된 저녁이 됐다.
통풍 파이프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소년은 아쉬운 듯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뒤, 좁은 통풍 파이프를 통해 돌아갔다.
오늘 어땠어? 혼자 남아서 무섭지는 않았니?
무섭지 않았어요. 다만...
하늘에서 내려온 경사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머니가 알게 되면, 도서 창고의 모든 걸 찢어버리지 않을까?
어머니를 미워하는 사람과 상층 칸의 초병에게 들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섭지 않으면 됐어. 넌 너무 어려서 수송팀을 따라다녀도 말썽만 피울 뿐일 테니. 차라리 수리 부대에서 좁은 통로에 들어가 도와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나중에 내가 어머니한테 말할게.
하지만 전 애초에...
됐어. [--].
소문내지 말고, 안에 있는 책에 흠집 내면 안 된다. 그리고 앞으로 출입할 때, 주변을 조심하면 돼.
다른 건 내가 너 대신 어머니한테 말할게.
네, 감사합니다.
그래. 세상이 어지럽긴 하지만, 용감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앞길이 좁지는 않아.
넌 기회를 빌어 거기서 글자를 좀 더 익히고, 지식을 넓히도록 해.
어머니 너무 탓하지 말거라. 너무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니까, 알다시피...
레이첼은 잠시 침묵한 뒤, 뒷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소년은 레이첼이 어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담 결과 덕분에 소년은 집안일과 공부 외에 4시간의 "수리 부대 작업 시간"을 갖게 됐다.
집에 있을 땐, 그는 어머니의 말투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평소보다 더 열심히 집안일과 공부를 했고, 자신의 외출 행방을 적극적으로 감췄다.
도서 창고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그는 도서의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는 물고기가 되곤 했다. 수많은 책 속에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를 넘어, 글과 화면 속에 푹 빠져서 성장했다.
이곳은 외부 세계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 혹은 어머니가 타인을 상대할 때, 뿜겨져 나오는 악의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대부분 어른들은 이런 서적들이 아이들에게 비현실적인 환상을 심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열차에서 태어나, 열차에 갇힌 아이에게 책은 외부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 책 중에 실제로 소년의 것이 한 권도 없지만, 소년은 책의 실제 소유자보다 책의 내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야기 속 휘황찬란한 황금시대와 그 시대의 말로, 세계와 우주의 광활함, 자연 경물의 낭만과 슬픔까지 소년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년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모든 것을 걸고 정의와 꿈을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모습과 결말에서 복원된 세계였다.
수많은 이야기의 결말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해치지 않았고, 하나로 뭉쳐 모두의 홈랜드를 재건했다.
악역들은 참회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가를 치렀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소년은 열차와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억압에 저항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누군가 성공할 수 있다면,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이곳의 환경을 바꿀 수 있겠지?
책을 든 어린 소년은 "정의"를 대표하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아니,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 것도 충분해.
소년은 종종 자신이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어머니의 꾸지람에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무모하게 보이는 정의 구현, 억지 행위, 그리고 자신의 취미에 대한 끈기도... 어머니께서 여러 차례 벌을 주자 소년은 점차 자신의 의지를 굽혔다.
좀 더 실질적인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좋겠어.
만약 다시 섣불리 무언가를 하고 그들과 싸운다면, 어머니한테 혼날 거야.
소년은 슬그머니 수많은 타협이 담긴 계획을 세웠고, 그 타협 속에 아직 깨지지 않은 자신의 기대를 숨겼다.
열차가 평화를 되찾고, 나도 혼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배우면, 어머니도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걸 허락하실 거야.
이제, 어머니와 레이첼 이모 말대로 공부도 계속하고 집안일도 도와드려야겠어.
거품처럼 깨지기 쉬운 환상은 어른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기쁨과 놀랄 것 없는 초조함이었다.
9살의 소년은 이런 사소한 고통과 무효한 투쟁 속에서 성장했고 어느덧 11살 생일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