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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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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과 잿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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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개인에게서 광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 등에는 거의 예외 없이 광기가 존재한다."</i>

인간은 일종의 광열함에 빠졌다...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인간은 이스마엘... 아니, 라헤일의 집 다락방에서 몇 차례 실패한 전화 끝에,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서랍 속 나무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스마엘도 곁에 누워 귓가에 다정히 속삭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곧 꿈속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며 모든 게 희미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인간은 또다시 톱니바퀴의 숲속에 있었다. 처음으로 진짜 이스마엘을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다만 "서 있다"기보다 "떠 있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네 육체에는 무게가 없고, 영혼도 21그램이 아니야.

모든 것이 "0"이 되어, 텅 빈 채, 그저 광대한 감각만 남아 있어.

이스마엘이 톱니바퀴 숲 사이를 유영하듯 다가왔다. 모습은 알고 있던 교황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뭔가가 더해져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여섯 개의 순백의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이제 내 모습의 변화에 놀라지도 않는구나.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네.

어때? 아름다워? 아니면... "좋아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하, 자,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질을 들여다봐.

이스마엘은 인간의 손을 잡아 가장 가까운 톱니바퀴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힘을 주자, 거대한 톱니바퀴가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너에게 물었던 질문 기억나? 만약 "인도"의 집합체가 네 손에 주어진다면, 넌 뭘 할 거냐고.

이제 네게 그 기회가 주어졌어.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

톱니바퀴가 회전하며 빛의 고리를 만들었고, 중력을 뒤흔들어 현기증을 일으켰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인간은 중력에 이끌리듯 톱니바퀴 숲에서 튕겨 나와 교황의 거처 거실의 소파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무수한 톱니바퀴를 감추고 있던 테라스 문이 "쾅"하고 닫혔다.

취임식까지 10분 남았어. 지금 단장하지 않으면 늦을걸.

이스마엘은 "커피에 설탕 몇 스푼?" 하고 묻는 것처럼 태연했다. 그녀는 인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아 턱을 괴고 있었다.

"새 교황" 취임식?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가 내 자리를 꿰찼다는 말이야?

미안하지만, 새로운 교황은 없어. 교황은 여전히 나, 이스마엘이야.

무슨 긴 꿈을 꿨는지는 몰라도,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지. 오늘은 네 취임식이야, 위원장님. 아니, 이젠 "검찰총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제 9분 남았어.

이스마엘은 인간의 당황한 표정에 익숙하다는 듯, 더는 설명하지 않고 다가와 능숙한 손길로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주기 시작했다.

네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 확실한데... 병원에서는 늘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 그래도 괜찮아. 내가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줄 테니까.

4년 전, 테베는 대외 전쟁을 이어갈 힘을 잃고 코린토스에서 철수하고 내전에 집중했어. 너와 대통령이 바랐던 목적을 이룬 셈이지.

한때 "신성 교회", "반동 조직"이라 불리던 우리는 혁명의 선구자이자 주축이 되었고, 라스티 대통령은 그것을 역사적 승리라고 불렀어.

놀라워? 그녀는 진짜 많이 성장했어. 대담하면서도 신중하게 군수기업들까지 아우르며 테베의 민심을 얻었고, 결국 낡고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렸어.

이건 내 승리이기도 해. "신성 교회"의 힘이 정권까지 장악하면서, 지금은 종교와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결합한 상태거든. 교황인 나는 라스티의 지지를 업고 전례 없는 권력을 쥐게 됐지.

마침내 이스마엘이 인간의 옷깃을 단정히 여며 주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작 나는 선교에 흥미를 잃었어. 라스티는 내가 네 비서 노릇이나 하면서, 퇴위했을 때보다 더 지루하게 사는 것 같다고 하더군.

존재하지 않던 기억이 블랙홀에서 솟아나, 텅 빈 머릿속을 채워 나갔다.

그리고 너는, 라스티 대통령의 임명으로 최고사법위원회 위원장이자 검찰총장이 되었지.

글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도 이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이스마엘은 고개를 저으며, 그 무거운 질문들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다 됐어, 가자.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겠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스마엘은 창밖으로 펼쳐진 테베 풍경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곁에 선 인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주사위? 그거. 그만둔 지 한참 됐어. 이제 아무 의미 없으니까.

이스마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창밖을 향한 채, 위원장의 질문을 건성으로 대답했다.

위원장인 인간 역시 더 묻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오후의 하늘에는 분홍빛과 흰빛이 섞인 노을이 없었다. 오늘의 태양마저 침울한 듯 먹구름 뒤로 스러지고 있었다.

인간의 시선은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를테면, 유리 벽에 거미줄처럼 남아 있는 "탄흔" 같은 곳에 말이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탄흔"을 보는 순간, 인간의 심장이 누군가에게 미세하게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은 점점 간질거리기 시작했고, 금방이라도 마른기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와 라스티는 이 깨진 유리를 교체하자고 제안했지만, 네가 끝까지 남겨두자고 고집부렸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고생했던 나날들을 회상하며, 전쟁터에서 저격수에게 쫓기던 순간을 추억하고 싶었던 건가?

이스마엘의 입가에 장난기 섞인 미소가 걸렸다.

기억이 없다라... 요즘 계속 이러네. 기억이 틀어져서인지, 예전의 너 같지가 않아.

통유리 엘리베이터가 낮은 층에 가까워지자,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바닥이 까맣게 보였고, 그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다른 머리색이 섞여 있었다.

새로운 테베의 시민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신의 대리인이 내려와 복음을 전해주리라 믿으며 경건하게 끝없이 높이 솟은 권력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띵. 복음이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인간은 수많은 플래시가 터질 것을 예상한 듯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하지만 기억은 빗나갔다. 밖에는 충성스러운 신도들뿐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몸짓을 어떤 의도된 표현으로 여기며, 일제히 고개를 숙여, 권력을 감히 마주 보지 않겠다는 복종의 뜻을 표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잖아.

아침부터 엘리베이터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베 대통령조차 인간을 숭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보세요,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이크는 켜져 있으니, 연단으로 나가셔서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면 됩니다.

이스마엘은 인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마이크 앞에 멈춰 섰다.

줄지어 선 대형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인간은 검은 물결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지만, 끝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말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사실, 인간은 입을 열었다. 다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인간은 군중에게서 뻗어 나오는 무수한 붉은 실을 가리켰다. 실들은 빽빽하게 얽혀 공포스러운 그물처럼 이스마엘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나 깨끗하던 이스마엘의 손끝에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붉은 실 한 가닥이 뻗어 나와, 바로 인간 자신에게 이어져 있었다.

이스마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빛을 부드럽게 내리깔았다.

네가 본 그대로야. 나의 "촉수"는 네게 연결되어 있어.

이스마엘이 몸을 살짝 숙이자, "촉수"에 이끌린 검은 인파가 일제히 인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마치 검붉은 바다가 파도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이스마엘의 손끝에서 이어진 단 하나의 "촉수" 또한, 인간의 미세한 손짓에 반응하듯 떨고 있었다.

인간은 갑자기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테베는 교황이 모든 권력을 쥔 나라가 됐지. 적어도 겉보기엔. 하지만 실제 권한은 전부 네 손에 있었어.

너는 나를 인도했고, 나는 네게 순종하며 힘을 바쳤어. 너는 그 힘으로 사람들을 인도했고, 마침내 "세계"마저 너를 인정하며 기뻐했지.

심장의 병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인간은 기침을 터뜨리며 이 도시와 이 국가를 올려다보았다.

멀리, 전 대통령의 조각상은 머리와 팔이 잘린 채, 머리 없는 흉상이 되어 새 정권의 조롱 속에 서 있었다.

권력의 몰락은 결코 품위 있지 않았다. 테베의 수도 역시, 포연 자욱한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혀끝에 비릿한 맛을 남겼다. 그것은 이내 입가를 타고 흘러 손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온통 피였다.

놀랄 것 없어. 혁명과 권력 다툼에는 언제나 피가 따르는 법이니까.

사람들은 지도자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인간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마저 성스러운 은총으로 여기고 있었다.

우리 모두 변했지. 너는 나를 인도하고 통제했지만, 결국 하나가 될 수는 없었지.

자유?

이스마엘이 다시 한번 웃었다.

이런 너의 앞에서, 나의 자유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스마엘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이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실은 스스로 위로 뻗어 올라 그녀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점점 목을 죄었다.

하지만 촉수는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며 인도를 이용해 이스마엘을 목 졸라 죽이려 했다.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다.

교황 이스마엘은 도시 중심 광장에 있는 머리 없는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자유를 추구하는 또 하나의 기념비가 되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선택에 실망했고, 태양마저 눈을 감았다.

톱니바퀴가 다시 한번 회전을 시작했다.

몰려들던 인파의 열광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비릿한 냄새로 가득한 참호로 바뀌었다.

미쳤어요?! 그렇게 크게 소리치면 어쩌자는 거예요! 죽고 싶어요?!

라스티의 머리에서 우스꽝스러운 철모가 벗겨질 뻔했다. 그녀는 참호 속에서 벌떡 일어나다시피 하며 팔꿈치로 인간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매복 중이니 숨으세요. 제발... 조용히...

라스티는 인간의 몸을 바닥에 완전히 짓누르고,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우는 것보다 더 흉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지금 들키면 끝장이에요. 여기서 34시간이나 매복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지금 발각되면 전부 물거품이 됩니다. 뒤쪽 부대는 저희가 길을 열어주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말을 이을수록 그녀의 고개는 떨어졌다.

코린토스는... 끝났어요.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저항해 봤자예요. 다른 도시들의 작전도 모두 실패했다고 해요. 이제 정말 저희에게 모든 게 달렸어요. 아이들도, 당신의 그 세 아이도 후방에 있잖아요. 여기서 또 실패하면 안 돼요... 쉿...

인간은 무언가를 본 듯했다. "뼛속 깊이 새겨진" 병사의 의지가 혼미한 의식을 밀어내고 터져 나왔다. 인간은 라스티를 뿌리치고 주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쾅!

몸을 찢어발길 듯한 폭격이 쏟아졌다. 이어 총알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탄도가 가까이 있다는 뜻이었다.

북쪽으로 이동하세요! 서두르세요! 여긴 더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허리를 낮추고 마지막 남은 총 한 자루를 움켜쥔 채, 라스티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뭐라고요?!

라스티가 멈춰 서자, 그녀를 따르던 작은 분대도 그대로 멈췄다.

지금, 이스마엘 님을... 물으시는 건가요? 눈이 안 보이시는 건가요? 아니면 포탄에 머리라도 맞으신 건가요?

돌아본 라스티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안 보이시나요? 바로 저희 머리 위에 있잖아요?

인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스티의 시선이 향한 곳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테베 수도의 성벽 아래였다. 성벽 위에서, 보란 듯이 밧줄 하나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밧줄은 한 시체의 목을 옭아맨 채, 긴 장대 끝에 매달려 있었다. 폭발이 일으킨 바람에 시체가 섬뜩하게 흔들렸다.

시체의 그림자가 인간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엎드리세요!!!

또 한 발의 포탄이 터졌다. 이번에는 라스티가 먼저 엎드리라고 외쳤다.

라스티는 인간의 몸을 강제로 짓누르며 땅바닥에 엎드리게 하더니,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나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의 폭발이었다.

보셨나요? 다 죽었어요! 몽땅 다 죽었다고요! 테베의 저 광기는 아무도 못 막아요! 코린토스는 그저 첫 번째 희생품일 뿐이라고요!

평화 협정은 전쟁 선포용 종잇조각이 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집회는 해산되었어요! 도시엔 빵 배급소만 남았다고요! 남자들은 전장으로, 여자들은 공장에서 성냥과 총알, 폭약을 찍어내고 있어요!

코린토스를 집어삼킨 뒤에도 침략은 멈추지 않았어요. 조금 까다로운 적이 나타나면 바로 무기를 개량했죠. 맞아요, 당신은 라헤일을 아시잖아요! 전 교황과 친하셨으니, 분명 아실 거예요!

라헤일이 발명한 "로봇"은 최첨단 무기가 되었어요. 애초에 사람을 죽이려고 만드신 게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결국 그분도 돌아가셨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요!

교황도 처형당하셨어요. 사람들은 그분의 지팡이와 왕관을 빼앗고, 거처까지 차지했어요. 그러고는 저렇게 시체를 내걸고 조롱하고 있어요... 잘됐네요. 이제 아무도 테베의 광기를 막을 수 없으니, 테베가 세계의 주인이 되겠죠!

뭐라도 말씀 좀 해보세요! 당신도 몇 달간 수없이 사람들을 죽였잖아요? 이제 와서 어리석게 구시면 안 됩니다!

라스티가 인간의 어깨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병사들은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무덤덤하게 무너져버린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허공에서 흔들리는 이스마엘의 시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회색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시체 위에 내려앉았다. 까마귀는 고개를 박고 시체의 살점을 쪼아 삼켰다.

까마귀의 동작을 보자, 입안에 문득 침이 고였다.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이봐요!! 제정신인가요?!

굶주려서 정신이 흐려지신 건가요? 지금 뭘 드실 상황이 아니에요. 아니, 세상에... 오, 자비로운 자시여, 아직 저희를 보살펴주실 힘이 있으신가요?

라스티는 돌연 차분해졌다. 그래야만 했다. 까마귀마저 다가오는 파멸을 감지한 듯,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하늘 저편으로 필사적인 날갯짓을 시작했다. 미친 인간들이 점령한 이 땅에서 벗어나려는 듯했다.

그리고 까마귀의 눈동자에, 잿빛 폐허 위로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유성"이 하늘을 가르며 땅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비쳤다.

이제 끝이군요.

탄약이 떨어지는 소리와 주사위가 구르는 소리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size=40>탄약이 불러온 종말은, 언제나 허무하고 짧았다.</size>

<size=40>인간은 깨어 있는 채로 톱니바퀴가 회전하며 만든 블랙홀에 휘말려, 가능성의 "발전 궤적" 속에서 헤맸다.</size>

테베가 외부로 확장하자, 이스마엘은 처형되었다.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자, 이스마엘은 감금되었다.

테베가 외부로 확장하자, 이스마엘은 처형되었다.

인간과 야반도주를 시도하다, 이스마엘은 체포되었다...

...

사람들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붉은 촉수들이 흔들리며, 인간의 눈앞에 허황된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광적으로 변할수록 인간은 더 굶주렸다.

톱니바퀴 속에서 얼마나 헤맸을까. 드디어 어느 날, 인간은 극도의 굶주림 속에서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사

정신 차려, 대체 몇 시간째야! 언제까지 식탁에 얼굴 박고 잘 건데!

라헤일

이사, 저 기면증 환자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우선 우리 자신의 진화를 마치는 게 더 급선무야.

촛불과 등불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술잔 부딪는 소리가 귓가에 교향곡처럼 울렸다.

하지만 톱니바퀴와 주사위 소리는 그보다 더 컸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귓가를 거치지 않고 두개골 속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진한 소스를 곁들인, 부드럽고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가 흰 도자기 접시에 담겨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오는 내내 "배고파"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는데도 한 입도 먹질 않네.

시야 속에서, 자기 손이 나이프와 포크를 꽉 쥐고 고깃덩어리를 향해 움직였다.

폭격으로 살이 찢기던 고통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일까. 나이프와 포크는 마치 자신의 잘린 팔다리를 써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 왔구나! "신"의 성물.

식당의 문이 열리고, 추기경이 붉은 관을 들고 천천히 들어섰다.

이사, 라헤일, 그리고 모든 손님이 일제히 두 손을 모으고 관을 향해 경건하게 눈인사했다.

관은 뚜껑이 열린 채, 긴 식탁 중앙에 놓였다. 그 안의 부패하지 않은 시체는 마치 잠든 듯, 평온하게 식객들... 아니, 신도들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신임 교황은 관 앞에 서서, 한 구절을 읊을 때마다 관에서 옛 교황의 성물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이것은 교황의 브로치, 이것은 교황께서 지니고 다니시던 주사위... 이 정도 양의 성물이라면 어떤 질병이라도 능히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작은 오동나무 주사위는 식탁 끝의 첫 손님에게 건네져, 한 사람 한 사람 전달되더니, 금세 인간의 눈앞까지 왔다.

자, 받아, [player name]. 이건 네가 예약해 둔 성물이란다.

멍하니 뭐 해? 어서 받아... 네 병을 낫게 해줄 거야! 이건 아주 특별한 거야. 생각해 봐, 이 성물은 방금 막 가져온 거라 그녀 몸의 냉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어떤 병이든 다 낫게 해줄 거라니까!

심장병을 앓던 인간이 피 묻은 주사위를 받자, 온화한 힘이 손바닥에서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마치 상냥한 여인이 바늘과 실을 들고, 상처투성이인 심장을 한 땀 한 땀 꿰매주는 것 같았다.

신임 교황은 다시 관 속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이것은 교황의 지팡이다. 이 홀이 있으면, 앞으로 우리의 길은 평탄할 것이며, 우리의 전투는 연전연승할 것이다.

지팡이 또한 차례차례 전달되어, 마침내 긴 식탁의 다른 쪽 끝에 앉은 어느 장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것은 교황의 왕관이다. 이 왕관이 있으면, 앞으로...

신임 교황은 금속 왕관을 들어 올렸다. 어조에는 황송함과 흥분으로 인한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군중의 시선도 왕관에 고정되어, 기대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은 관 앞에서 성물을 나누고, 십자가 아래에서 맛있는 술과 빵을 즐겼다.

인간도 몸을 떨며 나이프와 포크를 꽉 쥐었다. 건강을 되찾은 심장이 그를 벌떡 일으켜 세웠고, 이내 비틀거리며 식탁 중앙에 놓인 관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또 다른 어린 양이 우스꽝스럽게 식탁 위로 기어 올라가, 이미 맛있는 요리가 된 동족에게 달려드는 것을 목격했다.

희생양은 눈을 감은 채, 동족이 생각하고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내게서 이 힘을 탐냈어. 내가 만진 물건을 성물이라 부르며 가지려 안달했고, 내가 "죽은 뒤"에는 내 왕관과 지팡이를 차지하려 피 터지게 싸웠지.

아니면... 넌 이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방법을 찾아낼까?

식탁 위의 희생양이 마치 눈을 뜬 듯, 온화한 미소로 동족을 격려하며 속삭였다.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

연회장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마치 형언할 수 없는 안개처럼 빠르게 감싸왔다.

이스마엘

정말로 이해했구나? 잘됐네.

<size=35>그것은 아무도 받지 않는 감찰청의 전화였고</size>

<size=35>영혼의 자유를 향해 달려가던 슈트롤이었으며</size>

<size=35>누구도 짐작할 수 없던 이스마엘의 "신의 힘"의 근원이었다.</size>

<size=35>그것은 모든 공허한 설명이었고</size>

<size=35>모든 미지의 근원이었으며</size>

<size=35>"나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size>

이스마엘

말해줘, 최종적인 답은 뭐야?

■는 것이었다.

는 것이었다.

너무나 간단했다. 어쩌면 "세계"의 모든 것이 이처럼 간단하고 직설적인지도 모른다.

네가 나를 ■하고, 난 네가 되어, 다시 ■된다.

이스마엘

너의 탄생은 네게 "세계"를 느낄 오감을 주었지만, 넌 일찌감치 눈과 귀, 코와 입을 포기했지. 시각과 청각이 막히고, 페로몬과 진실의 냄새조차 맡지 못하게 됐지.

하지만 얼굴의 모든 감각이 퇴화했어도, 여전히 네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감각 하나는 남아 있어.

이제 말해봐, 넌 어떻게 해야 하지?

이스마엘

그래, 맞아. 입을 벌려, 이리 와.

충격에 모든 손님의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누구도 달려들어 막으려 하지 않았다.

문명이라는 식기를 버리고, 가장 원초적인 욕망으로 돌아가,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맛보는 것이다.

이스마엘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웃었다. 마침내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둘은,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이스마엘과 하나가 된 순간, 시야는 끝없이 넓어졌다.

몇몇 순간, 인간은 또 다른 세계를 본 듯했다.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더 혼란스럽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두 세계 모두에서 진홍빛 섬광이 끊임없이 번쩍였고, 재앙 앞에서 울부짖는 이들과 그 재앙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애쓰는 이들이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같았다. 혼돈과 질서는 언제나 함께 존재했다.

마침내, 인간은 "마치" 극도로 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듯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새하얀 천장과 링거 거치대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하얀 이불 옆에는, 각기 다른 머리색의 세 아이가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리... 아마도 리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던 아이는, 이제 더욱 엄숙해 보였다. 침대 옆에 엎드린 채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 깊은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루시아와 리브. 어릴 적엔 머리를 손질해 줄 시간도 없어 직접 잘라주곤 했는데... 어느새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지금 저 아이들은... 행복한 걸까?

훌쩍 자란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혼이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육신은 더 이상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닌 족쇄가 되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분홍 머리의 여인이 조용히 들어왔다.

다행이야. 다들 여기 있었구나...

이스마엘은 눈을 감고 있는 인간을 잠시 바라보다, 곧 확신에 찬 듯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의식이 있는 건 너뿐인 것 같네.

내 힘을 숨겨야만 했어. 그래서 "인도"의 힘 일부를 흩어놓았지. 그런데 그게 통제 불능이 되면서, 그 "디오라마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 뻔했어. 내가 직접 들어가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교황"이라는 신분을 빌린 거야. 그래야 흩어진 "인도"의 힘을 거둬들이기 쉬우니까.

하지만 그 힘이 그렇게까지 집요할 줄은 몰랐어. 결국 그레이 레이븐 소대 전부를 끌어들이고 말았지. 너를 봤을 때 어느 정도 예감은 했지만, 설마 아이들까지 휘말릴 줄은 몰랐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린 이미 하나잖아.

이스마엘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인간의 감긴 눈가를 어루만졌다.

...

그 세계의 모든 "인도"의 실을 거둬들이고 나면, 나는 온전히 "인도"의 집합체 그 자체가 되어버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지.

그래. 넌 늘 의문과 불만을 품고 있으니, 너 스스로 톱니바퀴를 돌려 다른 길을 찾아보게끔 놔뒀어. 하지만 결국, 내 계획보다 나은 방법은 없더군.

만약 마지막 연산에서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너는 그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다시는 나오지 못했을 거야.

이스마엘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거의 찡그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대담하게 "손을 놓은"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30분 전, 그레이 레이븐 소대 전원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보고를 받은 이스마엘은 즉시 위치를 추적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문에 들어서자마자, 잠든 얼굴 아래 숨겨진 인간의 깨어 있는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망설임 없이 강제 분리 수단을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인간이 그 안에 머무르게 둘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 나와. 내가 도와줄게. 네가 먼저 빠져나오면, 잠시 후에 내가 그 "세계"를 완전히 통제해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 멤버 세 명을 무사히 돌려보낼게.

이스마엘은 침대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자, 내 손바닥을 봐.

난 네 기분을 읽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지금 너의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날 뜯어 먹을 지경이야.

네 말이 맞아. "'진실함'에 대해 논할 때, 온전히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이제 우린 하나가 됐으니, 내 바람도 네 앞에 훤히 드러났겠지. 네 안위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진실함'에 대해 논할 때, 온전히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어.

우린 하나가 됐으니, 내 바람도 네 앞에 훤히 드러났겠지. 네 안위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그녀는 한탄에 가까운 숨을 내쉬었다.

우리 관계에 이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이스마엘은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마음은 왠지 가볍고 즐거웠다. 마침내 누군가 자신의 눈빛을 알아보고, 시선을 맞추고, 함께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마엘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몸을 숙여, 병상에 누운 인간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의 사랑하는 동족, 나의 사랑스러운 그레이 레이븐. 네 마음은 고맙지만, 이 일만큼은 내가 반드시...

그 순간, 미동도 없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쳤고, 감겨 있던 눈이 어느새 떠져 있었다.

아니... 언제부터?

인간이 병상에서 손을 펼치자, 원래 "교황" 이스마엘의 것이었던 주사위가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인간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 듯했지만, 이스마엘은 미처 보지 못했다. 다만, 자신과 똑같이 가벼우면서도 해방된 감정이 느껴졌을 뿐이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혼란스러운 감각이 다시 덮쳐왔고, 이스마엘조차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하...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