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마차는 "세계"와 맞서기로 각오한 두 명을 싣고 골목과 대로를 가르며 내달렸다. 경직된 사람들을 뒤로한 채, 붉게 물든 석양과 노을마저 떨쳐내듯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창백한 달빛이 비치는 작은 이층집 앞에 멈춰 섰다. 굴뚝에서는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쪽이야. 밤에는 인적이 드문 길이라, 여기로 오면 아무도 못 찾아낼 거야.
걱정 마. 이사는 내 오랜 친구야. 이미 한동안 널 몰래 따라다녔으니, 은신 실력은 믿어도 돼.
이사가 앞장서서 뒷문을 열자, 순간, 갖가지 향신료와 감자, 비릿한 생선 냄새가 솥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큰일 났네... 라헤일 여사가 저녁 준비하신 모양이야. 먼저 뒷마당에 좀 숨어 있을래?
이사... 발소리가 셋이구나. 이스마엘 말고, 또 누굴 끌어들인 거니?
높은 천장 아래, 기름천으로 덮인 거대한 물체 곁에서 마지막 모서리를 단단히 여미던 중년 여성이 말을 건네며, 의자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라헤일의 손은 깨끗했고, "인도"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이스마엘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미소 짓더니, 곧 어깨 너머로 따라 들어온 인간을 바라보았다.
라헤일 교수... 아니, 대모님. 제 친구 [player name]입니다. 최근에 알게 된 아주 좋은 친구예요.
네가 데려온... 친구라고? 근데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기어이 데려올 정도면, 보통 "친구"는 아니겠구나. 알겠다.
라헤일은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걸레로 손마디의 검붉은 얼룩을 힘주어 문질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얼룩은 "기름때", 정확히는 기계 윤활유였다.
저녁은 솥에 있으니, 이사, 네가 좀 거들어서 퍼 오렴.
저 끈적끈적한 죽 같은 건 먹기 싫어요... 살려줘라, 이스마엘. 우리 그냥 예전처럼 과일이랑 채소 갈아서 주스로 저녁 때우면 안 돼?
라헤일은 은빛 렌치를 공구함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번엔 그냥 감자수프가 아니야. 이 지방 특산물인 "하늘고기"를 넣고 끓였어. 폴라 마을이 아니면 구경도 못 하는 귀한 것이니, 투정 부리지 말고 먹어.
하늘고기는 하늘고기고, 감자수프는 감자수프죠! 어떻게 그걸 같이 끓일 생각을 하세요!
그게 바로 퓨전 요리라는 거다. 테베의 전통과 새로운 식재료의 결합이지. 이사, 뭐든 혁신이 필요해. 요리도 마찬가지야.
제발, 그 시간에 차라리 그 거대한 고철 덩어리나 계속 만드세요...
"발명"이라는 단어에, 인간의 머릿속을 채우던 의문들이 한순간에 풀리는 듯했다.
하하하...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주변을 꼼꼼히 살피더라니. "발명가"라, 그럴싸한데? 그래, 맞아. 난 이 시대에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재미없는 발명품이나 만지작거리는 괴팍한 발명가란다.
라헤일...
요즘은 이사가 여기서 함께 지내며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주고 있어. 참 기특한 아이지.
이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마지못해 접시를 들고, 시퍼렇게 끓어오르는 수프를 퍼 나르며 코를 틀어막았다.
인간의 시선이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거대한 천 덮개로 향했다.
제법 안목이 있구나. 보고 싶니? 아직은 덮어두었지만, 언젠가 "짠"하고 덮개를 젖혀 세계에 공개할 날을 기다리고 있단다.
좋다. 그럼, 잘 보렴...
라헤일이 기름천 한쪽 끝을 잡아 한 번에 젖혔다. 천이 걷히는 순간, 집 안에 퍼져 있던 음식 냄새가 확 몰려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로봇"
들어본 적 없는 단어가, 마치 오래전부터 뇌리에 새겨져 있던 기억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로봇"? 제법 근사한 이름이구나. "고철 덩어리"보단 훨씬 낫네. 이사, 들었니? 손님이 우리 기자 양반보다 훨씬 표현력이 뛰어나구나.
앗, 뜨거워! 뜨거워!
정작 박식하고 어휘력이 뛰어난 이사 기자는 하늘고기, 그리고 감자수프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어디서 봤던 거야?
"조종"이라... 그렇다면 저 로봇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 아니야? 그런데도 "모른다"니?
라헤일은 로봇의 번쩍이는 금속 외피를 두드리며, 웃으며 손짓했다.
기회가 되면 네가 처음으로 조종해 보는 게 어때? 제대로 작동하는지 한번 테스트해 줘.
이런 것들이 하루빨리 사람들의 삶에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언젠가는 짐을 나르거나 나무를 베는 일도 모두 "로봇"이 대신할 수 있겠지.
로봇에 대해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면 꼭 저렇게 신나서 말씀이 많아지시지... 두 분, 아주 잘 맞는 것 같네요.
있지, 이름은...
라헤일이 로봇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안쪽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스마리"
순간, 이스마엘의 얼굴이 굳어지며, 조금 전의 "온화"하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내 감출 수 없는 상실감으로 변했다. 좀처럼 그녀에게서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더 많은 것을 하실수록, 저는 점점 더 떠나기가 힘들어져요.
또 시작이구나... 넌 꼭 이럴 때만 날 "교수"라 부르더구나. 대체 어느 신이 그런 호칭을 내렸느냐? 나는 너의 대모이지, 교수가 아니다.
라헤일이 이스마엘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순간, 이스마엘의 눈가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간은 그저 그녀의 입가에서 새어 나온 아주 희미한 한숨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자자, 다들 이제 먹자고! 이 불쌍한 "마부" 이사가 이 하늘고기랑 얼마나 사투를 벌였는지 알기나 해?
이사는 식탁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서류와 신문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원래 기자로서 그녀가 작업대로 쓰던 자리인데, 이제는 그 위에 죽 같은 음식이 담긴 접시 몇 개와 숟가락이 대신 놓여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신문들이 종이상자 안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인간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고, 굵은 글씨로 선명하게 찍힌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전시 연맹 위에 드리운 교황의 망령>
<총감찰청, 전 교황 이스마엘에 대해 정식 공소 제기>
자, 자, 앉아! 저런 건 신경 쓰지 마. 다 헛소리니까. 내가 이미 통쾌한 반박 기사 써놨어. 내일 새벽이면 신문에 쫙 깔릴 거고, 여론은 무조건 뒤집혀. 내가 장담해!
무슨 기사를 준비했어? 네가 쓴 기사를 실어주겠다는 신문사가 정말 있었어?
물론이지! 나 잘 나가는 기자야. 다들 내가 쓴 기사 받아보려고 난리라니까. 네 헛소문들도 내가 기사로 하나하나 다 반박했어.
예를 들어, "뇌물수수" 루머는 내가 교황 거처의 관리자를 직접 찾아가서 생활비, 식비, 의복비 지출 기록까지 다 확인했어. 아주 깨끗하고 청렴하더구만! 완전 가난했더라고.
"외부 세력와 결탁했다"는 소문은 너무 심각해서 추기경 몇 명에게 확인하려 했는데... 다들 입을 꾹 닫더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조심하라고. 몇 명은 이미 정부 놈들이랑 손잡고 있는 게 분명해.
추기경들이 증언을 거부하길래, 이번엔 대사관에 연락했지. 그 덕에 네가 코린토스 방문객을 계속 거절해 왔다는 기록을 손에 넣었어. 너 그때부터 이미 문제가 생길 걸 예측해서 일부러 거리를 둔 거잖아... 그런데도 결국 그들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운 거야.
이 모든 걸 기사로 써놨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만... 딱 한 가지, 해명하기 애매한 게 있어.
내 얘기 중에 해명하기 애매한 게 남아 있어?
인간이 식탁에 앉아 식사하면서 듣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다 슈트롤 경찰관이 말했던 "교황 스캔들"이 문득 떠올랐다.
맞아, 맞아.
...
이스마엘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사도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이스마엘과 그녀의 "친구" 사이를 오가며, 마치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잠깐...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또 네가 말하는 그 "혁신적인 아이디어" 타령이겠구나.
이스마엘, 그리고 너! 둘이 이따가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이스마엘의 침대에 나란히 앉아봐. 포즈는 자유롭게 취해도 돼.
이사는 이스마엘과 인간을 하나로 감싸는 원을 그리며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사진을 찍어줄 거야. 맞아, 바로 네가 생각하는 그거! 이름하여 교황과 감찰관의 <세속 화보>! 그 뒤엔 바로 <교황의 숨겨진 연인 전격 공개> 같은 특집 기사를 내는 거지! 무조건 1면 감 아니겠어? 테베의 모든 시선을 단숨에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고!
일단 <세속 화보>부터 크게 퍼뜨리자. 교황에게 오랫동안 숨겨온 연인이 있었다는 소문을 흘리는 거지.
그러다 잘 나가는 연예인 스캔들 하나 터뜨려주면, 여론의 관심은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릴걸!
이사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무참히 희생된 하늘고기가 냄비 안에서 처량하게 출렁였다.
맞아, 이거야! 몇 달 정도 지나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지면, 그때 해명 기사를 내는 거지! "자비로운 교황, 병든 줄 알았던 신도의 죄를 덜어주려 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마엘이 식은땀을 흘리는 듯했다.
이사... 이사, 진정해. 괜찮아.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이건 네 일이잖아. 네가 의견을 말해야지, 왜 가만히 있어?
됐다, 이사. 그만해.
어머니! 제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이스마엘을 설득해 주셔야죠!
그만해, 이사. 우리 모두 알잖니. "인도"에 사로잡힌 이들은 결코 스스로 깨어날 수 없어. 내 죄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어.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한들 소용없어.
내가 라헤일과 네게 말했잖아.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내가 자라던 이 집도 더는 안전하지 않을 거라고. 그때가 오면, 다 같이 마지막 저녁을 먹고 짐을 싸서 테베 수도를 떠나기로 했잖아, 기억나지?
이스마엘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라헤일 교수님이 우릴 품어주셨듯이, 이번엔 우리가 라헤일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거야. 발명을 계속하실 수 있는 곳으로.
알아. 아는데... 그럼 넌? 너는 어떡할 건데?
이사는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여 접시 속 하늘고기를 바라봤다.
이 평화로운 저녁 식사가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때 막아야 했어. 그 번지르르한 어른들이 널 데려가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그 작자들은 네가 태생부터 "신의 힘"을 지녔다며 온갖 허무맹랑한 소리를 갖다 붙였지. 네가 마신 물이 포도주가 되고, 네가 만진 돌이 금이 되며, 네가 용서하면 상처가 즉시 아문다고... 결국엔 널 교황 자리에 앉혀 버렸잖아.
하지만 나랑 라헤일이 제일 잘 알잖아! 너, 우리랑 같이 과일이랑 채소를 주스로 갈아서 마셨는데, 왜 우린 신도 안 됐고, 영생도 못 얻었는데?
우리는 똑똑히 봤어. 사람들이 네 손수건 한 장 가지려고 서로 뺏고 난리 치고, 네가 닦은 촛대까지 가져가고, 심지어 네가 어릴 때 오르던 뒷마당 나무까지 통째로 베어가 대신들의 사무실 책상으로 만들어 놨다더라!
말해 봐, 이스마엘. 너한테 정말 "신의 힘"이라는 게 있어? 그들이 정말로 너한테서 "자비로운 용서"란 걸 받았던 거냐고?
이사의 손가락은 책상에 박힐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인간은 그녀가 격한 감정에 휩싸여 손끝에 "촉수"라도 튀어나올까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사의 울음은 전부 진심이었다. 이스마엘, 그리고 라헤일과 함께한 기억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만약 정말 네게 "신의 힘"이 있다면, 왜 이 세계는 이 모양인 건데? 왜 우리는 이렇게 막막하게, 마치 네가 쳐놓은 장막 뒤에 숨어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하냐고?
요 며칠, 네가 시키는 대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너희 뒤를 따라다녔어. 그러면서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 네가 관 속에서 멀쩡히 눈을 뜨고, 엘리베이터에서 목이 꿰뚫리는걸. 그런데도 넌 살아있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렇게 멀쩡하게 내 앞에 서 있잖아!
요즘은 이상한 꿈도 꿔. 꿈속 세계는 여기랑 전혀 다른데, 너무 생생해. 거기서 우리는 같은 학교 친구고, 라헤일은 네 지도교수였어. 그러다 눈을 뜨면,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
이스마엘... 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이 세계는 왜 이 모양인 거고, 너와 이 세계는 대체 무슨 관계인 거냐고?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그때, 라헤일의 따뜻한 손이 다가와, 두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소중한 아이들... 이사, 너무 얽매이지 마라. "무엇이 되든" 그것은 이스마엘의 자유란다. 우리가 그녀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그리고 이스마엘, 너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너도 결국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아이잖아. "교황 이스마엘"이든 아니든, 우리에게 달라질 것은 없어. 이사는 그저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난... 내 발명품은 이미 완성되었어. 오늘 마지막으로 기름칠까지 마쳤지. "이스마리"는 언제든 기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 이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으니, 내게 미련은 없다.
아니요. 제가 하고자 하는 사과는 더 많은 걸 의미해요. 이 "세계"는...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중요치 않다.
이스마엘, 네가 그러는 게 오히려 날 걱정시키는구나. 너는 그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렴. "신의 힘" 따위는 잊고, 네 뜻대로 살아.
우리는 언제나 네 뒤에 있을 거고, 끝까지 널 응원할 거야.
라헤일의 손가락이 이스마엘의 분홍 머리를 스쳤다. 이스마엘은 그 손길을 느끼며,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네. 언제나 제 뒤에서 저를 지지해 주셨어요.
인제 그만들 자. 식탁은 내가 치울 테니. 우린 원래 계획대로, 내일 아침에 떠날 것이다.
네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우린 떠날 거야. 너도 자유롭고, 우리도 자유로우니까.
알겠습니다.
밤 10시. 이스마엘이 계단 손잡이를 짚으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인간은 벽에 기댄 채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네, 연결 원하시는 번호... 확인했습니다. 지금 신호를 보내는 중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다른 이름으로 말을 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직 신호가 가는 중입니다. 곧 연결될 겁니다.
한참 동안 신호음이 울린 뒤, 수화기 너머로 교과서처럼 똑같이 찍어낸 듯한 접수원의 유감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네, 잠시만요. 아, 연결됐습니다. 슈트롤 경찰관님, 이쪽은 수도에서 오신 법률 감찰 전담관님이십니다...
이름은 안 물어봐도 알지. 이 야밤에 전화를 걸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니. 여보세요, [player name]. 지금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온 도시가 너 하나 찾는다고 발칵 뒤집혔어.
그래. 당장 다락방 커튼을 젖히거나 하수도 뚜껑이라도 열어봐. 길거리마다 순찰 불빛에 경찰견들이 쫙 깔렸으니까.
교황과 그녀의 "애인"을 체포하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너희가 사라진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그런 소문이 벌써 퍼졌어. 이제는 경찰서 안에서도 다들 그걸 믿는 분위기야. 정말, 내가 미친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 모르겠다.
나도 그게 답이길 바란다.
너랑 같이 유리 탑에 한 번 다녀온 뒤로, 내 마음속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면서 많은 걸 내려놓게 됐어. 내일 당장 사직서 내고, 경찰 노릇 안 할 거야.
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그 야생마 같은 여자에게 고백이나 하려고. 칼을 들고 죽일 듯이 덤벼들어도 상관없어. 그렇게라도 매달려 볼 작정이야. 그녀 곁에서 예술가가 되든, 오직 그녀만을 위한 보디가드가 되든, 그녀가 필요하다면 뭐든 상관없어.
무슨 정보인지 먼저 말해봐.
있긴 하지. 일주일 뒤, 추기경단이 추대한 새 교황을 신도들이 인정하는 절차를 겸한 취임식이 있어. 다만 워낙 급하게 준비하는 거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을 거야.
설마 거길 뒤엎을 셈인가? 명분도 없고 신도 인정하지 않는 새 교황을 하늘로 쏘아 올려 불꽃놀이라도 하려는 거야?
나보다 더 예술가 기질이 있네.
하지만 충고 하나 하지. 테베 사람들은 점점 더 미쳐가고 있어. 곧 통제 불능이 될 거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보다 숨어있는 게 나아.
내 이름으로 코린토스행 배표 두 장 샀어. 왜 두 장인지 당연히 알겠지? 그게 코린토스로 가는 마지막 배야. 기회 놓치지 마.
앞으로 경찰서에 전화해 봤자, 내가 받는 일은 없을 거야.
고맙긴.
전화는 그대로 끊어졌다.
안녕하세요. 연결할 다른 번호가 있으신가요?
수화기를 든 채 몇 초간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어느 곳으로 연결하시겠습니까? 전시 상황이라, 요금이 평소보다 비쌉니다.
죄송합니다. 현재 코린토스와의 모든 통신은 통제되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전용 회선 담당자를...
잘 안됐나 보군.
한동안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이스마엘이 창가 커튼을 살짝 내려 골목의 가스등 불빛을 가렸다. 슈트롤의 말대로, 바깥은 두 명의 "도망자"를 쫓는 추격자들로 가득했다.
그래. "세계"는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다만 나 때문에, 당장 이 집을 건드리지는 못하는 것뿐이지.
며칠 밤 편하게 잘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있어.
그럼 일주일 뒤, 새 교황 취임식에서 "인도"를 거두어들이려는 것이군. 하지만 추기경들은 분명 비밀리에 의식을 치르려 할 테고, "세계" 또한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챘으니 어떻게든 테베 사람들을 흩어놓으려 할 거야.
"죽어 마땅한 전 교황, 마침내 체포" 같은 충격적인 뉴스가 터져서,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성을 잃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경하지 않는 이상, 대규모로 "인도"의 실을 수습할 기회는 좀처럼 없을 거야.
이스마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창가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다가갔다.
좋아. 지금은 쉬는 게 먼저야. 며칠을 꼬박 내달렸고, 감옥에선 눈도 제대로 못 붙였잖아. 자, 이거 마셔.
이스마엘이 아래층에서 갓 데워 온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내밀었다.
달다 못해 목구멍에 달라붙는 듯한 단맛이 혀를 마비시켰다. 모든 신경이 그 단맛에 집중되는 바람에, 인간은 하마터면 우유를 뿜어낼 뻔했다.
아, 설탕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네.
컵을 머릿장에 내려놓은 인간은 그제야 천천히 이 아담한 다락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다락방은 낡았지만 정갈했다. 침구는 단정했고, 거미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소중히 아끼며 가꾸는 공간임이 틀림없었다.
책상 위에는 소녀 취향의 물건들, 정교하게 조각된 봉랍 인장과 양장본 책들이 놓여 있었다. 이스마엘은 인간이 드러낸 호기심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
라헤일이 나랑 이사를 거둬줬거든. 이 다락방이 내 방이었어. 책상 서랍 안에 든 건 전부 내 물건들이고.
서랍 안에는 가죽으로 감싼 조각칼과 줄칼, 그리고 나무 조각품들이 가득했다.
온통 주사위였다. 숫자만 새겨진 단순한 것부터, 화려한 무늬를 새기고 색을 입힌 것, 심지어 속이 비치는 정교한 투각 주사위도 있었다.
조각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좋은 방법이야... 예전에, 누군가 제게 손수 주사위를 하나 깎아준 적이 있어. 그래서 나도 배우게 됐지.
인간은 속이 뚫린 작은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그 구멍 너머로 두 발짝 떨어진 이스마엘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듯했다.
마치 그 주사위를 통해, 이스마엘의 소박했던 일상, 소녀 같은 마음, 그리고 주사위를 선물한 이에 대한 그리움을 엿보는 듯했다.
이스마엘은 주사위의 그 작은 구멍 너머의 "그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그리움이 결국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래. "그레이 레이븐".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진실과 진심의 파편이 서로에게 닿았다.
하지만 운명은, 이 "세계"에 억지로 끌려온 이방인을 절대 동정하지 않았다. 순간의 맑은 의식은 곧 사라져 다시는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손에서 주사위를 받아 다시 서랍에 넣고, 머리맡의 촛불을 불어 껐다.
이제 자. 침구는 모두 정돈해 두었으니, 편히 잘 수 있을 거야.
어떤 일이 닥치든, 오늘만큼은 억지로라도 푹 자 둬. 그래야 내일 어떤 상황이 닥쳐도 맞설 수 있을 테니까.
폭풍 전야, 둘은 한 침대에 누워 서로 마주한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도 지나지 않아 인간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자신의 눈동자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스마엘도 마찬가지로, 어딘가... 슬픔이 담긴 눈빛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어. 또 눈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하네. 막을 생각 없으니, 해봐.
인간은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고르며 머뭇거렸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과연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인간의 입에서 묘사된 작은 집은 마치 세속과 멀리 떨어진 "낙원" 같았다.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보는 곳이었다.
마당에는 가축우리와 채소밭이 있고, 뒤편엔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쉽지만, 그 교과서들은 얼마 안 가 테베에 의해 내용이 바뀌겠지. 전쟁이 터지면, 네가 모아둔 돈도 금세 휴지 조각이 될 거고.
...
"도망"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어. 하지만 대부분 도련님과 아가씨, 혹은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지. 교황의 도주가 "사랑의 도피" 같다니, 이런 건 또 처음 듣네.
그래도 이 전개는 이사 얘기보다 훨씬 흥미롭네.
네가 그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주니 기쁘구나.
이스마엘은 잠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터무니없는 꿈을 떨쳐내는 듯했다.
하... 하지만, 너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지.
넌 결코 한구석에 안주하는 선택을 하지 않아. 네 선택은 늘 세계와 이어져 있었지. 그게 바로 너고, 그게 진짜 너야.
설령 시간, 규칙, 인도가 모든 걸 바꿔놓는다 해도... 넌 결코 변하지 않아.
사실 난 "세계"와 하나야. "세계"가 가진 인도의 힘은 원래 내 힘에서 비롯된 거야.
내 "인도"의 힘이 이 "세계"로 흩어지면서 통제를 잃었고... 그 여파로 너와 그레이 레이븐 소대, 그리고 세 아이까지 이곳으로 강제로 끌려온 거야.
그래서 내가 그 힘을 거둬들이려고 교황이 된 거야. 다시 정돈해서 고르게 흩뿌리기 위해서 말이야.
이해했으려나? 지금 온전치 않은 네 상태론 전부 알아듣기 어려울 거야. 아마, 느끼게 해주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선택권은 처음부터 "이방인"인 네 손에 있었어. 다만 네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천히 건네주려 했을 뿐이야.
지금 보여줄게.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 테니.
이스마엘이 옆으로 몸을 돌려 손을 뻗어 인간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괜찮아... 긴장을 풀고 상상해 봐. 만약 "인도"의 집합체가 온전히 네 손에 쥐어진다면, 넌 뭘 할 거지?
"인도"를 소멸시켜 힘을 고르게 흩뿌릴 건가? 아니면 그걸 손에 쥐고,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 건가?
이스마엘의 손바닥에서 신의 힘이 스며 나왔다. 인간은 곧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수많은 이들이 내게서 이 힘을 탐냈어. 내가 만진 물건을 성물이라 부르며 가지려 안달했고, 내가 "죽은 뒤"에는 내 왕관과 지팡이를 차지하려 피 터지게 싸웠지.
아니면... 넌 이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방법을 찾아낼까?
마치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스마엘의 부드러운 눈빛에서 나와, 인간을 "간질이는" 듯했다.
황금빛 청사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서로 맞물려 회전하는 형상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손짓으로 인간을 이끌었고, 인간은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괜찮아. 네 모든 선택을 내게 보여줘... 주저하지 마. 난 언제나 네 결정을 존중하고,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할 테니.
톱니바퀴와 주사위가 연주하는 교향곡이 다시 귓가를 울리며, 인간의 의식을 저 높은 탑의 꼭대기로 끌어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