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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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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의 주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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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왜곡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나운서

"수만 명의 머리 위로 기이한 정적이 내려앉았습니다."

"어제 오전, 경찰과 교회 측은 전임 교황이 비밀리에 안장되었음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탑에서 전임 교황의 흔적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속출했습니다."

"전임 교황 이스마엘...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저녁까지는 살아 계셨던 교황 이스마엘'은, 마침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어제저녁,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은 피로 가득 찬 투명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장면을 보았으며, '수조' 같은 그 안에 이스마엘이 목에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수조' 안에 멀쩡히 살아남은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player name]입니다. 코린토스 출신 총감찰청의 일원으로, 즉시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현장에서 위독 판정을 받고 긴급 이송되었으나, 현재까지도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감옥 독방 구석에 앉아 있던 인간이 손가락으로 라디오를 툭 쳤다.

넌 저 얘기를 믿냐?

강도죄로 잡혀 온 다른 죄수가,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이 감방의 두목을 쳐다보았다.

나도 안 믿어. 이 녀석, 딱 봐도 나보다 죄질이 나빠 보이거든. 이봐, 네가 죽인 거 맞지?

혹시 예전에 교황 암살하려던 그 사람이랑 한패 아니야? 그때 온 도시가 떠들썩했잖아. 이름이 뭐더라... 아, "라스티"! 테베 사람들이라면 다 기억하는 이름이지!

근데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네놈이 잡혀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이 시위한답시고 거리에 쏟아져 나왔대. 라스티의 "암살"은 교황이 꾸민 자작극이라면서 말이지. 덕분에 테베가 코린토스로 쳐들어갈 명분도 날아갔다더군.

"전쟁 반대"하는 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젠 정부를 못 믿겠다는 놈들이 더 많아졌어. 이번엔 "가짜 죽음"은 안 된다면서, 교황의 치료 과정을 전부 공개하라고 난리라더군. 지금 테베는 그냥 개판이야!

라스티도 코린토스 출신이라며? 너도 그렇고. 둘이 짜고 친 거 아니야? 코린토스 것들은 원래 그렇게 잔머리 굴리는 거 좋아하잖아.

뭐? 지금 우리 두목이 널 칭찬이라도 한 줄 아는 거냐? 착각도 유분수지. 설령 네놈들이 "교황 암살"과 "코린토스 출병"의 인과 관계를 증명한다 해도... 누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하! 적어도 전쟁에 눈먼 테베인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할걸.

테베에서 "설 자리를 잃은" 이방인의 삶은, 감옥 안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두 죄수의 손끝에서 꿈틀대는 "촉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라디오 방송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괜히 고상한 척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내 가게에서 말 안 듣던 견습생 한 명을 죽였어.

근데 네 죄는 내가 지은 죄보다 무거울걸. 왜냐하면 여긴 테베니까. 사람 목숨보다 돈과 기회가 더 비싼 곳이거든. 간단한 이치지.

라디오에서는 시위와 파업 소식이 계속 흘러나왔다. 외출 자제 경고와 함께, 치안 경찰이 질서 유지를 위해 출동했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아나운서"

시위 및 파업 영향 범위는 동남부와 남부 노선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외출 시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라디오 수신 신호가 심하게 요동치더니,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아나운서의 말을 끊고 흘러나왔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인간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근데 말이야, 방금 간수장이 떠드는 걸 엿들었는데... 교황한테 씌워진 죄목들이 전부 사실이라더군. 그래서 죄를 피하려고 죽은 척 쇼를 한 거래. 경찰들도 완전히 놀아나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던데?

전혀 놀랍지도 않아. 그 교황이 마귀랑 한통속인 건 진작에 알았지! 내 세금을 얼마나 처먹었는데! 꼴좋다, 언젠간 당할 줄 알았어. 결국 진짜로 당했잖아? 제발 이번엔 살아나지 말아라.

어이, 코린토스 놈! 일 처리는 제대로 한 거냐? 그 빌어먹을 교황, 숨통은 확실히 끊어놓은 거 맞아? 그게 네놈이 테베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행이다! 아하하하!

"아나운서"

들려? 저 자가 네게 묻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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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숨통을 정말 끊었다고 확신해? 왜 대답이 없지?

감옥 복도 끝, 어느새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철창 너머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서프라이즈" 같은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두 죄수는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라도 빼앗긴 아이처럼 라디오 안테나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인간은 바로 몸을 일으켜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

아닌 것 같아.

후드 아래로, 낯익은 미소가 드러났다. 그녀는 뒤편의 교도관에게 눈짓하며, 이 가련한 코린토스인을 풀어주라 명했다.

????

자, 가자. 늘 말했듯, 날 따라와. 내 곁에만 있으면 돼.

손목의 속박이 풀리자, 인간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굳었던 손마디를 움직이며, 복잡한 심경으로 "신통방통한" 교황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그녀의 "악행"을 손가락질하지만, 그녀는 분명 인간을 위해 몸을 던졌다.

????

네 마음에 아직 의심이 남아 있구나.

정말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직설적으로 그의 망설임을 찔렀다.

????

어느 범인을 말하는 건가? 날 죽이려 한 자? 널 죽이려 한 자? 코린토스를 공격하려 든 자? 아니면 이 세상 전부를 난장판으로 만든 그 범인?

교황은 감옥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인간을 돌아보았다.

????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야. 범인은 바로 "세상의 규칙"이야.

그녀가 문을 밀어 열자, 예상치 못한 햇살이 어두운 감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따스한 빛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게 했다.

인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마침내 온전한 신뢰를 얻어낸 교황이 미소 지었다.

햇살 속에 선 그녀가 옷을 벗어 던졌다. 소매를 가볍게 흔들자, 붉은 피가 묻은 나무 주사위가 손끝에서 굴러 나왔다.

이스마엘

기꺼이 알려주지, 사랑하는 그레이 레이븐.

이스마엘은 손을 내밀어 인간의 손을 잡았다. 둘은 함께 소란스러운 거리를 걸으며, 세계의 진실 속으로 들어갔다.

이스마엘

세계의 규칙은 누구도 쉽게 알 수 없어. 네가 탑의 돔 아래에서 본 수많은 톱니바퀴, 그게 바로 세계 규칙 중 하나가 눈에 보이게 형상화된 거야.

그렇다고 너무 심오하게 생각할 건 없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의 "표면"에도 규칙은 늘 반영되어 있으니.

자, 이 주사위로 보여주지.

둘은 감옥에서 가장 가까운 사거리로 향했다. 이스마엘의 손에서 던져진 주사위가 멈추자, 숫자 "10"이 드러났다.

이스마엘

"10". 균등, 균형,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같음을 의미하지.

주사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인간의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 순간, 양쪽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마차 두 대가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길 한복판에서 뭐 하는 거예요! 죽고 싶어요?!

저기요! 비키세요, 얼른!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간신히 멈춰 선 마차에서, 멀끔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이 내렸다. 그들은 손끝에서 꿈틀대는 "촉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서로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 때문에 왼쪽 바퀴가 망가졌잖아요! 이 상태로 어떻게 가라는 거예요? 이러다 기차도 놓치겠네, 정말!

너만 급해? 난 오른쪽 바퀴까지 부러졌단 말이야!

순식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수군거렸고, 어떤 이들은 이런 사고쯤은 흔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한 아이가 이스마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의 작은 손바닥 안에는 은화 한 닢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아이의 "촉수"가 얽혀 있었다.

누나, 이건 누나가 떨어뜨린 거죠? 여기요.

착한 아이구나, 고맙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니란다. 저기 경찰서에 가져다주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스마엘이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이번에 나온 숫자는 "11"이었다.

"11". 살짝 기울었군. 조금 잃고, 조금 얻는 셈이지.

잠깐! 돈이 모자라잖아! 저놈 잡아! 도둑이다!

한 사내가 기다란 바게트를 훔쳐 달아났다. 그는 마차 사고를 구경하던 인파를 헤치며, 사람들의 비명 속으로 사라졌다.

데구르르.

주사위가 다시 굴러가더니 "20"이 나왔다. 길가에서 신문을 읽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무언가 확신을 얻은 얼굴이었다.

다음은 "15"였다. 거리의 신문팔이가 목청껏 외치며 쉴 새 없이 손님을 끌어모았다. 사람들은 그의 손에 잔돈을 쥐여주고 신문을 한 부씩 뽑아 들었다. 그날 신문팔이는 테베와 코린토스 전쟁에 관한 뉴스로 이번 분기를 통틀어 최고의 수입을 올렸다.

이어서 나온 숫자는 "2"였다. 도박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길모퉁이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반지와 모자, 넥타이는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태양 아래, 수많은 이들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허공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1"이 나왔다.

어느덧 둘은 경찰서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랐다. 그 앞 계단에, 낯익은 모습이 웅크리고 있었다.

흐... 흐윽...

한때 이스마엘을 찔렀던 젊은 암살자, 라스티는 어느새 풀려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름"이었다.

이제 군중의 관심은 모두 "[player name]의 교황 암살 미수 사건"에 쏠렸고, 아무도 라스티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라스티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코린토스의 소녀처럼, 신문팔이에게서 전쟁 소식이 담긴 신문을 사 들고 읽고 있을 뿐이었다.

"어젯밤, 테베 군이 코린토스 수도의 교외에 집결했다"... 말도 안 돼요, 고작 며칠 만에...

맙소사. 교황이 사라졌는데도 결국 이렇게 됐어요... 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라스티는 조국의 운명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바로 그 거리 위로, 거대한 시위 행렬이 행진해 지나갔다. 규모는 테베의 군대와도 맞먹을 정도였다.

군중

전쟁을 멈춰라! 우리 세금을 침략 전쟁에 낭비하지 말라!

코린토스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총을 내리고 싸움을 멈춰라!

시위대는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피켓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피켓에는 코린토스의 문자까지 쓰여 있었다.

제발 쏘지 마세요. 우리를 죽이지 마세요. 신이시여,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코린토스를 구해주세요. 저도 무언가 할 수 있게... 제발 길을 인도해 주세요.

이스마엘은 걸음을 멈추고, 손안의 주사위를 거두었다.

이제 충분히 보았겠지. 들리나?

이것이 바로 내가 듣는 세상의 소리야. 톱니바퀴는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주사위는 수없는 변주를 일으켜. 모든 것은 이끌리듯 "질서" 혹은 "혼돈"의 조화를 이루며, 거대한 나선을 그리며 치솟아.

이스마엘의 손끝이 인간의 귓가를 스치는 순간, 머릿속으로 톱니바퀴 맞물리는 소리와 주사위 구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규칙이다.

이 톱니바퀴와 주사위가 한데 엮여, 이 나라... 이 "테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야.

이스마엘이 인간의 얼굴을 가까이하며 뜨거운 숨결을 뱉어냈다. 머릿속의 소음은 점점 더 거세졌다.

들어봐. 마치 끓어오르는 죽과 같아. 보글보글, 거품이 일고, 뜨거운 김이 치솟고 있어... 곧 넘쳐 터져 나올 거야.

상상해 봐. 그 폭발의 끝은 무엇일까? 두 나라 백만 명의 목숨을 삼킬 전쟁일까, 아니면 자신을 파멸시키는 자폭일까?

시위대의 함성, 라스티의 울음, 말들의 울부짖음... 세상의 모든 소음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교향곡 제4악장 화려하고 밀도 높은 감정의 폭풍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머리 위로 휘몰아쳤다. 그것은 임박한 폭발이자, "파국으로 치닫는" 전조였다.

유일한 청자인 인간은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고막이 떨리고 뼛속까지 저렸다. 본능적으로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감당하기 힘든 소음이었다.

최근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아파져, 때아닌 기침을 터뜨렸다.

"세상의 규칙"을 본 그 순간, 인간은 곧바로 해답을 갈구했다.

내 힘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크구나. 고작 두세 번 본 사이에 벌써 이리 의지하게 된 건가?

아쉽지만, 신앙 따위로 광기에 휩싸인 군중을 붙들 순 없어. 나 역시 불가능하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할까?

못 믿겠다면, 바로 눈앞에 완벽한 예시가 있잖아.

이스마엘의 손가락이 경찰서 계단 위의 라스티를 가리켰다.

계단 위에서 울던 라스티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촉수"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한때 자신의 칼끝에 쓰러졌던 교황 이스마엘과, 최근 모든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한 또 한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보이지 않는 듯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이 조합만으로도 라스티는 온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칼이 없었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마치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역시 죽지 않았군요. 아니, 왜 죽지 않은 건가요?

그리고 당신,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원한이 네 눈을 가렸구나. 자신이 불러온 관성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면서.

맞아요. 테베는 결국 해냈군요. 전 그들의 손에 놀아나, 전쟁의 도화선이 되어준 셈이 됐네요. 이제 똑똑히 알았어요.

네가 본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그 일부가 너를 옭아매고 있지. 너의 삶이 거기에 갇혀선 안 돼.

제 고향이 무너지고 친구들이 모두 죽는다 해도, 저는 저항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한 번 찔렀다면, 두 번도 찌를 수 있어요. 제가 한 번 저항했다면, 코린토스는 수백, 수천 번이라도 저항할 겁니다!

라스티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분주한 거리의 소음은 멈추지 않았고, 수많은 행인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스마엘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은... 네 증오의 화살이 엉뚱한 곳을 향했다는 거다. 넌, 엉뚱한 상대를 찔렀어, 아이야.

널 조종한 사람들이 바로 이 전쟁을 위해 널 내세운 거야. 넌 그냥 작은 체스 말이었을 뿐이지. 아니, 사실 그들조차도, 그리고 나까지도 결국 그 판 위에 있었어.

자신을 가련한 피해자인 양 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결코 동정받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교권이란 본래 정치의 도구잖아. 나도 각오하고 있었어. 인간에게서 "교황" 자리를 받는 순간부터 말이야.

그리고 역시나... 권력에 저항하는 순간, "말을 안 듣는" 나는 곧바로 "비열한 교황"으로 낙인찍혔지.

미쳐버린 건 이 나라였고, 국민 모두였고, 네가 바라보는 눈앞 거리의 모든 사람이었어. 하지만 어쩌면...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내가 아닐까?

라스티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와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한들,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설득하려 들지 마세요!

넌 이미 알고 있었잖아? 탑 위에서 날 "죽인" 후, 내 서재의 모든 문서를 뒤지던 너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문서를 읽던 네 표정까지도.

당신...

라스티가 진실을 외면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봐, 아이야.

저는...

제 손으로 당신의 서재를 뒤졌어요. 그리고... 당신이 전쟁에 반대했다는 증거를 봤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고 싶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을 애써 외면하고, 제 마음속의 목소리만 믿고 싶었습니다. 저는...

라스티는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의 용기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선택의 기회를 놓치거나, 선택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스마엘은 그녀가 스스로 혼란을 정리해 나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5분 뒤, 라스티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때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저는 그저 증오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봐 버렸어요... 당신이 "통제 불능"이라는 이유로 덮어씌워진 죄목들, 죽은 뒤에도 조롱거리로 욕먹는 당신의 모습까지...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요?

이스마엘은 여전히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라스티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돌려 이스마엘 곁에 선 인간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녀는 최근의 소문들을 알고 있었다.

설마 당신이 그 "새로운 범인"이라는...

라스티는 잠시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제가 모든 걸 망쳐버렸군요.

하지만 죄송하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습니다.

이스마엘은 손을 뻗어, 자비롭고도 단호한 손길로 라스티의 손끝에 피어 있던 모든 촉수를 거두어 갔다.

라스티의 눈빛이 순간 공허해졌다가, 이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내가 네게 깃든 세계의 "인도"를 거두었으니, 한결 편안해졌을 거야.

넌 깨끗해졌어.

왜 너 자신에게 있던 지식에 대한 열망과 용기를 쉽게 버리려 하지?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거대한 물결에 휩쓸린 뒤에는 너무 늦으니까.

가봐. 네가 퍼뜨린 "인도"를 거두고, 세계가 균형을 되찾도록 노력해.

라스티는 영혼을 옭아매던 족쇄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극도의 긴장으로 굳었던 몸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라스티가 고개를 들어 눈 부신 빛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시야가 이토록 선명했던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문득 "경건한" 깨달음을 얻었다.

교황님... 만약 제가 당신의 신도가 되어, 당신을 믿고 따른다면 저를...

네 죄를 용서하마. 하지만 네가 내게 기도하거나, 내게 매달릴 필요는 없어. 넌 자유로우니까.

일어서, 아이야.

라스티는 구겨진 신문을 손에 쥔 채, 붉어진 눈가를 비볐다. 그녀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 마침내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젊은이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했지만, 적어도 본심만은 남아 있었다.

이스마엘은 적절한 때에 인간을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무언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듯 인간의 반응을 살폈다.

네가 지금 뭘 묻고 싶은지, 내가 한번 맞춰볼까? 사람들 손끝의 "촉수"란 무엇이며, 내가 왜 그것을 거두어 가는지. 바로 그거 아니겠어?

그럼, 이번에는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맞아. 이 세계에서 교황은 "신"의 대변인이야. 교황이 한 이방인 젊은이에게 용서를 베풀면, 경건한 신도 한 명을 얻을 수 있지.

교황이 연설하고, 한 길드의 조직자에게 축복을 내리면, 그 길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정치 변혁의 중심축이 되기도 해.

그것이 바로 "세계"가 교황에게 부여한 "인도"의 힘이고, 세계의 어떤 반동이나 전진의 광풍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지.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바로 "신앙"이라는 거야.

가장 다루기 힘든 권력이자, 가장 절대적인 정신적 권위.

수많은 역사를 참고해 보면, 신앙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는 경우가 많았어.

그래. 역시 날카롭게 짚어내는군. 그래서 말했잖아, 넌 내가 반드시 찾아야만 했던 인간이라고.

서두를 것 없어. 그리고... 네가 "인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면, 내가 네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할 이유 또한 없겠지.

이스마엘이 다시 손끝으로 인간의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

네 안의 소리를 들어 봐. 답은 그 안에 있을 테니.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어. 너에 관한 일이야.

테베 최고의 병원. 최고의 의료 기술이 모인 곳이었다.

이스마엘은 인간과 나란히 진료실 나무 의자에 앉아, 의사가 종이 위에 서투르게 그려 나가는 심장 그림을 지켜보았다.

잠깐, 잠깐만요... 이걸 끝까지 그려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요.

의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진료소에서는 "가벼운 감기"라고 했겠지만, 결과를 확인해 보니... 이건, 이건...

긴장돼?

이스마엘이 인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심장을 어루만져 주었다.

네 일이니, 네가 직접 주사위를 던지도록 해. 어때?

인간은 주사위를 받아서 들었다. 숫자 "1" 위에 선명하게 스며든 이스마엘의 핏자국을 애써 외면하며, 힘껏 던졌다.

주사위는 매끄러운 테이블 위를 두 번 구르더니 멈췄다.

숫자 "1". 그 위에 남은 붉은 핏자국이 다시 한번 인간을 조롱하듯 반짝였다.

이 세계가 참 노골적인 태도로 널 버리려고 하네.

자, 다 그렸습니다! 환자분,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보호자분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죠. 숨길 것은 없으니. 환자도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 여기를 보시죠. 이것이 환자분의 심장입니다.

의사는 종이를 들어, 방금 그려낸 실제와 다름없는 심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펜 끝으로 심장의 정중앙을 가리켰다.

심장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선천성 심장병은 대개 무언가 "결손된" 경우죠.

환자분의 심장 또한 결핍이 있는데, 흔한 심방중격 결손이나 심실중격 결손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중앙, 살과 판막이 있어야 할 자리가 전부 텅 비어 있습니다.

의사는 종이 위 "심장"의 중심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더니, 그 핵심을 뽑아 던지는 시늉을 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제 소견으로는, 환자분은 심장의 동력 없이 움직이는 육신과도 같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오직 그분의 힘으로만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겠죠. 세계가 이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심장을 용납할 리 없죠.

쿨럭... 죄송합니다만, 제 의사 생활을 통틀어 이런 사례는 처음 봅니다.

의사가 갑자기 크게 헛기침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더 이상 의사의 품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촉수"가 흥분한 듯 세차게 꿈틀거렸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환자분은 제 의사 인생의 마지막 환자가 되어주셨습니다!

환자분의 심장을 본 순간, 신의 계시를 받은 듯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의사가 아니라 신부가 되겠습니다! 어차피 의술로는 이 테베를 살려낼 수 없잖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이스마엘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 테베의 거리를 활보해도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환희에 찬 의사와 복잡한 얼굴의 인간을 번갈아 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과에도 가볼래? 내가 아는 훌륭한 의사들이 아직 많아.

이스마엘은 죽음을 선고받은 인간의 모든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인간이 걷고 싶어 하면 함께 걸었고, 잔디밭에 앉고 싶어 하면 곁에 앉았다.

침묵하고 싶다면, 침묵하게 했다. 그녀는 인간의 보기 드문 침울함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오후가 거의 다 지날 무렵, 하늘 한편에서 피어난 작은 꽃잎 같던 구름이 반대편으로 흘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인간은 입을 열었다.

무언가 더해지는 건 두렵지 않아, 병든 부위를 잘라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건 드문 상황이야, 채우기가 어렵지.

함께 생각해 보자. 흠... 많은 이들이 죽을병에 걸리고 나서야 신앙을 찾더군.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겠지. 네가 원한다면, 곁에 있을게. 네 기도를 들어줄 수 있어.

그저 선택지를 주는 것뿐이다. 나는 신에게 귀의하지 않지만, 네가 내게 귀의하는 것은 가능하니.

하지만 인간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넌 진실을 들을 가치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인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저녁이 찾아왔고, 하늘엔 여전히 분홍빛과 흰빛의 노을이 물들어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분홍빛은 유난히 옅었고, 남은 흰빛은 유독 창백해 보였다.

전에 말했잖아. 난 네 속마음을 읽는 게 아니라,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다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대신 말해줄 수는 있어. 지금 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집에 남겨진 세 아이지?

넌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누가 돌봐주지?"

"테베가 코린토스의 수도까지 함락시켜 버리면, 대체 언제쯤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이들은 이제 겨우 여덟 살인데, 시골로 피신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먹을 게 부족하면,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고 지낼지도 몰라. 맙소사..."

일시적으로는 가능하겠지. 적어도 "인도"의 힘으로 부풀려진 전쟁 의지는 한동안 누그러지고, 광기의 물결도 약해질 거야.

더 정확히 말하면, 난 이미 그 일을 하고 있어. 네가 보았던 그 붉은 실, "촉수"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말이야.

다만... 속도가 너무 느려. 인파가 한곳에 모이면 훨씬 수월할 텐데. 내가 아직 교황이었다면 대규모 집회쯤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하지.

그럴듯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해...

병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하늘의 장난이었을까. 인간은 저 멀리 지고 있는 태양이 순간적으로 깜빡이는 것을 본 듯했다.

목소리를 낮춰. 이 "세계"가 눈치채면 곤란하니.

잠시 후, 그것이 환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잔디밭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단 1초간, 일제히 멈춰 섰다. 나누던 대화도, 즐기던 소풍도, 모든 것이 멈춰 섰다.

이내 잔디밭 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봤다. 그들 손끝에 얽혀 있던 붉은 "촉수"들은, 마치 고양잇과 동물이나 뱀이 위협할 때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이제야 네가 이 세계의 규칙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구나.

그렇다면 이젠 알겠네, 네가 하려는 일은 "세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고,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테지, 네 몸은 점점 버티기 힘들어지다 끝내는...

저 멀리 잔디밭 위에서, 한 사람이 경직된 몸으로 일어나 이쪽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은 마지막으로 두세 번 기침을 내뱉었다. 광기에 휘둘리며 육체와 맞서려는 불안하고 산산조각 난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뒤,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

난 너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

잔디밭 위, 경직된 인파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작은 무리는 이제 명백한 위협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를 뚫은 "총알"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성가시고 위협적이었다.

괜찮아. 이미 우리를 데리러 온 이가 있어.

이스마엘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는 순간... 병원 정문을 뚫고 한 대의 마차가 미친 듯이 돌진해 왔다!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들의 앞에서 아찔하게 방향을 틀어 멈춰 섰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검은 머리의 마부, 앳된 소녀가 등자에 발을 딛고 몸을 내밀며, 이스마엘에게 손을 뻗었다.

어서 타! 모두 미쳐버린 것 같아! 경찰하고 기자들이 병원이랑 감옥에서 당신 둘을 못 찾으니까, 도시 전체에 수색령을 내렸어!

내 이름은 "이사"야! "마부"가 아니라고!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