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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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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이끄는 밧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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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교황의 비밀 거처가 있는 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어. 근데... 너는 어떻게 그 탑이 사건 현장인 걸 알았지? 설마 언론이 벌써 캐낸 건가?

전면이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따스한 봄 햇살이 유리창으로 들어오고, 기둥 그림자가 스칠 때마다 한 층씩 높아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시 전체가 발밑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인간이 입을 떼려는 순간, 장례식의 혼란과 죽은 자와의 "황당"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죽은 교황이 알려줬다고 할 건 아니지?

쳇, 네가 "총감찰청" 이름으로 날 찍어 누른 게 오늘만 벌써 세 번째야. 장례식에 나 대신 다른 애가 갔다면, 총감찰청에 너에 대한 민원이 빗발쳤을걸.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춰 섰다.

도착했어. 따라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둘은 긴 복도를 지나 선명한 경계선을 넘어, 복도 제일 끝의 묵직한 문을 밀어 열었다.

오후의 태양은 뜨겁지 않았다. 햇살이 창을 넘어와 실내 곳곳에 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총감찰청에서 나왔다. 신경 쓰지 마.

슈트롤 경찰관을 따라 근무 중인 경찰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인간은 방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의 장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생활용품들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얇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주인이 죽은 뒤 현장은 봉인됐고,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카펫 위에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과 핏자국이 뒤엉켜 있었다. 증거물들은 다 수거되었고, 바닥에 그려진 선명한 시신 윤곽선만이 남았다.

왜 굳이 현장에 오려는 거지? 경찰서에 정리된 자료만 봐도 충분할 텐데.

게다가 넌 전문가도 아니잖아? 듣자 하니 법률 감찰 전담관이라던데. 대학 때 법학 전공했어?

카펫 위 난잡한 흔적들 사이에서 인간은 몸을 낮추고 여러 발자국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발자국은 가장 "격렬한" 형태를 띤 발자국이었다. 핏자국이 터져 나온 중심을 밟아, 선명하고 강렬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 바로 범인의 것이다. 그 "코린토스 출신 암살자", 라스티의 발자국이야. 관련 자료는 이미 훑어봤겠지?

라스티는 일찍 코린토스 군사학교를 그만두고 테베로 건너와 국제관계학을 공부했어. 졸업 후엔, 공공기관이나 로펌에서 "단기 계약직"을 전전했고.

사건 직전에는 한 군수 기업 후방 지원부에서 평범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었지.

경찰관은 인간의 전문성을 굳이 평가하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인간의 추리를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두 번째 발자국 얘기가 나오자, 인간의 시선이 다시 핏물로 얼룩진 카펫으로 향했다.

흔적의 주인은 핏자국을 밟고 뒷걸음질 친 듯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듯, 끈적하고 가장자리가 흐릿한 자국이 카펫 위로 이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우리 전 교황님께서 생각보다 나름... 음...

경찰관이 적절한 형용사를 고심하는 사이, 인간은 "친절"하게 "선을 넘는" 평가을 툭 던졌다.

추리력이 제법인데?

돌아보지 마. 서두를 것 없어... 계속해 봐. 네 머릿속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주 흥미롭거든.

아침에 장례식에서 마주한 찰나의 순간은, 인간의 뇌리에 [환상]의 씨앗을 심어두었다. 이곳에 서서 추리하는 것만으로도, 귓가에 교황의 흥미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목소리는 머릿속을 빠져나와 귓가를 파고들며 마음을 간질였다.

쉿... 그냥 날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해.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보이지 않는 교황이 손길이 인간의 목덜미를 감싸며 시선을 아래로 고정했다. 돋아났던 소름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방금 무슨 얘기 중이었지? 아, 맞다, "교황"이 양말 바람이었다는 거.

봄이라지만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아 쌀쌀했거든. 난방도 시원찮았고... 그래서 보온이 필요했지.

그건 날 돌보던 아이들에게 물어볼 일이지. 난 별로 신경 안 써서 묻지도 않았지만.

인간의 손가락이 두 종류의 핏빛 발자국을 따라 길게 선을 그었다. 그 끝은 침실 테라스였다.

넌 여전히 그렇게 호기심이 많구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다시 인간의 눈을 가렸다.

이만큼이나 세세하게 추리해 냈으니, 사건 전체를 재구성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순간, 세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슈트롤과 다른 경찰들의 목소리도 아득해지고, 귓가엔 오직 교황의 속삭임만이 남았다.

처음부터 시작하자. 라스티라는 이름의 암살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눈을 감은 채 이끌리는 대로, 인간은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교황 저택의 현관문 앞으로 되돌아갔다.

3월 20일, 춘분 전날 저녁. 교황은 오후 업무를 마치고 30분간 묵도한 뒤, 다시 서재로 돌아와 18시 15분까지 책을 읽었지.

바로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 예정된 주교와의 면담은 30분부터였는데 말이야. 낯선 소리에 교황은 목소리를 높여 누구냐고 물었어.

인간이 문 앞에서 눈을 떴을 때, 범인 라스티가 현관문을 열고 눈앞에 서 있었다.

[환상] 속 라스티는 [현실]에서 온 방관자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체온은 달아오른 상태였다. 오른손엔 무언가를 꽉 쥔 채, 왼손은 두꺼운 나무문에 축축한 땀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끈 것은 그녀의 손가락이었다. 손끝에서 네다섯 개의 가느다란 "촉수"가 뻗어 나와 있었는데, 오늘 본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그때, 방 안에서 교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서, 면담까지 아직 15분 남았어. 잠시 뒤에 다시 오도록.

후, 14분. 아직은 괜찮아.

라스티는 발소리를 죽이며 테베 교황의 거처로 들어섰고, 카펫 위에 부드러운 부츠 자국을 남겼다.

짓밟힌 코린토스의 모든 풀과 꽃들이여, 죽어 나간 날짐승들이여, 억압받는 모든 이들이여...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어쩐지 많은 것들이 느껴지더라니... 역시 비서가 아니었군.

라스티가 거실 모퉁이에 막 다가섰을 때,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찾고 있던 교황이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했습니까?

네가 날 찾아올 거란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네가 말하고 싶다면, 기꺼이 들어주지.

당신도 그 빌어먹을 대신들과 한통속이에요! 코린토스의 땅을 빼앗고, 아이들을 끌고 가더니, 전쟁과 퍼니싱, 오염까지 전부 이 땅에 몰아넣어 잔디와 연못을 망쳐놨어요!

나는 그들의 행동을 인정한 적 없어. 그건 내 뜻이 아니야.

그딴 소리 집어치워요! 당신이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감히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겠어요? 당신들 모두가 코린토스의 껍질을 벗기고 뼈까지 발라 먹으려는 거잖아요!

너는 답을 들으러 온 게 아니군.

교황은 담담하게 라스티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순진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죠? 아니, 감히 어떻게 신의 눈앞에서, 신의 침묵 아래서, 이 모든 걸 방관할 수 있었던 거냐고요!

감정이 격해진 라스티는 오른손에 숨겼던 칼날을 드러내 교황을 겨누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결심을 굳혔다.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설령 신을 죽이는 죄를 짓더라도... 전, 할 겁니다!

증오에 눈이 멀었구나.

교황의 어조에 깃든 연민이 라스티를 완전히 격분시켰다.

맞아요, 답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똑똑히 보세요, 고귀하신 교황. 오늘, 당신에게 답을 알려줄 거니까요!

라스티가 카펫을 박차고 뛰어올라, 한 마리 맹수처럼 교황을 향해 덮쳤다.

[환상] 속 시간이 느려졌다. 인간은 눈앞에 흩뿌려질 피를 외면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등 뒤의 손은 부드럽게 인간의 머리를 누르며, 시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봐, 바로 이 순간이야.

18시 19분 20초, 그녀가 내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지.

날카로운 칼이 가슴을 꿰뚫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핏물이 터져 나왔다. 칼을 쥔 손은 격렬하게 떨렸고, 그 위의 실처럼 붉은 "촉수"는 순식간에 교황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암살자와 피살자의 얼굴에 진홍색 피가 튀었다. 이내 피는 줄기를 이루어 둘의 몸을 타고 흘러내려, 인간이 방금 발자국을 더듬던 카펫 위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교황의 얼굴엔 고통의 기색조차 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뒷걸음치자, 라스티는 그 관성에 이끌려 함께 발을 옮겼다.

누가 너를 여기로 오게 한 거지? 너무 많은 "인도"를 따르고 있구나. 이제 스스로 눈을 뜨고 진실을 봐라.

그 입 다물어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어요! 이 모든 건, 전부 당신들 때문이에요!

만약 교황을 죽이는 것이 세상의 재앙을 멈추는 길이라 믿는다면... 기꺼이 그 선택을 받아들이겠다.

입 다물라고!

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끝이 네가 바라던 결말이 아님을.

조용히 하라고요! 어째서, 어째서 아직도!

라스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불사의 괴물을 마주한 것 같았다. 온몸이 피에 젖은 그 존재가 그녀를 이끌고, 핏빛 카펫 위에서 기이한 춤을 추듯 뒤로 물러섰다.

기이한 춤사위 끝에, 교황, "자비로운 자"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너는 관성에 묶였구나. 하지만 그 결과까지 짊어질 힘은 갖고 있지 않아.

!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 속에서, 교황은 테라스 문턱까지 밀려나 암살자와 함께 뒤로 쓰러졌다.

인간의 시선은 쓰러지는 그들을 따라 테라스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그 순간, 교황 이스마엘이 남긴 [환상]이 머릿속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제 바닥 위에는 하얗게 그려진 시체 윤곽선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 추리는 여기까지. 18시 25분 01초, "나"는 여기서 죽었어. 똑똑히 봤나?

범인 라스티는 도망칠 여유도, 의지도 없었어. 내 서류 작업을 도우러 들어온 비서가 현장을 목격했고, 라스티는 곧바로 들이닥친 경비원에게 체포되었지.

인간의 시선이 윤곽선에 고정되자, [환상]은 인간의 뺨에서 손을 거뒀다. 그녀는 자기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목소리에는 남의 일을 구경하듯 희미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아직 묻고 싶은 게 있나?

인간의 시선은 테라스 문에 머물렀다. 시체의 윤곽선은 테라스 쪽으로 살짝 뻗어 있었는데, 마치 쓰러진 교황의 시체가 이 나무문을 부딪쳐 연 것 같았다.

그리고 핏자국은 스스로 길을 찾아간 것처럼, 테라스의 문틈 너머까지 몇 줄기 더 뻗어 있었다.

그럼, 그 문을 열어서 직접 확인해 봐.

그 목소리에서는 흡족함이 묻어났다.

이 세계에서 신의 힘은 모든 것을 인도할 수 있어도, 너만은 인도하지 못해. 이건 반드시 기억해 둬.

[환상]은 그 말을 남기고, 인간의 얼굴을 매만지던 손길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현실]은 오히려 더욱 몽롱하고 불분명해졌다.

응답이 없었다.

뒤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방을 지키던 경찰들과 슈트롤이, 모두 소리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손끝은 "깨끗"했고, 원래 붙어 있어야 할 "촉수"는 이미 모두 빨려 나가고 없었다.

다행히 경찰들의 호흡은 고르고 안정적이었는데,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는 곧 인간의 조사를 막지 않겠다는 "무언의 허락"과도 같았다.

인간은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에 거의 익숙해진 듯했다. 쓰러진 경찰들을 소파 옆으로 옮겨 눕힌 인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결정을 내렸다.

문밖의 풍경은 예상과 달랐다. 눈 부신 햇살 대신, 부드러운 금속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수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라는 개념이 톱니바퀴의 회전 속에 녹아 흐르는 듯했다.

거대한 톱니바퀴들 사이, 하얀 형체가 문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존재는 바퀴의 회전을 주시하며, 모든 것을 세심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장엄하고 완벽하리만큼 정교했지만, 동시에 극도로 불합리했다.

인간의 혀끝에서, 테베를 넘어 전 세계가 아는 그 이름이 맴돌았다. 그는 입을 열어, 그 유일하고도 "불합리"한 존재를 경건하게 부르려 했다.

쉿.

이미 교외 묘지에 묻혀야 했을 전 교황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올려, 인간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막았다.

오는 길에 무슨 풍경을 보았어? 내게 들려줄 수 있어?

적어도 길가에 핀 꽃이라도 한 송이 꺾어 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무미건조한걸.

네가 원하는 진실은 너무 많아. 그 모든 답을 보여준다 한들, 네가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지금 네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부터 설명해 주지.

이스마엘은 몸을 돌려, 인간의 눈앞에서 테라스 입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바닥의 혈흔과 하얀 시체 윤곽선 위로, 그녀의 몸이 완벽하게 겹쳤다.

이스마엘은 인간에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 네가 본 그대로, 나는 코린토스 출신 암살자 라스티의 칼에 가슴을 찔려, 이곳에 쓰러졌어.

라스티가 경비원에게 제압되는 동안, 의료진이 급히 달려와 나를 둘러싸고 응급처치를 시도했지.

원래대로라면, 그들의 "노력" 덕에 나는 상처에 붕대를 잔뜩 감은 채, 마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을 거야. 그리고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발표됐겠지. 그렇게 이 "암살" 사건은 무난하게 마무리되었을 거야.

하지만 난 그 의료진 속에서, 너무나 익숙한 얼굴들을 보고 말았어.

글쎄... 엄청 많았어. "존경받는" 의회 의원 몇 명, 그리고... 국무 대신도 있더라고.

이스마엘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마치 그날의 장면을 눈앞에 그대로 떠올리는 듯했다.

그들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노골적이고 다채로웠어. 꼭 동양의 변검을 보는 것 같았지.

누군가는 공포에 찬 얼굴로 '이스마엘이 없으면 신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잖아'라고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흥분에 겨워 있었지. 그 눈 속에서는 한 달 뒤 코린토스로 진군할 테베 군대의 환영이 보일 정도였으니.

심지어... 어떤 사람은 참지 못하고 내 숨결을 확인하더니 대놓고 소리치더군. '이 여자는 이제 끝났어! 신의 이름으로 우리 목을 조를 자는 이제 없다' 하고 말이야.

그제야 깨달았지. 내가 그들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어버렸다는걸.

그리고 차라리 잠시 죽는 편이 낫다는 걸 알게 됐지.

그런 셈이지. 하지만 동시에, 내겐 '인도'의 힘을 거둬들일 절호의 기회가 되었어.

맞아.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구나.

모든 기억을 잃은 너에게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어쨌든, 내 죽음을 바라던 자들에겐 완벽한 시체를 보여주었지. 그래야 그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광기에 몸을 던질 테니. 그리고 진짜 나는 이곳에 남아,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의 "인도"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자가 찾아오길 기다렸지.

그래. 바로 너야. 오직 너뿐이야.

지금은 여기까지밖에 설명할 수 없구나. 그래도 이 정도면... 네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의 한 조각은 됐겠지?

그녀가 손을 내밀자, 인간은 묵묵히 그 손을 맞잡았다. 죽음마저 초월한 교황을, 자기 손으로 카펫 위에서 일으켜 세웠다.

왜 말이 없지? 네 눈을 보니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는 거 같은데. 마치 네 안의 네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내 눈에 보여. '너무 무책임해. 당신이 꾸민 가짜 죽음이 결국 코린토스에 실질적인 고통을 줬잖아'라는 원망도 있고, '됐어. 애초에 누군가 전쟁을 벌이려 했으니, 당신이 막을 순 없었을 거야'라는 체념도 있군. 그리고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지?' 하는 자책까지 있네.

이스마엘은 인간의 모순된 마음과 깊은 고뇌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너그러움이 묻어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물어봐. 아는 건 다 말해줄 테니까.

아니. 오히려 그것이 전쟁의 뿌리이자, 갈등의 원인이 되었어.

감사 인사만 하고 그냥 가겠다는 건가? 이 세계와 너 자신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아직 이렇게나 많은데.

그 세 아이의 이름이, 혹시 "루시아", "리", 그리고 "리브"인가?

확답을 듣는 순간, 늘 엄숙하던 교황의 얼굴에도 드물게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 이건 먼저 사과해야 할 일이야.

이스마엘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뜸 사과부터 건넸다.

이제 다시는 그 세 아이 곁으로 돌아가 돌볼 기회는 없을 거야. 네가 이 세계에 단단히 찍혀버렸다는 걸, 난 이미 느꼈어.

막 돌아서려던 인간이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말 그대로야. 넌 이 세계의 변수이기에, 세계가 널 제거하려 들 거란 뜻이지. 어디를 가든 보이지 않는 힘이 널 짓누를 거야.

걷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도 있고, 길에서 놀란 말이 달려들 수도 있고, 엘리베이터가 천장에 부딪히는 사고가 날 수도 있어.

심지어 네 몸조차 널 거부하기 시작했지. 너 자신도 느꼈을 거 아니야?

이스마엘은 인간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따뜻한 피부 아래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넌 병에 걸렸어.

진료소 의사가 그리 말하던가? 그렇다면, 당장 병원을 바꾸는 게 좋겠군.

이스마엘은 눈썹을 치켜떴다. 마치 "거 봐, 내 말이 맞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방법을 찾지 않으면 넌 "이 탑에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그녀는 인간의 감정 변화를 짚어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날 믿고 너 자신을 온전히 내게 맡겨. 그저... 내 곁에 있으면 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잖아. 못 믿겠다면, 내가 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주지. 손님 배웅하듯, 널 탑 밖으로 데려다준다고 생각해.

너무 불안해할 것 없어. 나쁜 일은 아니니까.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도 생길 테고.

꼭대기 층에서 문이 닫힌 투명 엘리베이터는, 두 명의 승객을 태운 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나긴 조사와 대화 끝에 시간은 어느덧 저녁에 이르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석양이 유리 벽을 스치고, 층마다 드러나는 기둥을 차례로 비추며 흘러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시가 발밑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낮에 마차에서 보았던 꿈의 잔상과도 닮은 풍경이었다.

이스마엘이 어디선가 나무 주사위 하나를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리기 시작했다.

네 이야기를 해봐. 지상 광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에겐 3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

네 존재 자체가 흥미로워.

무슨 얘길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 네가 키우는 세 아이 얘기부터 해봐.

아니면 네가 어쩌다 이 세계에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감찰관이 되기로 했는지도 괜찮고.

그것도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해도 되고.

인간은 가족을 떠올리는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엘리베이터 너머 석양을 바라봤다. 인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왜 그래? 무슨 생각해, 그레이 레이븐?

이스마엘은 그 부드러운 분위기에 이끌려, 나직이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나 인간은 듣지 못한 듯했다. 그의 생각은 이미 강대한 테베를 넘어, 머나먼 코린토스를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인간의 시선이, 그리고 손끝이, 저 멀리 지평선의 석양을 가리켰다.

석양?

이스마엘도 마음이 흔들린 듯, 고개를 돌려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이 세계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스마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보기 드문 분홍빛이네. 넌 분홍색 석양을 좋아해?

인간은 이내 시선을 돌려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선은 의도와 달리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아하. 지금 "이스마엘의 머리색과 닮아서 예쁘다"라고 생각했지?

아니야, 그냥 짐작한 거야. 네 마음만은 읽히지 않거든. 넌 유일하게 제어되지 않는 '톱니바퀴'니까.

안심해, 그냥 짐작한 거야. 네 마음만은 읽히지 않거든. 넌 유일하게 제어되지 않는 "톱니바퀴"니까.

그저 네가 감상하는 있는 것들이 좋고, 네가 좋아하고 있는 걸 좋아할 뿐이야.

1분 정도 남았어, 설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이 투명 엘리베이터 통로의 유리 벽, 전부 방탄유리는 아니야. 특정 층만 그렇지.

그 말은, 만약 밖에서 이 안의 누군가를 저격하려 한다면, 생사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야.

이스마엘은 반걸음 다가와, 인간의 귓가에 속삭였다.

상상해 봐. 만약 가까운 건물 어딘가에 실력 있는 암살자가 저격총을 들고 우리가 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아마 조준경은 이미 우리 둘 중 한 명의 머리를 겨누고 있겠지.

더 최악의 상황은 뭘까? 만약 "세계"가 기어코 네 존재를 직접 없애려 든다면, 저격수 따윈 필요 없겠지. 그냥 저 석양 너머 하늘에서 "슝" 하고 빛줄기 하나만 쏘면 끝이야.

자, 과연 그 "빛"은 어느 유리를 맞출까? 방탄유리일까, 아니면 보통 유리일까?

과연 누굴 노리는 걸까? 이미 한번 "죽은" 몸인 나일까, 아니면... 너일까?

글쎄... 운명의 저울은 늘 기울어져 있는 법이지. 방탄이 아닐 확률은, 대략...

이스마엘이 갑자기 거리를 좁혀 인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주사위가 툭 떨어졌다.

인간의 시선은 그 주사위를 따라갔고, 마지막 순간 윗면에 나타난 숫자를 똑똑히 보았다.

"1".

아, 참 안됐네.

네가 살아남을 확률은... 0이야.

슝...

멀리서, 석양이 가볍게 한번 일렁였다.

조금 전 이스마엘이 흉내 낸 소리가 섬뜩할 만큼 현실이 되었다.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통로의 유리 벽에 작은 구멍이 뚫렸고, 그 지점으로부터 거미줄 같은 균열이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죽음이 머리를 꿰뚫기 직전, 인간은 주위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그 순간, 눈앞에 다가온 "세계가 쏜 총알"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온통 새빨간 빛을 띤, 가느다란 실 같은 촉수였다. 다른 이들의 손끝에서 자라나던 바로 그 붉은 실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죽음보다 먼저 덮친 것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잔상이었다. 이스마엘이 인간의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이다.

네가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 내가 어찌 널 비참하게 죽게 두겠어?

이스마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붉은 촉수는 그녀의 오른쪽 목덜미를 꿰뚫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며 선혈을 흩뿌렸다.

0.5초 만에, 피보라가 인간의 온몸을 덮치듯 퍼부어졌다.

그 시각, 탑 아래 광장에서는 수많은 기자가 몰려들어, 서로 밀치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수라장을 벌이고 있었다.

어디서 새어 나온 소문이야? 이봐! 출처가 어디냐고! 어느 신문사가 흘린 거야? 교황이 가짜로 죽었다고 떠든 놈이 누구야, 대체! 아이고!

아무것도 모르면 좀 비켜요! 자리 차지하지 말고! 좀 비키시라고요!

광기에 휩싸인 한 기자는 인파에 휩쓸린 여인을 거의 밀쳐 넘어뜨릴 뻔했지만, 그녀를 일으켜 세울 겨를도 없이 카메라를 치켜들고, 유리 엘리베이터를 향해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마지못해 두어 마디를 툭 던졌다.

소문으론, 교황님은 서거하신 게 아니라 이 탑 속에 숨어 계셨다고 하던데요. 오늘 아침 경찰에서 발표한 "이미 하관했다"는 것도 다 위장이었고, 곧 살아 있는 교황님이 직접 내려오신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소식인데?

누가 알겠습니까! 아,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네요!

엘리베이터가 탑 아래 도착해 멈춰 섰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진짜 살아 있는 교황"을 찍으려고 아수라장이 됐고, 플래시 불빛이 유리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

피가 엘리베이터 안쪽 절반을 물들이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핏물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교황"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교황의 피를 뒤집어쓴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젖어, 그대로 굳어버린 한 인간이 서 있었다.

붉은 핏방울이 인간의 머리카락 끝을 타고 흘러, 바닥에 놓인 나무 주사위의 숫자 "1"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스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