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날
><i>"사회의 통일에는 희생양이 필요하다."</i>
<i>"파멸을 택하든, 화해를 택하든, 사람들은 이상의 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다."</i>
<i>"...때가 되었지만, 희생양은 양우리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i>
난 이 안에서 수많은 존재를 "창조"했지. 라헤일, 이사, 라스티... 그리고 너까지.
모두가 이 "꿈" 속에 남아, 나와 함께해 줬어... 너만 예외였지.
단지 꿈일 뿐이고, 내 기억에 불과한데, 어째서 그것마저 깨뜨리려고 하는 걸까?
인간은 마치 갑자기 이곳에 떨어진 듯, 자신이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른 채, 멍하니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곁에 바짝 붙어 있던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형체는 너무 흐릿해, 아무리 애써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너무 외로워.
하지만 넌 여기가 잘못됐다고 했잖아. 이 힘이 절대 새어 나가면 안 된다고도 했고.
네 뜻은 알겠어.
그녀의 속눈썹이 서서히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가볍게 떨리는 흰 속눈썹은 인간의 눈에 그저 새하얀 얼룩으로 번져나갈 뿐이었다.
나도 결정을 내렸어. 먼저 사과부터 하게 해줘.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흐릿한 형체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느새 다가온 두 손이 인간의 뺨을 감싸더니, 부드럽게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하지만, 네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 그레이 레이븐.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인간의 이마에 와닿았다. 마치 떠나보내기 아쉬운 듯... 그녀는 몸을 숙여, 인간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만약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날 기억해 줘. 그리고 날 사랑해 줘.
뺨을 감싸던 손이 갑자기 힘을 주어 인간을 뒤로 밀쳐냈다.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추락감이 밀려올 때에야, 인간은 뒤늦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끝없이 높은 거대한 탑이었고, 발밑에는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는 대지가 있었다.
절망적인 추락 속에서 흐릿하던 세계가 마침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뒤엉켜 있던 색채들은 조금씩 경계를 드러냈다.
탑의 벽돌, 거리의 인파, 나무 한 그루, 둥지로 돌아가는 흰 새 한 마리까지...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쿵.
모든 것이 끝났다. 세계가 눈을 감았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으셔서, 말에서 내려 사람을 부를 뻔했습니다.
마부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며, 인간의 눈앞까지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묘지에 이미 도착했습니다. 목적지를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인간은 지팡이를 짚고, 채 가시지 않은 몽롱한 상태로 마차에서 내렸다.
방금 전의 꿈이 너무도 생생했던 탓에, 현실의 땅을 밟고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추락의 감각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을 욱신거리게 했다.
묘지로 향하는 작은 길에는 이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붉은 천으로 덮인 관을 함께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신분증을 확인한 뒤, 침울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행렬을 서둘러 따라갔고, 행렬 맨 끝에서 오늘 꼭 만나야 할 자의 모습을 찾아냈다.
당신은?
어깨를 두드리는 낯선 손길에 커다란 체구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단체 기도 소리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불협화음"의 정체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아~ 너였군. 일단 목소리를 낮추고, 이리 와서 얘기해.
슈트롤이 손짓하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둘은 인적을 피해 묘지 한쪽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새삼스럽게 자기소개할 필요는 없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player name]. 보름 내내 나한테 면담과 공동 조사를 줄기차게 요청해 온 사람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나?
네 자료도 확인했어. 5년 전쯤이었나?
그래.
그래... 일부러 그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다 알고 있다는 거군. 내가 왜 널 피했는지도 짐작했겠지?
이런 민감한 사건을 "이방인"한테 맡겨 조사를 한다는 건, 의회의 실수야. 넌 "암살자에게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의심을 받게 뻔하잖아.
어서 돌아가. 지금 테베와 코린토스는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판이야. 우리 같은 "쓸모없는 경찰"이 최전선에 끌려가진 않더라도, 교황 서거 이후 이 난장판을 수습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거든.
네 조사 신청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슈트롤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는 듯 더듬거렸다.
보름 가까이 모르는 척했는데, 이렇게 장례식까지 쫓아올 줄이야. 정말 끈질기군. 곧 교황의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니, 그때 내가 식사라도 초대할게. 어때?
그래, 그래, 알겠어. 우리도 바빠 죽겠다고. 코린토스 사람이라 요즘 눈치 보이는 건 알겠는데, 우리 사정도 마찬가지라니까.
슈트롤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는데, 그의 시선은 어느새 앞에서 거행되고 있는, 은밀하고 조촐한 장례식을 향해 있었다.
장례식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저 잘난 암살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봐.
아니... 더 정확히는, 살아생전 온갖 빛으로 자신을 치장했던 교황님께서 저지른 짓이라고 해야 하나?
멀리서 성가가 울려 퍼졌고, 인간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땅히 있어야 할 향도, 축성을 위한 봉헌물도, 빵과 포도주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교황과 생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평범한 이들이었다. 신도라 부르기가 민망한 이들까지 섞여 있었고, 집전하는 신부조차 무심하게 기도문을 읊조릴 뿐이었다.
저는... 추기경단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몇 명 오긴 했지. 하지만 저 뒤에 멀찍이 서 있을 뿐, 감히 앞에 나서진 못할걸. 교황이 죽고 나서 온갖 추문이 터져 나왔잖아. 지금 여론의 중심에 서 있는 마당에 엮이고 싶겠어? 손을 뗄 수밖에 없지.
내 입장이랄 게 있나? 경찰 기준에서 보면, 검찰에 넘긴 모든 고발 자료는 전부 증거로 입증된 것들이야.
우리가 밝혀낸 "추문"이라는 게, 단순히 뇌물 수수 같은 게 아니었어. 외부 세력, 특히 네 고향 코린토스와 내통한 정황까지 드러났지. 물론, 이건 대외적으로 발표할 사안은 아니고.
게다가 추잡한 모임을 여러 차례 주최하고... 온갖 일탈 행위를 벌였다는 정황도 있어.
슈트롤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라는 뜻을 전했다.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저를 죄짓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잘못을 들었고, 저의 혼란을 보았습니다. 그날, 당신은 너그럽게 저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충격적이지? 근데 진짜 문제는 이거야. 평범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교황이 용서하지만, 교황이 죄를 지으면 누가 용서하지? 신?
보다시피 신은 말이 없으셔. 결국 인간 손에 달린 문제지. 그래서 최종 판결이 나기 전까지, 이 논란의 중심에 있던 교황은 대예배당에 묻히지 못하고, 이렇게 교외 묘지에 임시로 안치되는 신세가 된 거야.
당신은 저에게 가까이 다가와, 이마에 입맞춤을 주며, 당신의 성소로 초대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지고, 당신의 곁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저는 성소에 머무르며, 아름다운 땅을 걷고, 견고한 벽을 쓰다듬으며, 빵과 와인을 즐깁니다. 저는 이 거처의 신성함에 깊은 행복을 느낍니다.
하하... 어떤 놈들은 대놓고 말하더군. 네 고향 출신의 암살자가 "총 한 방 잘 쐈다"라고.
삶은 기도의 여행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고받은 아름다움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는 결코 무덤에서 끝을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을 운구하던 인부들의 발이 엉키며 휘청거렸다. 인력이 부족해서였는지, 아니면 누군가 교황의 우스꽝스러운 최후를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사람들의 놀란 비명 속에서, 고귀한 육신을 담은 관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 충격으로 관 뚜껑마저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신부의 낭송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잠들었습니다… 저는 간청합니다. 그녀에게 평온한 깊은 잠을 주시고, 부드러운 달빛이 그녀의 죄를 씻어가게 하며, 나뭇잎의 그림자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소서.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열린 관 속, 시체가 손에 쥔 열쇠 지팡이와 머리맡의 묵주에 꽂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더니, 아수라장이 된 인파 속으로 불쑥 뛰어들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남자는 썩지 않은 시체를 향해 손을 뻗어 머리 장식을 낚아채고는, 시체 손에 쥔 열쇠 지팡이마저 빼앗으려 들었다.
당신이 손에 쥐었던 지팡이를 받아들여, 인도를 따라 끝없이 넓은 황무지로 나아갔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곁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위험도 두렵지 않습니다.
막지 마! 어차피 당신들도 마찬가지잖아! 교황이 남긴 성유물이라도 건져볼까 하고 온 거 아니야? 나랑 다를 게 뭔데?!
남자의 손끝에서 갑자기 진홍색을 띤 실 한 가닥이 뻗어 나왔다. 그것은 달팽이의 더듬이처럼 허공을 더듬더니, "휙" 소리를 내며 교황 시체의 가슴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간은 사라진 그 "촉수"를 다시 보려 눈을 비볐지만, 주변 반응을 보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심지어 "촉수"를 잃은 남자조차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이 교황이야말로 수백 년 만에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낸 유일한 분이라고! 당신들도 그 몸에 깃든 신의 은총을 탐내고 있는 거잖아!
죽은 호수에 돌을 던진 듯, 남자의 외침은 순식간에 군중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뒤이어 제복 차림의 창백한 여인이 앞으로 나서서, 교황 시체를 장식한 깃털 하나를 낚아챘다.
그녀의 손끝에서도 붉은 섬광이 스쳤지만, 너무 빨라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하하! 거봐! 결국 다들 본색을 드러내잖아!
당신의 눈은 해와 같고, 달과 같죠. 당신이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두 명, 세 명... "신의 은총"을 향한 탐욕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점점 많은 사람이 관으로 손을 뻗어, 머리에 씌워진 관을 뜯으며 마지막 신의 힘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려 했다.
경찰! 누가 경찰 좀 불러요!
이제 경찰이 나설 시간이야. 내가 오늘 여기 온 진짜 이유지.
이 난장판을 못 봤을 리가? 잔말 말고 따라와! 굳이 교황 사건을 파헤치고 싶다면... 경찰 일이나 좀 도와.
슈트롤이 인간에게 다시 눈짓했다.
슈트롤은 인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둘은 시끄러운 인파를 헤치고 분쟁의 중심으로 향했다.
슈트롤이 인간의 팔을 잡아끌며 시끄러운 인파를 헤치고 분쟁의 중심으로 향했다.
인간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약탈자들의 손을 낚아채 제압한 뒤, 슈트롤에게 넘겼다.
하지만 슈트롤 경찰관이 약탈자에게 수갑을 채우는 순간, 어디선가 또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손일지도 모른다. 그 손이 인간을 관 앞으로 세게 밀쳤다.
인간은 관 가장자리를 짚으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 순간, 핏기 없이 싸늘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한편, 절망에 빠진 도둑과 강도는 바로 곁에서 절규하며 경찰관의 제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저... 전 어쩔 수 없었어요! 다들 전 교황님의 물건에 신의 힘이 있어서, 뭐든 하나만 가지면... 불치병도 낫는다고 했단 말이에요.
전 아직 젊어요, 이렇게 병으로 죽고 싶지 않아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요!
그 단말마 같은 외침이 인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조금 전 꿈속에서 고통스럽게 타들어 가던 심장이 다시 폭주하듯 요동쳤다. 그리고 곧 살을 에는 듯한 격통이 덮쳐와, 인간은 참지 못하고 격한 기침을 터뜨렸다.
뭐야, 너까지 왜 이래?! 설마 너도 무슨 병에 걸린 거야? 오늘 여기 온 목적도 혹시...
갈비뼈 사이의 통증을 애써 참아냈지만, 소란스러운 인파의 소음에 모든 생각이 묻혀버렸다.
아니. 잠깐.
무언가가...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인간은 고개를 들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코끝에서 겨우 몇 치 떨어진 곳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
안녕, 오랜만이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은 걱정할 거 없어. 너한테서 그런 "촉수"가 자라날 일은 없을 테니.
입을 열자마자 질문부터 하다니... 이 세계의 너는 좀 더 연약하거나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비명을 지르거나, 뒷걸음질 치면서 내 시체를 신고한다든가... 아니면 저 사람들처럼 내 몸에서 "신의 힘"을 빼앗으려 들거나.
전 교황 "이스마엘"의 입술은 미동조차 없었지만,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인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 그럼, 네 "사명"에 대해선 얼마나 기억하고 있지?
넌 이 뒤틀린 이상 포인트에 억지로 던져졌잖아. 원래 있던 자리도, 소속도 전부 지워진 채로. 남은 건 사명뿐일 텐데.
사명조차 잊어버렸구나. 하긴,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
내게로 와. 지금의 넌, 내가 필요해.
이건 그저 허상이야. 아니면 관 속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더 맘에 드는 건가?
뭐, 그쪽 취향이라면야. 하지만 이런 허상이랑 같이 흙에 묻히는 건 영 재미없을걸.
도시 중심에 있는 탑으로 와. 거기가 내 거처고, 진짜 나는 그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맞아. 바로 "교황 암살 사건"의 현장이야.
이스마엘은 인간을 훑어보더니 무언가 확인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곤란하게 됐네. 이 "세계"가 벌써 널 알아차렸어. 그러니 한 발짝 떼기도 어려워진 거지.
다음 순간, 관 속에서 다시 한번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울렸고, 등 뒤에서 질서를 유지하라며 소리치던 슈트롤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하는 듯했다.
좋아, 이제 그 경찰관하고 다시 얘기해 봐. 네가 설득해서 그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건 저 사람뿐이니까.
그녀는 은밀한 약속이라도 건네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기다릴게.
교황이 "눈을 뜬" 것은 한순간의 환각 같았다. 거짓말처럼 현실의 소음이 다시 귓전을 때렸고, 슈트롤이 인간의 팔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관에 매달려서 뭐 해? 재수 없게... 얼른 안 일어나?
"예상했던 소동"은 진압했으니, 어서 관 뚜껑이나 다시 덮으라고 해.
교황의 유품을 탐내 미쳐 날뛰던 무리는 진작 끌려 나갔다. 남은 운구인 몇몇이 말없이 다가와, 묵직한 납 뚜껑을 들어 관 위로 덮었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생이 끝을 맺었다.
"우스꽝스러운 교황", "자비로운 이스마엘", "신의 화신"... 살아생전 뭐라 불렸든, 그 모든 호칭은 이 순간 흙 속에 함께 묻혀 더는 되살아날 수 없게 되었다.
교황의 끝을 지켜본 감찰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선은 까다로운 경찰관과 그의 손끝을 향했다.
어쩌면 어느 한순간 어떤 "천기"를 엿보았기 때문일까. 기묘한 인식이 인간의 머릿속에서 싹을 틔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났다. 역시 슈트롤의 손끝에서, 붉은빛이 희미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왜?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겠어?
슈트롤은 그렇게 묻더니, 주머니에서 오래 말아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인간은 잠시 그의 손끝에서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심하게 기침을 두 번 하고는, 다시 한번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이름 바로 아래에는 "코린토스"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조국의 이름이었다.
그런 유치하고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워. 전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네가 어떻게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내 생각엔, "코린토스에서 온 놈이 교황을 암살했다"는 건 그냥 도화선일 뿐이야. 그것도 전쟁을 못 해 안달 난 양반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도화선이지.
어휴...
슈트롤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손끝에서 담뱃재를 툭툭 털어냈다. 인간은 그가 또 어떤 충고를 하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에, 슈트롤은 담배 연기와 함께 내뱉으려던 충고를 가까스로 삼켰다. 그 대신 의심의 눈초리로 인간을 바라봤다. 멀리 태양마저 어이가 없다는 듯, 햇살이 잠시 흔들렸다.
너, 괜찮아? 갑자기 경찰한테 신학이니 철학이니... 난 그냥 부두에 가서 담배나 좀 사려던 거였다고.
문득 라디오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 지금 인간은 작은 날개를 필사적으로 퍼덕이며, 눈앞의 경찰관을 흔들려 하고 있었다.
이제야 말 같은 소리를 하네. 그래. 네가 입대하려던 거, 지휘관이 되고 싶어 했던 거 그리고 네가 중학교 때 썼던 그 "삶의 목표 종이비행기"까지, 전부 다 봤어.
인간은 자신이 진지하게 다뤘던 사건들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든 사건이 실패로 끝나거나 기이한 결말을 맞았다. 그렇게 연이은 좌절 끝에, 점차 "하수구 청소부", "미제 사건" 전담이 되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우연"들이 무언가를 건드린 건지, 경찰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네 인사 파일을 보고, 네 처지가 불쌍해서 경찰서 안에서 유일하게 널 만나준 거라고 생각해?
슈트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서로의 뒷조사를 하는 것쯤은 익숙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슈트롤은 담배 마지막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는 거칠게 연기를 뿜었다. 감찰관이 "드디어" 그 말을 꺼냈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듯했다.
다른 얘기를 해볼까? 내가 무슨 전공으로 학위를 땄는지는 알아?
아니, 원래는 예술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떨어졌어. 그래서 종합대학으로 가게 됐는데, 하필 <자치기관법> 개정 시기랑 겹쳐서, 경찰 관련 학과로 배정된 거야.
문제는 그 전에 벌어진 일이야. 내가 입학하기도 전에 시스템에 등록된 먼 친척 한 명이 순직했는데, 그 정책 혜택이 돌고 돌아 내게 온 거지. 덕분에 난 대학에 안 가도, 경찰 조직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어.
그럼. 난 졸업하고 나서도 죽어도 싫다고 버텼어.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분의 도움도 마다하고, 어떻게든 경찰 조직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 경호 일 같은 건 쳐다도 안 보고, 식당 주방에서 접시만 닦았어.
근데 내가 일하던 식당이 사실 경찰이 잠복 수사하려고 통째로 빌려둔 곳이었더라. 어쩌다 보니 보름 동안 못 잡던 범인을 내가 덜컥 잡아버렸지 뭐야. 사건 끝나고 접시는 다 박살나고, 식당도 문 닫았어. 그러고 나니 경찰들이 나한테 같이 일하자고 하더라.
그렇게 경찰이 되고 나서는, 머릿속에서 늘 두 가지 소리가 울렸어. "경찰 노릇은 지긋지긋하니,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저 무모한 여자가 지휘관이 돼선 안 돼.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전장에서 끔찍하게 죽을 테니까."
슈트롤은 예술학부터 문학, 심지어 교육학까지... 지금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학문들을 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어떤 길을 택하든 결국 경찰이 되고 말았다.
마치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유학 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이곳 테베 소속의 감찰관이라는 역할을 맡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피하고 피하던 교황 사건마저 인간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슈트롤은 담배를 껐다.
슈트롤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비쳤다.
난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깊게 파고들 생각 없었어. 근데 넌... 내가 본 사람 중에 그런 거에 가장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더 미친놈처럼 보였고.
경찰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괴상한 세상은 끊임없이 "넌 눈치 빠른 잔소리꾼이 제격"이라고 우기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그 직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한 거야. 나랑 "같은 처지"인 널 만나면, 뭔가 들을 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방금, 널 만난 게 정확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좋아, 조금만 덧붙이자면 사실 내 임무는 두 가지였어. 장례식 질서 유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총감찰청 감찰관의 골칫거리를 덜어주는 것. 필요한 절차를 계속 미루다간 민원만 쌓이니까.
슈트롤은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또... 네가 "나와 같은 경지인 것 같아서" 그래.
다행히, 인간의 필사적인 "날갯짓"은 적어도 이 경찰관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의심과 호기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슈트롤은 "동족"인 인간을 다시 한번 찬찬히 바라본 후, 굳어있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네가 정식으로 제출한 조사 신청은 절차에 묻혀서 끝없이 미뤄질 거야. 하지만 네 개인적인 호기심 정도는 채워줄 수 있어. 단, 그게 공식 절차에 포함됐을 때만 말이야.
말해봐. 어떤 증거를 보고 싶은 거지?
인간은 옷깃을 여미며, "환각"이 남긴 단서를 따라 새로운 목적지를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