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모든 허무가 삼켜졌고, 리브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꿰뚫었다.
하지만, 이 강렬한 의지는 그에 맞설 힘을 기다리지 못했고, 뒤이어 도착한 것은 부드럽고 하얀 잔잔한 빛줄기였다.
그것은 온화하게 리브의 의식을 감싸주었다. 저녁 바람을 맞이하는 파도처럼, 모든 격정이 조용히 해소되면서 더 큰 울림을 일으킬 틈도 없었다.
...
리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계는 길고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봄의 새싹이 돋아나고, 여름의 햇살은 건조했으며, 가을의 기운은 서늘했고, 깊은 겨울의 눈은 따뜻했다.
사계절이 조용히 흘러갔다.
정신을 차린 리브는 천천히 눈을 떴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을 비볐다.
...
정신이 몽롱한 리브는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고, 눈가에는 아직 축축함이 남아 있었다.
리브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자, 꿈속의 기이한 광경도 그에 따라 빛이 바래고, 어렴풋한 감촉만 남았을 뿐 세부 사항은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리브는 눈을 깜빡였고, 몸속에는 아직 피로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리브의 생각이 끊겼다. 문을 열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실내를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어머니!
어머니?
리브가 멍하니 이 "신분"을 나지막이 되뇌자, 기억 속의 안개가 점차 걷혔다.
어머니, 보세요. 오늘 또 야생 과일을 많이 찾았어요!
아이슬링은 붉은 야생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기대에 찬 얼굴로 리브에게 보여주었다.
잘했어, 아이슬링. 하지만 안전에 주의해야 해. 그리고 광산 쪽으로는 가면 안 돼.
리브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슬링에게서 다소 큰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자, 어서 가서 손을 깨끗이 씻어, 이제 곧 식사 시간이잖아.
네!
아이슬링의 얼굴이 흥분과 기쁨으로 붉게 물들었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방 안의 세면대로 달려갔다.
어머니, 오늘은 어제 말했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어요?
샌드위치...
리브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뒤, 무의식적으로 찬장으로 향했다. 그러자 샌드위치를 만들 빵과 채소, 햄이 "어제" 그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물론이지, 어제 약속했잖아?
찬장을 시작으로 리브는 이 작은 집을 둘러보며 머릿속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려보았다.
리브는 저쪽의 책장을 기억했다.
책장에는 어머니가 예전에 리브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책과 아버지가 전에 연구하셨던 의학 서적이 쌓여 있었다.
모든 생명은 상처를 입으면 에덴으로 보내져 치유를 받았고, 병이 낫게 되면 소녀에 의해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 세상의 신이자, 모든 생명들의 “천사”였다
어릴 적, 리브는 사랑 속에서 건강하게 자랐다.
그리고 선반 위의 훈장을 기억했다.
퍼니싱이 갑자기 발생하고 공중 정원이 하늘로 떠오르자, 리브는 부모님의 지지 아래 군에 입대하여 의무병이 되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죠? 다른 병사들이 먼저 철수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나요? 그들은 모두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동료들이란 말이에요.
이런 전쟁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제가 정말... 정말로 그들을 구해낸 게 맞나요?
리브는 철수 명령을 어기고 한 전투에서 35명의 부상병을 연달아 치료했다. 그리고 그 공로로 저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리브는 책상 위에 쌓인 자료와 논문을 기억했다.
그 전투 이후, 리브의 부상은 전장에 더 이상 나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리브는 구조체 간호학 학위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생명의 별에 들어가 구조체 의사가 되었다.
그런 뒤...
전쟁은 끝났다.
짧은 여섯 글자가 그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나긴 시간을 간단히 설명했다.
붉은 퍼니싱, 하늘을 뒤덮은 전쟁의 불길, 차가운 바람, 끝없는 전투...
모든 재앙은 역사서의 글자에 담겨 마지막 전투 보고서의 마침표와 함께 끝났다.
퍼니싱은 효과적으로 억제되었고, 인간은 조금씩 지구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리브는 자원하여 한 지휘관과 함께 지구로 돌아와 넓은 꽃밭이 있는 이 보육 구역을 선택해 정착했다.
찰칵...
자물쇠 안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리브의 회상이 끊겼다. 갑자기 고개를 든 리브는 생각이 현재로 돌아오자, 마음속에 저도 모르게 기쁨이 차올랐고, 문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아이슬링은 환호하며 깡충깡충 뛰었고, 리브와 함께 문 쪽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환영했다.
목구멍에 음이 닿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머리가 이전까지 녹슬어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누구지? 여긴 어디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막막함이 빠르게 밀려왔지만, 귓가의 두 마디 환영 인사에 이내 사라져 버렸다.
어서 와요.
아... 이들은...
지휘관의 가족이었다.
작은 방에는 햇살이 가득했고, 테이블 위 꽃병에는 어제 가져온 하얀 장미가 꽂혀 있었으며, 빵과 따뜻한 수프에서는 포근한 곡물 향이 풍겼다.
이곳은... 지휘관의 집이고
옆에 있는 여성은 지휘관의 연인이자, 지휘관의... 아내였다.
작은 방에는 햇살이 가득했고, 테이블 위 꽃병에는 어제 가져온 하얀 장미가 꽂혀 있었으며, 빵과 따뜻한 수프에서는 포근한 곡물 향이 풍겼다.
이곳은... 지휘관의 집이고,
여보?
분명 기억 속에서는 오랫동안 서로 이렇게 불렀었다. 하지만, 이 두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올 때, 리브는 아직도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이렇게 행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에선 한 줄기 이상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눈앞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기도 전에, 의식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지휘관을 일깨웠다.
"직장에서 쌓인 감정을 집으로 가져오지 마, 그건 타당치 않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건 타당치 않은 행위였다.
다녀오셨어요!
미묘한 위화감은 아이슬링이 달려와 안기자 조금씩 사라졌다.
아이슬링이 오늘도 야생 과일을 많이 따왔어요!
이렇게 많이 따왔어요!
아이슬링은 두 팔로 커다란 원을 서툴게 그렸다.
자, 어서 와서 손 씻으세요. 식사 준비됐어요.
부드러운 바람이 하얀 커튼을 스쳐 지나가는 오후의 식탁은 잡담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나가셨는데, 보육 구역에 무슨 일 있었어요?
기억은 질문에 따라 조금씩 완전해졌다.
공중 정원에서 전역한 후 지휘관과 리브는 이 보육 구역에 정착하기로 했고, 보육 구역 순찰대 대장 직책을 배정받게 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신형 여과탑도 효과가 없었나요?
리브는 걱정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의식 속에서 논리가 조금씩 정리되면서 이어지는 대화도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난민이요? 벌써 그 정도인가요?
375 보육 구역이라면, 여기서 아주 가깝잖아요. 혹시 다른 정보는 없나요?
세계 정부는 이 일에 관해 반응이 없었다. 퍼니싱이 다시 대규모로 발생해서 대응할 여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상황인지는 불확실했다.
오늘 오전 담당자가 순찰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순찰대의 순찰 강도를 높이고 야간에도 인원을 배치해 경계를 서도록 요구했다.
좋은 소식은 아니네요.
한쪽에서 포크로 얌전히 빵을 먹고 있는 아이슬링을 바라보며, 리브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
리브는 여전히 조금 걱정스러워 보였다.
맞아요. 지휘...
어째서 [player name]을(를) 지휘관이라고 부르고 싶은 걸까?
하지만 왜 이 호칭이 머릿속에 이렇게나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일까?
그 한 가닥의 부조화를 걷어낸 리브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지휘관님 말씀이 맞네요.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할 필요는 없죠. 그래도 우리는 오늘의 햇살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에겐 아직 공중 정원의 거주 자격이 있잖아요?
정말 무슨 조짐이라도 보이면 아이슬링을 먼저 공중 정원으로 보내도록 하죠. 그곳은 안전할 테니까요.
당연히 전 남아서 지휘관님과 함께 우리 집을 지킬 거예요. 저도 1등 군공을 받은 중위예요. 얕보지 마세요.
놀리지 마세요.
벽시계가 조용히 반 바퀴를 돌았다.
시간도 거의 다 됐네요. 오후에는 생명의 별에서 내려온 과제를 계속해야 해서...
그럼, 이따 봐요?
이 호칭에 분명 익숙해졌을 텐데, 어째서인지 붉은 기운이 여전히 리브의 귓가를 불태웠다.
리브는 부끄러워하며 뒤따라가, 부드러운 포옹으로 화답했다.
저녁에 봐요. 여보.
오후의 업무 시간은 항상 길면서도 짧았다.
리브는 책상 앞에 앉아 히포크라테스 교수가 생명의 별에서 전송해 준 몇몇 자료를 집중하여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과제 연구를 진행 중이었는데, 구조체 의식의 바다를 분해하고 해체하여, 구조체 의식의 바다 운행 구조를 최적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교수가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는지, 리브는 자료 속 정보를 꼼꼼히 비교하며 내용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머니?
아이슬링이 사탕이 든 병을 안고, 리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슬링? 무슨 일이야?
리브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의자를 당겨 아이슬링을 무릎에 앉혔다.
사탕, 먹고 싶어요.
아이슬링이 병을 가리켰고, 병 안의 투명한 형형색색 사탕 덩어리를 거부할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그럼, 오늘은 하나만 먹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병에 걸릴 수도 있어.
리브가 가볍게 뚜껑을 열어 아이슬링에게 좋아하는 색을 고르게 했다. 그러자 사탕을 얻은 아이슬링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탕을 들고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
아이슬링이 중앙광장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리브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단말기의 데이터에 몰두했다.
그러다 데이터 세트에서 미세한 변수 하나를 감지했다. 그것은 값이 아니라 더 모호한, 하나의 추측 또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의식의 바다, 그것은 구조체의 "의식"을 담아 저장하는 영역으로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기억은 다양한 형태로 의식의 바다에 저장된다.
리브는 왠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째서 "의식의 바다"의 내부 구조에 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은... 인간인데 말이다.
이 미세한 부조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파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아이슬링이 다시 리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머니, 사탕 하나 더 먹고 싶어요.
고개를 든 아이슬링은 리브가 이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안 돼. 아이슬링.
리브는 몸을 낮춰 아이슬링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먹고 싶...
오늘은 하나만 먹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병에 걸릴 수도 있어.
아이슬링은 병에 걸리지 않아요.
그건 아이슬링이 정하는 게 아니야.
리브는 아이슬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아이의 몸속에는 아주 작은 집이 하나씩 있어. 그래서 작은 집에는 사탕 1개, 샌드위치 1개, 그리고 죽 1그릇만 들어갈 수 있거든.
아이슬링은 오늘 사탕 1개, 샌드위치 1개를 먹었으니까, 사탕을 1개 더 먹으면 먼저 먹은 사탕이 슬퍼할 거고, 두 사탕이 아이슬링의 작은 집에서 싸우게 될 거야.
후우...
그리고 아이슬링이 지금 사탕을 하나 더 먹으면, 저녁밥인 죽이 살 곳이 없어져.
그래요?
아이슬링은 어리둥절하며 리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전에, 멜리노에는 자주 사탕을 주곤 했어요.
아이슬링, 절제하는 걸 배워야 한단다.
멜리노에든, 담당자 아주머니든, 다른 분에게 절제하지 못하고 사탕을 달라고 하면 안 돼.
절제...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절제라는 건, "조절"한다는 뜻이지. 착한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조절할 줄 알아야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어.
음...
아이슬링이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리브는 단말기를 확인했고, 시간은 벌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가져온 야생 과일로 같이 과일 플래터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작은 양 모양으로 만들어서, 저녁에 다 같이 먹는 거야.
과일 플래터요!
아이슬링은 더 신선한 것에 분명 주의가 쏠렸다.
가자.
리브는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끈 뒤, 아이슬링의 손을 잡고 작은 서재를 떠났다.
밤의 장막이 드리우자,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엌의 작은 창문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보통 입을 열기만 하면... 심지어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양육자는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쳤다.
그것은 양육자의 몸에서 끝없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그것은 고통의 맛을 알고 있었는데, 녹슨 비린내였다.
그리고 슬픔의 맛을 알고 있었는데, 모래가 섞인 눈물이었다.
그것은 양육자의 의식의 바다에서 모든 고통을 읽어냈지만, 단 하나 알지 못했던 것은...
사탕의 "달콤함"이었다.
그것의 미각이 방금 깨어난 듯, 황금빛 짙은 가을의 달콤함이 혀끝에서 굴렀다.
그것은 탐욕스럽게 이 신선한 "맛"들을 빨아들였다. 이전에는 미처 세계의 색이 이토록 다채로운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거절당했다.
어쩔 줄 몰랐던 그것은 어떤 반응을 "꾸며내야" 할지 몰라 그저 어리둥절하게 요구하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을 당했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은 듯했다.
야생 과일은 더 "향긋"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향기였다. 아삭한 식감, 새콤한 맛 그리고 더 많은 향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리브의 의식의 바다에 취해 꽃의 색을 읽고 흙의 향기를 맡았다.
때가 됐나요?
먼 곳의 속삭임이 연결망을 타고 떨리며 전해졌다.
아마... 된 것 같네요.
그것은 자문자답했다.
그녀는 제 것이 될 거예요. 그녀는 저에게 복종하며, 저의 것이 될 거라고요.
그녀는 제가 선택한 "어머니"입니다.
저는 그녀와... 그녀의 의식의 바다를 온전히 얻을 거예요.
왜 그녀의 의식의 바다를 원하는 거죠?
왜냐고요... 그러게요, 왜 원하는 거죠?
괜찮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그걸 원하고 있으니, 그건 마땅히 제 것이 되어야 해요.
자잘한 잠꼬대가 서서히 별하늘로 스며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