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이중합 탑에 들어가고 5212일이 흘렀다.
잠시 여기 있도록 해.
루나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여러 번 승격 네트워크를 이용해 미래를 연산하려 했지만, 보이는 건 막다른 길뿐이었다.
퍼니싱은 서서히 이화되기 시작했고, 루나는 더 이상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다. 이런 세계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
임시 주둔지는 텐트를 칠 필요가 없었고, 알파는 평소처럼 주변을 순찰하며 적조의 침범을 감시했다.
정, 정말로 내가 알파를 대신하지 않아도 돼?
필요 없어.
하지만, 하지만 알파는 다쳤잖아.
...
물고기한테 적조를 처리하라고?
롤랑은 이화 퍼니싱으로 기체를 수리하면서 라미아를 놀렸다.
그는 옆에서 말없이 있는 루나를 흘깃 보고, 앞으로 어떻게 이화 적조를 피해 더 안전한 주둔지를 찾을지 고민하면서 말을 골랐다.
알파는 승격 네트워크와의 연결을 끊었지만, 넌 그러지 않았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루나는 드물게도 인어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뭐... 뭐?
...
이런 지경까지 됐나?
둘 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마.
루나는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알파는 이곳이 안전하다고 확인해 줬다. 그래서 일행은 잠시 머물기로 했다.
밤이 되자 만물은 고요 속에 잠겼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남았다.
미세한 소리가 들리자, 루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롤랑은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이미 아실 텐데요. 루나 아가씨.
그러면 넌 죽어.
그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에요.
퍼니싱이 변이한 이상, 이제 난 널 도울 수 없어.
구세계의 "선별"은 새로운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승격 네트워크의 특성으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다른 길로 나아간 이 시대에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점은 잘 알고 있어요.
게다가 제가 꼭 실패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제가 재구성한 기체는 그녀에게서 온 것이니까요.
루나 아가씨와의 연결은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힘의 근원은 이미 달라졌어요.
...
그러면 넌 죽어.
루나는 어떤 강제 연산에서도 다른 결말을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번 시도하게 해 주세요.
그는 늘 하던 미소를 지었다.
결국 이건 루나 아가씨가 보고 싶어 하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제가 바라던 세계이기도 하니까요.
지금이 가장 좋은 퇴장 시간인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루나에게 인사한 롤랑은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하루, 이틀, 사흘...
또 다른 밤, 라미아의 불안한 물음 속에서 루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루나의 손끝에 닿자, 롤랑과 연결된 실이 끊어졌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이중합 탑에 들어가고 5401일이 흘렀다.
셋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여정 내내 그들은 단 한 명의 인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캠프는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사방에 흩어진 백골들은 이미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인어는 불안해했다. 점점 낯설어지는 이 세계가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인간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평소에 그들은 인간의 흔적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스캐빈저들은 늘 보였고, 가끔은 근처 인간 주둔지에 잘못 들어가기도 했다.
먼 곳으로 떠났거나, 아니면 모두 죽었겠지.
혹, 혹시 피난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모두 숨어있는 건 아닐까?
다른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라미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확실한 답을 얻으려 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렇게 큰 피난처를 만들 수 없어.
하, 하지만...
라미아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배어있었다.
...
루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라미아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또 이미 정해진 결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아니면... 우리가 피난할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작은 섬 같은 곳 말이야?
그럴 리 없어.
나 바다에 들어갈 수 있어. 루나가 준 새 기체는 아주 민첩하고, 대부분의 바닷속 이합 생물도 견딜 수 있거든.
하지만 바다의 이화는 육지보다 더 일찍 시작됐어.
혹시, 혹시라도 내가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인간들의 소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도...
그들은 마침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이건 예전의 이합 생물과 달라. 라미아.
루나의 퍼니싱 통제 능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약해졌다. 그리고 다른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퍼니싱을 지배하는 권한을 빼앗으려 한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적조 속에서 새로운 0호 대행자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적조가 바다로 역류하면서 더 거대한 이화 생물이 생기고 있어. 네가 전에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끔찍한 존재가 될 거야.
승격 네트워크가 계속 변하고 있어. 언젠가는 나도 더 이상 그것을 제어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도... "새로운 희망"을 찾으러 가고 싶어?
내... 내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어. 루나...
루나가 개조해 준 새 기체는 아주 대단해. 이번에도 꼭 좋은 소식을 가져올 거야!
미안.
루나는 마지막으로 라미아의 기체를 개조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루나와 알파는 해안에 말없이 서서, 인어의 모습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루나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라미아가 확실히 무언가를 찾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곳은 퍼니싱의 오염이 덜한, 그들이 쉴 수 있는 작은 섬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새벽, 알파가 다시 한번 상처투성이가 되어 그들의 임시 주둔지로 돌아왔을 때...
...
알파의 상처를 만지던 손이 살짝 멈칫했다. 루나는 고개를 숙였고, 손가락의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루나?
...
라미아야?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승격 네트워크가 대가를 요구하기도 전에, 그녀는 모든 결말을 보았다.
라미아와 연결된 실마저 조용히 끊어져 버렸다.
그 겁 많은 인어는 결국 평화를 가져다주는 흰 비둘기가 되지 못했다.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루나가 시간의 개념조차 잃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었다.
적조는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고, 이합 생물들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그 속에서 알파와 루나는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서로를 지켰다.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한번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었다.
붉은 환영들이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악의에 찬 촉수를 뻗었다.
때로는 롤랑, 때로는 라미아, 때로는 더 오래된 "기억"이 나타났다.
그 이후의 기억은 루나에게 없다.
긴 소모 속에서, 루나의 기억은 오래된 유리 조각이 파도에 씻긴 듯,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루나는 눈을 살짝 뜨고 손바닥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느꼈다.
해협을 떠난 뒤, 알파와 루나는 북극 항로 연합 주변까지 갔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곳은 아직 이화 적조의 침식이 심하지 않았지만, 주위에는 수많은 이합 생물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이 주변은 안전하지 않으니, 내가 근처에 있는 이합 생물의 거점을 처리하고 올게.
언니?
루나는 알파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끊임없는 전투로 알파는 이미 상처투성이였고, 이 정도로 변이된 퍼니싱으로 기체를 수리할 수도 없었다.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아. 언니.
루나는 정확하게 알파의 위치를 포착했다.
상처가 심각해. 내가 가서 그 이합 생물들을 처리할게.
언니는 승격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잖아. 언...
승격 네트워크는 이화된 퍼니싱의 충격으로 산산조각이 났지만, 구세계의 대행자는 여전히 일부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행자라 해도, 스스로 승격 네트워크와의 연결을 끊은 알파를 도울 방법은 없었다.
초기에는 이화된 퍼니싱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새로운 약점이 되어버렸다. 오랜 세월의 전투 속에서 알파의 기체는 피로가 극에 달해 파손 직전인 상태였다.
괜찮아.
몸을 돌리는 순간, 루나의 감정을 눈치챈 듯 알파가 돌아서서 간단히 설명했다.
저 이합 생물들은 다시 진화했어, 그대로 놔두면 이곳에 머무를 수 없을 거야.
네 눈은 거의 실명 상태야. 난 기체가 파손되긴 했지만, 적어도 시각 모듈은 문제없어.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알파가 시력을 잃은 루나를 안전한 곳에 두고, 산꼭대기를 떠났다.
그들의 이야기는 승격 네트워크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막을 내렸다.
루나는 조용히 절벽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어떤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루나는 공허한 눈동자로 조용히 내리고 있는 큰 눈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