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라인을... 이중합 탑이 나타나기 전 그날로 되돌린다.
의식 속에 오직 그 한 가지 정보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오랜 가뭄 끝에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지휘관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으로 설레면서도, 이 모든 것이 정말 가능할지에 대한 불안이 밀려왔다.
너를 속일 이유는 없어.
네가 말하는 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만날 사람은 때가 되면 만나게 되고, 태어날 사람은 순리대로 태어나겠지.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빛과 희망이 사라져 버린, 그 고통스러운 이별의 시간은 이제 끝나게 될 것이다.
네가 성공하게 된다면, 그들은 햇빛 아래서 태어날 거야.
어쩌면 공중 정원에서 용감한 병사가 될 수도 있고, 보육 구역에서 일하는 직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나은 내일을 누릴 자격이 있다.
정해진 일은 바뀌지 않아. 다만 그것도... 네가 성공했다는 전제하에서야.
이런 상황에서도 너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거야?
이것도 내가 "보고" 싶었던 새로운 이야기긴 해. 그런데 정말 이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면서, 어디선가 불어온 한기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얼음 결정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듯 당연히 공짜로 얻어지는 좋은 일도 없는 법이다.
"나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일까? 아니면 "인간"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까?
정확히 말하면...
위험이 공존해. "대가"도 너 혼자만 치르는 게 아니야.
이런 가능성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는 나도 예측할 수 없어.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이런 위험을 감수하라고 권하고 싶진 않아.
너무 위험한 선택이야.
이스마엘은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넌 "해저에서 죽은" 지휘관이 될 거야.
해저에서 죽은 지휘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931206, 이 숫자를 기억해?
파도가 해안을 거세게 덮치고, 폭우가 수면을 가차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인어는 품 안의 알을 소중히 안은 채, 수면 위의 인간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또 다른 네가 나에게 알려준 거야.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클론 하나가 사고로 사망했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게 진짜 "자신"이 된다는 걸 지휘관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진짜 죽음이 될 거야.
이스마엘은 알 수 없는 방향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카오스가 부화하지 못한다면, "너"는 이 사고로 정말 죽게 될 거야.
시간의 기점을 바꾸지 못한다면, 세계는 영원히 이 시간의 폐쇄 루프에 갇히게 될 거야.
만약...
아무도 가보지 않은 이 길에는 셀 수 없는 위험이 숨어있었다. 이건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가시덤불로 뒤덮인 황야와 다름없었다.
피로 적신 가시덤불에서 정말로 장미가 피어날 수 있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이 길은 선택하지 않는 게 좋아.
이 "선택"은 알 수 없는 소용돌이로 가득해.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너뿐만 아니라... 인간 문명 전체가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될 거야.
뼛속 깊이 박힌 얼음 결정이 무질서하게 자라나더니 온몸을 헤집고 다녔다.
희망을 주었다가 다시 그것을 산산조각 내는 것...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있을까?
위태로운 가지 끝에 매달린 빨간 사과 앞에서, 굶주린 이는 나무 아래 앉아 그것을 어떻게 따야 할지 끝없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난 여전히 네가 나와 함께...
이스마엘이 지휘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차원의 <phonetic=문지기>관측자</phonetic>가 되었으면 해.
너의 "문명" 때문에 그러지?
이중합 탑이 조용히 회전하며, 끝없는 나선계단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낯익은 표식이 새겨진 거대한 문이 지휘관 앞에서 소리 없이 열렸다.
기이하고 섬뜩한 곡선들로 만들어져 있는 이질적인 "건물"들, "도시" 중앙의 거대한 조각상,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멀리서 바라보니 행성들과 항성들이 기묘한 무늬를 이루고 있었고, 검은 환영이 하늘 한가운데 걸려있었다.
이곳은 내 "문명"이야.
도시의 시간이 어느 한순간에 멈춰버린 것 같았다.
맞아. 호박이야. 내가 직접 이 공간에 그들을 봉인했어.
언젠가는 그들도 이 세계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적어도 그들은 다른 "수확"된 문명들처럼, 더 높은 차원의 존재들에게 쉽게 "말살"당하지는 않을 거야.
환영이 순식간에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스마엘은 지휘관을 바라보며 마지막 선택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관측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인간 문명을 이대로 멈춰두고 먼 미래의 구원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위해 목숨을 건 도전을 할 것인가?
지휘관은 자문했다. 과연 자신에게 인간을 대신해 이런 "선택"을 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중합 탑 내부는 텅 비어 있었고, 하얀 안개만이 끝없는 복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만약... "더 큰 위험"을 선택해서 해저로 돌아갔다가 실수라도 한다면, 인간 문명 전체가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휘관의 떨리는 손끝은 멈추지 않았고, 차가운 고립감이 등골을 타고 스며 올랐다.
...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이스마엘이 위로하듯 조심스럽게 지휘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네가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물렀다 해도, 결국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거야.
그 모든 "결말"을 이미 봤잖아.
텅 빈 복도에서 이스마엘의 목소리가 마법처럼 지휘관의 불안한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인간 문명은 이미 퍼니싱의 표적이 됐어. 나와 함께 가든, 해저로 돌아가든,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라도 선택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희가 걸어온 길이 의미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씩 풀어지면서,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퍼니싱이 인간 문명을 표적으로 삼은 이상, 모든 선택지는 파멸로 향했다. 남은 것은 그 끝에서 가장 작은 희생을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선택하기 전에...
말해봐.
지휘관의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이스마엘은 늘 그렇듯 너그럽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우주 도시의 모든 연구 자료를 문 너머의 "<phonetic=나나미>관리자</phonetic>"에게 전해달라는 거야?
나나미라면... 분명 지휘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휘관이 시간의 폐쇄 루프에 갇히더라도, 그 "유서"와 이중합 탑 코어 분석 자료를 본다면...
나나미는 분명 지휘관이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차릴 것이다.
역시 "그레이 레이븐"의 잔재주야.
이스마엘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걸.
이스마엘은 흔쾌히 지휘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정... 했어?
시간은 충분해. 천천히 생각해 봐.
이스마엘을 따라 더 높은 차원의 관측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해저로 돌아갈 것인가?
"관측자"가 된다면 인간 문명은 "보존"될 수 있겠지만, 퍼니싱이 만든 정보 속에 영원히 정체되어 있을 것이다.
호박 속 생명체처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적을 기다리며, 그 순간에 영원히 멈춰있게 될 거였다.
해저로 돌아간다면... 가시밭길 같은 황야를 혼자 헤쳐나가야 하겠지만, 성공만 할 수 있다면...
인간 문명은 새로운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이스마엘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결말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말해줄래?
네가 이런 선택을 할 줄 알았어. 이게...
가장 좋은 결말이야.
당연히 아니지.
이 우주는 끝없이 넓어. 나 역시 어두운 숲속 작은 벌레일 뿐이야.
한정된 생명으로는 무한한 미래를 다 볼 수 없어. "관측자"가 된다는 건...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첫걸음일 뿐이야.
이스마엘은 지휘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첫걸음만 내딛으면... 우주의 문이 네게 열릴 거야.
무수한 별들이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듯 반짝였고, 알 수 없는 속삭임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 순간, 수만 가지의 비밀이 의식 속으로 폭포수처럼 흘러들어왔다.
의식이 강타당한 듯 급격히 팽창했고, 무수한 신경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 이중합 탑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 영향은 탑을 넘어 더 멀리 퍼져나갔다.
안 돼. 그러지 마!
진흙탕이 된 공중 정원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낙원... 우리 모두 함께 낙원으로 가자.
우주 도시에 꿈결 같은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인간<//지휘관>의 의식이 끝없이 펼쳐져 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적조가 뒤틀리며 거대한 숲이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리고 인간<//야수>이 숲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
인간<//병사>이 거리 모퉁이에 멍하니 앉아, 죽은 가족의 붉은 목도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여름 밤의 벌레 소리처럼, 인간<//개미>은 새로운 둥지를 찾아 무리 지어 분주히 움직였다.
인간<//꽃>이 어둠 속 빗물에 젖어 천천히 시들어갔다.
인간<//???>...
인간<//지휘관>은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보았다.
조심해.
처음 "지식"을 받아들이는 단계라서 그 힘을 다루기가 쉽지 않을 거야.
지휘관은 이스마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지만, 그 순간 머리를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뭘 봤어?
이스마엘이 차분하게 물었다.
죽음이었다.
지휘관은 공중 정원이 끝없는 우주를 떠돌다가, 셀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 퍼니싱이 그들의 뒤를 따라잡는 모습을 보았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들은 "회수되어야 할" 문명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지상에서 고통받는 인간과 새롭게 태어난 0호 대행자의 모습도 보았다.
우주 도시에 움츠러든 인간은 발전을 멈추고, 적조의 "낙원"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지구와 인간이 맞이하게 될 수많은 인간 문명의 결말들을 목격했다.
맞아.
그게 바로 그들이 미리 정해둔 결말이야.
지휘관의 혼란스러운 설명을 들은 이스마엘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지휘관은 이스마엘이 사용한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쉿...
더 높은 차원의 존재들이야. 이 우주의 "법칙"을 감시하고, "규칙"을 만드는 존재들이지.
이스마엘의 손짓에 열쇠 지팡이가 나타났다. 이중합 탑의 하얀 안개가 흩어지자, 그 너머로 끝없이 깊어지는 칠흑의 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모든 궤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테스트를 내고, 규칙을 정하고, "올바른" 문명을 선별해.
"테스트"에 통과해야만 우주로 향하는 "티켓"을 얻을 수 있어.
기이한 성운이 이중합 탑 안팎으로 반짝였고, 깊은 성단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눈동자가 천천히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이해가 되지? 네 문명의 재가동을 도울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거야.
지휘관은 고차원의 힘으로도 지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맞아.
네가 관측자가 된다고 해도, 이 모든 걸 재가동할 만한 권한이나 능력은 없어.
이중합 탑은 이미 하늘과 땅을 관통했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거야.
이스마엘의 목소리는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본 듯,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너희 문명을 숨기고,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야.
마치 호박처럼.
퍼니싱으로 문명 전체를 보존한 뒤, 생명이 다시 깨어나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퍼니싱... 그건 가장 큰 속임수야.
한때는 나도 순진했어. 퍼니싱을 완벽히 습득하기만 하면, 그들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불이 빛을 주기도 하지만, 모든 걸 태워 재앙이 되기도 하지.
옳고 그름을... 누가 판단하는 걸까? 그들만이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그 정의를 우리가 판단하면 안 되는 걸까?
분홍 머리 여성의 눈동자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불꽃이 타올랐다.
자, 나와 함께...
이스마엘은 지휘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 재앙의 힘을 다루는 법을 전수했다.
수만 가닥의 실이 이중합 탑을 둘러싸고 서서히 감겨들며, 거대한 비단 고치를 형성해 갔다.
"세계"는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모든 "정보"가 실에 감겨들며, 존재하던 모든 의미가 사라져갔다.
마침내 "세계"는 그 근원의 모습을 드러냈다.
고치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지핵의 용암이 맥박치듯 요동치다가 점차 잦아들었다.
모든 것이 영원한 정지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게... 네가 지키고자 했던 "문명"의 진짜 모습이구나?
하늘에서 용암이 모든 존재를 감싸안았고, 퍼니싱이 그 안에 모든 정보를 영원히 봉인했다.
모든 정보를 "심장"에 담아내는 순간, 미약하지만, 그 안에 살아있는 생명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인간 문명 전체가 단 한 사람의 어깨에 맡겨졌다.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거야.
이스마엘이 지휘관의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이제... 모든 걸 "미래"에 맡겨.
언젠가...
우리가 "규칙"을 새로 쓸 수 있을 때.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때.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의 "미래"에 도달하는 그때.
봉인된 호박 속 생명이 다시 깨어날 것이다.
화로 속 숨겨진 불씨가 다시 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신기루를 쫓듯이.
"관측자"는 별바다와 깊은 우주 속을 떠돌며,
끝없이 미지의 "미래"를 찾아 헤매야 한다.
인간의 결말-"문명의 묘지기"
이렇게 인간의 문명이 시간 속에 멈춰 서고 말았다.
...
정말 그 길을 선택할 거야?
한 번 더 말해둘게. 난 이런 "미래"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길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아직 밟지 않은 미지의 광야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위험이 크다는 건 그만큼 얻을 것도 크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마엘의 말대로 "관측자"가 된다 해도, "봉인"과 "폐쇄 루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멈춰버린 호박 속 생명체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일말의 가능성과 일말의 희망, 둘 다 같은 거다.
홀로 문명의 짐을 짊어지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직접 뛰어들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거나...
어차피 인간 문명은 "수확될" 운명이고, 이미 정해진 결말이라면...
차라리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마지막 답을 찾아 나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라 해 봤자, 지휘관과 문명이 함께 심연으로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적어도 그들은 "살아있을" 수 있어.
해저로 가면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그걸 붙잡고 싶어.
온 세계가 영원한 폐쇄 루프의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데도?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라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몸부림도 "새로운 답"을 찾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
역시 너답네. "그레이 레이븐".
이스마엘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희미한 그리움은 오래전 떠나보낸 이를 회상하는 듯했다.
지휘관이 뭔가 묻기도 전에, 이스마엘은 그 두꺼운 책을 다시 펼치고 있었다.
오래된 책장 위로 붉은 금빛 선으로 이루어진 "선택지"가 일렁이며 빛나고 있었다.
정해진 결말을 뛰어넘어 새로운 "선택"이 생기다니 이런 전개는 처음이야.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일지도...
루시아가 이중합 탑의 굴레를 끊으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나나미는 저 광활한 우주에서 유일한 진실을 찾기 위해 은하를 건넜다.
수많은 사람의 의지가 하나로 모여 불꽃이 되었다. 그 불꽃은 운명이라는 실타래를 태우고 정해진 한계를 부수어 어둠을 비추었다.
기적이면서도 기적이 아니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시간이라는 역사책 속에서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불씨를 지폈다.
...
알았어.
인간 문명이 여기 오기까지... 정말 아슬아슬했지.
그럼, 이 새로운 이야기를 한번 살펴볼까.
책장이 넘어가고, 붉은 금빛 선이 이상한 문자로 변해갔다.
내가 해저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그럼, 넌 해저 요람으로 돌아가 크틸라의 알 안에서 진정한 "카오스"로 깨어나게 될 거야.
네 의식이 카오스와 하나가 될 거고...
"너" 자체는 진정한 카오스가 되겠지.
완전한 카오스가 지닌 절대적인 힘으로 콜레도르를 물리치고 나면, 이중합 탑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거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둘게. 난 이런 "미래"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스마엘이 보았던 모든 미래는 아마 이스마엘이 말했던 "그들"이 지켜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죽을 각오로 도전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네"가 진정한 카오스가 될 거니까.
이스마엘은 눈앞의 인간 지휘관을 바라보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넌 이미 그 "비전"들을 엿본 적 있잖아?
네가 가진 힘이 어디서 왔는진 잘 모르겠지만...
"너"는 "너"야.
"네"가 진정한 "카오스"가 된다면, 카오스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될 거고.
네 "시선"은 카오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네 "시선"은 이곳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본·네거트가 네 의지를 좌우할 수 없는 거지.
지휘관의 걱정을 읽어낸 이스마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미 모든 게 변했어.
난 네가 본·네거트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탑 안에서 카오스와 융합했던 그 결말도 읽어본 적이 있어.
그 결말은...
붉은 투영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지구 밖의 모든 것이 본·네거트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그는 자기 뜻대로 적조를 바다로 몰아낸 뒤,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본·네거트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본·네거트는 결국 "문"을 통과해 지구를 떠나지 못했다.
이중합 탑에서 흘러나온 적조는 점점 강해졌고, 퍼니싱의 "욕망"은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언젠가는 카오스마저 적조의 의식에 지배당할 것이다.
집을 되찾기 위해 싸우던 인간은 적조 속에서 뒤틀린 모습으로 변해갔고, 본·네거트와 다른 "나라"의 인간은 지상에 갇혀 끝없는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몇 장면들이 또 다른 지옥의 막다른 길을 그려냈다.
본·네거트는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0호 대행자를 막아내고 자신이 확신했던 "미래"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건 이미 써 내려진 "결말"이야.
이스마엘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모든 분기점의 핵심은 바로 너야. 그레이 레이븐.
네가 일단 카오스가 되고 나면, 적조는 절대로 바다에 들어갈 수 없게 돼.
왜냐하면, 넌 이미 이중합 탑을 떠났으니까.
이것 하나만으로도, 게슈탈트와 화서는 물론이고, 나조차도 끝까지 연산해 봐도 보지 못했던 "미래"야.
지휘관의 말투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는지, 이스마엘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시도가 성공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어. 그리고...
나 역시 이 상황에 얽히게 된 이상,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할 수 없게 됐어.
열쇠 지팡이가 허공을 가르자,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여정" 중에 네가 이 모든 걸 막아내지 못한다면...
아주 작은 실수 하나로도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어.
모든 것이 "폐쇄 루프"가 되어버려서, 넌 영원히 "해저 요람"이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거야.
요람 속에서 끝없이 죽음을 반복하게 될 거라고.
아직 다른 선택지도 있어. 그레이 레이븐.
대체 몇 번이었을까?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그 희망이 막 피어나려 할 때면 다시 심연으로 추락했던 그 순간들이.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끝없는 희생이 쌓여갔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지휘관을 운명의 심연에서 끌어올려 줬다.
이것이 지휘관의 마지막이 된다 해도...
지휘관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간 문명의 희미한 불빛을 지켜내기로, 굳게 다짐했다.
나는...
이 창백한 시간의 사슬을 끊어내고, 썩어버린 운명의 길을 모두 불태워버리겠다.
그리고 없는 고난과 칠흑 같은 어둠이 가로막더라도 반드시 헤쳐나가겠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희망의 불꽃을 되찾아 올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진정한 새벽빛을 선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