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3 밤의 장막 너머의 빛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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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7 나선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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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흉측한 결정체가 사라지자, 인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끝없는 전투 속에서 새겨진 몸의 상처들도 하나둘 옅어져 갔다.

긴 밤이 지나고, 이중합 탑은 예전처럼 짙은 하얀 안개에 휩싸인 기이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이상한 말들과 과도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순간, 이곳의 시공간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지휘관의 손끝에서 자유롭게 넘겨지는 것만 같았다.

치아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이중합 탑의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정체가 사라지고 계단이 재구성되면서, 순식간에 공간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간 가장자리에 천천히 균열이 생기더니, 분홍 머리의 여성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음?

지휘관은 다시 한번 이중합 탑 내부를 "감지"해보았다. 퍼니싱에 잠식된 미래를 되돌리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이중합 탑을 "사용"하라며 지휘관을 재촉했다. 하지만...

"코어"를 잃은 이중합 탑은 떨리기만 할 뿐, 사용자의 명령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중합 탑의 코어는 네가 이미 밖으로 가져갔잖아.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한다 해도, 근본적인 "규칙"은 뒤집을 수 없어.

정확한 시간의 분기점에 도착할 수 있겠어?

본·네거트에겐 이중합 탑 내부의 균열과 붕괴를 복구할 권능이 없어. 그와 콜레도르가 제멋대로 날뛴 탓에 이중합 탑은 이미 무너졌고, 모든 통로가 뒤엉켜버렸지. 그래서 정확한 "시간"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

난 너희 세계나, 이중합 탑이 있던 문명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

미안.

0호 대행자는 네가 탑에 처음 들어온 그 시점에 여전히 존재하고, 코어도 이중합 탑 밖에 있어. 그러니...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지휘관은 이 망가진 책을 확실히 읽을 수 있게 됐다.

이중합 탑 주위는 균열로 가득했고, 시간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이중합 탑은 끝없이 위로 자라나, 이제는 그 끝에 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이중합 탑은 언젠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인간 문명은 물론, 이곳에 흡수된 다른 문명의 잔해들까지 모두 문 너머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0호 대행자의 권능을 강제로 회수할 방법을 찾는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린 이중합 탑이 과연 시간을 올바른 미래로 되돌릴 수 있을까?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 넌 정말로 더 높은 차원의 힘을 얻었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이중합 탑 안에서조차 마지막 "시간"의 인간 문명이 살아남을 거란 보장을 할 수 없었다.

벽의 균열 사이로 이상한 하늘의 빛이 새어 들어왔고, 이화 적조가 조용히 퍼져 나가며 이중합 탑을 벗어나 외부의 시간까지 오염시키려 했다.

남은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적조는 벽에 부딪혀 허공을 휘저은 채 결정체 속으로 되돌아갔다.

이중합 탑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올바른 시간 라인으로 돌아갈 수도, 이중합 탑의 힘을 사용할 수도 없다면...

공허하게 남은 세월을 이렇게 이중합 탑 안에서 균열을 메우며 붕괴를 기다리는 것만이 지휘관의 운명일까?

감정이 격해지자, 권능이 저절로 의지대로 움직였다. 날카로운 결정체가 옆에 있던 분홍 머리의 여성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이스마엘은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더 높은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진정해.

이런 모습은 너답지 않아.

지휘관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힘을 거두며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통과"하면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더 강력한 힘을 얻어 시간마저 조종할 수 있게 됐음에도, 왜...

왜 아무것도 "<phonetic=초기>올바른</phonetic>" 길로 돌려놓을 수 없는 걸까?

이중합 탑이 지휘관의 고통을 감지하자, 적조가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며 격렬한 파도를 일으켰다.

진정해. 이중합 탑의 균열이 더 벌어지고 있잖아.

이스마엘이 열쇠 지팡이로 허공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하려다 멈칫했다.

아...

지오드가 저절로 열분해되더니 격렬한 파도가 잠잠해졌다.

이제 진정 좀 됐어?

방금까지 위협을 받은 이가 자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스마엘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의 앞으로 내려왔다.

그레이 레이븐, 새로운 "힘"을 꽤 빨리 익혔군.

온 힘을 다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전투를 견뎌온 지휘관의 바람은 우주 속에서 인간 문명의 불씨가 영원히 빛나는 것, 단 하나였다.

우선, 난 널 속이지 않았어.

늘 신비로운 미소를 짓던 이스마엘이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문을 통과"해 "더 높은 차원의 힘"을 얻는 것은 너와 인간 문명, 모두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어.

중요한 건 이중합 탑이 아니라... "너"야.

"그때" 네가 적조와의 융합을 선택했다면, 어쩌면 카오스와 함께 적조의 힘으로 0호 대행자의 권한을 빼앗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합 생물"은 적조를 되돌릴 수 없어. "퍼니싱"보다 더 높은 차원의 힘을 얻는 것도 영원히 불가능해.

이화 적조는 여전히 인간을 해치겠지. 네가 0호 대행자가 된다 해도, 그건 너의 "끝"이 될 거야. 인간 문명의 마지막이기도 하고.

이스마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처음부터 너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이스마엘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다.

또렷한 마인드가 이스마엘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진실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여기서 끝인 걸까?

이토록 강력한 힘과 긴 생을... 앞으로는 마인드 표식에 남은 흔적에 의지한 채, 과거와 미래가 이중합 탑 안에서 끝없는 고독 속에 모두 사라질 때까지 보내야만 하는 걸까?

지휘관은 텅 빈 이중합 탑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

나와 함께 고차원의 <phonetic=문지기>관측자</phonetic>가 되는 방법도 있어.

문을 통과했으니, <phonetic=문지기>관측자</phonetic>가 될 자격이 생겼거든.

과연 그럴까?

관측자가 된다면, 널 도와서 이중합 탑을 회수하고 진정한 0호 대행자의 권한을 얻게 해줄 수 있어.

우리는 동료가 될 수 있어.

퍼니싱을 어떻게 활용하면 인간 문명을 다른 형태로 보존할 수 있는지 알려줄게.

인간 문명을... 보존한다고요?

당연히 다르지.

퍼니싱은 네가 있기 때문에 이 문명을 진정한 "문" 뒤로 "수확"해 가지는 않을 거야.

그 문 뒤에 뭐가 있는지, 넌 이미 봤잖아.

진정한 "우주"가 인정한 의식만이 들어설 수 있는 그곳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로봇 의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명이 없는 공간을 떠돌던 외로운 우주 함선에 있던 이스마엘은 수많은 세계의 몰락과 우주의 탄생을 목격했다.

호박처럼, 네가 있는 문명은 온전히 보존될 거야. 언젠가 네가 훨씬 더 높은 차원의 힘을 얻게 되면...

보존된 문명이 다시 깨어날 수 있어. 잿더미 속에 묻힌 별처럼, 언젠가는 그들도 다시 이 우주에서 빛날 수 있게 될 거야.

퍼니싱... 정보.

퍼니싱을 매개체로 모든 문명의 정보를 보존해 두었다가, 미래에 "재가동"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인가?

또 모호한 대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이스마엘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100%야.

그건 미래의 이야기지.

이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과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계는 보존되지만, 마지막 인간은 우주 깊숙이 추방되어 막연한 "재가동"의 시간만을 기다리게 될 텐데.

지휘관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중합 탑 깊숙한 곳에서 잠시 쉴 공간을 찾고 싶었다. 관측자가 되든, 아니면 이중합 탑에서 영원히 모래시계가 다 흐를 때까지 기다리든,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어쩌면 눈을 뜨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 휴게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한낮의 꿈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밖에선 여전히 익숙한 대화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면 루시아는 걱정스레 바라볼 것이며, 리브는 따뜻한 차를 건넬 것이고, 리는 곁에서 지휘관의 무기를 정비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리스크를 감수할 의향이 있다면 말이야.

등 뒤에서 분홍 머리의 여성이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가 위험을 감수하겠다면... 어쩌면,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몰라.

"과거"를 바꿔보는 거야.

그래도 기점은 아직 남아있어.

너만의 "기점".

둔탁한 파도 소리와 함께, 복잡한 기억 속에 깊이 묻혀있던 "해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맞아.

이스마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손을 뻗어 그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의 두께가 이전과 달리 얇아져 있었다.

응.

"그녀"가 노력하고 있나 봐.

이스마엘은 이 주제를 애매하게 넘기며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지휘관 앞에 책을 펼쳐 보이며, 인간 문명의 역사를 함께 들여다보자고 제안했다.

여기 이 페이지... 원래는 비어 있었어.

이스마엘은 빈 단락을 가리켰다.

하지만 네가 루시아와 함께 이중합 탑을 떠난 후...

여기에 흐릿한 글자가 나타났어.

그래서 내용을 살펴보려 했는데, 아쉽게도 난 어두운 숲속 작은 벌레일 뿐이라, 먼 미래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어.

이스마엘은 담담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네가 이중합 탑을 나와 나나미를 만난 후로는 이 글자들이 더욱 선명해졌어.

난 "해저"를 봤고... "너"를 봤어.

한 인간이... 미지의 세계에 들어섰어.

넌 아직 이곳에 오면 안 됐어.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레이 레이븐...

그때의 "너"도 그곳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 거기서 많은 걸 알게 된 거 맞지?

지휘관은 명확한 대답 대신 애매하게 고개만 움직였다. 그리고 서둘러 다음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 후... 네가 문을 통과한 그 순간.

붉은 금빛 글씨가 운명의 궤도처럼 얽히더니, 마지막 "선택지"가 절박하게 종이 위로 떠 올랐다.

책 위에 있는 모호한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읽어가자, 그 순간 허공에서 어떤 두꺼운 벽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내가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이던 순간, 다시 지구로 돌아오게 된 계기야.

이건 너희들만의 "기적"이기도 해.

루시아였다.

나나미였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켜낸 의지였다.

그들은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어냈다.

그들의 노랫소리가 하나로 모여 문명의 잔재를 태우고, 역사의 은하 속에서 거센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 불꽃은 거짓된 시공간을 꿰뚫고, 새로운 미래의 이정표를 드러냈다.

전혀 달라.

본·네거트는 네가 자기의 완벽한 "열쇠"가 되길 바랐어.

그때의 네가 해저 요람으로 돌아갔다면, 크틸라는 본·네거트의 뜻에 따른 "열쇠"밖에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야.

그럼, 카오스는 완전히 본·네거트의 꼭두각시가 됐겠지.

카오스는 본·네거트의 바람대로 적조를 바다 안에 가두게 되겠지만, 언젠가는 0호 대행자의 의지가 카오스의 의식을 완전히 지워버릴 거야.

이건 네가 <phonetic=30년 후>그때</phonetic> 적조에 뛰어들어서 할 수 있었던 모든 일과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어.

하지만, 지금...

이스마엘은 책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네가 그 해저 요람으로 돌아간다면, 크틸라는 온전한 카오스를 부화시킬 수 있어.

온전한 카오스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게 될 거야. 그럼, 콜레도르조차 이길 수 있지.

이중합 탑이 무너지기 전에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네가 진정으로 바라던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라.

모든 시간 라인을... 이중합 탑이 나타나기 전 그날로 되돌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