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스며드는 가운데, 청초차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온기가 안개처럼 부드럽게 흩어졌다. 자신을 "이스마엘"이라 칭하는 고차원 존재는 조용히 한쪽에 앉아, 서두름 없이 지휘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새벽빛을 바라보며, 지휘관의 생각은 차가운 바람을 따라 저 멀리 하늘 너머로 흘러갔다.
적조에 들어가 새로 나타난 0호 대행자와 권한을 놓고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이중합 탑으로 들어가 "문을 통과"할 것인가?
전자는 분명 인간의 생존 시간을 연장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말로 "문을 통과"해서 이스마엘이 말한 "더 높은 차원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멈춘 듯했다. 소나무 끝자락에 걸린 햇살도, 차가운 바람도 모두 정지된 것만 같았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이스마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어때?
뭘 선택할지 결정했어?
이스마엘이 인간을 향한 악의는 없을지 몰라도, 결국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예전에 이스마엘이 본·네거트와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약속은 너무나 모호했고, 새로운 "선택지"라는 것도 한낱 공상에 불과해 보였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문"이 주는 "시련"은 매번 다르고, 그건 내가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 할 수 있지.
"미지"의 결과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적조에 들어갔을 때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분명히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카오스의 의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때가...
물이 물에 녹아드는 것처럼, 지휘관의 의식이 카오스의 의식과 완벽하게 융합되어 갔다.
그 순간... 혹은 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모두 카오스의 기억이었다.
본·네거트, 이스마엘 그리고... 이중합 탑에서 보낸 수많은 밤낮.
"빌리·필그림" 어때? 아니면 지금의 네가 이 이름에 좀 더 잘 어울리려나?
그렇군. 이게 바로... 너희들의 선택이군.
여기서 그녀를 죽여도 새로운 신분으로 나타날 거야. 콜레도르가 아니더라도, 다른 "캐릭터"가 이어받겠지.
"올바른" 이가 이 자리에 설 때까지.
그래. 하지만 시도해 보지 않은 다른 가능성이 있는 한 넌 절대 그 지휘관을 미끼로 쓰는 걸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이 컨스텔레이션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이해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기억의 조각들이 실타래처럼 의식을 휘감았지만, 그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적조에 들어가 카오스와 힘을 합쳐, 새로 태어난 0호 대행자와 맞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표정을 보니 결정한 것 같네?
거절하는 거 맞지?
이스마엘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지구가 위험에 처한 이 상황에서 지휘관은 "고차원 존재"를 신뢰할 수 없었다.
괜찮아. 네 선택을 이해해.
예전의 나라도... 이상한 후드를 쓴 "고차원 인간"을 쉽게 믿진 않았을 거야.
이스마엘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후드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자, 다시 예전의 "감사원 이스마엘"로 돌아간 듯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우주 도시로 데려다줄까? 내가 멋대로 적조에서 끌어낸 거니까.
0호 대행자가 우주 도시를 포위했어. 지금 네 상태로는 돌아가기 힘들 거야.
지휘관은 이스마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니, 방호복이 적조 때문에 완전히 부식돼 있었다.
그렇게 하지.
어두운 장막이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적조로 뛰어들었던 그 산꼭대기로 이미 돌아와 있었다.
분홍 머리의 고차원 존재는 이미 사라졌었고, 그녀의 마지막 말만이 허공에 맴돌았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내 이름을 불러.
내 이름 알지? 이스마엘이야.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늘이 밝아오는데도 눈은 멈출 줄 몰랐다.
단말기를 확인해 보니 적조에 들어갔던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듯했다. 우주 도시는 고요한 잠에 빠져 있었고, 성벽 위로 몇몇 보초병들이 두꺼운 군화로 눈을 밟으며 순찰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우주 도시와 관련된 모든 지시 사항은 로사, 엠마, 오블리크의 단말기로 이미 보내놓은 상태였다. 지휘관 없이도 그들이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시련"보다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편이 더 안심되었다.
지휘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 후...
희미한 새벽빛 속에서 망설임 없이 적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적조가 시야를 채우며, 살갗과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적조 속에서 마지막으로 지구의 하늘을 눈에 담아두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지휘관님께서 탑에서 나오신 지 <color=#ff4e4eff>902</color>일째 되는 날이자,
지휘관님께서 떠나신 지 <color=#ff4e4eff>62</color>일이 되는 날이에요.
그날, 지휘관님이 남기신 메시지를 받았어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오블리크, 엠마와 함께 도시 밖으로 달려 나갔지만... 지휘관님의 모습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어요.
그 후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어요.
도시 밖 이화 적조가 미친 듯이 솟구쳤고, 새로운 여과탑이 없었다면 우주 도시는 이미 적조에 잠겼을 거예요.
하지만 한동안 "폭풍"이 분 이후, 이화 적조는 의외로 잠잠해졌고, 오히려 우주 도시의 예전 안전 구역에서 물러나기까지 했어요.
오블리크가 순찰대를 이끌고 조심스럽게 영역을 넓혀봤는데, 이화 적조가 공격성을 보이지 않더라고요.
순찰대가 가져오는 물자들로 어떻게든 이 "혹한"을 버티고 있어요.
지휘관님... 로사입니다.
이렇게 우주 도시에 앉아 지휘관님께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휘관님께서 떠나신 후, 전 수없이 적조를 탐색하고 연구했어요.
적조 가장자리에서 지휘관님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보았지만, 지휘관님은 나타나지 않으시네요.
지휘관님께서 떠나신 후, "폭풍"이 지나간 이후로는 새로 태어난 0호 대행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어요.
적조는 더 이상 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어요. 가끔 적조에 이끌려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죠.
정말 성공하신 건가요? 지휘관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적조를 통제할 수 있게 되신 건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지휘관님께서 목숨 걸고 지켜낸 소중한 시간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을게요.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이끌어갈게요.
이 편지를 적조에 띄워 보낼게요. 부디... 지휘관님께 닿기를.
저희는 언젠가 지휘관님께서 꼭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인간의 횃불은... 영원히 타오를 겁니다.
편지를 다 쓰기도 전에 잉크가 바닥났다.
로사는 마지막 몇 글자를 힘주어 또렷이 쓴 뒤, 편지지를 작은 배 모양으로 접었다.
우주 도시 밖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었다.
이화 적조는 우주 도시 밖에 잠복해 있었다.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인간의 활동 영역은 우주 도시 근처의 좁은 구역으로 제한되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이화 적조의 위협은 여전했고, 언제 인간이 잠식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이 될 수도, 내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의 결말-"장벽"
인간의 문명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
이스마엘은... 인간에 대해 적대감은 없어 보였다.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가 정말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스마엘을 믿어도 될까?
날 믿든 믿지 않든 네게 해가 되는 건 없어.
지휘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스마엘은 차분히 찻잔을 들고 있었다.
네가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어. "문"이 주는 "시련"은 매번 다르고, 그건 내가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넌 실패하지 않을 거 같아.
네가 가진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니까.
교활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가더니 이스마엘은 다시 평소의 차분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생각해.
이스마엘은 찻잔을 든 채 여유롭게 시선을 돌렸다.
복잡한 생각들이 지휘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침 햇살은 우주 도시를 얇은 베일처럼 감싸고 있었다.
이중합 탑에 들어가 정말로 "시련"을 통과할 수 있다면...
음? 이중합 탑에서 뻗어 나온 그 터널 말하는 거야?
음... 그럴 수도 있겠지.
이스마엘의 대답은 역시나 모호했다.
"문을 통과"해서 "더 강한 힘"을 얻는다면, 시간을 올바른 미래로 되돌릴 수는 없어도, 최소한 나나미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 "과거"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변화"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최악의 결과는 죽음뿐이다.
결정한 것 같네.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이스마엘이 손을 살짝 흔드니, 허공에 오래되고 기이한 문이 갑자기 나타났다.
정확히는 내 권한으로 열 수 있는 이중합 탑으로 가는 지름길이지.
준비됐어? 혹시... 우주 도시에 가서 마무리할 일이라도 있나?
적조로 들어가기 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정보를 로사, 엠마, 오블리크의 단말기에 전송해 두었다.
어차피 최악의 결과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다를 뿐, 유언을 바꿀 필요도 없었다.
그럼...
문이 서서히 열리자, 눈 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이스마엘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하늘은 어스름한 푸른빛을 띠었고, 소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잔잔히 들렸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수많은 생각이 흘러갔다. 그러면서 지휘관의 눈앞에는 과거의 무수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지구, 그레이 레이븐 소대,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전투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진 모든 순간...
푸른 하늘은 눈 내리는 먹구름 뒤로 숨어 들었고, 더 이상의 한숨도 내쉬지 않았다.
이게...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보는 지구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누구에게 해야 할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의 빛은 절벽 그리고 "과거"의 지휘관을 감싸안았다.
눈보라가 정적 속에 인간 지휘관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지휘관은 돌아서서 고독한 귀환길에 들어섰다.
칠흑처럼 검은 문이 소리도 내지 않고 닫혔다. 그리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