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시간은 의미 없는 백지와 같았다. 지휘관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자아라는 개념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뼈는 녹아내리고, 피와 살은 부식되어 찢겨나갔으며, 몸뚱이는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이어졌다. 극심한 고통이 절정에 달한 뒤에는 의식 속 공백만이 남았다.
희미한 윤곽이 물속에 녹아드는 물방울처럼 질척거리는 적조 속을 떠다녔다.
혼란스럽게 뒤섞인 오감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직...
쉰 목소리로 대답하려 했지만, 들려오는 건 끝없이 울리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감각이 서서히 몸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이 옆구리를 스치자 드러난 피부가 따끔거렸다.
피부?
왜 아직도 이런 개념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아니... 이런 개념이 왜 아직도 존재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 떠오르자마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의식 속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전해져 왔고, 텅 비어버린 머릿속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이상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직은 조심해야 해.
누군가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지휘관의 눈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눈 부신 빛이 눈을 찔러왔다. 손길이 아무리 부드러워도 따끔거리는 통증을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연약한 존재로구나. 자연의 진정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다니.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게다가 설맹증 때문에 눈이 더 손상될 수 있을 거야.
말대로 조심히 움직이자, 통증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망가진 몸에도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우주 도시 근처의 한 산꼭대기인 것 같았고, 몇 장의 천으로 급하게 지은 텐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텐트 밖에서는 따뜻한 김이 찬바람과 함께 스며들어왔고, 분홍 머리의 여성이 그곳에 앉아 흙으로 거칠게 빚은 도자기를 들고 있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보네.
설맹증으로 흐렸던 시야가 점차 맑아지면서, 앞에 앉아 있는 분홍 머리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건 분명 과거 공중 정원 감사원의 이스마엘이었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어떻게 적조에서 지휘관을 구출할 수 있었던 걸까?
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날 알아보다니, 영광이야.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머릿속에서 수많은 추측이 뒤엉키자, 근육이 저절로 경직되며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어.
이스마엘이 고개를 들자, 특이한 눈동자에서 별빛 같은 광채가 반짝였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힘이 누르듯, 지휘관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쉿...
말도 정보가 될 수 있어. 조심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규칙을 만드는" 존재가 아닌 "문지기"일 뿐이야.
낯선 듯하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그 단어가 수많은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이중합 탑의 "문"은 다른 "문"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 여사한테 들은 건데, 다른 "문" 뒤에는 생명이 없는 문명이 존재한다고 했다.
가치 있는 요소들을 회수하고 있고, 진공 영점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문명을 검증한 뒤,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문명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문"으로 수확한 다음, 그들의 진화 과정을 지켜본다고 했어.
너희들의 이해대로 말하자면, 이곳은 "문"의 뒤편이야.
이중합 탑과 연결된 "문"이야. 여긴 회수된 후의 공간이고.
이곳은 문명의 무덤이자 문명이 싹트는 곳이야. 매 순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소멸하지.
순간 밀려드는 기억에 지휘관은 본능적으로 이마를 짚은 채 뒤로 물러났다.
그래. 바로 나야.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스마엘은 다시 후드를 썼다.
어쩌면... 이 모습이 더 익숙하겠네.
후드를 내렸다가 망토를 다시 걷자, 분홍 머리 구조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파도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과거 여러차례 "지휘관을 죽였던" 그 분홍 머리의 신비한 이도... 바로 이스마엘이었다.
내 이름 알고 있잖아? 이스마엘이야.
후드 아래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끔은 날 "자비로운 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어.
정보란 게 전해지다 보면 늘 왜곡되기 마련이지.
"적군과 아군, 선과 악 구분 없이 평등하게 적임자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
그건 다 와전된 소문이야. 단지 내 기분이 좋을 때, 미완의 과업을 지닌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것뿐이야.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야.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퍼니싱은 내가 인간 문명을 시험하기 위해 투입한 게 아니야.
난 그저 "문지기"일 뿐이야.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시선, 다시 말해...
이스마엘의 손끝이 흔들리자, 힘으로 만들어진 빛과 그림자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투영에 불과하지.
빛을 등지고 낯선 계단을 오르는 동안, 꿈의 틈새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말해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당신도 나처럼, 다른 비전을 엿볼 수 있나?
당신도 나처럼... 이곳에 남은 건 단지 하나의 투영일 뿐인가?
이화 적조에 오염된 도시 주변에서 이스마엘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기대하는 "변수"가 너의 소원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
이스마엘은 시간과 공간 너머에 봉인된 "지휘관"을 엿보고 있었다.
이 생각이 스치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스마엘은 미소를 지을 뿐, 부정하지 않았다.
그 미소를 보자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장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음... 날 부르던 사람이 너였구나?
내 도움을 바라는 거야?
아직 돌이킬 수 있을 때,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 네 선택을 해.
자, 그럼... 【지휘관】. 너의 "여정"에 후회가 없기를 빌게.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들... 과거의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신경 끝이 서늘해졌다.
모든 것을 알아냈지만, 깨달음과 기쁨 대신 경계심과 불안만이 가득했다.
이스마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도자기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잔 속에는 끓는 물과 푸른 풀잎이 춤추고 있었고, 독특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차 한잔하지.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난 예전에 너를 도와준 적도 있잖아. 기억한다면 말이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이 세계는 그 두 분기점까지... 갈 길이 아직 멀거든.
때가 돼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모든 걸 자세히 설명할 순 없어. 왜냐하면...
이스마엘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빠르게 배우군. 좋은 일이야.
모호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린 경계선 같았다. 이스마엘 역시 어떤 "규칙"에 묶여 있어,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이 발견이 지휘관의 마음을 조금은 안심시켰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스마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결말"을 고를 때, 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지?
고통이 미미하다 해도, 적조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카오스의 "나무 열매" 효과가 지속될 거란 보장도 없었고, 새로 태어난 0호 대행자와 권한을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어.
자신의 의식으로 적조를 막겠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했어. 설사 성공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을 거야.
게다가 시도하는 데 지급해야 하는 대가가 네 목숨이었는데도, 넌 그 선택을 했지.
이스마엘은 살짝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인간을 주의 깊게 살폈다.
성공을 확신한 시도였어? 아니면 정해진 "결말" 앞에서 최선을 다한 거야?
지휘관은 이스마엘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여러 번 언급된 그 단어로 화제를 돌렸다.
다른 비전을 엿볼 수 있는 너라면, 그 "결말"들을 봤을 텐데.
예전에 나나미와의 연산에서 몇 번 겪어봤잖아?
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야. 다른 차원에 있어서 보이는 시각이 다를 뿐이지.
지금은...
이스마엘이 손을 살짝 펼치자 두꺼운 책 한 권이 나타났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책장이 저절로 넘어갔고, 붉은 금빛 글씨가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간 문명은 이미 종착점을 향해 가고 있어.
수많은 "결말"을 봐왔지만, 어떤 결말에서도 인간은 퍼니싱의 "테스트"를 온전히 통과한 적은 없었어.
이번... "테스트"가 그다지 합리적이진 않았지만 말이야.
이스마엘은 고민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렸다.
간단히 말하면...
예전에 봤던 "니모"의 꿈 기억나?
예전의 "니모"는 "도미니카"처럼 어떤 세계에 속해 있었어. 아, 이 "세계"는 다른 "우주"나 "공간", 또는 네가 이해하기 쉬운 다른 개념으로 생각해도 좋아.
그 "세계"에서 그들은 시간 여행 장치를 발명했고, 그 안에서 "이중합체 결정"이라는 물질을 발견했어.
그 후, 정체 모를 결정체가 시간 여행 장치 전체를 감싸버렸지.
그렇게 이해해도 돼.
그건 그들 "세계"만의 "테스트"였고, 이를 "카오스 오염"이라 불렀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세계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어. 이중합체 결정이 시간 여행 장치를 완전히 덮어버리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탑이 되었지. 그 후... "선발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스마엘은 세상을 뒤흔들 만한 이 "위대한 과업"을 마치 일상적인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 이미 꿈에서 봤으니까.
머릿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폐허가 된 방에서 나누었던 본·네거트와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그들이 실수로 버그를 남기는 바람에 오염된 밈이 그 흔적을 따라 이 "세계"까지, 들어오게 된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영점 에너지가 퍼니싱을 가져왔다고 해도, 이중합 탑이 이렇게 빨리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을 거야.
무언가를 확인한 듯, 이스마엘이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 뒤의 일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니모... 아니. 본·네거트라고 해야 하나. 그와 도미니카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오염시킨" 문명을 구하려고 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실패했지만 말이야.
"후계자"를 찾아 봉인하려 했던 것이나, 퍼니싱과의 공존을 시도했던 것... 모두 너희가 바라던 "결말"에 이르지 못했어.
이스마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조"... "퍼니싱"은 절대 만족하지 않아.
그것의 사명은 오직 "회수"뿐이거든. 설사 0호 대행자의 권한을 통제할 수 있는 의식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의식"은 결국 적조가 만들어낸 새로운 의식으로 대체될 거야.
맞아.
이스마엘은 찻잔을 살짝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색 적조는 여전히 우주 도시 외곽을 감싸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0호 대행자는 조금씩 "카오스"의 의식과 권한을 빼앗을 거야. 그리고 완전히 "부화"하는 순간, 카오스는 완전히 사라지게 될 거야.
이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처음 했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어?
이 "결말"을 고를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지?
이 대답을 들은 이스마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목소리도 한층 차갑게 변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모든 일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건가?
모든 변수가 너로 인해 시작되었으니, 적조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었나? 그리고 내가 나타나면서 너의 그런 신념이 더 깊어진 건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과 떠오르는 얼굴들을 되새기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다만... 할 수 있는 힘이 아직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건 선택이 아닌 책임이었다.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적조 속 "암세포"되거나, 미끼가 되어 다른 존재를 유인해 내든 말이다.
이스마엘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스마엘의 표정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위험한 결정이야.
이스마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면에서는 네 추측이 맞다고 볼 수 있어.
난 네게 적조에 융합되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를 줄 수 있어.
이중합 탑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해.
이중합 탑 주위를 이화 적조가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서,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문지기"인 나는 이중합 탑으로 널 다시 들여보낼 수 있어.
"열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출구"는 통제할 수 없고, "열쇠"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이중합 탑으로 돌아간들 지휘관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아니. 넌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할 수 있어.
이스마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휘관의 귓가에 울렸다.
"문을 통과하는 것"과 "이중합 탑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야.
"이중합 탑에 들어가면" 혼란스러운 시공간과 통제 불가능한 조각들만 볼 수 있지.
하지만 "문을 통과한다"는 건 새로운 힘을 의미해.
얼마 전, 이중합 탑이 처음 나타났을 때, 한 구조체가 "구조체"라는 신분으로 이중합 탑에 들어갔었어.
그는 성공적으로 정상에 도달했고... 모든 "시련"을 극복한 뒤, "<phonetic=문>종착점</phonetic>"의 문에 도달했지.
난 그에게 문을 건널 수 있는 티켓을 건네주었어. 하지만 그는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지.
이스마엘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요"라고 말하더군.
저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그들과 함께 찾을 거예요.
지휘관은 그 뜻밖의 재난과 처참했던 전투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탑"을 나온 뒤로 그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을 잊었고, 얻었던 힘도 모두 잃어버렸어.
난 아직도 "인간"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힘들어. 내가 너무 오랫동안 떠돌아다녀서 예전의 감정들을 잃어버린 걸지도 몰라.
이스마엘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하지만, 이 일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네 선택은?
문을 통과하는 시련을 시작할 건가? 아니면 우주 도시로 돌아갈 건가?
그레이 레이븐… 정말 경계심 많군.
이스마엘은 지휘관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새로운 가능성?
이스마엘은 눈앞에 피어오르는 청초차의 옅은 김 속에서 과거의 도시를 보는 듯했다.
네가 진정으로 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하지만 나조차도 정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어.
정말... 다른 "<phonetic=결말>가능성</phonetic>"이 존재할까?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자신을 이스마엘이라 칭하는 이 고차원 존재가 새로운 인형극을 구경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지휘관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더 있다는 것은 나쁠 게 없었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이스마엘이 굳이 시간을 들여 지휘관을 속일 이유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기억해라. 이중합 탑의 붕괴는 이미... 매우 심각한 상태다.
나와... 카오스가... 어떻게든 이중합 탑 전체를 봉쇄할 것이다.
네가 성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이중합 탑에 절대로 다시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다.
본·네거트가 아직 이중합 탑 안에 있다고 해도, "시련"이 시작되는 걸 막을 권한은 없어.
본·네거트는 이미 카오스와 하나가 됐어. 그래서 난 그 후의 행적은 추적하지 않았지.
말해.
이스마엘은 친근하게 지휘관에게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리가 망설임 없이 이스마엘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은 "문을 통과하는 일"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문을 통과한다"는 건 새로운 "힘"을 의미해.
다르게 말하자면, 새로운 "힘의 차원"을 의미해. 네가 그 우주 함선에서 봤던 "나나미"와 같은 존재라고 보면 돼.
우주 함선에서 목격한 나나미의 힘을 떠올렸다. 직접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그녀는 서로 다른 시간 라인의 지구들에 각기 다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지휘관도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게다가 넌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 방금처럼...
적조에 융합돼서 0.1%도 안 되는 확률을 걸고 0호 대행자와 권한을 놓고 싸우는 것 말고는 말이야.
지금 지상에 0호 대행자와 맞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 카오스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카오스의 남은 힘마저 새로운 0호 대행자에게 잠식돼 버렸다.
지금의 이중합 탑은 <phonetic=0호 대행자>콜레도르</phonetic>가 이 "세계"로 가져온 것이야. 그녀는 사라졌지만, 이중합 탑에 여러 "문명"의 정보들이 중첩되면서 새로운 0호 대행자가 탄생했어.
누군가가 막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중합 탑을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 인간 문명은 모조리 수확되고 말 거야.
하지만... 네가 시련을 통과한다면, 이중합 탑의 통제권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몰라.
솔직히 말하면...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어.
0호 대행자만이 이중합 탑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어. 지금까지는 0호 대행자가 완전히 소멸한 후에야 그 권한이 이전되었거든.
"문을 통과"하는 것은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야.
그리고 네가 이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네 의식이 충분히 강해져서 시련에 도전할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야.
마음대로 이해해도 좋아.
내가 여기 나타난 것도, 네가 시련을 시작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니까.
그럴지도?
이스마엘은 직접적인 대답은 피했다.
"문지기"로서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야. 0호 대행자의 봉쇄를 우회할 방법을 찾을 필요 없이, 곧바로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이후의 모든 것은 네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해.
이 "기회"를 잡을지 말지는...
이스마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다시 한번 들어 올렸다.
너의 선택에 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