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도시
완성됐어요.
새로운 적조 샘플과 재료를 얻게 된 로사는 일행이 가져온 코어 장치를 이용해 밤낮으로 새로운 필터를 제작했다.
소형 필터가 성공적으로 가동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던 침식 농도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적조는 우주 도시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물러갔고, 우주 도시 내 공기도 한결 맑아진 듯했다.
또 다른 소형 필터가 천천히 가동되자, 근처에서 일하던 주민들이 낮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종합 테스트를 완료했어요. 정화 효율이 이전 대비 8% 상승하여, 현재 이 구역의 퍼니싱 농도를 최소 기준치로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어요.
로사는 이 조잡한 장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적어도 당분간은 이화 적조를 막을 수 있으니까요.
엠마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려 했지만, 로사는 오히려 눈썹을 더 심하게 찌푸려졌다.
적조 샘플 분석 보고서가 나왔어요.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8% 정도의 정화 효율 상승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해요. 하지만...
이게 현재 우주 도시의 모든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치에요. 대체품도 부족하고 실험 재료도 계속 줄어드는 상황이라...
죄송해요. 지금으로서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 이중합 탑 코어에서 더 많은 것을 분석해 내지 못한다면...
로사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이건 지휘관님께서 요청하신 물건이에요.
로사는 모자 모양의 소형 장치를 지휘관에게 건넸다.
오늘 제가 실험실에서 예전에 구상했던 대로 첫 번째 시뮬레이션 장치를 제작했거든요. 다만 아직 테스트를 진행하지 못한 상태예요.
이게 무슨 장치죠?
이 장치는...
의식에 문제라도 생기신 건가요?
엠마의 표정이 긴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굳어졌다.
로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휘관이 재빨리 말을 막았다. 지휘관의 설명을 들은 엠마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인드 표식 시뮬레이션... 필터링... 등대 네트워크 방식으로 필터를 단일 강화한 다음 격자 형태로 확장하면...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듯, 로사는 노트에 뭔가를 빠르게 적으며 실험실로 돌아갔다.
로사, 오랫동안 쉬지도 못했잖아요.
쾅!
그 말에 돌아온 대답은 실험실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었다.
...
엠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복도 끝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오블리크가 걸어 들어왔다.
좋지 않습니다.
0호 대행자의 출현 이후, 선발대의 외부 활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다들 많이 침울한 상태입니다.
외부 활동이 없었다는 건 물자 보급이 없다는 뜻이었다. 식량은 부족했고, 필수품들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끼니를 오랫동안 챙겨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바네사 님의 일을 알게 된 후로는...
오블리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깥에서 주민들은 말없이 거리에 모여 바네사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년이란 세월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은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바네사를 따라 끊임없는 이주의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바네사는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져도 바네사만 있으면 모든 게 잘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실수하는 바보들에게 큰 소리로 욕하면서도, 항상 어떻게든 모두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그들이 바네사 없이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깊은 현악기 소리 사이로 주민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따뜻한 실내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가수의 낮은 노랫소리에 맞춰 각자 들고 있는 조악한 제등 또는 급하게 만든 횃불을 높이 들었다.
거리 곳곳에서 드문드문 빛나는 불빛들이 방황하는 영혼에 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뭔가... 해야할 것 같아요.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은 이런 시련을 겪지 않아야 했다.
이중합 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0호 대행자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주민들은... 공중 정원에서 살 수 있었고, 보육 구역에서 살 수도 있었다. 시설 관리자가 될 수도, 로봇 수리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군인, 농부, 여행하는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더 평화로운 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통과 슬픔을 짊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겐 아파할 권리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은 쓴 술이 되어 영혼에 살아갈 용기를 준다고 하지만...
...
엠마는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옆에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휘관님은요?
괜찮으세요?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려 지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거친 금속에 베인 손바닥 위에는 성갑충과 그레이 레이븐의 명패가 엮여 있었다. 그 무게가 손바닥뿐 아니라 가슴까지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휘관님...
바네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다. 만약 지휘관이 여기서 쓰러진다면...
이것밖에 안 돼. [player name].
창문을 열자 눈 섞인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충혈된 눈가와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목숨을 걸어 얻어낸 시간인데, 낭비하거나 슬퍼하는 데 쓰면 안 되었다.
이중합 탑에 들어선 이후의 모든 사건을 빠르게 정리하며, 그 속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지금의 모든 상황에는 분명 궁극적인 "해답"이 존재할 것이다.
또 다른 "경품"은... "희망"이라고 해.
전환점은 반드시 올 거야. 그리고 지금 너희가 겪는 어려움도 분명 최고의 해결책이 있을 거야.
이건 네가... 아니, 너희 문명이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물"이야!
현재 단계에선 이중합 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다른 해결책은 없을까?
시선이 떨어지면서, 의식이 날카로운 실에 끌려가듯 깊고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음... 새로운 "이상"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미안한데, 여기서 떠나 줘. 아직... 네가 올 때가 아니야.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 그리고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 중얼거림...
모든 허상을 벗겨내고 나면, 아무리 믿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그것이 최후의 진실일 것이다.
머릿속에 희미한 진실의 윤곽이 드러나려고 했다. 그 마지막 실마리를 붙잡으려는 순간, 성벽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급박한 발소리에 생각이 중단되고 말았다.
지휘관님! 순찰대에서 긴급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성벽 가장자리에서 묵직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의 관자놀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떨리는 총구는 아래에서 다가오는 적을 향하고 있었다.
방호복의 자폭 장치를 흘긋 확인한 병사는 이를 악물며 도시 내부와의 통신을 연결했다.
경보... 경보입니다! 퍼니싱 농도가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특수 제작된 총알이 이합 생물을 관통하며 0호 대행자의 몸에 박혔다. 순간 그의 형체가 흐려졌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효과가 없습니다.
0호 대행자입니다. 0호 대행자가 나타났습니다!
소란스러운 통신 소리 뒤로 묵직한 폭발음이 들렸다.
위치 파악되었습니다! 우주 도시 외곽 초소입니다. 지난번 측정한 필터 작용 범위의 최외곽 지점입니다!
필터의 봉쇄를 뚫으려고...
로사가 제작한 필터는 여전히 퍼니싱을 효과적으로 걸러내며 이합 생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0호 대행자는 적조를 이용해 이미 우주 도시를 잠식했을 것이다.
우주 도시 외곽
멀리서 보면 이색 적조가 우주 도시 가장자리를 따라 꿈틀거렸다. 필터가 작동하자 보이지 않던 성벽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몇몇 이합 생물이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으려 했지만, 경계선 안쪽으로 들어선 사지는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저기에 있어요.
0호 대행자가 경계선 끝에 서 있었다.
0호 대행자는 손을 들어 올려 눈앞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심스럽게 건드려보았다.
...
손가락이 공기 중에서 녹아내리자, 0호 대행자는 고통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아직은 이 "경계선"을 직접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0호 대행자는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저기에 그 인간이...
그 인간은 이 세계의 고정점이자 세계의 운명과 묶여있어서 자신에게 충분한 힘을 제공할 수 있었다.
0호 대행자의 사명은 지구 문명을 수확하는 것이었다.
적조 속에서 흩날리던 눈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0호 대행자는 산꼭대기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수많은 이합 생물이 인간의 방어선으로 몰려들었다.
적조가 눈발을 휘감고 산사태처럼 밀려오며, 이합 생물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벽을 끊임없이 들이받았다.
멀리 있는 이중합 탑에서 불길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한때 "이합 재난 구역"이라 불리던 곳에서 흘러나온 적조는 대륙을 침식하는 홍수처럼 황무지와 산지를 넘어 인간의 마지막 거주지까지 밀려왔다.
이합 생물들이 꿈틀거리며 우주 도시를 천천히 포위해 가고 있었다.
필터가 현재의 퍼니싱을 정화할 수 있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그것들은 충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망원경 속에서 0호 대행자는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0호 대행자가 카오스를 완전히 잠식해 버린 걸까요?
지난번 0호 대행자를 봤을 때만 해도 카오스는 완전히 잠식당하지 않았다. 당시엔 카오스가 어느 정도 그것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는 최악의 소식이었다. 카오스가 완전히 흡수되었다는 것은 적조가 곧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것임을 의미했다.
대량의 적조가 두 사람이 서 있는 방향으로 밀려왔다.
지휘관님!
엠마는 무기를 꺼내 들어 적조를 동반한 0호 대행자를 조준했다.
방금 관찰한 결과, 필터는 아직 현재의 퍼니싱을 정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를 활용해 카오스의 의지가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것은 산기슭에서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오스.
특정 단어에 반응하듯 대상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새로운 모습으로 재구성되었다.
...
창백한 얼굴의 낯익은 소녀가 붉은 적조의 중심에 서 있었다.
말해줘. ▃▅▆▁▂▄▁
▅▆▁▃▄▁할 말이 없어. ▅▆▁▆▁▃▄
악화하는 현실... ▁▃▄▅▆▁▆
...
안 돼.
그것은 중얼거리며 위에 있는 인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언가를 분석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
이리 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player name]. 우리와...
새로운... 세계...
쿵!
그것에 대한 대답은 주저 없이 울린 총성이었다.
그것은 무수한 생명들이 영혼을 바쳐 지켜온 횃불이었다. 결코 여기서 꺼트릴 수 없었다.
방금... 제 아버지를 본 것 같았어요.
총소리에 놀란 엠마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번처럼 적조의 환영이 실제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어요.
이중합 탑을 통해 그것이 흡수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인간 문명만이 아니었다.
성핵이 소성단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았다.
적조의 환영...
익숙한 광경이군.
기억 속 도시가 같은 파도에 휩쓸렸고, 붉은 퍼니싱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구더기처럼 닿을 수 있는 모든 성계를 잠식했다.
안타깝지만, 카오스라는 의지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책을 펼치자 붉은 금빛 실로 수 놓인 문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스마엘은 그것들을 응시하며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카오스를 상실한 지금, 더 이상 적조를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인도자 없이 태어난 0호 대행자는 순수한 야수가 될 거야.
이스마엘은 멀리서 0호 대행자가 출현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콜레도르와는 달리, 혼돈의 적조에서 재탄생한 0호 대행자는 소통이 불가능했다. "<phonetic= 0호 대행자>처벌을 내리는 자</phonetic>"처럼, 원초적인 본성만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구 문명 전체를 문 너머로 끌고 가는 임무를 달성하려 할 것이다.
정말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가자. 미지로 나아가, 죽음으로 길을 묻고, 생존자에게 내일을 남기자.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심연의 깊은 메아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을 흔들었다. 파도 소리가 해저 특유의 백색 소음과 뒤섞이면서 귓가를 울렸다.
이곳을 떠나. 아직...
때가 아니야.
적조가 산기슭에서 오르내리는 가운데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흠칫 놀라 깨어나니 창문에 비친 것은 자신의 눈빛이었다.
0호 대행자가 우주 도시 외곽에 나타난 지 40여 일이 지났다.
폭설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적조와 이합 생물들은 우주 도시의 중심부부터 차례로 잠식해 갔다. 주민들은 외부 활동이 불가능해서 도시에 얼마 남지 않은 식량으로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현재 식량 저장량이 위험 수준이며, 온실 작물 수확까지 최소 4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약재 비축분도 부족해서 일부 중상자들의 상태가 악화하고 있어요.
지, 지휘관님! 그 0호 대행자가 또 나타났어요.
그... 그것이 아직도 같은 말을 하고 있나요?
네. 이번엔 나선이 마주쳤는데요. 그것이 나선의 어머니 모습으로 변해 계속 말을 걸어왔다고 해요.
지휘관만 적조 속으로 들어오면, 자신은 우주 도시를 떠나겠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 없어요. 절대 그 조건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거예요.
지휘관님을 잠식한 후, 더 강력해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선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걸 이해해 줄 리가 없어요.
사람들은 적조가 한 명의 인간을 삼키는 것만으로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지휘관님을 적조 속으로 보내자는 투표를 제안했어요.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럴 수가...
이중합 탑 속에서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카오스와 그녀의 "나무 열매", 이중합 탑 안의 적조...
적조로 들어가... 이중합 탑에서처럼 적조에 잠긴 뒤, 마인드 표식 장치를 이용해서 아직 기반이 불안정한 새로운 0호 대행자의 권한을 빼앗는다면...
로사가 만든 안정된 마인드 표식 장치는 확보했지만... 정말 가능할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식량 소비량이 현재 보유량을 훨씬 초과했어요. 순찰대가 우주 도시를 다 뒤져봤지만...
예전에는 필터가 작동하는 범위 내의 숲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40여 일 전부터 우주 도시가 적조에 포위된 이후, 순찰대는 철저히 경계하며 주민들의 외출을 엄격히 통제했다.
적조는 틈만 있으면 파고들었고, 4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주민이 적조의 유혹에 굴복해 융합되고 말았다.
나선이랑 다른 사람들도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탐색을 시도한 거예요.
바니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순찰대의 신속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한쪽 다리가 이미 퍼니싱에 심각하게 침식되어 절단이 불가피한 상태예요.
...
이대로는 안 된다.
차가운 한기가 하늘의 빛과 함께 아래로 쏟아졌다. 눈 부신 빛이 천장에 반사되어 공간 전체를 환하게 밝혔고, 주변의 모든 광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근처에서는 적조가 뱀처럼 섬뜩하게 꿈틀거리며, 필터의 작동 범위 밖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0호 대행자의 명령에 따라 이합 생물들이 쉴 새 없이 필터가 형성한 안전 구역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센 파도가 보이지 않는 도시의 벽을 내리쳤고, 끈적이는 파도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의식은 다시 한번 실신했던 순간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분홍 머리의 구조체... 해저...
왜인지 더 오래된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것은 더 이전의 이중합 탑에서의 "기억"이었다.
말해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당신도 나처럼, 다른 비전을 엿볼 수 있나?
당신도 나처럼... 이곳에 남은 건 단지 하나의 투영일 뿐인가?
자, 이제 거울 앞에서 고개를 들고, 내게 말해줘.
"그녀"가 엿본 것은 뒤에 비치는 한 줄기 하늘의 빛만이 아니었다.
가장 완벽한... 결말이라고?
네가 기대하는 "변수"가 너의 소원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
조각난 기억들이 깨진 거울 조각처럼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든 허상을 벗겨내고 나면, 아무리 믿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그것이 최후의 진실일 것이다.
대답 대신 차가운 바람만이 휘몰아쳤다.
그녀는... 그때 유리 장막 뒤에 있던 지휘관을 보았다.
해저, 계단, 행진하는 도살장, 다가오는 폭우.
"<phonetic=자비로운 자>그녀</phonetic>"는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이 세계를 관찰하고 있었다.
"<phonetic=자비로운 자>그녀</phonetic>"... 혹은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들은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얻으려 하며, 이 세계선에서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
그들은 퍼니싱이 인간을 잠식하는 걸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인간이 퍼니싱을 이겨내는 걸 보고 싶은 걸까?
만약 전자라면, 왜 직접 나서서 퍼니싱을 도와 인간을 멸망시키지 않는 걸까?
아니라면, 왜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들은 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보려는 걸까?
수없이 많은 광기 어린 추측들이 정신을 휘감았다. 이중합 탑, 콜레도르, 본·네거트, 분홍 머리의 구조체... 혼돈스러운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네 증상은... 0호 대행자의 권능이 가져온 영향과 매우 비슷하군.
...
내가 아는 건 오염된 밈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거야. 역대 "도미니카"들은 모두 이를 막으려 애썼지만, 유감스럽게도 별 효과가 없었지.
오염된 밈은 왜 영점 에너지를 노리는 거지?
이것은 가치 있는 요소들을 회수하는 작업이다. 진공 영점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문명을 검증한 뒤,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문명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문"으로 수확한다. 그 후 그들의 독자적인 진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열쇠가 없잖아. "문"을 완성한다 해도 온전한 상태로 벗어날 수 없다고.
0호 대행자... 왜 오염된 밈에 이런 이름을 붙인 걸까? 예전에도 이런 "존재"였던 걸까?
이 이중합 탑은 원래 제 작품이자, 저를 탄생시킨 시작점이기도 하죠.
이게 바로 이야기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주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눈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한밤중, 산꼭대기에서 뒤돌아보니 우주 도시의 드문드문한 불빛들이 꺼진 채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방호복의 찢어진 부분은 임시로 수리했지만, 틈새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이 순간, 사방이 너무나 고요해서 덜덜 떨리는 뼈마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해야 할 일들은 모두 마쳤고, 엠마와 오블리크가 남은 일들을 잘 마무리할 것이다. 지휘관은 마음속 잡념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어 창공을 바라보았다.
칠흑처럼 검은 산맥이 끝없이 늘어서서 작은 도시를 압도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 지휘관은 차갑고 적막한 밤을 마주한 채, 미지의 차원을 응시했다.
가슴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상위자들의 오만함과 냉정함을 큰 소리로 따지고 싶었지만, 쓰디쓴 말들은 혀끝에서 맴돌다 결국 목구멍 속으로 가라앉았다.
인간의 말에 대답한 것은 산골짜기 사이로 울리는 신비롭고도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벌레는 태양을 올려다볼 수는 없지만, 무리를 이루면 거대한 나무도 흔들 수 있는 법이다.
지휘관은 거대한 산맥을 향해 말하는지, 혼잣말하는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조에 몸을 맡긴 후의 일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장치로 의식을 붙들어 적조 속에서 최대한 버텨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희미한 하늘빛이 비치는 눈보라 속에서 귓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0호 대행자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우주 도시를 포위했고, 도시의 물자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일도 맞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0호 대행자의 권한은 아직 불안정하다. 이중합 탑에서처럼 적조로 들어간다면, 카오스의 의식을 찾아 0호 대행자의 권한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퍼니싱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겠지만... 지상의 인간들에게 숨 돌릴 틈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루시아가 곁에 없다.
지휘관은 아쉬움과 눈보라를 뒤로하고, 더 이상 망설임 없이 산 아래 소용돌이치는 적조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적조" 안에서 암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의식이 남아있는 한, 당신들은 결코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 원하는 것을 온전히 회수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
내 손으로 인간 문명에 새로운 불씨를 지필 것이다.
눈이 점점 더 거세게 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