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3 밤의 장막 너머의 빛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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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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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마엘이 책장을 넘기자, 수많은 소성단이 흩날리면서 오래된 종이 위로 반짝이는 글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스마엘

드디어 이 시점에 도달했어.

종이 위에는 가로세로로 얽힌 표들이 하나의 정교한 도표처럼 치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스마엘

인간... 기점...

아, 여기있네.

그녀가 검지로 책 페이지를 집자 선택된 문자들이 갑자기 빛나며 우주 도시의 투영을 만들어냈다.

지휘관이 이중합 탑을 떠난 지 771일째 되는 날이었다.

인간은 마지막 거점이었던 "대묘비"마저 포기하고 우주 도시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화 적조는 지구의 광활한 영토를 집어삼키며 양분을 무차별적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우주 도시 밖, 필터의 보호가 미치지 못하는 구역엔 고농도 퍼니싱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침식시키고 있었다.

이스마엘

퍼니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이스마엘이 새로운 페이지를 넘겼다.

우주 도시에 남은 인간은 이화 적조에서 어떤 물질을 추출하였고, 실험실에서 그 물질을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했다.

이스마엘

익숙한 광경이네.

흰색 방호복을 입은 인간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지만...

붉은 경고등이 연이어 울리고 장비들이 파손되면서, 인간은 냉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이 물질은 인간의 현재 과학 기술로는 분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은 마침내 이화 적조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지구의 현존 기술로는 퍼니싱에 맞서 싸울 수 없다는 치명적인 현실을 의미했다.

이스마엘

포기, 절망... 늘 그래왔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가설이 등장했고, 곧바로 검증 단계에 돌입했다. 새로 발견된 이 물질들은 지구의 것이 아닌, <color=#ff4e4eff>"또 다른 문명"</color>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은 과거 자신이 탑에서 겪었던 상황을 언급했다. 과거의 "시공간 여행 장치"가 카오스의 오염에 점차 잠식되어 현재의 이중합 탑으로 변모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중합 탑"은 거대한 중간 기착지가 되었다.

붉은 바벨탑처럼 대지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그 거대한 구조물 내부에 복잡하게 얽힌 터널들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과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으며, 셀 수 없는 "미지"의 영역과 이어져 있었다.

당시, 다른 시대에 갇혀 있던 콜레도르가 이중합 탑을 발견했고, 탑의 코어를 이용해 퍼니싱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phonetic=원초의 존재>도미니카</phonetic>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 세계에 강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0호 대행자가 이중합 탑을 완전히 장악한 후, 그 존재는... 과연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인가?

인간 문명 전체를 이끌고 다음 세계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성핵이 소성단을 빨아들이듯 더 많은 문명의 조각을 끌어모을 것인가?

이스마엘

예리한 통찰력과 정교한 추론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마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표했다.

이스마엘

난... 후자라고 추측하는데. 0호 대행자... "처벌을 내리는 자"는 결코 만족을 모르니까.

눈빛이 점점 깊어진 분홍 머리 여성은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스마엘

"선별"을 통과하지 못한 문명들을 모조리 수확해 버린다고... 흠.

이스마엘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책장은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저절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찬란하게 빛나던 책장이 희미해지자, 분홍 머리의 여성은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먼 곳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두 개의 주사위가 천천히 회전하는 동안, 칠흑 같은 운명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날카로운 물보라처럼 튀어 올랐다가 희미한 빛 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우주 도시를 휘감은 폭설은 여전히 그 기세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실내로 있음에도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는 조금도 누그러들 줄 몰랐다.

눈 보고 계세요?

그렇게 빨리 그치지는 않을 겁니다.

이화 적조... 아니. 이화 퍼니싱이 지구의 에너지를 계속 집어삼키고 있으니까요.

이화 적조를 억제할 이가 없어서 "쇠퇴"가 시작됐죠, 그렇기 때문에 이 극한의 추위도 쉽게 멈추지 않을 거예요.

로사도 지휘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의 폭설을 바라보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제가 이중합 탑 코어에서 몇 개의 조각을 추가로 분석했어요. 우주 도시가 아직 이화 퍼니싱에 저항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새로운 "기술" 덕분이었어요.

하지만...

로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 현재로서는 성능이 완벽한 필터 장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선발대가 가져온 적조 샘플을 분석해 보니, 이화 비율이 계속 상승하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현재의 필터로는 막아내기 힘들 것 같아 걱정돼요.

필터의 성능을 강화해야 합니다. 최소한 현재의 필터 기능부터 강화해야지만...

물자 목록은 다 작성했어?

대부분의 부품은 우주 도시에 재고가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필터 회수 장치에 필요한 코어 부품은 우주 도시에서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예전 여과탑의 코어 장치입니다. 퍼니싱의 확산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여과탑이 있었던 보육 구역이나 도시를 찾는다면, 예비 부품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바네사는 실험실 옆 회의실에서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고, 오블리크는 간단한 작전 지도를 펼쳐놓고 적조가 모여있는 방향을 표시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선발대를 이끌고 외출했었습니다.

현재 적조는 아직 우주 도시 남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극한의 추위가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는 동시에, 적조에도 어느 정도 위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이나 다름없이... 적조는 추운 곳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오블리크는 작전 지도의 남부 지역에 적조를 나타내는 붉은 선을 가로 그었다.

새로운 0호 대행자도 북부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북쪽으로 최소한 길 하나 정도는 통행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바네사는 오블리크가 가리키는 대로 지도에 구불구불한 경로를 그렸다.

하지만, 이 길은 매우 위험합니다. 표시된 두 지점은 이합 생물들이 군집을 이루며 서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길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중도 오염 구역을 다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길이야. 네가 적조를 헤엄쳐서 건너지 않는 한 말이지.

바네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구불구불한 경로가 낚싯바늘처럼 지도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북극 항로 뒤편에 창고가 몇 개 있었어. 한참 전에 내가 표시해 뒀던 곳이지.

그 징그러운 것들이 아직도 북쪽 추위를 피한다면, 창고에 쓸 만한 부품이 남아 있을 거야. 네가 찾는 핵심 부품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항상 운이 좋았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어. 적조의 변이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고, 새로운 0호 대행자도 강해져서 우주 도시 방어선까지 위협하고 있어.

감시 포대나 방공 기관총 같은 걸로 저것들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게다가 우주 도시는 지금 자급자족도 안 되고 있어. 식량도 주변을 뒤져야 겨우 끼니를 때우는 수준이야.

0호 대행자가 정말로 우주 도시를 포위한다면 놈이 나설 것도 없이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할걸?

바네사는 냉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방금 안 좋은 소식 하나 들어왔어.

외곽 근처에서 선발대 대원 둘이 적조 속으로 또 뛰어들었대.

...

달콤하면서도 녹슨 피비린내가 감도는 적조의 환영은 황홀한 놀이동산 같았다. 그래서 적조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기억 깊숙이 묻어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인간의 환상을 구석구석 엿보며, 인간이 바라는 꿈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마음속 가장 여린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적조 속에서 엄마가 자기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게 진실인 걸까요?

어쩌면... 이쪽이 거짓이고, 이쪽이야말로 영원한 악몽일지도 모르죠? 제가 만약...

제가 저쪽으로 가면 된대요. 엄마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어요.

그곳은 낙원이고, 풍성한 음식이 있고, 춥지도 않다고 하네요.

모두가 반응하기도 전에, 시미는 처연하게 웃더니 총을 내던지고 적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보 같으니...

숨막히는 정적이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그걸 찾아서 필터를 완성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도 며칠 못 버티고, 단체로 줄 서서 적조 속으로 뛰어들게 될 거야.

제가 가보겠습니다.

너 혼자서는 안 돼.

눈썹을 찌푸린 바네사가 작전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블리크, 넌 선발대를 이끌고 이쪽 구역으로 돌아가. 그곳에 북극 항로 연합의 옛 창고가 하나 있을 거야. 내가 정문에 안전 표시를 해뒀어.

그리고...

지휘관은 나와 이쪽 방향으로 갈 거야.

안 됩니다. 그쪽은 0호 대행자의 영역과 너무 가깝습니다.

그래서 지휘관과 내가 같이 가는 거야. 내 의식의 바다가 안정적이기만 하다면 날 어떻게 하지는 못하니까.

그 구역에 큰 창고가 있던 걸로 기억해. 북극 항로 연합이 공중 정원과 거래할 때 전용으로 쓰던 창고야.

북극 항로 연합도 정기적으로, 퍼니싱 필터 장치를 정비해야 했으니까, 거기에 로사가 필요로 하는 게 있을 거야.

적어도 한 팀은 물자를 가져와서 이 시기를 버텨낼 수 있어.

바네사는 중얼거리며 창밖 어두운 하늘을 봤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기괴한 붉은빛이 하늘을 물들이더니 조금씩 0호 대행자의 눈동자로 일그러져 갔다.

달콤하면서도 역겨운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의식이 강제로 기억에서 끌려 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아득히 먼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며, 뇌를 울리는 강렬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마인드 표식 저편에서 고통스러운 신호가 전해졌다.

지휘관은 바네사와 함께 우주 도시를 떠나 계획했던 그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네사

쿨럭...

귓가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고, 방호복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팔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혈청이 혈액과 서서히 섞여 들어가자, 동공 아래로 이상한 색채들이 일렁이며 형체를 잃어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자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정신이 들면, 내려와서 걸어.

흔들리던 시야가 문득 멈추었다. 지휘관은 그제야 바네사가 자신을 등에 업고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혼돈스러웠던 머릿속이 드디어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다.

그때… 지휘관은 바네사와 함께 우주 도시를 떠나 계획된 경로를 따라 목표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0호 대행자의 행방을 예측할 수 없었다.

새로운 0호 대행자가 지나가야만 하는 경로에 나타났다. 카오스의 모습은 거의 투명해진 상태였고, 그 모습 대신 낯선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곧 카오스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다.

카오스의 남은 의식이 지휘관과 바네사를 도왔다. 격렬한 전투 끝에 바네사가 패배할 뻔한 그 순간, 0호 대행자는 붉은 액체가 되어 적조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아직도 기억 안 나? 그럼, 널 적조에 던져버려주마, 한 방에 끝내게.

흥...

바네사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지휘관과 함께 근처에 있는 은신처로 이동했다.

바네사의 상태도 심각해보였다. 그녀는 심한 외상을 입었고, 순환액은 계속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의식의 바다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역겨운 놈한테 당했으니까 그렇지.

바네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0호 대행자가 사라진 뒤, 넌 심하게 침식됐었어.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널 업고 오느라...

바네사는 멀쩡한 한쪽 팔로 붕대를 뜯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지휘관은 붕대를 든 뒤, 적당히 잘라 바네사의 상처를 신속히 감아주었다. 그런 뒤, 준비해 둔 <b><ud><color=#34aff8ff><link=18>응축액 팩</link></color></ud></b>을 꺼내려는데 바네사가 지휘관의 손을 잡았다.

그건 나중에 쓰자.

지금의 상태로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 불가능해 보였다.

목표 창고가 코앞이야.

바네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역겨운 것들이 아직 이곳에 손대지 않았어, 0호 대행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거든. 우리가 물자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

넌... 움직일 수 있겠어?

바네사가 지휘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가자.

0호 대행자가 이곳을 발견했으니, 이화 적조가 퍼지면 한동안은 이 구역을 탐색할 수 없을 거야.

오블리크 일행도 코어 부품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리 다 같이 적조에 뛰어들면 되겠네.

쳇...

뭐야, 재미없어?

간단한 휴식을 취한 후, 둘은 바네사가 표시한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다.

바네사 말대로 0호 대행자가 이곳을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그림자 속에서 이화 적조가 꿈틀대고 있었고, 모습이 일그러진 적조 생물 몇 마리가 구석에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화 적조가 밀려오기 전에 물자를 회수해야만 했다.

조심해.

바네사는 멀쩡한 한쪽 팔로 총을 꽉 쥐며 지휘관에게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부식성 점액이 날아왔다.

펑... 펑...

연달아 울린 두 발의 총성이 적조 생물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흉강으로 보이는 부위를 관통했다.

다행히 0호 대행자는 아니었네.

적조 생물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리자, 바네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점이 바로 앞에 있었다.

통제 불능의 이화 적조가 미친 듯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둘은 최대한의 속도로 아직 침식되지 않은 창고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수많은 적조 생물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고, 지휘관과 바네사가 처치할 때마다 적조 속으로 녹아 들어가 다시 몸을 만들어냈다.

쿨럭.

격렬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네사의 의식의 바다가 대량의 퍼니싱에 오염된 것이 분명했다.

왼팔은 이미 완전히 마비됐고, 오른쪽 다리의 부품도 망가져서, 기껏해야 20분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옆에서 지휘관이 달려드는 적조 생물들을 차분히 쏘아대는 모습을 본 바네사는 눈을 감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쿨럭...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기침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 떠들지 마.

바네사는 비릿한 순환액을 삼켰다.

바로 앞이야.

창고 앞에 가져온 연료를 쏟아부었다. 작은 충격만 가해도 땅바닥에서 맹렬한 불길이 치솟을 것이다.

쾅!

붉은 금빛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됐어. 어서 들어가.

불길이 완충 구역 역할을 하고 있어서 당분간 적조 생물들이 창고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몇 분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네사는 옆에서 지휘관의 행동을 지켜보며 묵묵히 코어 장치를 찾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바네사의 기억을 따라 둘은 창고를 돌아다니며 쓸 만한 물자들을 최대한 찾아냈다.

구석 선반 위에 로사가 설명했던 코어 장치가 놓여있었다.

난 항상 운이 좋은 편이지.

지휘관은 재빨리 장치를 배낭에 넣었고, 바네사는 힘겹게 몇 개의 상자를 벽 모퉁이에 쌓아 올렸다.

응. 너는 돌파해. 입구의 불길로는 적조 생물들을 오래 막지는 못할 거야. 내가 남아서 뒤를 맡을게.

의식 연결의 반대편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과 비명이 마인드 표식을 통해 전해져 왔다.

나도 알고 있어, 눈치챘으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말끝을 맺기도 전에 바네사의 오른쪽 다리가 휘청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 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네사는 응급 가방에서 붕대 두 개를 꺼내어 망가진 오른쪽 다리 관절을 다시 묶고는 간신히 일어섰다.

이제부터 내가 남아서 막을 테니, 넌 이걸 가지고 돌아가. 내가 이런 역겨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무기를 꺼내든 바네사가 지휘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멍하니 서 있어? 유언이라도 듣겠다는 거야? 그런 거 없어. 어서 가.

뭘 망설이는 거야?

멍청한 짓... 하지 마.

바네사

이거 놔!

지휘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일 수 없는 바네사를 등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방금 쌓아둔 상자를 따라 천창으로 올라가려 했다.

천창은 너무 좁아서 한 명만 겨우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휘관은 몇 번을 시도해 봤지만 둘이 동시에 통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안 된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날 내려놔.

펑... 펑...

총성이 몇 번 울린 후, 낡은 천창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바네사

쿨럭...

지휘관은 다시 상자를 쌓고 등반 로프를 이용해 순식간에 창고 지붕 위에 올라섰다.

지휘관의 의도를 눈치챈 바네사는 이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참... 순진한 이상주의자라니까.

이런 상황에서 동정심만큼 쓸모없는 게 없어. 충고하지만, 그 동정심이라도 아끼고 싶다면 날 내려놓고 우주 도시로 돌아가.

...

등 뒤에서 구조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지휘관이 집중해서 올라가는 동안, 주위를 살펴보니 적조 생물들은 아직 타오르는 불길에 막혀 창고 바깥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 영리한 놈들이 적조를 우회해 둘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건물들이 새로운 탈출 경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등반 로프의 길이가 다른 건물 옥상으로 건너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차라리 날 저쪽으로 던지는 건 어때?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봐.

제발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이대로 뛰어내리면 우리 둘 다 바닥에 떨어져서 저 징그러운 것들과 포옹하게 될 거라고.

그래서 언제까지 날 데리고 폐허 프리러닝을 할 생각이야?

바네사는 말하면서도 뒤쫓아오는 이합 생물들을 향해 계속 사격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 정도 거리에서 날 데리고 도망칠 수 없다고...

지휘관은 거리를 여러 번 측정한 끝에 안전한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건물의 대들보까지 먼저 올라간 후, 인접한 건물 꼭대기로 뛰어넘기로 했다.

낡은 건물은 성인 한 명과 구조체 하나의 무게를 동시에 견디기 버거운 듯, 철제 구조물에서 불길한 끼익 소리가 났다.

어서 날 내려놓으라고. 여기서 죽고 싶어?

이런 역겨운 말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로 날 여기 두고 가는 게 좋을 거야. 내 오른쪽 다리는 부품에 문제가 생겨서 더는 움직일 수가 없어.

여기 남아있으면... 그래도 쓸 만한 폭탄이 될 수 있잖아.

구조체 성대가 뭐라고. 어차피 순환액도 낭비되지 않잖아.

지휘관은 이를 악물고 철제 구조물 위를 달렸다. 그러다 구조물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등반 로프를 던져 맞은편 건물 꼭대기에 고정한 후 매달렸다.

무너진 구조물은 아래쪽 창고를 완전히 짓눌러버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바네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파오스 수석답네.

등반 로프가 맞은편 건물의 지지대를 휘감았다. 지휘관은 로프의 견고함을 여러 번 시험한 후, 둘의 그림자가 붉게 녹슨 하늘을 가로질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믿고 있잖아. 전술과 신념은 모두 적을 위한 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맞잖아?

괜히 강한 척하지 마.

흥...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그래서 널 이길 수 없었나?

아니. 난 진 적 없어.

생존자들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해. 그것만이 우리의 불씨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나의 이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인간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올 수 있었겠어?

단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 한, 불씨가 꺼지지 않는 한, 난... 너한테 진 게 아니야.

바네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바네사

쿨럭...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의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폐허의 마지막 벽을 간신히 기어올랐다. 그리고 지휘관의 체력은 이미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한 지휘관은 주변에 꿈틀대는 이합 생물들을 제거하면서 망설임 없이 목표 구역으로 이동했다.

단말기에서 삑삑 소리가 울렸다. 로사가 개조한 단말기가 통신 범위 안으로 들어서자, 반대편의 동료들과 간신히 연락됐다.

꽤 영리하네. 언제 오블리크한테 연락한 거야?

날 바보 취급하지 마.

등에 업힌 바네사는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지휘관은 그녀의 기체 온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제발...

걱정 마. 이 정도로 죽진 않아.

눈밭의 끝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 하늘로 붉은 신호탄이 치솟았고, 그곳에는 오블리크가 이끄는 또 다른 선발대가 있었다.

지휘관은 종아리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튀어나온 철근이 방호복을 찢으면서, 차가운 바람이 그 틈으로 스며들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누구도 여기서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눈밭은 늪처럼 질퍽거리면서 희망과 절망을 함께 품고 있었다.

오블리크

바네사님... 지휘관님...

희미한 목소리가 매서운 칼바람에 산산이 흩어져 바람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마비된 몸은 더 이상의 전진을 거부했다. 퍼니싱이 서서히 지휘관의 육체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마의 식은땀이 얼음으로 변해갔다. 순간 시야가 다시 한번 뒤틀리며 기괴한 색채들이 망막을 뒤덮었다.

의식이 다시 깊은 해저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