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치솟았다.
무의식중에 기괴한 해저 낙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거 놀랄 일이군.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까지 이 지옥 같은 곳에 떨어질 줄이야.
아. 이렇게 인연을 맺은 김에 나도 부탁 하나 있어.
나와 의식 연결을 해 줘.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의식의 바다 상태가 말이 아니야.
우리는 여기까지 왔어. 이건 혹사의 예상을 뛰어넘었어.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여기까지 왔다니, 대체 언제?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나 대신 바렐리아한테 이렇게 전해줘.
갑자기 가슴 한편이 아팠다.
내 흑역사 동영상 지워달라고 해줘. 아니다. 그냥 나 대신 바렐리아와 반즈에게 안부나 전해줘.
지휘관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 듯, 슈트롤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슈트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네 얼굴은 이제 지겨우니까, 날 찾아오려거든 천천히 와"라고 좀 전해줘.
눈앞의 광경이 갑자기 바뀌더니, 어둠 속 위험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지휘관!!! 내 뒤에 숨어!!
순간, 살과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이번에는 그를 구했을까?" 지휘관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은...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걸까?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극심한 압박감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비명 한 번, 마지막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슈트롤은 그 강인한 모습 그대로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파도 소리와 함께 축축하고 비린내 나는 냄새가 밀려왔다.
...
...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의미 없어.
해봐야 알 수 있지.
대가는? 단순히 샘플 채취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적조에 접근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요람 속에만 숨어있을 순 없어.
살아남으려면 언젠가는 적조와 맞서야만 해.
그날이 오기 전에 인간의 적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
거센 눈보라가 소녀의 가녀린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어쨌든 더는 이곳에 오지 마. 위험해.
소리가 들리자, 대화를 나누던 둘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
살아있군. 정말 다행이야.
백발의 대행자는 말없이 더 높이 떠올랐고, 생기 없는 눈동자로 지휘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나는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그렇게 겁도 없이 행동해도 되는 건가?
흐음...
하지만 그렇게까지 날 믿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더는 이곳에 가까이 오지 마.
너희도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이화 적조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됐어.
적조를 제어하던 카오스가 힘을 잃고 서서히 적조에 동화되고 있어.
떠나.
떠나.
방금 카오스를 봤겠지.
루나는 지휘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어서 떠나.
새로운 0호 대행자가 만들어지고 있어. 그건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루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인간의 순진한 망상을 일축했다.
이화 적조가 폭발한 이후, 난 승격 네트워크와의 연결이 조금씩 끊어지고 있어.
하지만 전 대행자였던 만큼, 승격 네트워크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어.
지금 승격 네트워크는 정보를 갱신하면서 계속 진화하고 있어. 쉽게 말하면... "정보"가 끊임없이 늘어나고 퍼져나가고 있다는 거지.
퍼니싱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이 세계에서 물질의 총량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있을지도 몰라.
"새로운 생명"이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주둔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나나미라는 소녀는 찾았나?
나나미가 전제 조건을 설정할게! 현재 상태의 지휘관이 합류하는 걸 새로운 "연산"의 시작점으로 해서...
조건 사전 설정 성공, 논리 연산 완료.
지휘관, 출발하자.
또 다른 "경품"은... "희망"이라고 해.
전환점은 반드시 올 거야. 그리고 지금 너희가 겪는 어려움도 분명 최고의 해결책이 있을 거야.
이건 네가... 아니, 너희 문명이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물"이야!
...
그렇게 말했다고?
알았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익숙한 어지럼증이 다시 몰려왔다.
퍼니싱 농도가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어!
설산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던 바네사는 지휘관에게 혈청을 한 번 더 주입하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바네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넘실거리는 적조 사이로 창백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카오스의 모습은 희미해져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
...
소용돌이치는 적조 속에서 0호 대행자가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당장 우주 도시로 돌아가자.
어서 가.
루나가 손을 뻗자 넘실거리던 적조가 잠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제 루나의 권능으로는 적조를 제어하기에 역부족인 것 같았다.
[player name].
희미한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루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어서 가.
마지막으로... 도와줄게.
대행자가 남은 힘을 짜내 부드럽지만, 확고한 봉쇄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바네사와 인간 지휘관을 자신의 "영지"에서 단호하게 몰아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바네사와 함께 루나의 영역 밖으로 이미 쫓겨난 상태였다.
멈춰 선 눈보라 속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루나가 승격 네트워크가 남긴 공간 차단 권능의 일부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루나의 마지막 말을 전해왔다.
더는 이곳에 가까이 오지 마.
퍼니싱 농도가 계속 올라가고 있어. 이대로 있다가는 혈청 한두 개로 끝나지 않을 거야.
바네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먼저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지휘관은 바네사의 측 후방에서 튀어나온 이합 생물을 재빨리 총으로 쏘아 날려버렸다.
루나가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펼쳤던 모든 "힘"을 거두자, 이합 생물들이 그 틈을 노린 것이었다.
총성이 울린 뒤, 이합 생물의 비명이 지휘관의 귓가에 들렸다.
이합 생물들이 쫓아오고 있어.
뒤를 돌아보니 루나의 가녀린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내린 마지막 결단일 것이다.
둘은 뒤쫓아 오는 이합 생물들을 처리하며, 힘겹게 설원을 걸어갔다.
...
광풍과 눈보라가 소녀를 끝없는 회백색 세상 속으로 삼키려는 듯, 무자비하게 그녀의 몸을 할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나는 무한한 권능을 지닌 대행자였다.
의지할 수 있는 언니, 충직한 기사 그리고 겁은 많지만, 강인한 인어가 있었다.
상처투성이였던 과거를 벗어나, 한때 세상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운명의 강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더라면, 루나는 더 평온한 미래를 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곁에 있던 이들도 하나둘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갑자기 멈췄다. 귓가에 거센 적조의 소리가 울렸고, 이화 적조가 정화된 땅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이제 오는 건가?
새로운... 0호 대행자.
루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산기슭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