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결지 곳곳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일하는 틈틈이 담소를 나누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운송 장비 옆에 서서 바닥에 놓인 물자를 확인하며 종이에 기록하고 있었다.
그쪽 수량 점검은 다 끝났나요?
왜 그러고 있어요? 먹고 싶으면 드세요.
유랑민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과일 몇 개를 만지작거리다가 입맛을 다시며 도로 내려놓았다.
아니요. 배급받을 때까지 기다릴게요.
우리가 찾아온 식량이잖아요. 이 정도 특권은 있어요. 그래서 하나쯤 빼고 보고해도 괜찮아요.
중년 남자는 몸을 숙여 유랑민의 팔을 잡고는 과일을 다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잖아요. 이렇게 주둔지도 생겼고, 예전처럼 정처 없이 떠돌 필요도 없고...
자,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먹어요. 곧 겨울도 끝나가요.
그래도 전...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저 사람 말이 맞아. 너무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차가운 목소리에 놀란 둘은 벌떡 일어나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셋이 다가와 있었다.
바네사 님!
바... 바네사 님!
차 좀 빌려 갈 테니까 후방 지원 관리자한테 얘기해.
바네사가 이 말을 마치자, 셋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엔진이 울리자, 차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유랑민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차창에서 검은 그림자가 유랑민을 향해 날아왔다.
밥 잘 먹고 잘 자. 그리고 네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쓸데없이 딱딱하게 굴지 말고, 누구처럼 이것저것 걱정하지도 마.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생각하지도 마.
어? 네. 감사합니다. 바네사 님!
유랑민은 반사적으로 바네사가 던진 물건을 받아서 들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보이는 건 멀어져간 운송 장비와 흩날리는 먼지뿐이었다.
집결지 밖 완충 구역의 가장자리에서 원래대로라면 백 리 밖에 있어야 할 적조가 거세게 몰아치며 높고 낮은 산등성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대지와 숲이 흔들렸다. 균형을 잃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펴기도 전에 적조 쪽으로 떨어지려 했다.
가엾은 것...
보이지 않는 힘이 작은 새를 받쳐 올리더니 분홍 머리 여성의 손으로 보냈다.
변화가 너무 빨라서 너도 준비가 안 됐구나?
새의 날개에 생긴 상처를 어루만진 이스마엘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백발의 소녀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적조의 포효 속에서 모습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
흩날리는 눈송이가 허상처럼 소녀의 몸을 통과했고, 적조 속에 있는 카오스의 다리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이면, 이 정교한 인형이 회색과 진홍색이 뒤섞인 세상 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았다.
참 곤란하게 됐네.
돌아갈 기회를 얻었는데, 뜻밖의 일에 발목을 잡히다니... 음?
무언가 소리를 들은 듯 이스마엘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새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눈보라 속으로 날아갔다.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이스마엘이 허공을 향해 가냘픈 손가락을 뻗자, 책 한 권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며 천천히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책이 만들어낸 투영 속에는 지프차 한 대가 야외 초소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너희들이 이 이야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더해주길 바라.
목표 지점에 도착한 후, 오블리크는 둘을 데리고 감시탑의 당직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장비를 켜며 앞서 보고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적조 상황은 어때?
제가 떠날 때, 6호 표식이 잠겨버린 상태였고, 적조 파도가 5호 표식까지 약 1km 남아있었습니다.
당직실에 한 대밖에 없는 모니터가 천천히 켜졌다. 그건 온갖 잡다한 부품들을 긁어모아 만든 듯한 허술한 스크린으로, 격자 모양으로 분할된 감시 화면 중 대부분은 이미 작동을 멈춘 지 오래였다.
작동하는 화면에서는 섬뜩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회색빛 눈송이들이 죽음의 행렬처럼 끝없이 적조 속으로 녹아 들어가면서,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진홍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둘이 그 광경에 할 말을 잃은 사이, 오블리크가 급하게 말을 고쳤다.
지금은 4호 표식까지 1km 정도입니다.
이렇게 빨리?
확실치 않습니다. 물자가 부족해서 이 정도 간격으로 표식을 설치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게다가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여과 장치가 이합 생물에 대한 방어력을 거의 잃었습니다. 예전에는 피하기 바빴던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공격해 올 정도가 됐습니다.
...
그나마 다행인 건 3호 표식에 설치하려던 여과탑 코어는 회수했습니다.
쳇...
좁은 당직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네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결단을 내렸다.
오블리크, 너는 [player name]을(를) 데리고 집결지로 돌아가. 로사한테 여기 상황 알리고 이주 준비를 해.
네!
그럼, 바네사 님은요?
적조가 이렇게 급격히 변이한 건 분명 외부 요인이 있을 거야. 지금 적조의 상태를 샘플링해야겠어.
원인을 모르면 어디로 도망가든 안전하지 못해.
바네사는 설명하면서 장비의 전원을 끄고 분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물자가 얼마 없으니, 이것도 가져가.
네!
오블리크는 모니터와 어지럽게 얽힌 전선들을 안고 당직실을 나갔다.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야. 현장에서는 내가 오블리크보다 강하니까 위험한 임무는 내가 맡는 게 맞아.
조금 전에 한 말 벌써 잊은 거야?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했잖아. 다른 문제는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말을 마치자, 눈앞의 구조체에게 의식 연결 신호를 보냈다.
바네사는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결국 이어폰을 톡톡 두드렸다.
곧이어 초소 아래에서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만족해? 지휘관.
20분 후, 4호 표식 근처.
쳇.
이합 생물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바네사는 계속 뒤로 물러났다. 크고 작은 상처에서 순환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작 이합 생물 몇 마리한테...
적조의 힘이 강해지니까 이 잡것들도 기어오르네.
바네사는 고통을 참으며 옆에서 달려드는 이합 생물의 공격을 칼로 막아냈다.
공기 중의 퍼니싱이 물방울이 맺힐 수 있을 만큼 짙어졌어. 이대로 가다가는...
의식 모형 편차율 31.7%, 43.9%...
조용히 해!
시각 모듈에서 이합 생물의 형체가 잔상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잔상들이 물밀듯이 바네사를 향해 밀려들었다.
쓸모없는 총알은 이합 생물의 외피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그들의 영양분으로 변했다.
끼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합 생물이 지휘관 쪽으로 돌진해 왔다.
물러서!
시각 모듈에 묻은 피를 닦아낸 바네사는 무기를 들어 뒤에서 다가오는 이합 생물의 발톱을 막아냈다.
침식 임계 경고
다가오는 괴물이 피에 젖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심층 연결 완료. 마인드 표식 출력을 최대치로 증폭합니다.
꺼져!
의식의 바다를 오염시키던 핏빛 안개가 서서히 흩어졌다. 그러자 바네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이합 생물을 연속으로 베어냈다.
바네사가 이합 생물 몇 마리를 제거하자, 남은 개체들도 움츠러들며 적조 속으로 물러났다.
하... 드디어 해치웠네.
심층 연결이 전투력을 높여준다는 걸 알면서 왜 이제...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리던 바네사의 동공이 순간 축소됐다.
바네사의 뒤에 있던 인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바위에 기대어 미끄러져 앉아 있었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몸속으로 익숙한 차가운 액체가 천천히 주입되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바네사가 주사기를 치웠다.
죽지 마. 그렇지 않으면 희석도 안 한 귀한 약품 그냥 낭비하게 되는 거라고.
가방에서 보급품을 꺼낸 바네사는 물병을 지휘관의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수분이 보충되자, 정신도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바네사는 인간의 허름한 전투복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장비로는 이제 퍼니싱을 막아낼 수 없어. 특히 이화 적조 앞에선 아무 소용 없다고.
퍼니싱 농도는 계속 올라가는데, 네 방호복은 지금의 이화 적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야. 희석한 혈청을 두 번이나 주입했는데도 침식 수치가 떨어지지 않았어.
그나마 비상용으로 순찰대에게 원액 혈청 몇 개 남겨둔 게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바네사는 콧방귀를 뀌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최악은 면했지만 낙관적이진 않아.
중심부 적조 샘플은 확보했는데, 우리의 활동 반경이 제한적이라 이화 적조에 오염된 숲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어.
주위를 둘러보니, 둘은 아직 적조에 오염된 숲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주변은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은 정신이 좀 들어? 어서 돌아가야 해. 네 방호복 상태로는 다음 습격이 오면 버티지 못할 거야.
천천히 바위에 의지해 일어선 지휘관은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둘은 넓게 퍼진 이화 적조를 피해 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지휘관이 로사의 요청대로 다른 두 구역에서 적조 샘플을 채취했다. 이때 반투명한 샘플러를 든 바네사는 평소답지 않게 말이 없었다.
여긴 조금 전의 중심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인데... 퍼니싱 농도가 떨어지지 않았어.
지휘관은 짧은 이 한마디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네사가 말하면서 조용히 몸을 돌렸고, 그녀가 든 반투명 샘플러는 섬뜩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앙의 붉은 액체가 주변의 흰색 완충 층을 계속해서 집어삼키며, 그것들을 자신의 양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적조가 무언가와 공명이라도 하는 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면의 적조가 갑자기 치솟았고, 바네사가 대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
적조가 양옆으로 천천히 갈라지더니, 창백한 인형이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떠나...
지휘관은 질문하면서 필사적으로 카오스의 모습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다리부터 시작해 서서히 적조 속으로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color=#ff4e4eff><b>떠나.</b></color>
극심한 잠식의 고통이 순식간에 지휘관의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마치 자신이 적조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color=#ff4e4eff><b>떠나.</b></color>
인형은 로봇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그러더니 서서히 또 다른 <phonetic=0호 대행자>"모습"</phonetic>이 그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적조의 힘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다는 듯 점점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화 적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거대한 진홍빛 파도가 흉악한 짐승이 피로 물든 아가리를 벌리듯 둘을 집어삼키려 달려들었다.
[player name]!!!
바네사가 순식간에 몸을 날려 지휘관을 덮쳤다. 둘은 강가를 따라 몇 미터나 굴러갔다.
뒤돌아보지 마!!
바네사는 포효하다시피 외쳤다.
지휘관은 재빨리 일어나 옆에 있던 샘플 장비를 집어 들어 적조와 자신 사이에 내밀었지만, 그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바네사가 적조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거대한 파도 앞에서 그녀의 모습은 벌새만큼이나 작아 보였다.
진홍빛 단두대가 순식간에 내려앉았고, 죽음의 기운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과다한 퍼니싱의 충격으로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지휘관은 거대한 적조 앞을 가로막고 선 희미한 붉은 날개를 볼 수 있었다.
그건 루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