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3 밤의 장막 너머의 빛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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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끝없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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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과 보초용 기관총 뒤로 컨테이너형 조립식 숙소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고, 시야가 닿는 곳마다 연이어 이어지는 산맥과 만년설이 펼쳐져 있었다.

철회 색 벽은 추위를 막아주긴 했지만, 광활한 산야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더 두꺼운 단열벽을 만들어 온기를 가두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발전기 연료마저 언젠가는 바닥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끝없는 겨울 속에서 얼음이 수원을 막아버렸다. 주둔지에서는 얼음을 깨어 녹이는 것이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급수대가 돌아왔어.

앞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무장한 급수대가 약속대로 주둔지로 복귀했다.

파이프를 여기에 연결해.

대장은 망토 속에 사냥총을 넣으며, 동료들에게 간결한 지시를 내렸다.

함께 온 청년이 펌프를 켜고 낡은 고무호스를 저수탱크에 연결했다.

평소처럼, 걸러내야 할 불순물들이 있어요.

중년 남자는 양손에 입김을 불어 넣고 뻣뻣해진 손가락 관절을 비비더니, 이번 상황을 기록한 문서를 펼쳐 들었다.

얼음 녹이는 장비가 고장 났는데, 나중에 수리 맡길 겁니다.

그리고 강 표면이 녹기 시작해서 걷기가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얼음 깨는 작업에 애를 좀 먹었습니다.

강 표면이 녹았다고?

바네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실외 온도는 전혀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

적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적조였다면 얼음에서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상 징후가 있었을 겁니다.

대장이 청년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청년은 배낭에서 금속으로 보강된 시험관을 꺼냈다.

현장에서 녹은 물의 온도를 측정하고 샘플도 채취했습니다.

이 따뜻한 물은 빙점보다 5.8도나 높았습니다.

열 손실 대체율을 고려한다면... 상류에 온천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장의 숨결이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입자가 되었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이내 사라졌다.

샘플은 평소대로 실험실로 보내면 돼.

바네사는 멍하니 강물이 시작되는 침엽수림으로 덮인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산맥은 강물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화 적조가 이곳의 수원을 침식하기 시작한다면, 당장은 저장된 얼음으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염된 물이 순환계에 들어간다면...

인간은 다시 이 지역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펌프 소리가 멎고, 얼음 녹이는 장비의 저장 통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자 구시대 곡물 창고를 닮은 높다란 기둥형 탱크에 소중한 정수가 가득 채워졌다.

눈앞의 저수탱크는 이 위태로운 주둔지를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청년이 호스를 끌고 운송 장비 쪽으로 돌아갔지만, 대장은 여전히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player name] 님, 바네사 님...

어느새 장갑을 벗은 중년 남자가 거친 손가락으로 사냥총 개머리판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 온천이 있을 만한 곳을 정말로 확인해 볼 수는 없을까요?

대장은 초조한 듯 고개를 내밀며, 바네사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진심을 읽어내려 했다.

정말 온천이 있다면, 얼음 녹이는 과정을 줄일 수 있고, 물을 길어 오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겁니다.

안 돼.

하지만 지난달에 존스 부인의 어린 딸이 물이 없어서...

서리가 내린 듯한 중년 남자의 눈빛은 비통함으로 가득했다.

안 돼.

바네사는 짜증 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그 산을 조사해 본 적 없어. 거기에 이화 적조나 다른 이화 생물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물을 위해 급수대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라고?

바네사님, 하지만...

대장은 어쩔 줄 몰라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전 그저...

그만하고, 가서 밥이나 먹어.

차갑게 말을 끊은 바네사는 대장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분석 결과, 강물이 녹은 것이 이화 적조의 침식 때문이 아니라 정말 위쪽 온천 때문이라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깨가 축 처진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운송 장비에 올랐다.

급수대가 휴식 구역으로 향하는 것을 본 바네사는 짜증 난다는 듯 몸을 돌려 저수탱크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조야. 조 윌리엄스.

잠시 후 바네사가 덧붙였다.

존스 부인의 작은딸, 리아타는... 그의 아이였어.

그래서라니?

이런 일이... 아직도 특별해 보여?

바네사는 냉소를 지으며, 이번 저수량을 기록부에 기재했다.

저수탱크 주위의 퍼니싱 농도를 확인한 바네사는 기록부를 챙겨 전 초소로 돌아갔다.

실내로 들어오자, 속눈썹과 코 아래에 맺혀 있던 얇은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 물방울로 변했다. 그러면서 뒷머리를 찌르는 듯한 불편함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곧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일시적일 뿐이야.

온천이 오염되지 않았다 해도 결국은 지하수일 뿐, 지질 구조로는 이화 적조의 침식을 막을 수 없다.

이화 적조는 언젠가 물순환을 반드시 오염시킬 거야. 암반층을 뚫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니까.

바네사는 비웃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일시적인 희망은 소용없어. 정화 방법을 찾는 게 최우선이야.

적조는 이 메마른 대지를 소리 없이 침식하며, 자연의 법칙을 지키고 있는 모든 순수한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인간은 이미 운명에 맞설 힘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맞서야 할 적은 침식체 하나, 이합 생물 한 마리 또는 추악한 인간형 변종 무리가 아니었다. 진정한 적은 이 설원과 어둠에 뒤덮인 하늘 그리고 영원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저 산맥이었다.

적은 얼어붙은 바위였고, 녹아내린 얼음 동굴이었다.

적은 이 행성의 표면을 전부 뒤덮은 이화 적조와 그 속에서 부화한 새로운 "생명체"들이었다.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마.

...

바네사의 눈빛은 "변명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중합 탑 코어만 얻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이 세계에 영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바네사는 곁눈질로 한번 보더니 화제를 바꿨다.

로사한테 연락 왔어? 이중합 탑 코어 쪽은 진행 상황이 어때?

<b><ud><color=#34aff8ff><link=17>이중합 코어 조각</link></color></ud></b>을 얻은 이후, 로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실험실로 들어가 진화하는 적조에 대항하기 위한 필터 실드의 방호 능력 개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 먼저 가볼게. 그리고 지금 12시야.

식사하는 거 잊어버리면, 네가 굶어 죽기 전에 내가 먼저 널 적조에 던져버릴 거야.

바네사는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먼저 전초소를 떠났다.

바네사가 떠나자마자, 조잡한 통신 장치에서 쉰 듯한 백색 소음이 들려왔다.

희미한 사람의 목소리가 잡음을 뚫고 나왔다. 끊어진 몇 마디 단어 뒤에는 안정적인 음성이 이어졌다.

물... 주둔... 호...

우주 도시에서 지휘관님을 호출합니다. 주둔지의 수원은 아직 안전한가요?

강 표면이 녹은 일을 로사에게 간단히 말해줬다.

온천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네요.

통신 장치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디코딩은 여전히 순조롭지 않아요.

외층 데이터 락을 푸는 건 문제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읽어내고 복원할 수 있는 정보가 이중합 탑 코어 내부의 1%도 안 돼요.

사용된 기술이 복잡해서 지금 우주 도시의 여건으로는... 천천히 하나씩 더듬어가면서 쓸 만한 것들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어요.

다음 단계에서는 필터 관련 내용을 해독할 수 있기를 바라요. 예전 필터 실드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하는데, 이화 적조가 계속 진화할까 봐 걱정돼요.

시간이...

로사는 말을 멈췄다.

시간. 그것은 지금 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연락드린 이유는 다른 일 때문인데요.

로사가 생각에서 깨어난 듯, 통신 너머로 노트를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록 하나를 작성했어요. 필터 실드 강화에 필요할 것 같은 재료들이에요.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은 필수품이에요. 나머지는 이중합 코어 조각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추측한 것인데, 필요할 수도 있는 물건들이에요.

물자 수집하실 때 보이면 챙겨주시겠어요?

감사해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전 연구실로 돌아가 볼게요.

이번 통화는 상대방이 요청한 거였지만, 확인해야 할 다른 정보도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려야겠네요. 그건 아시모프 님의 추측일 뿐이에요. 기술이 너무나 복잡해서 현재로서는 재료부터 환경까지 제작 요건을 맞추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요.

지휘관님, 의식 강화 장비로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요?

로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통신 장비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하죠.

이화 적조에서 어떤 괴물이 부화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노트를 넘기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마도 로사가 우주 도시에 남은 재료 목록을 확인하는 중인 듯했다.

우주 도시에 있는 재고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작에 성공할 거란 장담은 할 수 없고, 장치의 작동 신뢰도도 평가하기 어려워요.

그럼, 전 실험실로 돌아가 볼게요.

몸조심하세요. 지휘관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백색 소음이 다시 스피커를 채웠다. 그리고 작은 기계는 더 이상 전파를 잡지 못했다.

방 안은 습한 정적에 휩싸였다. 인간 지휘관은 한쪽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식당"이라고 불리지만, 컨테이너 10개를 이은 이 거대한 임시 건물은 주둔지의 회의실이자 창고로도 쓰였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이 바쁜 와중에 잠시 쉬어가는 오락실이 되기도 했다.

얼핏 척박해 보이는 툰드라 위에서도 자발적인 질서가 싹트고 있었고, 서로 도와주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오후가 되어, 각자 업무가 배정된 유랑민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지휘관이 식당에 들어서자, 긴 테이블과 의자 주변에는 저녁 근무를 기다리는 노동자들만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조가 무슨 물 탐사 결사대를 자청했다가 바네사 님한테 개망신당했대!

그게 다 존스 부인 때문이잖아. 누가 제대로 살고 싶지 않겠어.

그래. 리아타가... 주둔지에서 제일 어렸지.

겨우 18살이었는데.

...

유랑민의 말에 식탁 위는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됐다.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근데 바네사 님 진짜 독하더라. 두 마디로 조 씨를 싹 눌러버리던데...

유랑민은 작은 봉지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흥미를 보였다.

바네사 님 진짜 대단하시지. 나도 다음엔 그분들이랑 같이 물자 찾으러 가보고 싶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바네사 님이 널 데리고 가서 죽게 할 리가 없잖아. 그런 걱정은 그만하고, 레몬 빙수나 먹을래?

유랑민은 가십거리에 흥미를 잃었는지 화제를 음식으로 돌렸다.

그 낡은 책 보다가 돌았냐? 진짜 옛날 도련님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아이고, 도련님. 예약하신 자리가 여기죠? 곧 빙수 한 잔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과장된 행동을 하는 유랑민이 친구를 큰 소리로 놀렸다.

먹기 싫으면 말아! 잘 봐! 여기 얼음은 내가 식당 수도관 주위에서 직접 받아온 거라 깨끗하다고.

손바닥만 한 종이봉투를 꺼낸 유랑민은 물통에 연노란 가루를 조심스레 부었다.

그리고 뚜껑을 꽉 닫고 살살 흔들어서 옆 사람에게 건넸다.

이건 나만의 비법이라고...

까칠한 유랑민은 의심스러운 듯 물통을 받아 뚜껑을 열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찡그렸다.

퉤퉤퉤, 이게 무슨 맛이야. 그냥 배급받은 비타민C 알약 아니야!

이게 바로 고난 속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통조림 과일이라도 훔쳐 오던가...

유랑민은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내 끊기고 말았다.

미쳤어? 죽고 싶어? 물자 훔치다 걸리면 바네사 님께서 주둔지에서 널 쫓아낼 거야.

게다가 마지막 과일 통조림은 다 리아타한테 줬잖아. 비록 살리진 못했지만, 죽기 전에 달콤한 맛이라도 맛보게 해줬지.

아! 지휘관님!

지휘관은 지나가면서 그들의 대화를 다 들었다. 하지만 물자를 탐내지 말라고 경고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바네사의 철저한 규율이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몇천 제곱 규모의 이 정착지에서는 훔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배급 물자 외에 유랑민들이 가진 개인 물품이라곤 호신용 무기와 버리지 못하는 소중한 잡동사니뿐이었다.

전자는 질서를 만들었고, 후자는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상기시켜 주었다.

인사를 나누자, 유랑민들은 서둘러 일터로 향했다. 그리고 지휘관은 음식이 제공되는 구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휘관님! 오늘도 이 시간까지 바쁘셨나 보네요?

여러분들을 위해 따뜻한 국을 남겨뒀어요. 지금 데우는 중이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엠마가 여기서 기다리시면서 잠깐 도와주고 있었거든요.

지휘관님, 여기요.

엠마가 건조식품과 뜨거운 국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순찰 소대 교대 배정 때문에 왔어요.

아네바 소대 의료진이 상처를 입어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예요. 지금 이수 소대 쪽 의료진으로 교체...

그럼, 예비 의료진을 투입해야겠네요.

엠마가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는 사이, 지휘관은 거친 건조식품과 싱거운 뜨거운 국물 한 모금으로 속을 달랬다.

음... 그리고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는데요.

다음 순찰 소대 배정을 마친 엠마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가져온 강물 샘플의 분석이 방금 끝났어요.

엠마의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소식은 아닌 듯했다.

뚜렷한 적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물에서 이상 오염 현상이 나타났어요. 제 생각엔...

아니면 이화 적조가 저 침엽수림까지 이미 퍼진 걸 수도 있고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대묘비 집결지에서는 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은 같았다.

로사의 계산에 따르면, 퍼니싱은 여전히 추운 지역을 싫어했다.

우주 도시는 새로운 필터 실드 설치를 시작했고, 대묘비와 주위 집결지 주민들은 순차적으로 우주 도시로 이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원에 정말 문제가 생겼다면, 이전 일정을 앞당겨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바네사에게 알리고 오겠습니다.

둘이 대화하는 동안, 주위에서 듣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빈 테이블 쪽으로 모여들었다. 결국 식당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곳에 모였다.

또 이사를 해야 한다고요?

유랑민의 표정에는 이미 익숙해진 듯한 불안감이 배어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겨우 여기서 안정을 찾나 했는데...

뭘 꾸물거려. 어서 가서 짐이나 싸자.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라도 정리는 해야 할 거 아냐.

사람들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논의하다가 엠마가 진정시키자 서서히 흩어졌다.

어둠이 내려앉자, 모닥불 주위로 몸을 녹이려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아, 여기서는 오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전도 좋은 일이야. 못 들었어? 우주 도시에 더 좋은 필터 실드가 설치됐다잖아!

유랑민이 억지로 기운 내며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격려하려 했다.

됐다. 난 가서 짐이나 챙겨야겠다.

더 이상 몸을 녹일 기분이 아니었던 유랑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다가, 긴 옷을 걸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괜찮아. 급한 일이라도 있나?

아, 못 들으셨어요? 우리 또 이전해야 한대요.

진짜... 언제쯤이나 이놈의 이전이 끝날지... 이전, 이전, 또 이전...

아니. 그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돌아왔다고?

후드를 눌러쓴 여성은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라 불리는 사람이 돌아오고 나서는 삶이 확실히 나아졌어요.

우주 도시에 필터 실드도 설치됐고, 주둔지도 많이 정돈됐어요. 하지만...

유랑민의 눈에서 뚜렷한 슬픔이 느껴졌다.

어쨌든, 그분도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에요.

유랑민은 "한"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힘주어 말했다.

단 한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들 뭘 할 수 있겠어요?

...

아, 짐 싸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당신도 어서 짐 챙기는 게 좋을 거예요.

갑자기 습격이라도 당하면, 아무것도 못 챙기고 가야 할지도 몰라요. 저번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열쇠를 그렇게 잃어버렸어요.

그 열쇠는 우리 집 대문 열쇠였어요.

하지만... "집"이라는 건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