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앞이야!
높게 쌓인 눈을 밟으며 나아가자, 하얀 돔 형태의 거대한 건물이 숲 너머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정말 좋아할 거야!
헤헤,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당신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줄곧 침묵하고 있던 꼬마 저격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음... 사실 나나미도 어떤 목적으로 온 건지 설명하기 힘들어.
왠지 모르겠지만... 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화 같습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보는 거지! 나나미는 지금 온몸에 힘이 넘친다고!
그럴 수도 있어. 시간 라인들에서 그렇게 오래 여행했었는데, 이런 상황은 나나미도 처음이야.
그런 것 같아. 나나미는 "대식가"가 연산 과정에서 사용하는 연산 능력이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져.
파생되는 정보량이 줄어들고, 세계선이 수속되고 있어서 처리할 정보량이 줄어드는 걸지도 몰라.
그때, 새하얀 눈이 내려앉은 숲속에서, 작은 동물들이 덤불 사이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지휘관! 저거 봐! 다람쥐가 있어!
인간의 존재를 잊은 듯한 다람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곧이어 다람쥐는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이 이상한 조합을 신기한 듯 지켜보았다.
정말 귀엽다. 지휘관, 한번 만져볼래?
다람쥐는 지휘관의 손길에 깜짝 놀랐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손끝에 닿은 부드러운 털은 "연산" 속 세계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실제 같았다.
나나미의 기억 모듈에 접촉했을 때부터, 지휘관의 의식은 완전히 화서와 단절됐었다. 이곳은 정말 "연산"된 세계인 걸까?
곧이어 지휘관의 의문을 눈치챈 나나미가 고개를 저었다.
나나미도 몰라.
나나미가 연산을 시작했을 때는 그저 지휘관과 인간을 도울 방법이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시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다음부터는 나나미도 잘 모르겠어.
이론상으로 여기는 나나미가 시뮬레이션한 공간이어야 하는데...
나나미가 시뮬레이션한 공간 말고도 다른 곳이 있어.
이건 미래라는 선물이야.
안녕! 그냥 나나미라고 불러.
여기는 어디지?
Delorean-탐지호, 별의 바다!
예전에 비앙카가 근원 추적 장치에서 발견했던 그 이중합 조각 기억나?
"열쇠", "초대장"을 활성화할 새로운 "열쇠"입니다.
이것도 선현님께서 남기신 메시지입니다.
왜 그래, 지휘관?
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나나미는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바라보더니, 문득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지휘관. 누가 듣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엔 나나미만 믿고 계속 따라와 봐!
거의 다 왔어! 봐!
잠시만요. 저게 침식체가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
아니야! 저들도 나나미의 친구들이라고!
나나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눈꽃!
안녕하세요! 사랑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라? 손님,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나는 천하무적 유아독존 전지전능한 나나미님이니까!
이름이 엄청나게 기네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손님을 모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그냥 나나미의 칭호인 거야!
옆에 계신 분은... 혹시 인간이십니까?
둔해 보이던 기계체가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아, 안녕하세요! 정말 인간이시네요!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여기는 사랑의 집, 인간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따뜻한 공동체입니다! 당신은 이곳에 입주하시는 첫 번째 인간이십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인간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밖은 너무 추우니, 우선 저희가 꾸며놓은 공동체로 들어오시죠.
눈꽃이 허둥지둥 움직이며, 지휘관 일행을 뒤쪽의 하얀 건물로 안내했다.
다음 순서는 사랑의 집 공동채의 환영식입니다.
곧이어 기계체들이 바깥보다는 조금 따뜻한 실내에서 한 줄로 선 후, 어설픈 "환영" 동작을 선보였다.
짜잔, 사랑의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 엄청 멋져!
지휘관은 나나미의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면서, 주변 환경을 살펴보았다.
이게 바로 나나미가 겪었던 "과거"인 걸까?
건물 안의 로비는 전시장처럼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자리 잡은 거대한 기계로부터 따스한 열기가 퍼져 나왔다.
뒤편의 벽에는 다채로운 색채의 그라피티로 "사랑의 집"이라는 글귀가 어설프게 적혀있었다.
아, 저 알록달록한 글자 말입니까?
저도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전에 찾아오셨던 손님께서는 기계체의 "진심"을 인간들이 더 깊이 이해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손님께서는 인간이 반드시 이곳에 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음,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상하네요, 데이터 모듈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기억 안 나면, 너무 신경 쓰지 마. 너희들 아직 케이크가 남지 않았어?
맞습니다! 사랑의 집 특제 케이크를 한입 더 드셔보십쇼.
공동체의 리더가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는 사이, 나나미는 마치 자신의 자리인 양 로비의 소파에 앉았다.
헤헤.
나나미는 대답 대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라도 그들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내"가 여기 없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시간에...
단말기를 꺼낸 나나미가 뭔가를 계산하였다.
어머, 큰일이야. 이제 곧 항공 연구 실험실에 도착할 거야.
큰일이야 큰일!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회색 머리 소녀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지휘관의 손을 낚아채고는 로비를 뛰쳐나갔다.
손님, 아직 특제 케이크를 맛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거야! 안녕, 눈꽃! 안녕, 꼬마 저격수!
그렇게 나나미와 지휘관은 어리둥절해하는 기계체들을 뒤로한 채, 하얀 설원을 달렸다.
어느새 거센 눈보라가 걷히면서, 나나미와 지휘관이 뛰어가고 있는 길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지휘관, 조심해!
지휘관이 눈에 가려진 돌부리에 걸려 눈밭에 세게 넘어졌다.
어지럼증이 가시고 눈가에 묻은 눈을 털어내자,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정말이네!
그때,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 지휘관이 고개를 돌리자, 나나미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서 보니 나나미의 기체에는 상처가 많이 늘어났었다.
응? 그건 신경 쓰지 마, 다른 세계선에서 생긴 상처일 뿐이야.
의식에만 영향을 미치고, 나나미의 최강 기체에는 영향 없어!
괜찮아, 나나미는 하나도 안 아파!
아무 문제 없어!
나나미는 눈밭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나나미 혼자 외롭게 여행하지 않아서 너무 행복해!
계속 지휘관이랑 이렇게 여행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응응! 나나미도 알아. 이런 공간에 오래 머물면, 지휘관의 의식에 영향을 줘서 바보가 될 수도 있지.
이런 전제 조건이 있으면, 아무리 즐겁다 해도 포기해야지.
……
리브·백야의 기체 실험은 실패하지만, 인간은 계속 강행하게 돼. 결국에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해서, 지구 할머니가 화가 날 거고.
그러다가 인간이 "쇠퇴"라고 부르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그다음에는 극한의 추위가 찾아와.
이는 단순한 연산을 넘어서서, 본 네거트가 말했었던 이중합 탑의 한 "층"과 더 유사했다.
그때 지휘관이 제때 리브를 깨우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건 연산으로 만들어진 세계일 뿐이야!
인간의 미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 지휘관과 나나미의 미래도 멈추지는 않을 거고.
나나미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나미랑 같이 계속 앞으로 가자! 지휘관!
나나미는 앞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아!
나나미와 지휘관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모든 게 끝나고, 모든 슬픈 일이 사라지는 그날, 나나미는 꼭 지구에서 지휘관을 붙잡을 거야!
그때가 되면, 지휘관은 다시 한번 나나미랑 여행을 떠나야 해!
겨울은 언젠가 끝나고, 그에 이어 봄이 올 것이다.
세계 또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휘관은 나나미를 따라 전진하다가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때, 눈앞의 건물 옆에서 과거의 나나미가 홀로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수고 많았어.
나나미는 과거의 자신에게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나랑 지휘관에게 맡겨줘.
그 순간, 흘러가던 세계선이 잘리면서, 새로운 공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점차 하나로 모여들었다.
막이 열리고, 모든 광경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하나둘 사라져갔다.
그 광경 속에서, 나나미는 지휘관의 의식의 바다를 앵커 포인트로 삼아, 지휘관과 함께 아른거리는 공간을 날아다녔다.
IF——
억제되지 않은 이합 숲이 범람하여, 지구 전체를 집어삼킨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 전원이 구조 임무 중 적조 속에서 사라진다.
그 세계의 나나미는 지휘관을 구하지 못하고, 적조가 자신이 올라간 바위를 거의 집어삼킬 때까지 오랫동안 홀로 서 있는다.
결국 그녀는 기계 교회와 함께 지구를 떠난다.
IF——
공중 정원이 데이터 벽을 뚫은 후, 정체불명의 강력한 공격을 받는다.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공중 정원은 지구로 추락한다.
나나미는 콜레도르가 무언가와 하나가 되어, 지표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인간의 생존 영역은 점점 줄어들면서, 결국 퍼니싱에 모두 집어삼켜진다.
IF——
지휘관이 이중합 탑에 들어간 후, 공중 정원이 멀리 떠난다.
긴 시간이 지난 후, 기계 교회의 우주 함선은 우주에서 그 익숙한 거대 구조물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기계 교회 측에서 온갖 신호를 보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나나미가 공중 정원에 들어갈 때는 이미 유령선이 되어 있었고, 거대한 공중 정원 전체가 텅 비어 있다.
단순히 본 적이 있는 광경들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결말들이지.
회색 머리 소녀는 장막 뒤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지휘관. 나나미가 같이 있잖아.
그리고...
세계의 진실은 이게 다가 아니야.
우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해.
이렇게 해야만, ■■■■■■■■■■■■■■■■■■■■.
신호 파장이 먼 우주에 퍼졌다.
IF——
이중합 탑의 붉은빛이 온 세계를 뒤덮는다.
나나미는 기계체들을 이끌고 서둘러 우주에 오르지만, 그들의 비행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IF——
적색 바다가 지구 전체를 집어삼키고, 참전했던 이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지상에는 발 디딜 곳이 사라져, 나나미는 결국 태양계를 떠난다.
IF——
IF——
262537412640768743개의 세계는 정수에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저편이었다.
나나미가 겪었던 세계는 맞아.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야.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 지휘관.
나나미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거야.
쉿...
회색 머리 소녀가 무대 위를 가리켰다.
다행히 아직은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나나미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고, 그녀가 손가락을 내리자, "무대" 위의 흑백 스크린이 한 컷씩 멈춰 섰다.
이는 장례식인 것 같았으며, 많은 이들이 모여 누군가의 희생을 애도하였다.
멀리서는 나나미가 검은 우산을 든 채 군중 밖에 서 있었고,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지구에 큰 공헌을 세운 인간 한 명을 추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위대한 지휘관은 수많은 불가능을 승리로 이뤄냈고, 인간과 공중 정원의 이름을 빛냈습니다.
이 지휘관을 위해 묵념하겠습니다.
공중 정원의 위대한 전사,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을 위하여.
그때도, 나나미는 한발 늦었어.
하지만 이번에 나나미는 절대 늦지 않을 거야. 지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