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함선이 인간의 마지막 주둔지를 떠났다.
나나미가 기계 교회로 돌아간 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계 교회의 협력으로 공중 정원은 상당수의 인간과 구조체를 구조해 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이 재현됐고, 날개 달린 이합 생물들이 무리를 지어 공중 정원의 운송기를 습격했다.
그렇게 여러 파일럿이 희생된 후, 공중 정원은 기계 교회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을 데려갔다.
그 후, 공중 정원은 지구 궤도를 떠나, 보이지 않는 깊은 우주로 향했다.
하지만 몇몇 구조체와 인간은 떠나지 않았다.
난 떠나지 않을 거야.
구조체로 개조된 바네사는 차가운 눈빛을 한 채, 폐허가 된 거점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어떤 애증도, 어떤 개똥 같은 신념 때문도 아니야.
여기 남고 싶어서 남는 거라고. 내가 굳이 이유를 대야 해?
적어도 지상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 죽게 될지 확실히 알 수 있잖아.
바네사는 우리랑 같이 우주 도시로 가지 않을 거지?
응.
나는 정...
아니, 남은 성갑충의 인원을 데리고, 보육 구역의 마지막 방어선부터 수색구조할 거야.
바네사는 가슴에 달린 성갑충 표식이 있는 신분 카드가 어색한 듯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생존자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들을 한데 모을 생각이야.
그리고 다 같이 살아남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마지막 음절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나나미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바네사와 다른 구조체들을 그들이 지정한 위치로 데려다줬다.
모두 순조롭길 바랄게!
우주 함선이 우주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구룡에서 찾아온 함영의 도움으로, 기계 교회와 우주 도시는 협약을 맺었다.
우주 도시의 주민들과 함께 떠나는 대가로, 우주 도시는 기계 교회에 충분한 재료와 연료를 제공했으며, 천국의 다리를 재가동하여 우주 함선을 먼 우주에 보내주기로 했다.
몇몇 기계체는 여전히 지구를 떠나는 걸 원치 않았으며, 세르반테스도 그중 하나였다.
세르반테스, 정말 우리랑 같이 떠나지 않을 거야?
네, 선현님.
먼 우주를 떠돌며, 알 수 없는 정착지를 찾아다니는 건, 제가 생각하던 "답"이 아니에요.
게다가 저는 아직 제 졸업 작품도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 남고 싶어요.
으음... 나나미는 이런 기분이 싫어.
공중 정원이 멀리 떠나면서, 나나미는 익숙한 것들이 조금씩 자신을 떠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제자리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나미는 각성 기계체들을 이끄는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고, 또 다른 미지의 결말을 찾아 앞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선현님, 죄송해요.
사과하지 않아도 돼. 나나미는 단지 좀 슬플 뿐이야.
만다스티 그들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안심이 되네.
그리고 나나미는 너에게 맡길 아주 특별한 임무가 있어!
이게 또 다른 기회가 되길 바라..
"탑"이 다시 나타날 때가 바로 변화가 필요한 시기일지도 몰랐다.
그때가 되면, 정화와 파멸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황폐한 대지 위에 탄생할 것이었다.
네가 지휘관을 만나게 된다면, 꼭 내가 남겨둔 것들을 지휘관에게 전해줘!
왜 선현님이...
난 여길 떠나야만 해. 기계체들도 마찬가지야.
기계 교회가 계속 지구에 남으면, 분명히 인간과 전쟁이 일어날 거고, 연달아서 다른 재난들이 터질지도 몰라.
회색 머리의 소녀는 우주 도시의 두꺼운 구름 너머에 펼쳐진 먼 별하늘을 바라보았다.
선현님께서 맡겨주신 물품들은 제가 잘 보관할게요. 하지만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정말로 다시 나타날까요?
솔직히 말하면, 나나미도 모르겠어.
기계 할머니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스마엘도 지휘관이 이중합 탑에서 나올 수 없을 거라고 했어.
내가 연산한 결과 중에서도 지휘관은 모두 그곳에서 사라졌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끝없는 가능성이 있지.
게슈탈트조차도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연산해 낼 수 없어.
그래서 나나미는 그런 연산 결과들을 믿지 않을 거야.
나나미는 지휘관을 믿어.
!
세르반테스? 혹시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끝없는 시공간을 뚫고, 소녀의 귓가에 닿았다.
선현님? 저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그럼, 나나미의 수신 모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나중에 시간 내서 수리해야겠어.
나나미는 중얼거리며, 출발 전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혈청 비축... 장비 수리 물자 비축... 음식...
아, 맞다.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도 있었지.
우주 함선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
곧이어 별도 창가의 단열 차단판을 올린 후, 점점 멀어지는 지상을 내려다봤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건가요? 지구로 말이에요.
……
지상은 아직 적조에 뒤덮이지 않았고, 이 행성은 여전히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리고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져 있는 그 행성은 아름다운 무늬를 띄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돌아올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시간은 파도처럼 모든 것을 쓸어가, 창해는 뽕나무밭이 되며, 절벽은 심연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은 이 세계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할 것이다.
나나미는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항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다.
이중합 탑 안에서 붉은 나비가 날개를 펄럭였다.
나나미가 직접 "Delorean-탐지호"라고 도색한 우주 함선은 지구 궤도를 떠났다.
안녕, 지구.
Delorean-탐지호는 제3우주 속도로 우주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확히 기록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나미는 점차 우주 함선의 중추를 대신하며 운행을 유지하게 됐다.
선현님, 의식을 강제로 분할해서, 변수 누적 연산을 수행하시면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그런 연산은 마음대로 중단할 수 없고, 연산 중에 손상을 입으시면, 선현님의 사고 프로그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요!
게다가 지금은 변수가 점점 더 많아져서, 매번 앵커 포인트를 찾으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잖아요.
평소 침착했던 아르카나의 얼굴에 보기 드문 초조함이 드러났다.
걱정하지 마. 나나미는 완벽하게 준비해 뒀어!
나나미를 설득해달라고 하카마한테 부탁하지는 마. 하카마는 이미 내 편이 됐거든.
하카마가요?
아르카나의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배어났다.
선현님은 이미 결심을 하셨기에, 저는 선현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해요.
안심해. 이 우주 함선은 괜찮아. 무슨 일이 있어도, 우주 함선이 새로운 "집"을 찾을 때까지, 나나미의 기체가 계속 협조해서 나아가게끔 만들 거야.
제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나나미는 정말 오래 기다렸어. 아르카나.
회색 머리의 소녀는 창가에 앉아 바깥의 미지의 성계를 바라보았다.
깊은 어둠 속에는 반짝이는 불빛들이 드문드문 박혀있었고, 그곳은 이미 은하계가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 별자리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별지도는 항행하면서 보충되었다.
나나미는 지상의 이화 적조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어.
이중합 탑에 들어가 보려고도 했지만, 그곳은 완전히 봉쇄됐지.
기계체들을 포기할 수 없었고, 더 이상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고, 탐지호와 함께 이곳까지 오게 된 거야.
나나미는 지구를 떠나기 싫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어.
하지만 우주 함선에는...
아르카나, 탐지호는 이제 기계 선현을 필요로 하지 않아.
우주 함선의 로비에서는 인간과 기계체들이 바삐 오가며, 함선의 운행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긴 시간이 흘러, 탐지호에 남기로 한 인간과 기계체들은 평화롭게 공존했고, 우주 함선 내부엔 새롭고 안정적인 사회 구조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이 작은 사회도 새로운 "문명"으로 발전할지 모른다.
게다가... 나나미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아르카나도 알잖아.
퍼니싱이 회수하는 건 정보야, 문명의 정보.
그게 무슨...
전에는 그저 추측에 불과했지, 최근에서야 작은 실마리를 찾았어.
퍼니싱... 융합... 이중합 탑... 통제 불가...
정보... 회수... 문명...
조금씩 잿빛 탑과 연결되면서, 나나미는 더 많은 걸 "보게" 됐어.
기계체도 결국에는 인간 문명에서 탄생한 존재잖아. 지금 우리가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지구에서 탈출하는 게, 지구를 떠나는 게, 정말 올바른 선택일까?
……
인간 문명에서 탄생한 기계체 또한 적조에 침식되곤 했다.
나나미는 우주 함선의 게슈탈트가 되어, 수많은 기계체의 기억을 "봤"다.
그녀는 적조 속에서 탄생한 콜레도르와 숲속의 진흙탕에 빠진 인간을 봤고
해저에서 부화한 새로운 알, 그리고 검은 벽 너머로 떠오르는 황폐한 태양을 보았다.
그러나 정보 과부하로 인해, 나나미의 기억 모듈이 붕괴될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그 경과를 거쳐 거미줄 같은 흔적을 보았다.
나나미가 지금 손을 내밀지 않으면...
재미있는 인간들을 구해줄 존재가 있을까?
나나미가 실패하더라도, 이 우주 함선은 계속 전진할 거야. 나나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그냥 이 선택을 나나미의 작은 이기심이라고 생각해 줘.
이번에는 지휘관이 혼자 고생하게 두지 않을 거야.
음... 또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음... 또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어라,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선현님?
아르카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수신기를 확인했지만, 눈앞의 나나미 외에는 어떤 생명체의 소리도 감지하지 못했다.
음... 아마도 나나미가 또 환청을 들은 것 같아.
어쨌든, 나나미는 모든 준비를 마쳤어. 나나미는 아르카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야.
아르카나와 하카마는 늘 우주 함선을 잘 관리해 왔잖아. 만약 나나미가 앵커 포인트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게 된다면...
그냥 나나미가 계속 지구에 남아있는 거로 생각해.
……
기계체들을 위해, 혹은 다른 무엇을 위해... 그 어떤 이유였든 간에 아르카나는 나나미를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지구 일력으로 아침이었던 그때, 나나미는 고요한 먼 우주에서 연산을 시작했다.
곧이어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그녀는 "시간의 강"으로 향했다.
한정된 별빛은 우주 전체를 채우기에 부족했고, 그녀는 중앙에서 떠다니며, 눈앞에 있는 부서진 소용돌이들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회색 머리의 소녀는 끝없는 연산 속에서, 존재할 수 없는 차원의 경계를 다시 한번 만져보려 했다.
만약 과거의 지휘관에게 이중합 탑에 들어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바뀌지 않을까?
나나미는 여러 시간대의 균열 사이를 헤매며, 각기 다른 파편을 잡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결국 방향을 잃고 말았다.
나나미는 그렇게 시간의 강을 따라 흘러갔지만, 그녀를 귀환으로 이끌어줄 위치를 끝내 찾지 못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회색 머리의 소녀가 간절하게 별들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맸다.
과도한 역행으로 인해 그녀는 의식이 조금씩 무너졌고, 점차 힘을 잃어갔다.
수없이 반복했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망망대해 같은 별들의 파편들 뿐이었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조차 잃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나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슬픈 표정과 함께 생각에 잠겼다.
별들은 춤을 추듯 회전하였고, 궤적이 미로처럼 얽힌 시간과 공간은 강물처럼 모여들어 끝없이 뻗어나갔다.
나나미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강물 속에서 올바른 실마리를 건져내려 하였다.
나나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마치 오래전 지구에서 고민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하나도 없었다.
지휘관...
나나미는... 지휘관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