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 내 재고들이!!!
기계 교회의 로비에서 네빌이 머리를 감싸 쥐고 통곡하는 동안, 세르반테스는 옆에서 손실된 물자를 하나씩 확인하였다.
연료 손실... 엔진 추진제 손실...
으아아아아악!!!
단열재 손실... 섬유 구조 손실... 복합 재료 손실...
으으... 으아아아악!
내 재고! 재료! 물자!! 게다가 내 우주 함선까지!!
네빌이 괴로워하며 자기 머리를 감싸안았다.
어라. 왜 그래?
날렵하게 위층에서 뛰어내린 나나미가 로비의 처참한 광경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전 적조와 결판을 내러 갈 거예요!!!
결판을 내러 가요!!
이화 적조가 외곽의 물자 창고들을 잠식했습니다.
히힝... 흑흑흑흑흑...
분리했던 머리를 다시 목에 돌려 끼운 네빌은 기진맥진이 되었다.
집계가 끝났습니다.
적조에 부식된 창고에는 주로 네빌이 우주 함선을 위해 모아둔 각종 소모성 물자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세르반테스가 손실된 물자의 목록을 중앙에 투영했다.
연료 때문에 그런 거라면, 다른 곳에서 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소모성 물자만 손실된 게 아니에요. 사실... 가장 심각한 건 원자로예요.
?
왜 원자로를 외곽의 폐허에 숨겨둔 거죠?
실험하다가 사고 날까 봐 거기 안치했던 거라고! 원자로를 집 안에 둘 수는 없잖아!
그 괴물이 하필 그쪽으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으음, 원자로라면 좀 곤란하네. 그건 예전에 나나미가 네빌이랑 버려진 연구소에서 떼어온 거였잖아.
그럼 지금 연료는 얼마 남은 거야?
남은 건...
네빌이 세르반테스가 작성한 목록을 훑어보았다.
하아... 남은 연료로는 지구 한 바퀴도 돌지 못할 거예요. 더 먼 곳은 말할 필요도 없죠.
이 거대한 우주 함선을 우주로 보내기엔 연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음...
그렇다면, 원래 계획대로 북극 항로 연합에 먼저 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구룡과 북극 항로 연합이 인접한 위치에... 우주 도시가 있습니다.
그렇지! 우주 도시가 있었지! 거기엔 자기 가속 궤도가 있잖아!
네, 선현님. 우주 도시에는 냉핵융합 원자로를 사용하여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기 가속 궤도 "천국의 다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우주 도시는 한때 새벽-III호 비행선 발사 임무를 맡았고, 공중 정원의 전신인 에덴 Ⅰ형의 연구 개발 및 기술 검증도 그곳에서 이루어졌죠.
그쪽의 자원을 제대로 이용한다면, 우주 함선을 하늘로 보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예전에 우주 도시의 성주 율리아가 슐츠를 몰아낼 때, 함영이 도움을 보탰습니다. 기계 교회와 우주 도시는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오! 냉핵융합 원자로! 그거 엄청 좋은 거잖아!
그 말에 네빌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우주 도시로 향하자는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진행 중이던 개조 작업은 슬슬 마무리되었고, 기본 형태를 갖춘 우주 함선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나섰다.
엔진 소리가 요동치면서, 황폐한 땅의 어느 텅 빈 공간에 오래 머물렀던 우주 함선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되었다.
광학 위장 시스템과 구조 역장이 가동됐고, 엔진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순항 모드에 돌입했다
거대한 우주 함선은 저공비행하며, 인간 세계의 폐허 위를 스쳐 지나갔다.
우주 함선의 창에 있는 차광 단열판이 하나둘 내려가는 가운데, 회색 머리의 소녀는 창가에 앉아, 단열판 틈새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카운트다운이 나나미 곁에서 깜빡이던 가운데, 그녀는 "운명"의 중력이 느껴졌다.
나나미는 그 "미래"가 무엇을 불러일으킬지 명백히 알고 있었다.
기계체들은 지상에 남아, 인간 문명에 더욱 심각한 재난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에서, 영혼을 가진 기계체 소녀는 인간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을 우주로 유배를 보내게 된다.
지금쯤이면 깨달았겠지, 나나미...
난 미래의 너야.
자신의 자유를 바쳐, 영원히 항행하는 비행선의 연산 능력 중추 AI가 된 나나미는 각성 기계체들을 이끌고, 끝없는 우주로 향하는 길을 선택했다.
……
그렇게 모든 것이 "운명"이 정해놓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은 이중합 탑에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고, 적조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유일한 변화라곤 적조 속에 나타난 신비한 소녀뿐이었지만, 그녀 역시 지휘관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호한 말만 남겼다.
곧이어 영원한 겨울이 찾아올 거였다. 만약 기계체들이 계속 지상에 머물러있게 된다면...
기억 속 홍수처럼 몰아치는 강철들이 또다시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를 집어삼킬 것이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걸까?
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정말 이렇게 "운명"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 저항할 수 없는 종말에 굴복해야 하는 걸까?
정말 이대로 지구와 인간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기계체들과 함께 우주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그러나 지금의 나나미는 만신창이가 된 이 지구에 뭘 할 수는 있는 걸까?
회색 머리의 소녀는 멍하니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선현님?
와! 하카마! 걸어 다닐 때, 소리가 아예 안 나네!
선현님께서 너무 집중하고 계셨던 겁니다.
나나미는 멍때린 게 아니야!
기계체와 인간은 분명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 아르카나가 말한 것처럼 되진 않을 거야.
볼을 부풀린 나나미가 의욕 없는 모습을 보였다.
또 아르카나와 다투신 겁니까?
아르카나도 기계체들을 위해 그런 거지만, 나나미는 그 말이 싫어.
그녀는 항상 "인간은 기계체의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은 언젠가 기계체를 공격할 거다" 같은 말만 하고... 으음, 나나미는 듣고 싶지 않아.
저는... 적조의 근황을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진 하카마가 화제를 돌렸다.
우주 함선이 계속 북쪽으로 항행하는 동안, 지금까지 우리가 본 대부분의 보육 구역은 이화 적조에 삼켜졌습니다.
그럼 인간들은...
도중에 이주 중인 인간들을 몇몇 만났는데, 모두 북극 항로 연합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별이 위장하여 그들에게 접근한 후, 몇 가지 소식을 알아 왔습니다.
공중 정원이 망각자와 아딜레 쪽의 인간들과 연합해서, 지속적으로 지상의 생존자들을 수색 구조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화 적조의 퍼니싱 농도가 계속 높아지는 바람에, 그들은 적조가 침식한 구역이나 원래의 보육 구역엔 진입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분석 샘플을 얻기 위해, 제가 스프너와 함께 적조에 침식을 당한 폐허로 들어가봤더니...
하카마가 목소리를 낮추며, 나나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폐허에 갇혀있던 반각성 기계체 여럿과 인간들을 발견했고 모두 구출했습니다.
인간?! 인간이 이화 적조에 둘러싸인 폐허에서 살아남았다는 거야?
네, 참 믿기 힘든 사실이죠.
그들은 땅을 파서 임시 안전 구역을 만들었고, 소형 필터 하나와 일부 혈청을 이용해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겁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심각하게 침식된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살아있었고 정신 상태도 양호했습니다.
저와 스프너는... 아르카나 몰래, 그들을 우주 함선의 최하층에 임시로 안치했습니다.
그 인간들은 조금의 공격성도 띠지 않습니...
"쾅!"
하카마의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우주 함선 하층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고, 혼란스러운 발소리가 이어졌다.
!!!
붉은 눈을 한 침식체가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침식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저쪽은 기계체들의 임시 물자 수집 창고가 아니었어?!
큰일났어, 별아...
아야!
삐!!!
꼬마 기계체가 확성기의 소리를 최대로 키워, 침식체의 주의를 끌려 했다.
안 돼, 아야. 저쪽엔 인간들이 있잖아! 인간들을 해치면 안 된다고 선현님께서 당부하셨어...
소녀는 눈물을 닦고, 멀지 않은 중층을 향해 달려갔다.
저기요! 그쪽은 막다른 길이에요!
제길!
뭐 하는 거야!
기계체들이 우리를 받아줬잖아, 배은망덕할 순 없지!
기계체는 퍼니싱에 침식되면 살아남을 수 없어! 나한테는 아직 혈청이 하나 남아있으니까, 내가...
내가 갈게, 나도 할 수 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르날이 먼저 달려 나갔다.
조심하세요!
베르날이 순식간에 침식체를 향해 격발했다.
"쾅!"
하지만 그 낡은 총으로는 침식체에 피해를 입힐 수 없었고
그녀의 공격에 자극받은 침식체는 몸을 돌려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에 침식체가 있는 거지?!
나나미의 목소리보다 베르날의 앞에 더 먼저 나타난 건 나나미의 장검이었다.
나나미는 방패로 곁에 있는 소녀를 빈틈없이 보호하며, 날렵하게 검을 휘둘러 침식체를 몰아냈다.
네가 이러면 곤란하지! 어서 사라져!
우주 함선의 바닥에 위치했던 문이 열렸고, 침식체는 그길로 떨어져내려갔다.
휴, 아슬아슬했네. 나나미가 제때에 와서 다행이야.
……
인간 소녀는 기진맥진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은 고마웠어! 네가 없었다면 별은 침식됐을 거야!
후우... 별말씀을요.
저쪽에서 침식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바로 반응하기도 어렵더군요...
저쪽은...
광휘가 수집해온 물자를 두는 곳입니다.
광휘의 스캐너가 업데이트되지 않아서, 침식 정도가 낮은 기계체를 감지하지 못했나 봅니다.
이 침식체는 아마 그때를 틈타서 섞여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큰 피해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광휘군! 조심했어야지! 퍼니싱이 잿빛 탑을 침식할 수도 있었잖아.
나나미는 곧바로 기체를 잿빛 탑에 접속하였고, 내부를 꼼꼼히 점검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주 함선에도 더 크고 강력한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아.
흑... 괜, 괜찮으세요?
조금 전, 용감하게 침식체를 유인했던 별이 울먹이며 돌아와, 주저앉아있는 베르날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우주 함선이 파괴되면, 저희도 임시 거처를 잃게 될 테니까요.
거대한 우주 함선은 저공비행하며, 한때 인간들이 살았던 도시를 스쳐 지나갔다.
언제부터인가 기계체들은 인간을 적대시하지 않게 됐다.
심지어는 나나미에게 혼이 난 뒤로, 계속 인간을 쫓아내려 했던 광휘의 추종자조차 태도가 점차 누그러들었다.
아야는 바보야! 이번에도 별이 이겼어.
삐삐삐삐!
인간 때문이 아니라고! 별이가 잘해서 이긴 거야!
인간이라고 다 교활한 건 아니야...
삐삐삐삐삐삐!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뭐라고 해. 모든 인간이 다 착하다고 한 건 아니야. 잊지 않았다고.
그, 그래도 인간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별이 멀지 않은 곳에서 신중하게 작업하는 베르날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크흠... 거기, 인간 아가씨!
지난번에 그 무기는 어떻게 개조한 거죠?
조금만 조정했을 뿐인데도, 저와의 적합도가 4.29%나 증가했더군요...
하하, 그렇군요. 실은 당신이 습관적으로 왼쪽 기계 팔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잡는 방향만 살짝 조절했을 뿐이에요.
습관이라... 습관이 뭐지?
음, 간단히 말하자면,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로봇 팔을 더 자주 쓰는지 그런 거예요.
아무튼, 고마워요.
이것이 선현님께서 원하셨던 모습인가요?
맞아. 나나미가 말했잖아. 인간과 기계체는 분명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야.
전에 "봤던" 우주 함선에는 인간이 없었으니, 이것도 일종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 기록해 둬야겠어.
나나미가 고개를 숙이고, 단말기에 뭔가를 적었다.
매일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나미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야!
선현님은 왜 그토록 "변화"에 집착하시는 건가요?
"선현님은 결국 교회로 돌아와, 저희가 이 황폐한 땅을 떠나, 수많은 별의 끝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계체에게는 이런 결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래도 기계 문명이 인간 문명에서 탄생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아르카나.
회색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앳돼 보였지만,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퍼니싱이 기계체를 침식시킬 수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우리가 더 먼 곳으로 도망간다고 해도, 퍼니싱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난 그 모든 걸 봤어. 아르카나.
더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그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 아니야.
그렇다면, 왜 늘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께 희망을 두는 거죠?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이 특별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 평범한 인간일 뿐이잖아요.
지휘관은 달라, 아르카나.
지휘관은 수많은 인연에 얽혀있고, 이 시공간과 우주를 연결하고 있어. 뭐랄까... 어떻게 보면 앵커 포인트 또는 위치 발신기 같은 거야.
지휘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는 걸지도 몰라.
게다가...
나나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많은 의미가 담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휘관은 인간 중에서 가장 특별해. 그리고 나나미는 지휘관이 좋아!
그때, 나나미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자신의 선실로 달려갔다.
지구에서 추방된 소녀는 말없이 창가에 앉아 이 모든 것을 말해주며, 틈틈이 스크린 너머로 수억 광년이 떨어져 있는 푸른 행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나미 네게는 아직 내 운명과 다른 길을 택할 자유가 있어.
헤헤, 지휘관!
나나미가 이제 지휘관의 음성 사서함으로 영상 메시지를 보낼 수 있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저...
<phonetic=나나미>지휘관</phonetic>, 지금 뭐 해?
나나미가 오늘 특별히 점을 쳐봤는데! 이 메시지는 지휘관이 꼭 볼 수 있을 거라 했어!
앗, 시간이 다 된 것 같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
<phonetic=나나미>지휘관</phonetic>, <phonetic=나>나나미</phonetic>를 기다려줘!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나나미는 인간을 도울 방법을 찾고야 말겠어!
나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