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2 은하수를 향해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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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외로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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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의 구룡.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고,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구룡 사람들이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며, 재앙은 잿더미 속 검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후우...

밤하늘이 화려하게 빛나는 구룡성에서, 한 소녀가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포뢰님과 함께 순찰을 도는 것 같네요.

드문 일은 아니잖아요. 저도 순찰을 자주 나온다고요.

네네, 이렇게 우연히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는 거죠... 어라?

지실이 눈썹을 찌푸리며, 길가에 있는 고장 난 기계체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돌발 장애네요. 보고해야 할까요?

당연하죠!

포뢰가 기계체의 손상된 데이터를 능숙하게 점검하면서, 단말기로 그 내용을 업로드했다.

화서

57번째 손상된 데이터 보고를 수신했습니다.

……

화서가 출력한 손상된 데이터의 보고서를 살펴보던 곡이 눈썹을 찌푸렸다.

화서, 분석 결과는 나왔어?

화서

데이터 손실로 인해, 상세한 답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밤만 해도 벌써 57번째 데이터 보고야.

고장 원인은 찾을 수 있어?

화서

데이터 손실로 인해, 상세한 답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

곡이 보고서를 내려놓은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거리에는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구룡의 밤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

화서, 만세명의 상태는 어때?

화서

현재 만세명의 모든 섹터는 정상 실행 중입니다. 지상 방호층의 압력은 안정적이며, 퍼니싱 농도는 정상 수치보다 25.69% 높으나 아직 통제 가능한 범위입니다.

……

곡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면을 노려봤으며, 그곳의 지하 깊은 곳에는 만세명이 묻혀있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붉은 피가 화염 속으로 흩뿌려졌다.

빛의 벽조차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밀려온 진홍빛 파도를 막아내지 못하였고, 그렇게 적조는 끊임없이 구룡의 외곽을 집어삼켰다.

지실은 적조에 휘말린 한 인간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 인간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

포뢰

서쪽 3번째 블록에 지원이 필요해요! 생존자를 발견했어요!

통신을 받는 지실이 서둘러 얼굴을 닦은 후, 다음 구조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희생된 병사들과 구룡 주민들의 의식 업로드는 완료됐어?

화서

만세명의 의식 업로드 규정에 따라 희생된 병사들과 주민들의 의식이 모두 업로드됐으며, 동시에 다른 1025명의 업로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상자 수는 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만세명 메모리 구역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확보해.

네.

곡이 뒤를 돌아, 화서를 바라보았다.

지금이 바로 연산했던 그날이야?

붉은색 데이터로 뒤덮인 높은 벽을 바라보던 곡은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장의 원인... 상세한 결과를 분석할 수 없다는 그 데이터 보고인 거야?

화서

데이터 손실이 있으나, 지금까지 접수된 135건의 문제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고장 원인의 45.37%가 퍼니싱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스크린 위로 135건의 보고서가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하며, 복잡한 데이터들이 재구성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화서

데이터 손실로 인해, 상세한 답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여성 구조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세명 내부 순환 도로 아래의 방호층을 열고, 시민들을 피난소로 대피시켜.

퍼니싱이 변이를 일으켰다. 게다가 그 요인은 45.37%만이 퍼니싱과 관련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분석할 수 없었다. 이는 곧 변이의 근원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며칠 전에 곡이 화서를 통해 이런 상황을 계산했다 해도, 이런 끔찍한 결말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구룡의 모든 시민을 만세명 데이터 층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

……

그 나이 든 부희파 멤버는 조용히 예를 표한 뒤, 연기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어떤 외부의 힘으로 시간이 빨라진 것처럼, 적조의 변이 속도는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퍼니싱은 불과 몇 년 만에 평범한 인간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변이했고, 구룡에 남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극북을 향해 이주해야만 했다.

곡 님, 공중 정원에서 통신 요청이 왔어요.

연결해.

조금 지쳐 보이는 세리카가 통신 영상에 나타났다.

치렛말은 하지 않을게요. 공중 정원은 이제 지표면의 이합 재난 구역을 통제할 수 없게 돼서... 지구 궤도를 떠나기로 했어요.

허.

곡의 차가운 비웃음에 세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공중 정원의 엘리트 소대 대부분이 희생됐어요. 게다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남은 두 멤버가 몇 번이나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그 탑은 이미 완전히 봉쇄된 상태예요.

이제 퍼니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없어요.

그때, 수송기가 착륙하는 소음이 세리카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통신 너머에서는 몇몇 작업자들이 재빨리 착륙한 수송기로 들어가, 중상을 입은 구조체와 인간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공중 정원이 지구 궤도를 떠나야 한다면, 지구에 남은 인간과 구조체들에게는 공중 정원에 들어와 함께 떠날 권리가 보장돼요.

세리카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피난 인원 명단과 인계 구역을 보내주세요. 그럼, 공중 정원이 그곳에 수송기를 보내 대기시킬 거예요.

이번 작전의 코드네임은... <color=#ff4e4eff>"출항"</color>이예요.

공중 정원의 수송기 소대가 착륙했다. 그들은 수백 명의 구룡 사람과 구룡으로 피난 온 다른 보육 구역의 인간들을 탑승시켰고, 곧이어 하늘로 사라졌다.

수송기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곡은 천천히 몸을 돌려, 플랫폼 아래에 모여 있는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이 떠날 마지막 기회야.

에이, 이 늙은이가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젊은이들도 가기 싫어요!

하하, 구룡의 옛말에도 낙엽은 뿌리로 간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뿌리가 있는 이곳을 지킬 거예요.

그 공중 정원이라는 곳에 가서, 혹시나 "쿵"하고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저희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하늘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노인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요! 우리의 삶은 구룡과 함께 이 땅에 있습니다!

수년간의 유랑 생활 동안, 구룡은 만세명의 보호가 있었음에도 큰 손해를 입었다. 그렇게 한때 번영을 누리던 도시에는 이제 고작 수천 명의 주민들만이 남았다.

곡은 높은 단상에 서서, 아래에 있는 그녀의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곡 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포뢰는 남아있는 포뢰파의 대장으로서,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문명의 불씨는 공중 정원으로 보내 보존했고, 남은 이들은...

이것이 그들의 의지라면, 그 누구도 고향 땅에서 몰아낼 수 없어.

이곳의 결말을 알면서도, 이 자리에 머무르려 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그들이 승리의 여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들겠어.

구룡의 명예는 만세명이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구룡의 의지는 이곳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이었다.

화서.

화서

……

구룡에 남은 주민들을 만세명 데이터층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

만세명이 유지보수 없이도 계속 작동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곡은 평소의 도도한 모습과는 달리, 미소를 지어 포뢰를 안심시키고는 단상 아래에 모인 주민들을 내려다보았다.

내 생명이 다하기 전까지는 계속 작동하게 할 거야.

그 말은 끝내 그녀의 마음속에만 남겨두었다.

……

셀 수 없는 나날이 흐른 지금, 곡은 기괴한 형태의 퍼니싱 생물과 또 한 번 전투를 치른 후, 화려한 기둥에 기대어 끝없이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화서, 만세명의 상태는 어때?

화서

현재 만세명의 모든 섹터는 정상 실행 중입니다. 지상 방호층의 압력은 안정적이며, 퍼니싱 농도는 정상 수치보다 38.69% 높으나 아직 통제 가능한 범위입니다.

……

뜨거운 숨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하얗게 얼어붙으며, 과열된 그녀의 체온을 식혀주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던 포뢰를 강제로 만세명에 업로드한 이후, 곡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화서

만세명이 완전 봉쇄된 이후, <color=#ff4e4eff>1825일</color>이 지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시간은 오래된 서재의 책들처럼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갔고, 언제나 깨어있던 곡조차 그 숨겨진 책의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외롭지 않아?

적조 속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외로울 게 뭐가 있지?

장검을 치켜든 곡이 오염물에서 울리는 속삭임에 답했다.

곡은 지쳐있는 상태였음에도, 그녀의 눈빛은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곡의 귓가에는 등 뒤에서 만세명의 문이 닫히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제왕은 재앙과 함께 성문 밖에 남았으며, 벽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번영과 죽음이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기 있어.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음...

괜찮습니다. 곡 님이 더 성숙해지시면 이해하게 되실 것입니다.

내 뒤에는 구룡이 있어. 내가 지켜야 할 땅과 사람들이지.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눈앞의 진홍빛 파도를 응시했다.

그들은 진작에 너를 버렸어...

그 순간, 적조가 일그러진 실루엣들을 만들었다.

……

반면에 곡의 입가에는 차가운 조소가 번졌고, 곧이어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붉은 실루엣을 베어냈다.

군주가 성문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이치지. 너 따위 것이 구룡의 법도를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시금 습격해 오는 이화 적조를 물리친 곡은 장검을 닦으며, 홀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섰다.

이에 만세명은 영원히 곡의 뒤에서 평온하게 작동할 것이었다.

그녀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만세명이 봉쇄된 지... <color=#ff4e4eff>4772일</color> 정도 됐나?

화서

정정하겠습니다. 만세명 봉쇄 이후 <color=#ff4e4eff>4775일</color>이 지났습니다.

……

곡은 그 며칠간의 기억이 왜 흐릿한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전투에서 이화 적조에 의해 기억 모듈이 부식되거나, 중상을 입어 자가 복구 과정을 거쳐 시간이 흐른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곡이 에너지를 동원해 기체를 수리하려던 그때, 오랫동안 반응이 없던 생명 신호 탐지 레이더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생명 신호가...

곧이어 레이더에 세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화서, 내 기체를 다시 점검해.

화서

점검 완료. 기체 손상도 23.89%, 레이더 모듈은 이상이 없습니다.

다시 일어난 곡이 장검을 들었다.

이런 세계에는 위협적이지 않은 "생명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곡은 만세명을 노리는 기계체와 인간들을 쫓아낸 적도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곡은 조금 흐릿해진 시각 모듈을 조정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내 위치 시스템을 못 믿는 거야?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산골짜기 너머로 구룡의 낡은 건물들이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산골짜기 너머로 구룡의 낡은 건물들이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흩날리는 눈이 순식간에 서리로 변해 보안경에 단단히 얼어붙었다. 구룡 사람들은 정말로 이토록 혹독한 땅에서 살아남은 걸까?

물러서.

지휘관 일행이 건물에 다다른 그 순간, 매서운 검광이 눈보라를 가르며 그들 앞에 깊은 도랑을 만들었다.

마지막 기회야. 네 의도가 무엇이든 이곳을 떠나.

검광이 다시 한번 지면을 갈랐다.

그럴 리가 없어.

휘몰아치던 바람이 점차 잦아들자, 검을 든 익숙한 그림자가 눈보라 속에서 나타났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그럴 리가... 어떻게 그 탑에서 나온 거야? 화서가 연산한 새로운 미래에서 넌 그곳을 빠져나올 수...

곡은 의심의 눈빛으로 지휘관을 노려보며, 순식간에 장검을 목에 겨누었다.

흥, 이화 적조가 만들어낸 새로운 속임수인가?

이제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네.

바네사가 곡의 장검을 쳐내며, 짜증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맞다고. [player name] 말이야. 우리는 한 달 전쯤 북극 항로 연합의 버려진 마을에서 이 사람과 연락이 닿았어.

기체가 망가져서 인간을 식별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나와 옆에 있는 이 녀석이 진짜 구조체라는 건 구분할 수 있잖아.

……

곡이 천천히 검을 내리며, 신중하게 눈앞의 셋을 살폈다.

확실히 곡은 전에 만난 적 있었던 바네사와 엠마가 진짜 구조체라는 걸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여기를 지키는 동안, 나는 화서를 통해 "미래"를 몇 번이나 다시 연산해 봤어. 하지만 어떤 미래에도... [player name] 네가 없었어.

적조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진짜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루나, 바네사, 세르반테스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쉽게 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지휘관에게 본 네거트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거나, 아직 적조에 완전히 "용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붉은 액체는 지휘관의 허상을 만들 수 없었다.

……

확실히 아무 이득도 없지.

결국 곡은 장검을 칼집에 넣었지만, 금방이라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유지했고,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도 경계심이 남아있었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기에, 곡은 눈앞의 인간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백성들을 지켜야만 했다.

이에 곡이 계속 경계하는 것을 본 지휘관은 바네사와 함께 두 걸음 물러나,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자, 지휘관은 그 기회를 틈타 화서가 연산했다는 미래에 관해 물었다.

그건 네가 실종된 직후의 일이야.

네가 이중합 탑으로 들어간 후, 너와 루시아가 약속된 장소에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고 공중 정원으로부터 전해 들었어.

너와 루시아가 실종됐다는 걸 모두가 알아. 나는 불길한 예감에 화서를 통해 몇 번이고 계산해 봤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어. 아무리 많은 변수를 추가해도, 너에 관한 결과만큼은 전부 같았지.

너는 그 탑에서 나오지 못했어.

이는 루나가 승격 네트워크로 "연산"한 결과와 같았다.

루시아가 아니었다면, 지휘관은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 네가 이중합 탑을 빠져나왔으니, 정말 기점과 변화가 생긴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곳에 왜 온 건지나 말해봐.

눈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구룡의 군주는 자신이 지키는 모든 것 앞에 굳건히 서 있었다. 신하들이 곁에 없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운명을 움켜쥔 통치자처럼 흔들림 없는 위엄을 보였었다.

엠마의 도움으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은 후, 지휘관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곡에게 설명했다.

이중합 탑에서 일어난 모든 일, 탑을 나온 후 만난 기계체들, 나나미가 남긴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 그리고 어디 있는지 모를 나나미와 연락을 시도하기 위해 화서의 연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그러고 보니... 계산 과정에서 그 기계체들의 동향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

……

곡은 잠시 침묵하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화서를 불러냈다.

만세명을 완전히 가동하는 데 연산 능력이 얼마나 필요하지?

화서

화서의 연산 능력 35.18%가 필요합니다.

40%를 남기고, 나머지 연산 능력은 전부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에 공급해.

곡의 묵인하에 엠마는 곧바로 수색구조 차량을 몰아, 로사와 세르반테스를 데려온 후, 가져온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를 조정하였다.

그렇게 잠깐의 여유가 생긴 지휘관은 검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곡에게 계속 품어왔던 의문을 물어보았다.

구룡 사람들은 이 행성을 떠나지 않아. 우리는 문명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씨앗만 남겼을 뿐이야.

다른 이들은 모두 여기 있어.

똑똑하네.

잠시 침묵하던 곡이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천기는... 정말 헤아릴 수 없는 건가 봐.

난 수많은 변수를 추가했었어. 심지어는 내가 직접 탑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계산해 봤지만, 지금처럼 네가 내 앞에 서 있는 결말은 하나도 없었어.

어릴 때부터 늘 다른 이에게 희망을 걸지 말라고 배웠지만...

홀로 서 있는 곡의 눈가에는 눈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넌 반드시 성공해야 해...

다 됐어요. 이제 가동될 거예요.

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로사가 지휘관을 불렀다.

지휘관님, 테스트를 마쳤어요. 아시모프 님이 남긴 이론을 바탕으로 도출한 결과에 따르면, 안전할 것 같아요.

다만 저는 이 시뮬레이션 장치가 구축한 연결에 들어갈 수 없거든요. 연결에는 특정 마인드 표식이 필요해서, 올바른 판단을 한 건지 확인할 수 없거든요.

그럼, 지금 바로 연결할까요?

지휘관은 아시모프가 남긴 노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 걸까? 정말 세르반테스의 말대로, 연산의 난류 속에서 길을 잃은 나나미에게 연락할 수 있는 것인가?

변수가 겹겹이 쌓인 상황에서, 지휘관은 정말 기점과 변수 그리고 희망을 가져올 수 있는 걸까?

그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안감이 지휘관의 목을 죄어왔고, 입가에는 적조의 기운이 맴돌았다.

네가 진짜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말했잖아, 인간에겐 새로운 구세주 따위 필요 없다고.

어느새 바네사가 지휘관의 곁에 와 있었다.

설령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살아남을 거야.

네가 없었을 때와 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살아가겠지.

허.

어서 다녀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걱정 마. 네가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나일 테니까.

눈을 못 뜨면 뒷산에 묻어버리지 뭐... 농담한 것뿐이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니면... 당장 그만둘래? 지금 바로 집결지로 돌아가면, 저녁 식사는 할 수 있을 거야.

지휘관은 그 많은 노력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루시아는 아직도 머나먼 과거에서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진 밤, 폭풍이 휘몰아치는 황야에 깔끔한 망토 차림의 분홍 머리 구조체가 나타났다.

늘씬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녀는 두 개의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

[player name]...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하는 거야?

아니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으려나?

이번에는... 뭐가 달라질까?

펄럭이는 후드에 미소가 가려진 그녀는 망토를 여미더니,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