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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영원한 겨울에 핀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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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달빛이 내리는 어둠 속에서, 은발의 기계체가 폐기 창고 안으로 사라졌다.

기계체라...

공중 정원이 자칭 기계 교회라는 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공식 기록엔 없을지 몰라도, 임무 수행 중인 소대들이 그들과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거든.

하지만 이런 한밤중에 여기서 나타날 줄은...

바네사가 무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지휘관과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만남은 우주 도시에서였다. 그는 그곳에서 지휘관에게 "열쇠"를 건네줬었다.

따라가자.

세르반테스는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듯, 굳은 표정으로 폐기 창고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어떻게 알아.

적조에 이화되어 어쩌지도 못하는 괴물이 하나 더 생기는 건 원치 않거든. 게다가 우리는 이전에 협의를 했잖아. 그가 여기 있어선 안 돼.

저쪽은 우리가 전에 관측했던 안전 범위의 경계 근처야. 그 빌어먹을 이화 적조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지. 게다가 적조가 그 로봇들을 침식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어.

기이한 색채의 이화 적조가 조금 전 세르반테스가 들어갔던 폐기 창고로 흘러 들어갔다.

쳇.

바네사는 짜증난다는 듯이 무기를 꺼냈다.

폐기 창고 안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먼지가 쌓인 천을 들춰내고, 봉인된 상자를 부수듯 열며,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마지막 좌표야. 여기서도 없다면...

곧이어 세르반테스는 선반 가장 아래쪽에서 익숙한 표식이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찾았다.

하지만 이화 적조가 그보다 빨랐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기괴한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아궁이 속에 숨은 회색 뱀이 쉭쉭 소리를 내며, 혀를 날름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화 적조에 둘러싸인 상자를 향해 과감히 손을 뻗었다.

"탕".

그 순간, 총알이 세르반테스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 기괴한 촉수를 정확하게 맞췄다.

누구십니까!

세르반테스는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상자를 낚아챈 후, 날카로운 시선으로 입구를 살폈다.

달빛과 눈 부신 흰 눈이 만드는 실루엣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친숙했으며, 그가 든 총구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player name] 지휘관님?

세르반테스는 시각 모듈을 다시 조정해 보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보고 있는 실루엣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인간 지휘관이 총구를 내리자, 다른 여성 구조체가 문으로 들어왔다.

꽤 괜찮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교관한테 배운 사격술은 녹슬지 않았나 봐.

당신은 이중합 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선현님의 연산으로는...

보다시피, 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지휘관은 또 살아서 나왔지.

그런데 당신... 우리 기계체님은 왜 다시 온 걸까? 우리는 전에 불가침 협의를 한 걸로 기억하는데...

당연하잖아. 생존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난 생존자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해. 언제든 침식체가 될 수 있는 깡통들이랑 사이좋게 지낼 순 없지.

그러니까 대답해 보라고 우리 기계체... 신사님, 왜 이곳에 다시 온 거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은발의 기계체는 고도로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지휘관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고, 옆의 바네사는 더더욱 그랬다.

기계체들은 이런 식으로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건가?

눈앞의 기계체는 침식된 것 같지 않았고, 정신도 또렷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상자에는 기계 교회의 표식이 찍혀 있었으며...

세르반테스는 왠지 모르게 지휘관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성급하게 나서는 건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바네사는 예언이라 하기는 애매한 그 말이 떠올랐는지, 순간 표정이 어두워지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왜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돌아서려는 찰나, 기계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구면이라서?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 걸까?

어떤 이유든 간에, 결국 한 마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상에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 공중 정원, 그 모든 지원이 없어진 지휘관은 그저 "인간" 한 명일 뿐이었다.

……

세르반테스는 창고를 나서며 바네사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 둘은 함께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어쩔 거야?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어."라는 지휘관님?

이 녀석을 놓아주면, 앞으로 다른 기계체들을 찾는 건 더욱 어려워질 텐데.

불가침 협의를 맺은 후, 여기 남아있던 대부분은 기계체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구역으로 이동해서 생활하고 있어. 그쪽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지휘관이 채 몇 발자국도 떼기 전에, 기계체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잠시만요.

멀지 않은 곳에서는 은발의 기계체가 서 있었고, 그 창백한 기체는 지면의 눈과 하나가 되어있었다.

당신은 정말 [player name]입니까?

허... 이 녀석을 사칭하는 게, 내 총 앞에서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하지만 선현님의 연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하는 선현이 누군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결국 넌 "연산"을 믿을 거야, 아니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거야?

우리는 전에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모든 생체 정보를 백업해 둬서, 집결지에 들어왔을 때부터 전부 대조해 봤다고.

약물로 성장을 촉진한 흔적도 없고, 모든 생체 정보가 일치해. 게다가 데이터는 로사가 직접 출력했고, 대조용 파일도 개봉한 흔적이 없었어.

네게 이런 얘기를 해줄 필요도 없는 거 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눈밭에서 너와 시간을 낭비한 만큼, 가치 있는 걸 내놓는 게 좋을 거야.

……

잠시 침묵하던 세르반테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현님은 오래전에 지구를 떠나셨습니다.

선현님은 원래 떠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지휘관님이 돌아오시는 그때 결정하겠다고 하셨거든요. 하지만 선현님은 기계 교회가 계속 지구에 남으면, 필연적으로 인간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다른 재난들도 일어날 수 있다고 연산하셨습니다.

선현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셨지만, 모두 소용없었습니다.

선현님은 이중합 탑, 이화 적조 같은 것들을 해결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계 교회를 이끌고 지구를 떠나기로 선택하셨죠.

저는 전투에 능한 기계체가 아니라서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고, 이 행성을 떠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이 행성의 마지막이 어떨지 보고 싶거든요.

세르반테스가 고개를 돌려,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잠깐, 할 말이 더 남았어.

왜 다시 이곳에 온 거야? 협의에 따르면, 넌 이곳에 있어서는 안 돼.

네가 들고 있는 그 상자에는 또 뭐가 들어있는 거고?

……

기계체가 무의식적으로 케이스를 뒤로 숨기며, 뭔가를 망설이듯 바네사의 시선을 피했다.

세르반테스는 눈앞에 있는 지휘관이 진짜인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지휘관은 정말 예전 그대로인 걸까?

동족상잔이란 말이 있듯이,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어떤 종족, 인간 심지어 기계체마저 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정말 선현이 신뢰했던 그대로인 걸까?

……

그동안 나도 대충 지상의 상황을 파악했어. 모두가 자기만의 안전을 위해 불안에 떨고 있지.

이런 상황에 너무 몰아붙여서 새로운 적을 만드는 건 현명하지 않았다.

이화 적조가 눈앞에 있는 지금 상황에서 인간은 더 이상 다른 적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세르반테스가 공격할 의도가 없어 보이자, 지휘관은 바네사에게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내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뒤에서 갑자기 기계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으로 가시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아닙니다. 제가 걱정이 앞섰나 봅니다. 아무래도 30년이나 지났으니까요.

은발의 기계체가 두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제가 왜 협의를 어기고 인간 집결지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우주 도시는 오래전에 버려졌었고, 도시의 주민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북극 항로 근처로 이동하던 로사는 폐허가 된 도시를 발견했고, 그곳의 도시 방어 무기 일부를 개조하고는 실험실을 만들었다.

우주 도시 안에서 은발의 기계체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으며, 바네사는 어째선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제가 놓친 게 없었으면 좋겠네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머리의 소녀가 조용히 들어와, 자연스럽게 지휘관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휘관님, 절 못 알아보시다니요.

저예요. 아시모프 님의 조수, 로사입니다.

벌써 잊으신 거예요? 전에 통신으로 봤잖아요.

네, 아시모프 님이 떠나시기 전에 주신 기체로 바꿔서, 전과 좀 달라 보일 수도 있겠네요.

통신으로만 보았던 로사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선 소녀는 너무나 달랐다. 그렇기에 지휘관은 그 둘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험 데이터에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돌아와야 했어요. 그래서 지휘관님의 생체 정보 대조를 마친 후, 바로 이쪽으로 왔죠.

지휘관님이 가져오신 그 "코어"는 꽤 복잡한데... 됐어요, 그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우선은 저 기계체의 말을 들어보죠.

로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세르반테스가 마침내 몸을 돌려, 30년이 넘는 긴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선현님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님과 루시아가 이중합 탑에 들어가시는 걸 예견하셨습니다.

선현님이 떠나신 이유는 조금 전 말씀 드렸고, 제가 남은 이유도 정말로 지구의 결말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창밖에는 하얀 눈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저는 선현님이 남기신 "탑"이기도 합니다.

파멸인 동시에 전환점이기도 하죠.

선현님이 연산을 통해 무엇을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떠나실 때 우주 함선과 연락할 수 있는 통신기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런 핵심적인 도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늘 사용할 수 없던 상태던데...

얼마 전부터... 우주 함선 그리고 선현님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허.

통신기가 고장 난 거예요? 기계체가 만든 물건인데 왜 문제가 생긴 거죠?

통신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현님은 지구를 떠나신 후에도 연산을 통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찾으시다가, 시공간 난류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여보세요?! 세르반테스! 내~ 말~ 들~ 려?!

헤헤, 이건 녹화본이야. 만약 이 녹화 영상이 전송됐다면, 나나미한테 조그마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일 거야!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아주 신비한 보물을 남겼거든. 우주 도시의 창고에 말이야!

음...

"나나미의 번뜩이는 영감"이 진짜인지도, 지휘관이 정말로 돌아올지도, 그게 아직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세르반테스! 잘 기억해! 만약에! 지휘관이 돌아오면! 꼭! 반드시 내가 너한테 맡긴 창고 열쇠를 지휘관한테 줘야 해!

그건 엄청 중요한 거야! 절대로 잊지 마!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한테 줘야 해!

조금 오래된 스크린 속의 나나미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낯선 기체를 하고 있었지만, 그 해맑은 미소만큼은 변함없었다.

아 맞다. 지휘관은 아직 내 새 기체를 못 봤으니까, 이 영상은 보여주면 안 돼. 나는...

세르반테스가 담담하게 영상을 종료했다.

상황이 급박하여 영상을 편집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선현님의 새로운 모습을 예술적으로 더 아름답게 담아내려 했는데...

크흠, 상자 안에는 선현님이 남기신 창고 열쇠가 있습니다.

선현님은 예비 열쇠를 여러 개 복사해서 각 창고에 보관하셨는데, 다른 건 모두 적조에 잠겨버리고 이것만 남았죠.

세르반테스가 상자를 열어, 다시 한번 "열쇠"를 지휘관에게 건네주었다.

그 창고가 어디 있는지는 제가 알아요.

열쇠를 자세히 관찰한 로사가 결론을 내렸다.

끼이익.

오랜 세월 굳게 닫혀있던 창고를 열고 전원을 연결하자, 전등들이 깜빡이며 하나둘씩 켜졌다.

물자가 엄청나게 많네요.

로사는 창고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살펴보았고, 각 상자의 봉인 테이프에는 내용물이 꼼꼼히 분류되어 있었다.

음식이네요... 이건 이제 못 먹을 것 같고, 방한복, 퍼니싱 필터...

혈청도 있네요. 저온 보관된 걸 보니 아직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뭐죠?

곧이어 먼지가 흩날리며, 기이한 디자인의 의자가 지휘관의 눈앞에 나타났다.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입니다. 지휘관님께는 낯설지 않을 텐데요.

기억 속 깊이 묻어두었던 악몽이 다시 한번 지휘관의 의식을 덮쳐왔다.

그러나 지휘관은 입안에 맴도는 쇠 맛을 참아내며, 침착하게 세르반테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선현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이 열쇠를 지휘관님께 전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우선은 이걸 작동시켜 봐야 선현님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동시킨다 해도, 연산 능력이 턱없이 부족할 텐데요.

시선이 일제히 로사에게 쏠리자, 그녀가 의자 뒤쪽의 인터페이스를 펜 끝으로 짚어 보였다.

아시모프 님이 떠나시기 전에 제게 암호화된 파일 하나를 남기셨어요. 거기에는 당신에 관한 많은 실험 기록이 있었죠.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로 무언가를 수신했던 과정도 포함해서요.

게다가 파일에는 데이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어요. 예를 들면, 게슈탈트의 연산 능력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같은...

네... 게슈탈트는 공중 정원과 함께 떠났죠.

그럴 거예요. 지금 우리가 가진 자원에 이 창고의 장치까지 모두 동원해도, 연산 능력이 게슈탈트의 10%도 안 되는 인공지능 시스템조차 구축하기 힘들 거예요.

구룡이 있잖아.

문가에 기대고 있던 바네사가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알기로는 공중 정원이 구룡 측에 접촉은 했는데, 일부만 공중 정원으로 들어갔어.

그러니까 화서는 분명 지상에 남아있을 거야.

화서의 연산 능력이면 이 장치를 충분히 가동할 수 있죠. 그런데 구룡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지상에서 30년이 넘는 고통을 겪지 않았더라도, 이합 재난 구역의 적조는 지휘관이 루시아와 탑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들이 살아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구룡이 있었던 곳으로 가면서 찾아보자. 구룡이 그렇게 쉽게 멸망했을 리가 없어.

그들이 지상에 남기로 했다는 건, 분명 자신들만의 피난 방법이 있었다는 거야.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고?

바네사가 창고 대문을 밀어젖히자, 매서운 한파가 칼날처럼 들이닥쳤으며, 이윽고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매 순간 위험 속에 사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약자가 아니라는 거야.

바네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오블리크를 불러와 집결지에서 대기하라고 해.

엠마와 내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함께 출발할 거야. 우리 둘의 기체가 비교적 신형이고, 게다가...

의식 연결을 통해서 퍼니싱에 대한 저항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잖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라면 구조체와 의식을 연결하는 법을 기억하고 있겠지?

다행이네.

간단히 물자를 보충한 바네사는 갈림길에서 합류하자고 엠마와 말을 맞춘 후, 마지막으로 인간 지휘관의 장비를 점검했다.

혈청이 좀 적은데요?

부상자에게 혈청을 아끼지 마. 작전 기간에는 보급이 제일 중요하니까 전부 가져가.

이에 바네사는 지휘관의 보급팩에 예비 혈청을 집어넣은 후, 한걸음 물러섰다.

허... 이런 식으로 네 옆에 서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바네사가 자조적인 냉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총을 점검했다.

관례대로 네가 명령을 내려. 지·휘·관.

지휘관은 마음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이 명령을 외치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상징하는 그 셋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