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타들어 가던 지휘관의 의식은 온몸의 세포가 분열됐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어지러운 색채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쯤, 활발한 목소리가 심연에 가라앉은 지휘관의 의식을 끌어올렸다.
별아, 조심해.
눈을 뜬 건지도 모를 상황에서, 어렴풋이 화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외 상황 감지... 예상외... 예상외 기억 저장...
불법 권한... 접근... 접근 불가...
넘어지면 아야가 비웃을 거야.
삐...
더 이상 화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지휘관의 눈앞에는 희미한 빛이 보였다. 이곳은....
으아아악...
이상한 고글을 쓴 여자아이가 땅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삐... 삐삐...
봐, 결국 넘어졌지?
익숙한 회색 머리의 소녀가 밝은 표정으로 여자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여긴 별이 돌아다닐 곳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여기는 나나미의 기억 저장 모듈인 건가?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가 날 나나미의 기억에 연결한 거려나?
나나미와 그 기계체들은 바로 지휘관의 눈앞에 서 있었지만, 지휘관의 외침은 두꺼운 투명 장막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어째선지 그들은 지휘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걸로 여기 있는 "동포"들도 모두 집으로 데려갔네!
회색 머리의 소녀가 윙크를 하며, 눈앞에 수첩이 있기라도 한 듯, 장난스럽게 허공에 체크 표시를 몇 개 했다.
좋아! 출발하자! 우리는... 기계 교회로 돌아갈 거야!
나나미가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는 파워에 올라탔다. 그 모습은 마치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어린 장군 같았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휘관이 목 놓아 소리친 노력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지휘관은 세르반테스가 이런 상황에 대해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우주 함선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식에 따르면, 선현님은 지구를 떠나신 후에도 연산을 통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찾으시다가, 시공간 난류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저희의 추측대로, 지휘관님께서 감응 시뮬레이션 장치를 통해 선현님과 연락이 통한다면, 지휘관님의 의식도 선현님과 함께 시공간 난류 속에서 방황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선현님께는 수많은 만남이 있었기에, 지휘관님과 선현님께서 어느 시간대에 나타날지는 예측하기 어려워요. 선현님을 깨울 수 있는 기점을 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긴 여정이 될 겁니다.
지휘관은 긴 여정을 겪게 될 것이었다.
똑똑! 나나미 왔어!
주인을 태운 파워가 작은 선풍처럼 기계 교회로 돌진했다. 하지만 기계체와 코그휠의 깔깔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야 할 로비는 어째선지 조용했고, 몇몇 반각성 기계체들만이 무기력하게 구석에 서 있을 뿐이었다.
다들 어떻게 된 거야! 자자! 나나미가 돌아왔다고!
선현님, 돌아오셨군요.
아르카나가 복도 반대편에서 황급히 걸어 나왔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왜 아무도 안 보여?
모두 전 세계에 흩어진 동포들을 긴급 회수하거나 연락하러 나갔어요.
얼마 전, 이중합 탑 주변에서 인간들이 "적조"라고 말하는 액체가 이화됐다는 것을 잿빛 탑이 감지했어요.
과거의 적조는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기계체에 큰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이화된 적조는 상당수의 반각성 기계체들을 잠식했어요.
적조... 이화...
눈썹을 찌푸린 나나미가 의식의 바다에서 이 두 단어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나나미가 "본" 세계들 중에 이런 결말이 있었던가?
선현님, 공중 정원의 메시지는 받으셨나요?
아~ 니~ 아직 그쪽 소식은 없었어.
회색 머리 소녀가 단말기를 열어, 공중 정원의 메시지를 고르는 척했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과 루시아가 이중합 탑에서 나오지 못했어요.
……
탑에 들어간 지 <color=#ff4e4eff>1825일</color>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어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과 루시아가 그 탑에서 방황하시는 것 같아요.
네빌은 이화 적조의 원인이 그 탑에 있다고 보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이화 적조의 성분을 분석할 방법은 찾지 못했어요.
흠... 지휘관이랑 루시아가 출발한 지도 벌써 그렇게 됐구나.
지휘관이 왜 나나미와 안 놀아주는 건지 궁금했었어.
지휘관이 나나미를 <phonetic=잊지 않은>잊은</phonetic> 줄 알았다고...
으음... 방금 아르카나가 말한 거야?
아뇨. 선현님, 기체 상태는 괜찮으신가요?
나나미의 기체에 문제가 있을 리 없어. 나나미의 기체는 제일 강하다고.
혹시... 이중합 탑 근처에 가셔서 조사하신 건 아니시죠?
{226|153|170}~
그 말에 나나미는 두리번거리더니, 나나미가 네빌의 마술 공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찌 됐든,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예요, 선현님.
아르카나는 나나미의 뒤를 쫓으며, 화제를 돌리려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이 오랫동안 실종되셨고, 이화 적조가 기계체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어요. 우리는...
아, 나나미가 잊고 있던 뭔가가 떠올랐어.
회색 머리의 소녀가 볼을 부풀리고는 중얼거리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선현님, 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
아르카나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재앙이 다가오고 있고, 변고가 곧 일어날 것이며, "세계"는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는 걸 들었어요. 그전에 우리는 준비해야만 해요.
잿빛 탑은 언제든 출발할 수 있고, 네빌도 우주 함선 개조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준비한 상태입니다.
흐흠~ 나나미가 기억하기로는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나미는 아르카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았다.
……
선현님, 이건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재앙 속에서는 기계체와 인간이 공존할 수 없어요.
누가 나나미가 회피한대! 그런 적 없어!
단아한 여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의 바퀴가 기계 교회를 배신하고, 각성 기계체와 반각성 기계체들을 데리고 떠났어요.
이것이 제가 전해드릴 두 번째 소식이에요.
이화 적조가 가져온 변화는 기계 교회에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일부 기계체들은 인간들 때문에 나쁜 변화가 생겼다고 믿었다. 인간들이 세계를 오염시키고 침략했으며, 인간들이 세계를 망친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아닌가요?
운명의 바퀴가 관절의 부품들을 만지작거렸다.
운명의 바퀴가 "황제"를 데리고 기계 교회를 벗어난 후, 잘 지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누구도 그에게 충분한 기름을 주지 않았고, 무료로 기체를 정비해 주는 이도 없었다.
운명의 바퀴, 선현님께서는 당신이 슐츠를 데려간 죄를 아직 추궁하지 않으셨어요.
죄라고요? 슐츠가 기계체 동포들을 위해 우주 도시를 점령하려던 게 죄라면, 그를 표현할 더 멋진 말을 찾을 수 없네요.
이제는 우리의 시대예요. 아르카나 님... "어머니".
슐츠를 우리에게 인도하시면, 아마 선현님께서도 당신을 용서해 주실 거예요.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어머니", 제가 돌아온 건 누구의 용서를 구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모든 동포에게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 진실은 바로, 지금 지구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기계체의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을 소멸하여 지구를 차지한 다음, 퍼니싱에 맞서 싸울 거고, 우리는 지구의 새로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선현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선현님께서는 인간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 운명의 바퀴는 선현님의 기계 의지를 따르는 사도입니다. 동포들이여, 만약 선현님께 이 세계를 바칠 수 있다면...
굳이 이 작은 기계 교회에 움츠려있지 않아도 됩니다!
무슨 소리야... 나나미는 이 세계 전체를 원한 적이 없어!
나나미는 시무룩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운명의 바퀴는 소수의 코그휠들을 데려갔고, 남은 대부분의 기계체는 여전히 선현님의 뜻을 따르고 있어요.
……
나나미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볼을 부풀렸다.
슐츠는 나쁜 녀석이지만, 나나미는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슐츠랑 운명의 바퀴를 보내준 제로는 당분간 기계 교회 외출 금지라는 벌을 주면 되지만, 그래도 운명의 바퀴랑 슐츠는...
음...
나나미는 평소답지 않게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동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슐츠 본체의 의식을 폐기하려 했던 것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도였지만, 기계체의 의식이 정말 그렇게 쉽게 폐기될 수 있는 걸까?
슐츠의 본체는 코드 한 줄과 다름없었고, 그가 자신의 코드를 얼마나 많이 복제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이론적으로 그는 데이터가 흐르는 어느 곳이든 숨을 수 있었다.
하아...
그녀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카나가 말하지 않아도, 나나미는 변화의 조짐을 느끼고 있었다.
곧이어 공간이 일그러지며, 소녀의 모습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점점 희미해졌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자,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카운트다운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겠어.
각성 기계체가 자신만의 "의식"을 가지게 되면, 기계 교회는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계속 지체하다가는 기계 교회를 떠나는 마지막 기계체는 슐츠와 운명의 바퀴가 아닐 것이었다.
슐츠와 운명의 바퀴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정말 "잘못"한 건지 나나미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나나미는 게슈탈트를 통해 연산했던 미래를 떠올렸다. 그 미래에서는 타락과 어둠, 죽음의 혹한이 휘몰아쳤으며, 기계체들이 끝없는 전쟁을 일으켜 지상의 모든 땅을 침식했었다
나나미는 그런 미래를 원치 않아.
네빌의 마술 공방 안쪽에서 조잡한 설계도를 찾아낸 나나미가 이를 빛에 비추어 주의 깊게 살폈다.
네빌은 어디 갔어?
근처의 한 폐기 창고에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서, 그걸 가지러 갔어요.
음... 전에 내가 부탁한 물건은? 어떻게 됐어?
실험실에 뒀다고 떠나기 네빌이 전에 말했어요. 조정도 끝나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더라고요.
선현님의 새로운 기체인가요?
당연하지! 이건 나나미가 직접 디자인한 최강의 기체라고!
실험실 구석에서 구조체 배양기를 찾아낸 나나미가 유리면의 덮개를 걷어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매우 특별한 기체네요.
뒤따라 실험실에 도착한 아르카나도 배양기 안에 조용히 누워있는 "나나미"를 보았다.
당연하지, 이건 나나미가 특별히 디자인한 거니까.
저는 선현님께서 좀 더 성숙한 외형을 선택하실 줄 알았어요.
싫어 싫어, 나나미는 그런 거 싫어!
그 순간, 은색 장발 소녀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 나나미는 그 허상을 의식의 바다에서 떨쳐내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
후회하고 있어. 나나미는 이제 언니, 누나가 되고 싶지 않아.
나나미는 지금처럼 지구에 남아서, <phonetic=나나미...>지휘관</phonetic>이랑, 모두와 함께 살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
로비에는 반각성 기계체 아이들이 바깥 상황도 모른 채 즐겁게 놀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나미는 먼저 동포들을 눈앞의 위험으로부터 대피시켜야 했다.
이것이 기계 선현으로서 나나미가 져야 할 "책임"이었다.
공중 정원과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 쪽은...
지휘관이랑 루시아가 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근처에 가봤어.
아르카나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눈빛을 보였다.
당연히 가봐야지! 그 거대한 녀석이 동포들을 위협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탑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
그 탑이 아직도 그런 상태라면, 나나미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다른 두 명이든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거야.
억지로 들어간다 해도 지휘관을 찾을 수 없어. 나나미가 이미 시도해 봤거든.
새 기체를 디자인한 것도, 그 봉인된 "벽"을 뚫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지금 보니, 강제로 뚫고 들어가도 지휘관은 찾기 힘들 것 같아.
게다가...
게다가 지금 선현님의 기체도 그 탑에 강제로 진입하려다 심각하게 손상됐고요.
그건 전부 이중합 탑 때문인 게 아니야!
애초에 디자인 목적이 달랐잖아. 이 기체는 데이터 공간에서 더 원활한 연산을 위해 만든 거였다고. 하지만 이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야.
나나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중력"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걸 느꼈다.
기계체와 인간에게 남은 시간이... 정말 얼마 없네요.
선현... 선현님! 흑흑... "어머니", "어머니"!
별... 무슨 일이죠?
아르카나는 조심스레 몸을 낮추어, 놀란 듯 떨고 있는 기계체를 차분히 달래주었다."
밖에... 그 이상한 붉은 조수가 들이닥쳤어요! 그래서 아야가 어서 선현님을 모셔 오라고 했어요. 흑흑...
고글의 표정이 빠르게 변하던 별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울고 있었다.
아야 말로는 붉은 조수가 잿빛 탑의 방어를 뚫었대요! 전에 잿빛 탑이 세운 방어 시스템은 무력화됐고, 붉은 조수가 더 강력해진 걸지도 모른다고도 했어요. 흐으윽...
붉은 조수는 우리가 숨바꼭질하는 곳인 잿빛 탑 외층까지 들어왔어요.
이화 적조가 벌써 폐허까지 밀려 들어왔다고요?
아르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이네요. 하카마, 광휘 그리고 제로마저 모두 동포들을 회수하러 나갔는데...
나나미가 있잖아!
나나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배양기의 인터페이스를 하나씩 자신의 기체와 연결했다.
이 새로운 기체는 엄청나게 강하다고!
별, 너는 먼저 아야랑 함께 밖에 있는 친구들을 데리고, 우리 비밀 기지로 도망가!
네, 알겠어요!
좀 성급한 결정 아닐까요?. 네빌도 없는데...
너희들의 선현님을 믿어야지! 나나미를 못 믿는 거야?
나나미가 배양기의 버튼을 누르며, 미소와 함께 파워를 토닥였다.
나중에 보자, 파워!
나나미! 기사 형태로 출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