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처음에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루시아와 함께 평범해 보이면서도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늘 기적을 이뤄냈으며, 다른 이들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전투에서도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그렇기에 정화 구역에서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탑에 들어간 후, 미리 축하연을 준비할 정도였다.
그러나 반이중합 탑이 다시 불길한 붉은색으로 변했음에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귀환을 축하하는 현수막은 걸리지 못했다.
……
이, 이게 피난해 온 이들이 말해준 전부야.
그러니까, 루시아와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은 탑에서 나오지 못했고, 이중합 탑은 다시 붉은색으로 변했다는 거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루나 아가씨, 이제 우린 어떡해?
언니, 숲속의 상황은 어때?
적조가 더 위험해졌어.
나와 롤랑이 이합 숲에 들어가서 콜레도르를 찾아봤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어.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콜레도르가 그럴 리 없어.
루나가 천천히 눈을 감자, 손끝에 스치는 바람이 불길한 예감을 실어 날랐다.
적조가 통제를 벗어났어.
적조를 만들던 관리자가 사라지자, 적조는 악마가 깃든 파도처럼 그 땅을 집어삼켰다.
저 이합 생물들은 미쳤어요.
전에는 이합 숲 근처에서만 돌아다녔고, 보육 구역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어요. 하, 하지만 이번엔...
놈들이 쳐들어와서 보육 구역에 있는 대부분을 녹여버렸어요! 그것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요!
진정해!
모든 이합 생물이 그렇다는 거야?
맞아요. 전부 미쳐버렸어요! 보육 구역의 방어를 뚫고, 자기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아가며, 계속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어요!
긴급 보고를 올려. 이합 생물이 날뛰는 걸 보고한 보육 구역도 벌써 네 번째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이합 생물들이 미친 듯이 지상을 장악하며, 적색 이중합 탑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콜록...
조수가 범람하는 이합 숲의 적조 속에서 루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루나!
루나 아가씨... 역시 안 되는 건가요?
콜록... 적조가 내 힘을 거부하고 있어. 내 지배를 받아들이지도, 명령을 듣지도 않아.
그럼, 그만둬. 인간...
인간들의 생사는 우리와 상관없어.
이번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아.
이합 숲으로 향하는 길에,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로 다시 "미래"를 연산해 보려 했다.
루나는 눈 폭풍이 휘몰아치는 <phonetic=죽음>미래</phonetic>를 보았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적조의 권한은 가져오지 못했어. 그래도 그 과정에서 적조 속에 또 다른 "의지"가 있다는 걸 발견했지.
역시 이 모든 변수는 너와 관련이 있었구나.
은발 소녀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지휘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적조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로 보내고 있어.
그녀와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의식이 또렷하지 않았고, 몇 마디 말만 겨우 반복할 뿐이었어. 그러다 문득 네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들었지.
그리고 그 하얀 소녀가 깨어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고, 적조가 다시 통제를 벗어나 반발하면서, 이합 생물들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했어.
그 후에는...
루나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함에도, 거울 틀 너머에 별하늘이 있기를 그리고 승격 네트워크가 놓친 희망이 있기를 바라며, 승격 네트워크로 끊임없이 연산했다.
루나는 눈 폭풍이 휘몰아치는 <phonetic=죽음>미래</phonetic>를 보았다.
그리고...
롤랑이 죽었어.
수없이 많은 연산 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롤랑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 첫 번째 밤에 죽었다.
롤랑은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어.
하지만...
저는 그저 루나 아가씨를 지키고, 원하시는 결말을 안겨드리는 거로 충분해요.
결국 이건 루나 아가씨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일뿐만 아니라, 제가 바라던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지금이 가장 좋은 커튼콜 타이밍인 것 같네요.
그는 결국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는 라미아야.
인간이 떠나려 할 때, 그녀는 기어이 정보를 알아내러 갔어.
루나는 같은 장면을 기억 속에서 수없이 되돌려 봤다는 듯,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라미아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다른 구역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결국 아무런 소식도 못 구했어.
내가 꼭 좋은 소식과 돌아올게. 루나 아가씨...
겁 많은 인어는 심연으로 뛰어들었지만, 새로운 소식을 가져오지는 못했어.
적조가 바다로 역류하면서, 바다에 거대한 이화 생물이 생겨난 거야.
바다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는데도, 그녀는 그 길을 선택했어.
그 겁 많은 인어는 결국 평화를 가져다주는 흰 비둘기가 되지 못한 거야.
마지막은 언니야.
루나는 인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변함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승격자는 "선별"이라는 퍼니싱의 첫 관문을 통과한 것뿐이야. 대행자라고 해서 무적인 건 아니지.
적어도 나는 아니었어.
루나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언니는 계속 승격 네트워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했어.
하지만 그 대가로, 더 이상 승격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게 됐지. 내가 대행자라 해도 그녀를 도울 방법은 없었어.
그때는 이미 눈이 잘 보이지 않았어.
이 주변은 안전하지 않으니, 내가 근처에 있는 이합 생물의 거점을 처리하고 올게.
알파는 시력에 문제가 생긴 루나가 걱정됐는지 잠시 망설였다.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아, 언니.
루나는 시야를 잃었음에도, 보이기라도 하는 듯 정확히 알파의 위치를 감지해 냈다.
저 이합 생물들이 또다시 진화했어. 이대로 놔두면 이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거야.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알파가 시력을 잃은 루나를 안전한 곳에 두고, 산꼭대기를 떠났다.
언니는 거짓말을 했어. 다시 돌아오지 않았거든.
그곳에는 이화된 이합 생물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고, 언니는 그것들을 막아내기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나는 계속 여기서 언니를 기다릴 거야.
지휘관은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루나에게는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너와는 관계없어. 이런 얘기를 한 건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녀는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깨지기 쉬운 하얀 도자기 인형 같았다.
이 모든 건 내가 연산을 통해 본 일이야.
루나는 눈 폭풍이 몰아치는 미래, 적조에 뒤덮인 들판, 모두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 결국 혼자 이 절벽에 남는 것까지 모두 직접 보았다.
루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피처럼 붉은 황혼 아래, 지휘관과 루나는 침묵 속에서 해가 저물고, 은은한 달빛이 세상을 감싸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너는 어때? 적조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닌데, 또 어떤 일을 겪은 거야?
숱한 전투와 고민으로 가득 찬 나날들을 겪은 지휘관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받은 소식은 네가 루시아와 함께 이중합 탑으로 들어갔다는 거였어.
루시아는 이제 <phonetic=죽음>없어</phonetic>.
그 말은 지휘관의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들었고, 밀려오는 절망은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심장을 다시금 옥죄였다.
……
루나가 내뱉은 숨이 얼음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할까?
공중 정원이 전성기였을 때도 이 정도의 기술은 극히 일부만이 연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코어의 비밀을 푸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짐작조차 어려웠다.
바닥난 내 힘으로는 인간 집결지 주변의 퍼니싱을 저지하는 것이 한계야.
적조는 계속해서 이화되고 있어. 그들의 힘은 이게 다가 아니야.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player name], 난 인간의 영웅이 아니고, 이 지구를 구할 수도 없어.
루나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지휘관 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으음...
루나는 지휘관의 손가락이 자신의 차가운 뺨에 닿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건 대가야.
승격 네트워크가 받아 간 대가야. 미래를 보려면, 뭔가를 바쳐야 하니까.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날 불쌍히 여길 필요 없어. 연민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난 승격 네트워크로 미래를 연산하고, 그들이 죽는 모든 경우를 피하려 했어. 하지만 결국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했지.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거야.
하지만 너는 달라, [player name].
루나의 생기 없는 눈동자는 인간이 아닌 허공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많은 것을 봤어. 세상을 집어삼킨 적조, 지구를 뒤덮은 침식체들, 그리고 혹한의 겨울과 영원한 밤까지 말이야.
하지만 유일하게 너는 보지 못했어, 지휘관.
내가 연산했던 모든 미래에서 넌 한 번도 그 탑을 나오지 못했어.
넌 이 세계의 기점이야.
너답지 않게 망설이고 있네.
운명이란 거대한 톱니바퀴 앞에 인간은 작은 벌레에 불과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로 부장 해도, 결국은 톱니 사이에 끼어 으스러질 뿐이었다.
지휘관은 탑 안에서 겪은 믿기 힘든 일들로 인해, 세상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의지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춰 설 거야?
루나가 조용히 지휘관 쪽을 바라보았다.
승격 네트워크의 연산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을 바탕으로 해. 나와 너, 공중 정원 그리고 언니에 대해서 말이야.
연산된 결과도 구체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장면들이야. 내가 너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이를 바탕으로 한 추측뿐이고.
너 말고도, 그 회색 머리 소녀 또한 나타나지 않았어.
그녀도 내가 연산한 모든 미래에서 보지 못했어. 그녀와 관련된 기계체들의 흔적도 없었고.
어쩌면 그녀 또한 "<phonetic=희망>변수</phonetic>"일지도 몰라. 아니면 그 기계체들 전체가 그런 걸 수도 있고.
더 알아보려고 했지만, 무리하게 연산을 하는 건 대가가 너무 컸어. 나중에는 대행자인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지.
결국에는 승격 네트워크가 가져온 정보에 내 시각 모듈이 침식됐고, 이제는 그 "미래"들을 볼 수 없게 됐어.
[player name], 이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정보야.
……
이번에는 루나가 피하지 않았다.
산봉우리에는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몇 초... 어쩌면 몇 분이 지난 그때, 창백한 소녀는 살짝 뒤로 물러나, 인간의 따뜻한 손길에서 떨어졌다.
이제 가.
시간이 얼마 없어. 퍼니싱이 네 보호막을 뚫으려는 게 느껴져.
루나의 말대로, 방호복의 표식이 점점 붉어졌다.
네가 끝을 향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버텨볼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서, 네게 시간을 더 많이 벌어줄게.
넌 유일한 변수야, [player name]. 네가 이중합 탑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관측한 데이터상 유일하게 존재하는 오차였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지휘관이 절벽을 떠나자, 홀로 남은 소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산자락 아래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루나의 곁에는 작은 등불 하나가 새로 놓여있었다.
루나는 인간 지휘관이 한 "쓸모없는" 행동을 눈치챈 듯, 천천히 등불에 손을 가져가더니, 등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이곳의 끝없는 고독 속에서, 그녀는 의식의 바다 속에서 연산을 통해 보았던 장면들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이에 루나는 의식의 바다 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자신은 이제 그 무엇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player name], 네가 성공하길 바라.
이게 마지막 기회야.
시력을 잃은 소녀가 다시 따스한 노란빛의 등불을 만졌다.
그래서, 이게 네가 얻은 정보라는 거지?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무성한 나무의 그림자가 춤을 추는 가운데,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세계의 기점, 기계체...
조각난 단서들이 운명에 의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자신감은 좋은 거지.
뭘 망설이는 거야?
내가 정말 이런 미래를 짊어질 수 있을까?
바네사가 멈추지 않고 걸어가면서, 따스한 노란빛과의 거리가 꽤 멀어졌다.
안 가고 뭐 해?
설마 내가 널 위로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짚어줄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위대한 파오스의 수석님?
바네사가 익숙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 이중합 탑에서 죽는다 해도, 우린 여전히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어.
인간에게 영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네가 계획을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못한다면...
쉿.
지휘관이 대답하려던 찰나, 바네사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지휘관이 재빨리 바네사를 따라 몸을 숨기고 등불을 껐다.
저쪽에... 흔적이 있어.
바네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휘관이 멀지 않은 설원에 남은 발자국을 발견했다.
눈이 발자국을 다 덮지 않은 걸 보니, 누군가가 금방 이곳을 지나간 것 같았다.
곧이어 둘은 수풀 뒤에 몸을 숨겼고, 바네사는 그 발자국을 따라 앞쪽을 살폈다.
저기야.
멀지 않은 곳에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숲을 헤집고 있었다.
구조체도, 침식체도 아니야.
갑자기 걸음을 재촉하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숲속을 샅샅이 살피는 걸로 보아, 그 "누군가"는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빛이 설원에 반사되면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익숙한 은색 해초 머리의 기계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