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2 은하수를 향해 /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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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겪어보지 못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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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소리가 방 안의 적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지휘관.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강압적인 어조로 보아, 상대가 바네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이면 깨어있을 테니까, 들어갈게.

낡은 나무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익숙하면서도 조금 낯선 구조체가 역광을 받으며 나타났다.

지휘관은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 목이 갈라져서, 뭔가를 말하려 해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몸이 붕대에 단단히 감겨있어 꼼짝할 수 없었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

바네사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방은 초라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보아하니 지휘관을 이곳으로 옮긴 누군가가 두고 간 것 같았다.

물은 미지근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곧이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난 바네사는 물컵을 지휘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물이라도 좀 마셔.

루시아의 기체 처리 사항을 전달하려고 왔어.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다시 지휘관의 심장을 조여왔고,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기억이 다시 지휘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화약 연기, 탄약 그리고 진홍빛 안개가 시야를 가득 채웠고,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루시아

지휘관님... [player name].

루시아

정말...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어요.

목구멍이 날카로운 칼날에 찢기는 것 같았고, 온 힘을 다해도 그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자, 그 익숙한 이름이 겨우 혀끝에서 맴돌았다.

무리하지 마. 너는 지금 탈진과 심한 탈수로 몸이 약해져 있어.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우린 루시아의 기체를 집결지의 수면 캡슐에 안치했어.

엠마와 로사가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녀의 Ω 코어는 수리할 수 없었어.

우린 모두 이런 일에는 익숙하니까,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만...

바네사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유감이야.

그리고...

바네사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낡은 나무문이 다시 한번 소리를 냈다.

들어와.

바네사, 집결지 가장자리에서 이화 적조가 발생했어요. 게다가 한 소대가 이화 적조에 갇혔는데, 지원할 인력이 부족해요.

가자.

지휘관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들은 이런 돌발 상황에 익숙한 듯했으며, 바네사는 간단하게 몇 마디 주고받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어.

방문이 쾅 하고 닫힌 후, 희미한 발걸음 소리마저 사그라들자, 지휘관이 있는 방은 다시 적막함으로 가득 찼다.

절망에 빠진 지휘관은 흐릿한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지만, 비통함에 짓눌린 몸은 온 힘을 다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조차 버거웠다.

인간 지휘관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으로는 회색 하늘이 펼쳐졌고, 큰 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바네사와 엠마는 급박한 상황을 전해 듣고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한동안 계속된 전투 끝에, 그녀들의 지원으로 이화 적조는 빠져나갔고, 생존한 소대 멤버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전장을 수습했다.

구조체로 개조된 지 오래되었지만, 바네사는 여전히 전투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역겹군.

바네사는 옷자락의 눈먼지를 털어내며, 방금 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엠마에게 치료받았다.

이화 적조가 처리하기 어렵긴 하지만, 이런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요.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때문인가요?

하,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당장 눈앞에 문제가 한가득인데?

전방 정찰대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거야? 경계 순찰 소대는 다 살아서 돌아왔고? 그리고 근처 보급 창고는 아직도 작동해? 후방에 있는 부상자들의 약은 충분하나?

바네사...

바네사가 몸을 일으키며 냉소를 지었다.

이중합 탑, 퍼니싱 게다가 계속되는 적조 이화까지... 이제는 우리조차도 이 망할 북극 항로 연합 근처의 바늘구멍만한 곳에 처박혀 있어야 하네.

누워있는 저 위대한 수석 지휘관을 동정할 시간에 우리 신세나 한탄하자고.

그분은 상태가 어떤가요?

……

당분간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루시아... 이젠 루시아도 곁에 없잖아.

바네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어떤 대단한 전투를 겪었는지 궁금하다고 해도, 우선은 그 녀석이 좀 회복되고 나서 얘기하자고.

네, 그렇게 전달할게요.

[player name]...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바네사... 바네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유랑민이 급하게 달려왔다.

말해.

집결지 뒤쪽 보급 창고에 이합 생물이 나타났어요!

순찰 소대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쓸모없는 것들.

큰일이에요. 그 창고에 마지막 남은 의료 물자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녀들은 서둘러 집결지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막 주둔지 외곽에 도착하자, 집결지 곳곳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고, 몇몇 부상자들은 의료 텐트로 옮겨지고 있었다.

바네사!

그때, 한 유랑민이 그녀들을 발견하고는 멀리서부터 바네사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왔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오늘은 더 이상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합 생물이 창고를 완전히 박살 낸거야? 젠장, 집결지에는 못해도 두 명을 남겨둬야 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엠마, 긴급 대응 계획을 세우고, 손상된 물자의 목록을 작성해. 그리고...

창고, 창고는 괜찮아요!

그럼, 왜 그렇게 난리야. 오블리크가 일찍 돌아오기라도 한 거야?

지휘관님... 그 구석방에 계시던 지휘관님이 나오셔서, 교대 중이던 순찰대와 함께 이합 생물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셨어요!

이게 말로만 듣던 공중 정원 엘리트 지휘관의 실력인가요? 전성기의 공중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도 안 가네요.

지상에서 태어난 인간이 동경의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나온 거야? 하, 역시 그레이 레이븐의 엘리트 지휘관답네.

바네사는 유랑민의 뒤를 살펴보았지만, 그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 지휘관은 지금 어디 있어?

방금까지도 저쪽에 계셨는데, 따라오지 않으신 걸까요? 혹시 또 쓰러지신 건 아니겠죠... 바네사?

바네사는 유랑민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넓은 보폭으로 집결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내가 여기 있으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구조체의 힘은 확실히 인간이었을 때보다 훨씬 강했기에, 나무문은 부서질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그러나 어두운 빛이 비춰든 그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던 사람은 어디 갔어?

아, 당신이 데려오신 그분 말씀인가요? 하아, 그분은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냐고!

아, 방금 집결지 중앙으로 가신 것 같아요. 대묘비 쪽으로요.

집결지 중앙에는 거대한 돌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이 땅의 중앙에 우뚝 서 있었던 그 비석은 처음에는 황금시대 도시의 유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했고, 장기 거주지로 확정된 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그 위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안토니, 콘스탄, 젤케, 시카, 다니엘...

루스, 에어리, 밤비나타, 양질, 안젤...

………………

한때 인간은 죽음을 마주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인간은 죽음과 관련된 단어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재앙이 가져온 이별을 비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별"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고, "대묘비"는 집결지 중앙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

구조체의 숨결이 흐릿한 수증기를 만들어냈고, 바네사가 시각 모듈을 간단히 조정하자, 대묘비 앞에 서 있는 지휘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과 묘비 위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는 상태였다.

...왜 그렇게 억지 부리는 거야?

몸도 성치 않은데 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 거냐고? 파오스의 교칙은 너에게 무모함만 가르친 건가?

[player name]?

바네사가 뭐라고 말을 걸어도, 묘비 앞의 지휘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휘관!

왠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자, 바네사는 빠르게 달려가 지휘관의 어깨를 잡아챘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왜 여기까지 왔냐고 꾸짖으려 했으나, 지휘관의 공허한 눈동자를 본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합 생물은 이미 순찰대에 의해 다른 곳으로 유인되었고, 미래에 갇힌 외로운 영혼은 눈보라 속에 우뚝 선 묘비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지휘관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하고 낯선 이름들이 지휘관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고, 그 줄지어 있는 검은 각인들은 마치 시간이 남긴 상처처럼 회색 비석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비석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위에서 아래까지 빼곡하게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떠나버렸다.

곧이어 지휘관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날카로운 거미줄처럼 전신을 휘감는 피로가 지휘관의 심장을 조이며, 마지막 남은 힘마저 빼앗아 갔던 것이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바네사의 목소리는 마치 멀리 떨어진 시공간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졌다.

허세... 파오스... 무모함...

바네사의 손에 이끌려 돌아선 지휘관은 피로에 찌들고,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듯, 묘지에서 도망쳐 나온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지휘관님, 지휘관님? 어떻게 이런 일이...

지휘관님... 무슨 일 있나요? 괜찮으신 건가요?

대체 무슨 일이... 지금 바로 생명의 별에 연락할게요.

[player name] 지휘관님...

정신 좀 차려봐!

겹쳐진 세계가 흐려지며, 다른 세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player name]! 정신 차려!

엠마가 곧 올 테니까 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 넌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바네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인간 지휘관의 방호복 침식 수치를 확인했다.

방문이라도 잠가둘걸.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player name]!

바네사가 아무리 불러도, 눈앞의 인간은 초점 잃은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볼 뿐,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기랄...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바네사는 이를 꽉 물며,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 여기서 얼어 죽고 싶은 거야?!

이 묘비 밑에 묻으려고 루시아가 널 이곳에 데려왔다고 생각해?

어느 결정적인 단어가 방아쇠가 된 듯, 인간은 몇 번 기침을 하더니 조금 정신을 차렸다.

루시아는 이제 없어! 너도 루시아랑 같이 수면 캡슐에 눕고 싶은 거야?!

루시아는 죽었다.

누가... 루시아를 죽인 걸까?

혼란스러운 기억이 지휘관의 뇌를 강타했고, 심장은 늑골과 흉강을 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그 순간, 지휘관은 시야를 수놓는 오색찬란한 빛 속에서 문득 루시아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녀의 입술은 애타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였다.

아... [player name] 대장님.

하지만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어요.

[player name] 지휘관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에요.

……

차가운 바람은 그날과 다를 바 없이 매서웠지만, 루시아의 기체는 수면 캡슐 안에 누워있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잃어가는 것을 본 바네사가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쾅".

그 순간, 바네사가 뒤에 있는 묘비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비린 순환액 냄새가 차가운 공기 속에 선명하게 퍼졌다.

곧이어 다리에 힘이 빠진 지휘관은 묘비에 기대어 주저앉으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순간적인 고통이 모든 환각을 떨쳐내자, 지휘관의 공허한 눈동자에는 분노를 넘어선 바네사의 차가운 표정이 비추었다.

난 널 해치지 않을 거야. 너한테 낭비할 시간도 없어. 집결지 전체가 날 기다리고 있다고.

네가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거라면... 엠마.

앗...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급히 달려온 엠마가 처참한 모습의 둘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방금 주둔 소대를 지휘해서 주둔지 창고를 지켜냈어. 평가해서 그에 맞는 물자 보상을 지급해.

하지만...

내 말 대로 해. 모든 게 끝나면, 이 사람을 후방 지원 쪽으로 데려가서, 거기서 알아서 하도록 하고.

네...

엠마는 의아해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바네사의 명령을 따랐다.

너 말이야...

네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난 이런 지상에서 30년을 살아왔어.

묘비 위로 선홍빛 순환액이 흘러내려, 밤비나타의 이름을 가렸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네가 일어설 수 없다면, 그냥 그렇게 앉아 있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 아마도 루시아는...

입술을 깨문 바네사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바네사의 발소리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눈에 파묻혀가던 지휘관은 모든 감각이 조금씩 얼어붙었다.

루시아는 죽었다.

수백 개의 바늘이 뇌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의식 표식의 저편에서는 더 이상 그 익숙한 신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지휘관은 목이 찢어질 듯 아팠음에도, 고통을 참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그녀는 정말로 이런 결말을 원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이중합 탑에서의 고난은 모두 끝났어요.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할 거라 믿어요. 그러니 지휘관님께서도 늘 건강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루시아

어떻게... 이대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 이런 식의 작별 인사를...

지휘관님을 혼자 두고… 떠나는 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묘비의 아래쪽에는 작은 공간이 남아있었다.

뒤엉킨 실타래 같은 기억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맴돌던 지휘관은 무언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루시아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묘비명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를 되찾기 위해 싸웠다.

우리는...

우리는 그레이 레이븐이다.

찢어진 전술 장갑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지만, 지휘관은 도리어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다. 그 순간 지휘관의 머릿속에는 이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집념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 재난에는 생존자가 없다.

하지만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

이 재난에는 생존자가 없다.

하지만 끝나게 될 것이다.

루시아...

탈진한 지휘관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기에, 대묘비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어느새 큰 눈이 그쳤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석양빛이 희미하게 비쳐, 밤이 장막처럼 천천히 내려앉아 하늘의 반쪽을 덮었다.

탑 안에서의 전투가 주마등처럼 지휘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회상이 멈췄다.

이런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지휘관님이 없는 미래는 의미가 없고, 저희가 바라던 평화로운 미래가 아니에요.

부디... 제가 떠난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이건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가 아니에요.

지휘관님. 모든 실패에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는 기적의 씨앗을 얻었으니, 반드시 이 세계의... 그리고 우리의 기적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감각을 잃은 손가락이 힘없이 묘비에서 떨어졌고, 비석에 흘러내린 붉은 피는 방금 새긴 글자를 천천히 메워갔다. 그리고 지휘관은 마지막 획을 그음과 함께, 사고가 멈춰버렸다.

비석을 타고 흐르는 피가 그날 손등에 그렸던 웃는 얼굴 같은 곡선을 그렸다.

누군가 뭔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흐릿한 소리는 점점 의식에서 멀어졌고, 붉은 노을만 희미한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이번에 깨어나면... 정말로 지휘관 혼자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루시아...

난 네게 약속했어.

후회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전에 설치했던 완충 구역도 이제 그냥 이합 생물에 넘겨준 거야?

아, 네... 워낙 갑작스럽기도 했고, 우리 초소가...

됐어. 인간 혼자서 이합 생물에 맞설 수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완충 구역은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거였으니까 괜찮아.

그것보다, 군수품은 다 옮긴 거야?

…………

답답해하는 바네사가 더욱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대형 장비는 그렇다 치고, 혈청 같은 휴대용 물자는 어떻게 됐어?

죄, 죄송합니다!!

연신 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모르는 부하를 보며, 바네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래판의 깃발 위치를 다시 조정해.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겠어.

바니가가 서둘러 움직이자, 허술한 작전 모래판 위에 현재 인간의 세력 범위와 이합 생물의 침식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현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완충 구역을 탈환하려면, 지난주부터 시행 중인 측면 진격 계획을 중단해야 해요. 현재 대기 중인 인원으로는 한 번의 탈환전을 치를 순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예비 전력이 전혀 남지 않게 돼요.

반면에 완충 구역을 완전히 포기하면, 양측의 전투 준비 구역이 모두 위험해질 거예요.

우선 정찰대와 순찰대를 철수시켜. 식량 생산 구역에 있는 소대를 제외한 후방 지원은 절대 사수해야 해.

이 정도 인원으로는...

그럼 그냥 완충 구역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지 뭐. 아예 내일은 양측의 전투 준비 구역을 포기하고, 모레는 나랑 같이 대탈출을 계획하면 되겠어 아주.

……

그럼 처음에 말씀하신 대로 결정...

그 순간,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쯧, 잠금장치도 고장 난 거야? 내일 수리하도록 일정에 적어놔.

바네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 전술 장갑을 낀 차가운 손이 바깥쪽에서 문틀을 붙잡았다.

평민은 이곳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군사 동향을 알 자격은 더더욱 없고. 죽고 싶은 거야?

너가?

지휘관은 의식이 돌아오면서, 이중합 탑과 그 코어에 관한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

들어와서 얘기해.

바네사는 반걸음 뒤로 물러서며, 지휘부의 문을 열었다.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자, 지휘관이 머릿속의 정보를 요점만 추려 하나씩 설명했다.

이중합 탑... 시간 기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더라면, 웹소설 작가가 와서 날 놀리는 줄 알았을 거야.

그 정보에는 이중합 코어도 포함됐었다.

그 이중합 코어가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그리고 이 절망적인 전쟁에서 인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로사는 집결지에 없어. 이곳은 위험하거든. 그녀도 구조체이긴 하지만 전투에는 능숙하지 않아서, 실험실을 더 멀리 옮겨놨어.

로사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거야.

이중합 탑에서 있었던 일을 당장 알고 싶긴 하지만, 이중합 코어 문제는 우선 보류해야 할 것 같네.

바네사가 허술한 지형도를 툭툭 쳤다.

네가 인원을 이끌고, 완충 구역의 이합 생물들을 돌파하여 뒤집어놓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론 부족해.

무리해서 탈환한다 해도, 지키긴 힘들 거야.

바네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모래판을 가리켰다.

그렇게 지휘관은 계획을 세밀히 검토하던 중, 한 구역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네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정말 머리가 많이 회복된 것 같네.

이곳이 중요한 관문인 건 맞아. 하지만 방어를 배치할 수도, 할 필요도 없어. 누군가가 그곳을 지키고 있거든.

루나가 그곳에 있어요.

루나는 거의 주둔지와 교류하지 않아. 전략적 협조뿐만 아니라 물자 지원도 거절하고 있어.

다른 승격자들의 흔적은 없었어요. 우리가 한동안 그녀를 관찰했었는데, 그곳엔 루나만 있었죠.

그녀는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인간을 이 땅에서 쫓아내려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마치...

그저 그곳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녀와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엠마... 엠마! 순찰 소대 쪽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번엔 또 뭐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요.

헉헉... 순찰 소대가 북서쪽에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관측되지 않은 이화 적조가 밀려와, 소대가 그 안에 고립됐어요!

보아하니 안 가볼 수가 없겠네.

[player name]의 신체 상태는 어때?

큰 문제 없어요. 정상적으로 임무 수행 가능해요.

그럼 출발하자. 이번엔 또 어떤 재수 없는 녀석들이 적조에 갇혔는지 보러 가야겠어.

바네사가 익숙한 비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