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1 칼날 위 탄생한 나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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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9 칼날 위 탄생한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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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자의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본·네거트가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었음에도, 그 가시들은 숙적을 향한 집념처럼 끈질기게 그를 뒤쫓았다.

인간의 형체를 잃어버린 본·네거트의 몸은 자신을 관통한 가시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본·네거트

이건 경고다. 카오스와의 융합만이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얘기해도... 너희들은 듣지 않겠지.

네 생각이 맞다고 고집부릴 거라면... 가라. 이중합 탑을 떠나라.

이중합 탑 내부의 균열과 붕괴는... 나와 카오스가 해결하도록 하지.

코어는... 너희가 가져가라.

카오스가 최선을 다해 너희들의 출구를 유지해 줄 거다.

본·네거트는 무너져가는 이중합 탑 속에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 말조차 남길 힘이 없는 듯했다.

본·네거트

하지만 기억해라. 이중합 탑의 붕괴는 이미... 매우 심각한 상태다.

나와... 카오스는... 어떻게든 이중합 탑 전체를 봉쇄할 것이다.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온다면... 절대로 이중합 탑에 들이지 않을 거다.

본·네거트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냉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그전에 죽을 거라는 걸 예감한 것 같았다.

잘 가세요. 다음엔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카오스는 이중합 탑의 코어가 담긴 "열쇠"를 건네준 뒤, 본·네거트의 곁으로 돌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이중합 탑의 붕괴가 모든 길을 막기 전에 어서 가세요.

네.

카오스는 지휘관과 루시아가 서로의 손을 잡고 험난한 지름길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 카오스는 고개를 숙여 옆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대행자를 바라보았다.

루시아를 이중합 탑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싸웠다면... 손쉽게 이겼을 거예요.

왜 그러지 않으셨나요?

이중합 탑을 지키는 이가 없으면 더 위험해질 뿐이다.

그게 전부인가요?

아마 지쳐서 그랬을지도.

저 둘이 자신들이 옳다는 걸 증명해서 나를 이 폐쇄 루프에서 해방시켜주기를 바란다.

당신은 해방되지 못할 거예요. 제가 좀 더 오래 깨어있기 위해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카오스는 고농도의 퍼니싱을 이용해 본·네거트 앞에 떠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리며 다음 동작을 알렸다.

…………

이중합 탑 안에서 맞서서 싸우기로 결심하신 순간, 이합 생물이 될 각오는 하셨겠죠.

그래. 물론이다.

본·네거트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남겨진 이상...

저와 함께 지옥으로 가시죠.

본·네거트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지옥에 있지 않았나?

카오스

…………

카오스는 지울 수 없는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처참하게 산산조각 난 대행자를 끌어안았다.

그에게 긴 형벌과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선사하기로 했다.

이중합 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격렬한 진동과 함께 수많은 벽이 연이어 무너져 내리며, 마치 오랜 고통이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들이 사라지고, 끝없던 고통 너머로 희망의 길이 환히 열렸다.

집에 가자. 집으로 가자! 예전의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가자.

완벽히 일치하는 두 발걸음 소리가 지면을 울렸고, 두 개의 교차된 심장이 내는 이중 진동처럼 들렸다.

루시아와 함께 긴 통로를 달리다 보니, 마치 죽음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이중합 탑의 출구에 가까워졌다.

끝없는 여정이 마침내 끝에 다다랐고, 빛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적들은 모두 제압됐고 몸에는 가벼운 상처만 있을 뿐, 처음 왔을 때처럼 둘 다 무사했다.

이중합 탑의 코어와 그동안 모은 정보들, 그리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모든 것이 전술 주머니에 보관되어 있었다.

루시아는 지휘관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영원히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순간, 영원할 것 같던 어둠이 걷히고, 마침내 새벽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네. 가요. 지휘관님.

그들 뒤에는 수많은 고통이 부서져 있었고,

앞에는 모든 것이 펼쳐져 있었다.

이중합 탑 안에서 느끼던 기이한 감각이 사라졌다. 탈출에 성공하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가 밀려왔다.

마침내 끝났다.

옆에서 전해져 오는 익숙한 온기와 오랜만에 마주한 낯선 바람이 그의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매번 임무를 마칠 때마다 그랬듯, 지휘관은 기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루시아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

꽉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리더니, 루시아는 마치 부서지기 직전의 기둥처럼 갑자기 무너지며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온기는 급속도로 사라져갔고, 기체 위에는 수많은 균열과 부식의 흔적이 퍼지고 있었다.

이중합 탑에서 그토록 견고하고 단단했던 기체는, 이중합 탑의 구조물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

루시아를 향해 손을 뻗자,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겨우 팔을 들어 올렸다.

지휘관은 곧바로 루시아의 손을 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

그때, 외부로 드러난 Ω코어가 눈에 보일 정도로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파편들을 잡으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것들은 손끝에서 점점 더 미세하게 부서질 뿐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루시아를 안아 일으키고 싶었던 지휘관은 그녀를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초조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중,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폐허가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 속, 잿빛 공기에는 붉은 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불타는 커튼에서 떨어지는 불씨처럼, 그 광경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이전에 봤던 탑 외부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휴대하고 있던 퍼니싱 감지기의 수치는 계속 변하다가 결국 비정상적으로 높은 구간에 멈춰 섰다.

어디든... 상관... 없어요.

루시아는 물에 빠진 사람이 부유물을 붙잡듯, 지휘관을 붙잡고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오랜 전투를 겪은 빛 무늬 태도는 마치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 같았지만, 여전히 땅에 꽂혀 있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짚고 일어나 지휘관의 부축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죽음의 늪에서 익사하지 않으려 마지막 힘을 짜내듯, 전에 지휘관이 죽었을 때 루시아가 적조에서 일어서던 모습과 같았다.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해요. 퍼니싱 농도가 너무 높고, Ω코어도 이미...

네. 그럴 거예요.

루시아는 돌아보며 지휘관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격려가 담긴 그 시선은 오히려 지휘관의 가슴을 후벼팠다.

불안이 공포로 변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정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본·네거트

만약 네가 도착한 곳이 황폐한 시간이나 세계라면, 이중합 탑도 계속 붕괴돼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예전에 들었던 경고가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전에 느꼈었던 이상한 감정들이 계속 지휘관을 괴롭혔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이중합 탑 때문인가? 아니면 서염 기체의 부하 때문인가?

…………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다.

루시아는 지휘관의 마음속 동요를 느낀 듯, 떨리는 손을 들어 지휘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휘관님.

먼저... 여길 벗어나야... 해요.

루시아는 몇 걸음 더 걷다가 멈춰 섰고, 무기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축에 응하는 척하면서 계속해서 지휘관을 앞으로 밀고 있었다. 루시아는 절대로 지휘관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 대가가...

가슴은 점점 조여오고, 입안에는 쇠 비린내가 퍼져갔다.

루시아가 안개 지역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코어를 그녀에게 맡겼었고, 본·네거트를 협박해 "꿈을 건너는 다리"로 루시아를 빼내 오게 했다.

제한된 선택지 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길을 택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반이중합 탑 내부의 시간 흐름은 외부와 달라요.

반짝이던 희망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아무리 뛰어난 서염 기체라도, 끝없는 전투와 Ω코어의 지속적인 소모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안개 지역에서 나온 후 루시아가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은 건, 정말 괜찮아서가 아니라 이중합 탑과 코어가 그 증상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이중합 탑을 벗어나게 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이중합 탑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어느새 지휘관보다 뒤처져 있었다. 분명 후방을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지휘관을 앞으로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미약하게 밀어내던 힘이 완전히 멈췄다.

루시아는 손을 내렸고, 그녀의 손끝은 등골에서 허리까지 미끄러 떨어지다가 힘을 줄 수 있는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전력을 다해 움켜쥐었다.

망가진 기체로 힘겹게 움직이던 루시아는 거리를 좁혀 지휘관의 곁으로 돌아갔다.

네.

함께 가요. 도움을 찾을 때까지, 지휘관님이 안전해질 때까지...

지휘관과 루시아는 서로를 부축하며 인적 없는 폐허 속으로 긴 여정을 떠났다.

한쪽은 빈사 상태의 구조체, 다른 한쪽은 경상을 입었지만 이미 침식된 인간이었다.

둘은 폐허를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소리치며 수색했지만, 사람의 흔적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들은 정오부터 밤까지 걸었고, 서로에게 의지한 채 잠깐 눈을 붙인 뒤, 밝은 달이 뜨자 다시 새벽까지 걸었다.

다행히 서로가 곁에 있어서 가능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 없는 여정 속에서 루시아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마저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묵묵히 앞을 바라보거나 지휘관을 쳐다보는 게 다였다.

지금 루시아의 세계에는 끝없는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상처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었다.

지휘관은 몇 번이고 루시아에게 통증 모듈을 끄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지휘관과 의식이 연결되어 있기에, 자신이 고통을 감내하며 의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기체의 손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의식의 바다까지 문제가 생긴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자신이 짐이 되는 게 죽도록 싫었던 루시아는 그저 희미한 희망을 품은 채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흩어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텅 빈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루시아는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수색이 시작되었다.

다친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고, 찬바람에 다리의 감각이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가슴 속에서 가라앉지 않는 고통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텅 빈 집들을 뒤지고, 주변을 배회하는 이합 생물들을 물리치며, 어슬렁거리는 그림자 사이로 계속 잠입해 나갔다.

찾은 것이라곤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노후화된 전자부품, 텅 빈 혈청병들과 같은 쓸모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마을 중심가를 지나 낡은 병원에 들어가서야 통신 송수신 장치 한 대를 발견했다.

통신 송수신 장치

지지직... 지지직...

지직... 안내방송을 듣고 있는 모든 생존자들에게 알립니다. 지상에 퍼니싱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있는 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인근 기지 또는 지원 부대에 최대한 신속히 연락하시기를 바랍니다. 주파수 구간 조정이 불가능할 경우, 이 주파수에서 송수신 장비로 단신호 3회, 장신호 3회, 단신호 3회를 송신하십시오.

반복합니다. 안내...

열 번째로 해당 주파수를 재수신한 후, 안내 방송이 사라졌다.

통신 송수신 장치

지지직... 지지직...

지직... 여기는 북극 항로 연합 소속 지원 부대원 엠마·카퍼필드입니다. 현재 발신자의 위치를 추적 중이니, 안전에 유의하시고 체력을 아껴주시기를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여기는 북극 항로 연합 소속 지원 부대원 엠마·카퍼필드...

엠마...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폐쇄 루프 앞에서 루시아는 탄식하듯 웃었다.

네. 어찌 됐든 구조대는 찾았네요.

먼지가 떠도는 공기 속으로 들어온 햇살이 루시아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다.

떠다니는 먼지를 바라보던 루시아는 갑자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휘관님.

지휘관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지휘관은 속으로 "유언처럼 그러지 마."라고 중얼거렸다.

지원 부대의 운송 장비가 마을 근처에 멈춰 섰다.

꿈에서 본 여성은 약속대로 나타나 루시아의 상태를 확인한 뒤, 즉시 응급조치를 취했다.

심각해요. Ω 코어의 과부하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요. 즉시 기체를 변경해야 하는데, 기존 기체를 보관하고 계신가요? 새로운 기체 제작은 시간이 부족해서 불가능해요.

아시모프...

…………

아시모프 님은... 안 계세요.

엠마는 고개를 숙이고 지난 세월의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저도 지휘관님과 루시아가 돌아온 게 믿겨지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지휘관님이 이중합 탑에 들어간 후 30년이 흘렀어요.

보세요.

엠마·카퍼필드는 잡동사니 상자에 붙어있던 공고문을 떼서 건네주었다.

누렇게 바래진 종이 위의 글자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조금의 시간을 들여 내용을 이해하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러분들이 떠난 후 처음 3년은 괜찮았어요. 하지만 5년째 되던 해에 이합 재난 구역에서 결국 문제가 터져버렸죠.

그리고 이 30년 동안 인간의 전선은 계속 후퇴했고, 지금은 북극 항로 연합이 지상의 마지막 요새가 됐어요.

엠마·카퍼필드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공중 정원은 우주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기 위해 지구 궤도를 떠났어요.

그레이 레이븐... 리와 리브는 성함을 타고 심우주로 떠났어요. 미래를 찾겠다는 그들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요.

그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공통된 소원이기도 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바네사가 해주는 게 좋겠네요.

네. 여기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인원 중 하나예요.

엠마가 단말기를 몇 번 조작하자, 형체 하나가 천천히 나타났다.

…………

시선이 마주치고 침묵이 흘렀다.

눈앞에 선 그녀는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랐지만, 익숙한 눈매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바네사였다.

30년이나 늦어진 인사네. [player name].

이번엔 네가 정말 죽은 줄 알았어.

바네사의 목소리에 울먹이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네가 꼭 돌아올 거라고 루나가 말했는데.

맞아. 루나가 없었더라면 이런 상황에서 북극 항로 연합은 버티지 못했을 거야.

아우 기체?

네 앞에 있잖아. 엠마.

…………

조용히 해 봐. 네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으니까.

바네사가 말을 하며 손을 들었다. 흐릿한 영상 너머로 희미하게나마 기계 구조가 드러났다.

이미 오래됐어. 백로 소대에 또 한 번의 인원 변경이 있었는데... 결국 나 혼자만 살아남았고, 그 뒤로 구조체가 됐어.

지금은 성갑충 소대 대장이야.

바렐리아는 희생됐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자리에 앉은 바네사는 초조한 듯 귓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잘 들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엠마의 운송 장비를 타고 북극 항로 연합으로 가는 거야. 구조체를 정비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가 전부 거기 있거든.

지금 지상 상황으로 봐선, 아무리 빨라도 14일은 걸릴 텐데, 루시아가 버틸 수 있을까?

지휘관이 엠마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

바네사의 말에 몸 안의 모든 기력이 빠져나갔다.

지휘관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우 기체를 찾는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통신 장치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

찾았어요. 지금 엠마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2614킬로미터 가면 예전 주둔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시모프 님이 떠나기 전에 아우 기체를 그 기지에 뒀어요. 근데…

로사의 말을 끝까지 들어.

영상 속 소녀는 이미 구조체가 되어 있었다. 기억 속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달리, 지금은 한층 냉담해 보였다.

로사

아우 기체가 보관된 창고가 주둔지와 함께 적조에 잠겼어요. 당시 급하게 철수해서, 적조가 물러간 뒤 물자 회수팀을 보냈지만 아우 기체는 찾지 못했어요.

지휘관님의 운을 한 번 시험해 보실래요?

어떻게 할 거야?

물론.

이 말을 들은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세요. 시간이 없어요.

지휘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루시아를 부축하며 엠마의 물자 구호 차량에 올라탔다.

행운을 빌어.

[player name].

고개를 든 지휘관은 바네사의 희미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어쨌든, 돌아온 걸 환영해.

이 말과 함께 바네사의 통신이 끊겼고, 로사만 통신 주파수 구간에 남게 됐다.

로사

네. 지휘관님.

로사

네.

차창 밖을 바라자 양쪽으로 황무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로사의 맑은 목소리를 들으니, 주둔지의 정보와 예전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리는 이중합 탑의 균열을 복원하다가, 루시아와 지휘관이 탑에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리브와 함께 뒤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코어를 잃어 이중합 탑 안에서 고통받고 있던 그 대행자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차징 팔콘 소대는 크롬과 반즈만 남게 됐다. 카무이는 조사 임무 중에 실종됐고, 카무가 그를 찾으러 갔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케르베로스 소대는 무사히 철수했지만, 머레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블랙 램 소대는 철수 작전에서 후방 엄호를 맡다가 전멸했다. 그래서 성갑충 소대 소대와 지원 부대만 현재 기지에 남게 된 것이다.

…………

점차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차창 밖 풍경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네.

루시아의 손은 이미 차가웠다.

기도하듯 중얼거리는 동안, 오랜만에 포근한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