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몸이 순식간에 "문"의 통로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탑의 코어와 가장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둘의 몸에 있는 퍼니싱이 끊임없이 푸른 코어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리가 한때 수정했던 그 코어 또한 멈추지 않고 퍼니싱의 힘을 흡수하고 있었다.
처음엔 무기가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 사이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숨소리가 조금씩 지쳐가더니, 주먹과 발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묻혀버렸다.
터널 깊숙이 들어갈수록 둘의 힘은 약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격 네트워크와 퍼니싱이 부여한 능력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오직 그들 자신의 힘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승격 네트워크에 의존해 태어난 셀레네가 주먹다짐 같은 저급한 싸움 방식을 선호할 리가 없었다.
너... 으...
……
대체... 으...
……
셀레네는 박빙일 거라 생각했던 전투에서 계속해서 밀리기만 했다. 그래서 입을 열 때마다 루나의 공격에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가득한 회랑은 오히려 루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모든 힘을 내려놓고 오직 자기 몸으로만 싸웠다.
마침내 루나는 비명을 지르는 셀레네를 바닥에 세게 눕혀버렸다.
왜... 어... 째서...
이렇게... 비열하고... 혼탁한 주제에... 어떻게...
셀레네는 갑자기 눈을 크게 부릅뜨며, 답을 찾으려는 듯 루나의 얼굴을 헤매듯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마침내 루나의 눈동자에서 멈췄다.
증오... 구나? 너... 깨달은 거지? 맞지? 내 생각이 옳았던 거야... 넌...
셀레네의 목소리가 조금씩 다급해졌다. 그리고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그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루나의 대답에 셀레네의 흥분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감정이란 건, 단순하거나 순수하지만은 않아. 목적도 마찬가지고.
어떤 감정이든 버린다고 해서 더 완벽해지거나 성숙해지는 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넌 생존자들이 얼마나 증오스러운지 알아야 해. 그리고 승격 네트워크의 의지를 따라야만 해. 그것만이... 올바른 길이야. 선별만이... 네가 나아가야 할 미래라고...
너와 0호 대행자는... 모두 잘못된 길을 걷고 있어.
너희의 사명을 왜 이행하지 않는 거지? 대체 무엇이 너희를 이렇게 만든 거야? 대체... 구원 불가능한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 거냐고!
미련이라...
터널의 가시를 꽉 움켜쥔 루나가 셀레네를 향해, 그녀 뒤에 있는 수많은 망자들의 원한을 향해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향해 물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지울 수 없는 미련이 있어서 이 세계를 증오하게 된 게 아닌가?!
너...
반박할 말을 더 하기도 전에 루나의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무기가 셀레네의 몸을 관통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승격 네트워크가 연산한 미래는... 반드시... 실현될 거니까...
Video: S 루나_문안 전환
이상 현상이 잦아들자, 루나는 권능이 서서히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루나는 예전처럼 힘이 거칠게 몸속에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감고 세심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0호... 대행자?
눈을 뜬 루나는 수상한 걸 발견했다.
셀레네를 물리치고 힘을 되찾은 루나는 원래 잃어버린 것뿐만 아니라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능력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있어야 할 오염 특성만은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능력을 사용해 그를 찾아보려 했지만, 돌아선 순간 뒤에서 거대한 정보의 홍수가 빛과 그림자로 변해 갑작스럽게 밀려와 그녀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으윽?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이 한 프레임씩 장면으로 압축되어 루나의 시야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루나는 수없이 반복되는 희망 뒤의 절망을,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새 생명 뒤의 죽음을 목격했다.
모든 종착점이 파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결말이 불완전했다.
찰나인지 영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동안, 루나는 미래의 모든 갈림길을 보는 것 같았다.
바꾸고 싶어?
셀레네의 목소리가 잡음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삭임은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넌 너만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가 확고하구나.
알 수 없는 힘이 양팔에 가득 차올랐다.
과거는 너무나 끔찍했어. 넌 얼마든지 더 나은 시작점을 선택할 수 있어.
그녀의 지시는 너무나 명확했다. 마치 루나가 손만 들면 모든 고난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인도했다.
가봐. 지금도 여전히 고통받는 <color=#ff4e4eff>과거</color>를 <color=#ff4e4eff>바꿔봐</color>.
…………
루나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