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루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달빛이 소녀의 몸에 쏟아져 내리며, 핏빛 위로 은색 테두리를 더했다.
걱정하던 이들이 재빨리 루나와 지휘관 곁으로 모여들어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나는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모든 소리가 잦아든 후에야 긴 생각에서 깨어났다.
지금의 난... 어떤 의지 쪽에도 서 있지 않아. 내 신념과 감정은 전부 내 것이야.
난 구체적인 미래를 기대하면서, 그 욕망으로 날 따르려는 목소리를 부르는 것뿐이야.
그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언제나 변함없었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무사한 미래를 바라.
그런 미래를 위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면, 그리고 내가 더 많은 짐을 져야 한다면... 네가 말한 것처럼 그걸 "행운의 대가"로 여기고 끝까지 책임질 거야.
승격 네트워크는 영원불변하지 않아. 언젠가는 재선별이 이뤄질 거야. 내 소원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 돼버렸어.
이제 내 힘을 되찾았으니, 이 힘으로 규칙에 선전포고를 할 거야.
그들이 다시 공격해오지만 않는다면.
루나가 미소 짓으며 달빛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뒀다.
모든 게 무사히 끝난 것 같은데.
이제 정화 구역의 반이중합 탑으로 가는 거야?
그래. 탑 안으로 떨어진 셀레네를 찾아야 대행자의 모든 권한을 되찾을 수 있어.
물론이지.
본·네거트가 가져온 정보도 내 추측을 증명했어.
그 탑 자체는 "퍼니싱이 통제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나타난 거야. 그래서 대행자를 막지 않을 거야.
0호 대행자와 셀레네가 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것 때문일 거야.
알겠어.
루나 아가씨, 무사히 자신을 되찾은 걸 보니 정말 다행이야.
선생님을 대신해 그 자료를 전달하는 임무는 완수했고, 다음 목적지가 정화 구역이니 우리는 여기서 가볼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다시 날을 잡아 전에 말했던 일을 계속하도록 하자.
알았어.
출발한다.
일행은 험준한 이합 숲을 약 30분 정도 걸어갔다.
앞서 걷던 알파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모든 일행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무기를 움켜준 뒤 주변을 경계했다.
미풍이 불어오자 보랏빛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파는 대답하지 않고, 등 뒤의 태도 손잡이만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거웠고, 천천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뭔가를 감지한 듯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한데.
알파와 함께 선두에 있던 루시아가 소리 없이 칼을 뽑아들었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올 때는 이합 생물들의 방해가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이합 생물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리는 고에너지 저격총을 꺼내 장전하며, 조심하라는 신호를 눈빛으로 보냈다.
이합 생물의 활동 징후가 전혀 감지되지 않아요.
너무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보라색 흙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천둥과 얼음이 얼어붙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교차하는 칼날의 섬광이 대지를 갈랐고, 끈적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곧이어 고통스러운 포효가 울려 퍼졌다.
땅 밑이야!
거짓된 평화가 가면을 벗어 던졌다. 대지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고요하던 숲이 끓어오르는 물처럼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눈앞 가까이에서 작은 산들이 솟아올랐고, 이합 생물들이 하나둘 그곳에서 기어 나왔다.
크고 작은 괴물들이 뒤엉켜 있어서 정확한 수량을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수십 마리, 어쩌면 수백 마리일지도 모를 괴물들이 하늘로 포효했다. 광기가 넘쳐흐르는 핏빛 눈동자로 물밀듯이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쳇...
누가 봐도 이건 계획된 함정이었다. 일행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알아차렸다면, 몇 발짝만 더 앞으로 갔더라면, 땅 밑에 숨어있던 이합 생물들의 포위망에 정확히 걸려들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합 생물들이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계략이 아니었다.
이합 생물을 조종하는 걸 보면... 콜레도르의 숨겨진 계획일까? 아니면 본·네거트의 짓일까?
정말 귀찮군.
루나가 대열 앞으로 나와 알파, 루시아와 나란히 섰다.
루나가 등 뒤의 월륜을 손에 쥐자, 원형무기가 회전하며 날카로운 칼날에서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알파는 작은 태도를 집어넣고 대신 큰 태도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러자 칼집의 표시등이 하나씩 켜지더니, 전류가 휘감기며 천둥이 울리는 가운데 장검이 천천히 칼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아는 분사기를 왼팔에 고정하였다. 응집된 한기가 주위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리자, 공기 중의 수분이 얼음 결정으로 변해 햇빛 아래서 반짝였다.
밀려오는 이합 생물 무리가 그들과 맞닥뜨린 순간, 최전방의 이합 생물들은 얼어붙거나 잘려 나가거나 타 버렸다.
전방에서 혼전이 벌어지는 동안, 작은 체구의 이합 생물들이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후방 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중 가장 앞선 이합 늑대가 피 묻은 입을 크게 벌리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그 입안으로 총구가 들어가더니 불꽃을 토해 내며 머리뼈째 날려 버렸다.
흥~ 흥~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롤랑은 왼손을 거두고 오른손의 체인검을 휘둘러 두 번째 이합 늑대의 목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 버렸다.
펑... 펑...
다른 한편에서는 리가 반쯤 쪼그려 앉아 고에너지 저격총을 들어 올려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겹쳐 울리는 총성과 함께 날아간 총알들이 작은 체구의 이합 생물들의 급소를 관통하며 반응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쾅!
크앙...
땅이 흔들리더니 다른 방향에서 더 많은 이합 생물이 나타났다.
이대로 계속 싸우다간 안 되겠어요!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개활지여서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적 때문에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돌파할 수도 없었다. 만약 함정이라도 밟게 된다면 순식간에 상황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안전한 곳을 찾아 공중 정원과 연락을 취해서 지원을 요청한 뒤, 돌파 경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리가 우측 전방에 좁은 산길을 발견했다. 그곳은 입구가 좁아 이합 생물들의 수적 우세를 제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리는 다른 쪽에서 롤랑도 그 산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롤랑은 리를 향해 몸을 돌려 살짝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과장된 동작으로 "우리 생각이 같네. 맞아. 바로 저기야."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리는 롤랑을 무시했다.
지휘관님!
리의 시선과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지휘관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부유 캐논으로 다가오는 이합 생물을 물리친 뒤, 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옆에서 이형창을 휘두르던 라미아도 따라왔다.
나, 나도 같이 가!
일행이 요충지로 달리는 동안, 지휘관은 단말기로 루시아를 호출했다.
루시아, 루나 그리고 알파가 이합 생물의 절반 이상을 처리했음에도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니 적들의 증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쯤에서 물러나.
분사기로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어 달려드는 이합 생물들을 잠시 막아선 루시아 일행도 이쪽으로 물러났다.
유리한 지형 덕분에 이합 생물들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고, 모두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리브, 롤랑, 라미아는 몰려오는 이합 생물들을 저지하고 있었고, 리는 원거리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파와 루시아는 잠시 재정비하고 있었다.
루나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퍼니싱이 통신을 방해하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이합 생물들의 전체적인 동태를 살폈다.
……
기류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루시아는 분사기를 이용해 루나와 같은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이게...
이합 생물들의 전체적인 상황을 관찰한 루시아는 루나의 표정이 왜 그토록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각 모듈의 끝에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이합 생물이 만들어 낸 거대한 파도였다. 이합 숲 전체가 생태계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저장하고 있던 퍼니싱을 쥐어짜 내 기형적인 괴물들을 부화시켰고, 거대한 괴물의 파도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일행을 집어삼키려 했다.
…………
루나는 이합 생물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 이합 생물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는 와중에도, 전부 고개를 위로 든 채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하나같이 동일한 목표, 바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군.
루시아가 루나를 바라보자, 루나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와 루나는 지상으로 내려와 이합 생물 무리의 상황을 다른 이들에게 전했다.
이합 생물만 상대하는 거라면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 지능이 없어서 협력이라는 걸 모르더군. 아무리 수량이 많아도 적절한 전술만 쓴다면 제거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
누군가 지휘한다면...
지휘자가 있든 없든, 여기서 계속 싸우는 건 의미 없어.
맞아. 우리의 다음 목표는 여기가 아니야. 이합 생물들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루나가 이쪽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정화 구역 근처에서 다시 만나는 걸로 하고 따로 행동하지.
한꺼번에 움직이면 이합 생물들이 몰려들어서 퇴로가 막힐 거야.
뭐지, 우리가 시야 밖에서 꼼수라도 부릴까 봐 걱정돼?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루나는 제자리에 서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기... 루나 아가씨, 이제 어떻게 하면 돼?
한 바퀴 돌아서 따돌릴 거야.
이 이합 생물들은 날 노리고 있으니까.
……
정말 괜찮겠어?
지금은 정면으로 맞설 필요 없어. 그냥 따돌리기만 하면 돼.
그리고...
루나의 등 뒤에 달린 한쪽 날개가 천천히 펼쳐지자, 주위의 퍼니싱 농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도 없으니까, 더 이상 "눈치" 볼 필요도 없지.
롤랑.
경로는 다 짜놨어요. 뒤쫓아오는 강아지들을 완벽하게 따돌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는 루나 아가씨의 순환액, 아니... "향기"가 좀 필요할 것 같네요.
알았다.
밖에 있는 이합 생물들은 다 처리했어.
좋아. 출발하자.
단말기에 나오는 경로로 이동해서 루시아가 관찰했던 가장 위험한 이합 생물 무리를 우회했다. 그 후로는 순조로웠고, 작은 크기의 이합 생물 몇 마리를 제외하면 별다른 방해는 없었다.
…………
매복해 있던 이합 생물들을 전혀 관측해 내지 못했어요.
수가 너무 많았어요. 게다가 이 지역은 원래 농도가 높은 곳이었잖아요.
이합 생물이 매복하다니... 처음 보는 상황이에요.
대체 누가 이 이합 생물들을 조종하는 걸까요? 콜레도르는 이미 처리했잖아요. 남은 건...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믿으시면 안 돼요.
전방에서 신호를 수신했어요.
성갑충 소대예요.
지시를 하며 한 발짝 내딛으려는 순간, 밟고 있던 땅이 먼저 무너져 내렸다.
쾅!
이어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지휘관님!
발 아래 땅의 감각이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를 향해 갈고리를 발사했다. 그 덕분에 땅을 뚫고 나온 이합 생물의 이빨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동력갑의 관측 시스템을 이용해 이합 생물의 수량을 빠르게 확인했다. 총 열 마리였고, 그중 두 마리는 대형이고 나머지는 소형으로 구성돼 있었다.
네!
땅을 뚫고 나온 것은 이합 생물뿐만이 아니었다. 이합 숲의 굵은 뿌리들도 함께 솟아오르며 지형이 변화한 탓에 지휘관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잠시 떨어지게 되었다.
몇 마리 늑대형 이합 생물이 지휘관의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지휘관은 착지와 동시에 옆으로 굴러 충격을 흡수한 뒤 거리를 벌렸다. 곧바로 반쯤 쪼그려 앉은 자세로 일어나 총을 들어 조준했다.
늑대형 이합 생물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등 뒤로 겹겹이 쌓인 방어 역장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와중에 지휘관은 일어서면서 손목을 돌려 총구를 앞에서 뒤로 겨눴다.
키가 큰 가면을 쓴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총알은 본·네거트 바로 앞에서 끝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힘이 다한 총알은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본·네거트는 시종일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지휘관은 눈앞의 대행자를 몇 발의 총알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
주위에 있던 광기 어린 이합 생물들이 보이지 않는 역장 방벽에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로막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역장 안에 있는 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요 속에 서 있게 됐다.
맞아.
어두운 그림자가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평소와는 달리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건가?
주위에서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이합 생물들을 보면서 한 가지 추론이 떠올랐다. 이 이합 생물들은 본·네거트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언젠가 그 정보를 손에 넣을 거야. 지금 넘겨주면 협상 카드로라도 쓸 수 있잖아.
난 절대로 콜레도르와 협력하지 않아.
최근 도미니카와 관련된 뭔가를 받은 적 있나?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혼잣말하듯 말을 꺼냈다.
"관련 인원"이 만약 이 시대에 뭔가를 남기고 싶었다면, 그 대상은 아마 너 일 거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봐. 단서는 네 주변에 있으니까.
본·네거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은 정화 구역이 있는 방향이었다.
말을 마친 본·네거트가 한 걸음 물러서자 순식간에 역장이 펼쳐졌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힘에 동력갑을 입은 지휘관이 비틀거렸고, 뒤에서는 이합 생물의 포효와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지휘관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본·네거트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지휘관님!
루시아가 이합 생물들을 모두 처리한 것 같았다. 위치를 파악한 후 갈고리를 나무줄기에 걸어 잠시 공중에 떴다가 다시 내려오니, 그레이 레이븐 소대 대원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본·네거트의 출현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모두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본·네거트의 정보는 "도미니카"의 초대장과 반이중합 탑을 가리키고 있어요.
반이중합 탑... 그는 우리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다시 만날 준비를 해야겠어요.
여기 상황이 꽤 심각한 것 같네요.
앞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전에 만난 적 있는 두 구조체가 나타났다.
안녕.
여러 인원이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
성갑충 소대의 오블리크입니다. 옆은 팔지고요. 전에 뵌 적이 있으니 어색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원래 정화 부대 소속이었는데, 지금은 성갑충 소대 소속입니다.
저희 둘뿐입니다. 바렐리아 지휘관과 다른 대원 헤바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뒤쪽 경로는 안전을 확보해 뒀고, 잠복해 있던 이합 생물도 모두 제거한 상태입니다.
지휘관은 오블리크가 쓰고 있는 가면의 모양을 눈여겨보았다.
무례하네. 우린 실력으로 붙어서 온 거라고.
그래서인지 둘의 몸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일행은 이합 숲을 벗어나 정화 구역으로 돌아왔다.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진 않았지만 모두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았다.
지휘관은 상처투성이가 된 동력갑을 벗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몰라 결국 오블리크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가장 처음 동력갑옷을 투하했던 것도 오블리크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제가 맡도록 하죠.
천만에요.
말을 마친 오블리크는 지휘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옷이 멋지네요.
예전에 제가 재봉 일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쪽에 관심이 좀 있어요. 실례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한 오블리크는 동력갑을 안고 떠났다. 뒤따르던 팔지도 지휘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른 용건 없으면 우린 먼저 가볼게.
근데... 솔직히 좀 아쉽네. 소문으로만 듣던 대행자를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따로 행동해서 못 봤네.
지휘관은 팔지의 이 말에서 뭔가를 눈치챘다.
글쎄...
물론 널 의심하는 건 아니야. 네가 의심받길 누군가가 바라고 있는 거지. 네가 실제로 뭘 했든 상관없어. 그들이 미래가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널 지키려는 편.
팔지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 뒤, 앞서가는 오블리크를 쫓아 달려갔다.
한편,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정비를 마쳤고, 루시아도 이번 작전의 주요 내용을 모두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지휘관님, 루나가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