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호 대행자와 셀레네는 하나가 되어 아크로 둘러싸인 "흑성"이 되었고, 새로운 모습으로 공중 정원에 강림했다.
지금까지 가장 특이한 형태의 사냥꾼이 낡은 족쇄를 벗어던지고, 마음대로 날뛸 수 있는 목장에 들어섰다.
공항-A1
공항에 울려 퍼지는 귀가 찢어질 듯한 경보음과 시끄러운 외침 소리가 뒤섞이면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후우...
경보기를 향해 날아간 주먹이 막 닿으려는 순간...
대장, 녹티스가 기물을 파손하려고 해!
주먹은 순간 부수는 동작에서 누르는 동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펴서 경보기를 덮었다. 그러자 이 구역의 경보음이 한순간 낮고 이상한 소리로 변했다.
헛소리하지 마. 그냥 시끄러워서 끄려고 한 것뿐이야.
근데 적은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시스템 오류는 아니겠지. 그럼, 누군가가 곤란해질 텐데...
곤란해질 이는 녹티스뿐이거든? 크흥...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미리 말해두지. 지금 임무 중이라고 내가 널 봐줄 거라 생각하지... 응?
21호의 으르렁 소리에 녹티스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21호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 냄새... 뭔가 이상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붉은 전류가 둘의 시야에 들어왔고, 21호는 반사적으로 털이 곤두섰다.
퍼니싱이다!
이게 무슨? 우리 지금 공중 정원에 있는 거 아니었어?
지지직...
복잡하게 얽힌 붉은 전류들이 공항에 진입한 후 갑자기 잠시 멈춰 섰다. 그러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공항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장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금속 창조물들은 퍼니싱과 접촉하자마자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변이하기 시작했다.
캉!
둘 뒤편에서 검광이 스쳐 지나가더니, 침식이 되어 움직이려던 장비를 산산조각 냈다.
전투 준비!
으악!
적군의 정체는 나중에 생각해야겠군.
녹티스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러자 손에 들려있던 경보기가 산산조각 났다.
이 몸은 공중 정원에서 실컷 한판 붙어보고 싶었다고!
생활 구역
평소 북적이던 상가 광장은 지금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집행 부대와 정화 부대의 구조체 병사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포위망 중앙에는 상가 홍보용 장식물이었던 거대한 로봇 조각상이 금속성 비명을 지르며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금속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네 개의 로봇 팔이 날카로운 파편들을 쳐 내자 소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2호 고위험 목표물 제거 완료. 그쪽은 어떻게 됐어?
콱...
그녀의 질문에 상대는 어렴풋한 총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팔지의 배후에서 애써 움직이던 로봇 부품이 산산조각 났다.
모두 해결했습니다. 생활 구역의 위험도는 높지 않습니다. 전투보다는 오히려 군중들의 공황으로 인한 혼란이 더 골치 아플 것 같습니다.
공포탄과 마취 탄 몇 발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집행 부대와 정화 부대 후방 지원팀이 투입되고 있으니, 남은 안전사고는 우리가 처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방심하지 마. 생활 구역은 원래 전장이 되면 안 되는 곳이야. 그러니 좀 더 신경 써야 해.
계속 진행하자. 다른 대원들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위험에 직면하자 공중 정원은 매우 신속한 대응 속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어떤 비상 계획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Ω 무기가 공중 정원의 모든 구역을 커버할 수는 없었다. 정화 범위 밖 구역에서는 로봇 장비들이 퍼니싱에 침식되어 광폭화됐고,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우리를 벗어나게 된 괴물은 공중 정원 곳곳을 휘저었다. 상업 구역, 전투 대기실, 물자 처리 센터, 생명의 별까지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때 인간의 희망이라 불리던 "등대"는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쳤다.
엔진층
다른 구역에 비하면 엔진층 상황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주요 구역에는 정비 부대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형 Ω 무기의 장악력 덕분에 로봇 장비에서 퍼니싱 침식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일 경우, 즉시 물리적으로 연결을 차단하고 절삭한 뒤 교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직은 최악의 상황이 아니네.
의회 그 멍청이들이 무슨 공중 정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놈들은 건설적인 면에선 방해만 되는 족속들이야.
…………
테디베어?
동료가 던진 말을 받아치지 않자 카레니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대방은 그 동작을 눈치챘는지 헤드폰을 벗었다.
무슨 일이야?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야? 지금은 네트워크가 끊겼을 텐데?
임시 통신 채널을 테스트하고 있었어. 지금까지 26개 지점의 설치와 가동이 완료됐고, 채널 안정성을 확인하는 중이야.
통신 채널이 마비된 채로 그냥 놔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눈먼 장님이 될 거잖아. 난 그런 상황이 싫단 말이야. 그래서 최대한 빨리 공중 정원의 눈을 뜨게 만들 거야.
그럼, 다른 구역의 정보를 접수할 수 있다는 건가? 지금 공중 정원 상황은 어때?
로컬 채널이 아직 완전히 연결되지 않아서 간단한 보고만 받을 수... 있... 어?
테디베어는 스크린의 데이터와 문자를 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어조에도 망설임이 배어났다.
테디베어의 변화를 눈치챈 카레니나는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한 번 힐끗 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문제라기보단... 내가 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그러는데. 다른 구역의 피해 상황이 예상과 좀 다른 것 같아.
하지만 지금은 정보 전송량이 제한적이라 내 판단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네 스크린에 뭐가 떴는지 봐도 난 도통 모르겠다고.
음...
테디베어는 동료를 난처한 듯 바라보며 어떤 예시로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집을 지을 때, 기초 공사부터 하잖아? 근데 이 녀석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땅도 제대로 파지 않았어.
그러니까 뭔가 계략이 있어서 이미 기초를 다 깔아놨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마도...
테디베어는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쓸며 경계심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이 녀석은 처음부터 집 지을 생각이 없는 거일 수도 있어.
게슈탈트
임시 채널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서 완전한 통신 복구는 아니더라도 각 구역의 상황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게슈탈트 앞에 선 아시모프는 한 손으로는 조작 패널의 항목들을 처리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단말기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각 구역의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시모프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졌다.
아시모프 님?
경계 임무를 맡고 있던 루시아가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
아시모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하던 작업을 마무리한 뒤, 고개를 단말기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통신 채널로 들어오는 보고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상해.
지휘관과 아시모프는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고,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추측을 확인했다.
공중 정원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주요 목적이 감옥을 파괴하는 건 절대 아닐 거야. 게슈탈트, 공중 정원 3D 맵을 띄워.
임시 통신 채널의 정보를 종합해서 모든 구역을 피해 정도에 따라 대, 중, 소 세 등급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색으로 표시해.
곧 거대한 투영이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세 가지 색이 패치처럼 공중 정원 모형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색상이 뒤죽박죽이라 어떤 규칙성도 보이지 않았다.
임시 통신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야. 거기에 인원들의 주관적인 판단 오차까지...
[player name], 데이터 필터링을 좀 도와줘. 오류 메시지의 영향을 최대한 줄여야 해.
자세한 이유는 필요 없이. 난 너의 전장에서 단련한 경험과 직감을 믿어.
Z57 구역의 가중치를 낮추고... 이 수치를 기준으로 이 세 구역의 피습 상황을 다시 계산해.
J89 구역을 4개로 나누고, 공격받은 두 지점만 추려내서 선으로 연결한 다음 다시 색칠해.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빈 공간으로 처리해.
피해가 가장 심각한 구역의 수치를 0으로 초기화하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색칠한 부분을 따로 계산해.
두 사람이 협력한 수정 명령은 계속 내려졌고, 공중 정원의 3D 모형은 화가의 손끝에서 천이 움직이듯 계속 색상이 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멈췄다.
각각의 색상 흔적은 더 이상 어지럽지 않게 됐다. 그리고 그사이를 선명한 붉은색 독사가 감고 있으면서 사냥감을 향해 은밀하게 독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 본 루시아는 칼자루를 꽉 쥐었고, 리브는 입을 막으며 낮게 탄성을 질렀다. 답이 밝혀진 것이었다.
탈옥수의 첫 번째 임무는 당연히 더 큰 두 번째 감옥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거였다.
A1 공항? 그 자식의 목표는 A1 공항이야! 다른 공격은 전부 눈속임이었어. 공중 정원을 탈출하려는 거야.
공항-A1
펑!
힘을 모아 뻗은 주먹이 침식체를 강타했고, 맞고 날아간 침식체는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있는 붉은색 대군 속으로 떨어졌다.
쾅!
녹티스가 폭파 버튼을 누르자, 침식체에 설치해 두었던 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거대한 화염이 주위 적들을 집어삼켰다.
완벽해!
하하하! 공중 정원에서 이렇게 맘껏 폭파할 수 있을 줄이야!
대장, 봤지? 내가 적들을 다 처리했는데, 이제 그 성가신 경보 좀 꺼도 되지 않아?
경보보다 네가 더 시끄러워. 그래서 단말기 알림음도 거의 못 들을 뻔했잖아.
단말기? 통신 시스템은 마비됐다며? 아직도 작동이 된다고?
바보. 21호는 중간에 놔둔 게 단말기로 통화하기 위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모르는 건 멍청이 녹티스뿐이야.
쳇... 그래서 대장, 무슨 연락을 받은 거야?
어디에 또 적이 나타났대? 난 아직 준비운동도 못 했는데, 딱 좋네.
앞뒤 맥락 없는 메시지가 두 개야. "경계를 높여라" 그리고... "조심하라"?
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중 정원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항구 지역의 장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먼지구름 사이로 섬뜩한 검은 구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변 아크가 조금씩 강해지더니 맨눈으로 보일 만큼 빠르게 압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지지직!
눈부신 섬광과 함께 귀를 찢을 듯한 전류 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공항의 모든 경보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멈추어버렸다.
!
쳇...
한참이 지나서야 셋은 이 여파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음, 조용해졌네...
넌 좀 조용히 해.
둘은 말을 계속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베라 양옆으로 자리를 잡은 뒤, 불쑥 나타난 불청객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치지직...
비켜!
구체가 미세하게 움직이자마자 베라가 반응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러 녹티스를 향해 베었다. 그러자 녹티스는 대장의 공격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펑!
그 작은 움직임과 전혀 다른 끔찍한 공격이 녹티스가 조금 전까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뭐야? 진짜 빠르네. 강적인 것 같은데.
감탄은 끝나고 나서 해. 21호!
베라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구체가 다시 한번 공격을 가해왔다.
아크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날아와서 21호는 도저히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펑!
멀리서 날아온 총알이 정확히 목표물을 맞추었고, 그 영향으로 검은 구체가 흔들리게 되면서 아크의 방향이 빗나갔다.
그럼에도 21호는 결국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콜록... 콜록콜록...
21호를 데리고 후퇴하세요.
하? 이 몸이 왜 그래야...
시키는 대로 해!
쳇...
녹티스는 새로 온 이를 흘겨보면서 마지못해 21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리와 베라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네가 메시지 보낸 거야?
아니요. 지휘관님은 여기 계시지 않아요. 전 혼자서 이 녀석을 쫓아왔어요.
베라는 단말기 화면을 슬쩍 보았다. 메시지 두 개가 하나는 선명하게, 다른 하나는 흐릿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흥, 그건 두고 봐야겠지.
그래서 이 녀석은 대체 뭔데?
공중 정원을 이런 상황으로 만든 주범이죠. 그 이상 자세한 건 저도 모르겠지만...
펑...
리는 대화 중에도 다시 공격을 가해 움직이려던 구체를 물러나게 했다. 그렇게 둘과 구체는 다시 대치 상태가 되었다.
분명한 건, 이 자식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그렇군. 그래서 공항에 나타난 거였군.
베라는 리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비웃듯 웃었다.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도망가려고? 우릴 뭐로 보는 거야.
일단 진정하시는 게 좋겠어요. 우리가 협력한다면 놈을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최소한 이 우주선들로부터는 멀리 떨어뜨려야 해요.
그 이후에 원하는 대로 처리하세요.
그럴 필요 없어. 너무 귀찮아지니까.
지금은 다툴 시기가 아닙니다.
너랑 싸울 생각 없어. 이 자식이 쉽게 물러날 놈이었으면, 네가 여기까지 쫓아올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시도는 해봐야죠.
그만둬. 내가 반대하는 건 더 좋은 방안이 있어서야.
녹티스!
나 왔어. 대장!
이 우주선들 전부 폭파해. 도망갈 수 있나 어디 한번 보자고!
훗, 이런 일은 너무 내 취향인데.
당신!
지지직!
녹티스가 움직이자 검은 구체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아크를 발산했다.
상황을 본 리는 어쩔 수 없이 베라와 협력하여 녹티스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펑!
우리는 공중 정원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거지, 문제를 일으키러 온 게 아니에요!
캉!
어차피 다 문제잖아.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야겠어?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냐?
펑!
총알과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말다툼이 이어졌다. 그리고 폭발음 속에서 검은 구체를 포위해 갔다.
구체는 우주선들이 하나둘씩 파괴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대장! 마지막 한 대 남았어. 곧 끝내 버릴게!
녹티스의 외침이 마치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구체 주위 아크 밀도가 순식간에 상승했다.
지지직!
큰일이군요. 이 녀석이 폭주하려고 해요. 어서 막아야 됩니다!
굳이 말 안 해도 알거든!
총알과 칼날이 분노에 찬 듯 검은 구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구체는 이번에 방어를 완전히 포기한 채 둘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며 녹티스를 향해 돌진했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남은 우주선만 노려보는 것 같았다.
녹티스, 피해!
흥... 덤벼라!
녹티스는 적이 전속력으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자,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폭탄 두 뭉치의 안전핀을 이로 뽑아내고는 마지막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 어서...
으응? 누구... 윽!
달려들던 녹티스는 어둠 속에서 번쩍인 레이저에 맞아 뒤로 밀려났다.
손에서 놓친 폭탄 두 뭉치는 날아온 칼날에 맞아 우주선 쪽으로 튕겨나갔다.
펑!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며 공항 전체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콜록... 콜록콜록...
지휘관님?
흥, 너무 늦은 거 아니야.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 여러 대원이 삼삼오오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파편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검은 구체를 포위했다.
이제 도망갈 데도 없지? 어디 한번 움직여봐.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궁지에 몰린 짐승이 가장 위험한 법이죠.
두 소대가 다 여기 있는데, 아무리 강해 봤자 뒤집기는 글렀어.
너희들, 이렇게 꾸물거리면 내가 먼저 간다?
녹티스는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지지직...
네.
흥, 같은 수법에 두 번은 당하지 않아.
아크로 만들어진 방어막이 순식간에 흩어졌고, 녹티스는 구체의 측면까지 날아와 있었다.
지지직...
바로 그 순간, 구체 주변에 남은 아크에서 이전과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동시에 움직였다. 하지만...
윽...
아크가 처량하게 울부짖는 것이 괴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이 모든 이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붙잡아 두었다.
갑자기 눈부신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익숙한 감각이 오감을 통해 정신을 강타했고, 공간이 일그러진 것처럼 시야마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거운 압력이 갑자기 나타나 이곳의 모든 이들이 산더미 같은 무게를 짊어진 듯한 숨 막히는 느낌을 받게 했다.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지휘관님!
철... 수... 해!
간신히 말을 내뱉은 베라가 온몸을 떨며 녹티스를 공항 출구 쪽으로 걷어찼다. 이어서 21호의 옷깃을 잡아 바깥으로 돌진했다.
루시아가 달려와 리브를 끌고 벗어나려 했다.
지... 지이!
검은 구체가 다시 한번 진동하더니, 조금 전보다 더 급박한 힘이 전해져 왔고 마비감은 더욱 심해졌다. 리를 제외한 모든 이가 순식간에 행동 능력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단말기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이 경보음은 늘 한 가지 상황만을 의미했다.
그것은 퍼니싱 농도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뿐이다.
…………
붉은 무늬가 구체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더니, 공항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리도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한번 보더니, 또 다시 구체를 원망스럽게 바라본 뒤 마침내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