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 실종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자, 게슈탈트 데이터 벽이 해체되기 8개월 전.
해저 사건에서 빠져나온 라미아가 견과류 한 봉지를 들고 루나에게 돌아왔다.
루나 아가씨, 늦어서 미안. 돌아오는 길에 선물을 좀 사느라 늦었어.
루나는 라미아의 손에 들린 견과류 봉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것밖에 없어?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그럼, 짧게 말해.
그, 그게... 설명이 좀 어려워서...
…………
루나는 눈앞의 소심한 인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몇 달 만에 보니, 전에 없던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소소한 선물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거나, 평소보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 혹시 알고 있어?
롤랑이 너보다 먼저 와서 다 말해줬어.
내가... 본·네거트의 계획을 망쳐버렸어. 그래서 혹시... 루나 아가씨가 움직이기 힘든 틈을 타서 그가 복수하러 오지는 않을까?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가 얼마나 치밀한지 알 텐데. 네가 그의 계획을 완전히 망칠 거라고 눈치챘다면 즉시 와서 널 막았을 거야.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아직 다른 수가 있다는 뜻이야.
우리가 그쪽이랑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승격자로서 굳이 싸울 이유는 없어.
결정체에 속박당한 루나는 다시 한번 라미아와 그녀가 들고 있는 견과류를 힐끗 보았다.
보고할 게 그것뿐인가?
나, 그게...
용기를 낸 인어가 고개를 숙인 채 견과류를 까면서 해저에서 있었던 일들을 30분에 걸쳐 루나에게 말해줬다.
대략... 이런 일이 있었어.
라미아는 다 깐 견과류를 루나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
라미아가 자꾸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본 루나는 한숨을 쉰 뒤, 결국 그 선물을 받았다.
원래는 그 알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크틸라"가 "그녀"를 자신과 연결시켜 버렸어.
그 전투 이후로 알도 반응을 멈춰서, 평범한 이합 생물과 다를 바 없어졌어.
게다가 알 안의 하이디가... 크틸라 계획의 전말에 대한 기억을 공중 정원에 남기고 싶다고 해서, 내가...
결국 마지막까지 크틸라는 네가 살아있는 알을 가져갈까 봐 경계했었군.
나...
자책할 필요 없어. 그 죽은 알보다 네가 가져온 정보가 더 가치 있으니까.
게다가 그건 본·네거트의 계획에서 나온 거잖아. 그의 성격으로 봐선, 알이 살아있고 쓸모가 있었다면 네가 그걸 공중 정원에 가져가게 놔두지는 않았을 거야.
그, 그렇지. 그때 릴리스가 바로 제 근처에 있었으니까... 나를 막아야 했다면 벌써...
둘은 잠시 침묵했다.
재선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거야?
라미아, 너는 이합 생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루나는 알을 얻기 전까지는 이합 생물과 침식체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이합 생물은... 개체가 퍼니싱에 의해 해체되고 재구성된 형태라고 알고 있어.
퍼니싱만 제어할 수 있다면, 이합 생물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도 결정할 수 있고.
선별을 통과하려면, 첫 번째 조건이 자아를 유지하는 거야.
하지만 인간 의식은 퍼니싱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는 게 문제야. 그래서 살아남는 인간이 극히 드물지. 우리가 동료를 늘리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해.
이런 "생존"은 의식의 안정도뿐만 아니라 운과 당시의 상태도 중요하거든.
반면에 승격 네트워크가 퍼니싱을 누가 제어할지 고르는 기준은 단순해. 그냥 정보의 "가중치"가 더 무거운 쪽을 고르지.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 승격자가 되려면 강렬한 감정이 필수라고 생각했던 거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아니면 끝없는 공허함이든.
그 알은 승격 네트워크가 원하는 조건에 정확하게 부합했어. 퍼니싱이 고농도로 축적된 이합 생물에, 안정적인 의식까지 갖추고 있었으니까.
이런 게 곁에 있다면, 대행자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지.
어쩌면 본·네거트는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있어. 그저 도구를 잘 활용하는 것뿐일지도
그 대행자가 의식 융합에 대해 많이 연구했던 건, 혹시 그것 때문인 건가? 꿰매 붙이는 방식으로 이 "가중치"를 높이려고?
의식을 꿰매 붙인다라...
어. 그 많은 아이를 만들어낸 크틸라도 두 개의 다른 의식이 있었잖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항상 혹사 본인이 지배했었고.
혹사의 의식은 크틸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녀가 인간형 육체와 생명의 나무를 다루는 데 도움을 줬어.
그녀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혹사의 제어 때문이었을 거야. 마지막에 혹사가 억지로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혹사의 의식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또 다른 의식은?
그 의식은 해저에 있는 "거대한 고래"를 조종할 때만 사용했어. 죽은 자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온상 역할을 한 거였지.
"거대한 고래" 안의 의식은 크틸라와의 연결이 거의 없었어. 그래서 완전히 별개의 존재나 다름없었지.
혹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서로를 감지할 수도 없었어. 하지만 해저의 그 쇠사슬들에...
쇠사슬 얘기를 하다 라미아는 문득 고개를 들어 루나의 현재를 바라보았다.
루나 아가씨... 여기에 속박당해 있는 것도 퍼니싱을 더 이상 제어하기 어려워서인 건가?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라미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속박돼 있는 루나가 공격할 수 없는 안전거리까지 간 후에야 용기를 내 멈춰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루나 아가씨한테 무례일 수도 있겠지만...
루나 아가씨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다면,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어.
왜지?
그게... 내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한 이들 중에 루나 아가씨가 항상 있었거든.
아, 그게 아니고! 루나 아가씨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내가 루나 아가씨 곁에 남고 싶다는 뜻이야.
그래서 루나 아가씨가 무사히 선별을 통과하셨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익숙한 곳에 남을... 남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될까?
루나는 라미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이 인어가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욕심이 더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루나를 자신의 이익 범위에 포함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루나는 생각했다.
맞아. 난 퍼니싱을 제어하기가 많이 힘들어졌어.
하지만, 내 상황은 크틸라와 정반대야.
그녀는 다른 의식들과 "꿰매 붙여져서" 생명의 나무를 제어하고 그렇게 많은 이합 생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하지만 내 의식은 지금 "분해되고 있어". 승격 네트워크의 연결이 나와 비슷한... 다른 존재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
게다가 승격 네트워크 자체는 그 이중합 탑으로 인해 진화했어. 그리고 퍼니싱에 저장된 정보들은 이미 독립성을 찾기 시작했고.
비슷한 의식은 승격 네트워크에서 비슷한 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래서 언니와 "그" 언니도 그때 그런 상황이었지.
최근엔... 그 잡음들을 거의 듣지 못했고, 대행자의 권한도 잡음과 함께 희미해지고 있어.
내가 아무리 싫어해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루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 라미아.
벗어날 때가 되면 널 부를게.
지금은...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승격 네트워크에 남아있는 정보를 탐색하고 싶어.
루나의 시선이 라미아를 지나 먼 곳을 향했다. 그녀의 시각 모듈이 포착할 수 있는 가장 먼 곳, 퍼니싱 농도가 가장 높은 곳에 희미한 환영이 서 있었다.
…………
천천히 몸을 돌려 양손을 뻗은 환영이 루나에게 붉은색 악몽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재선별을 통과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었다.
미래로 향하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네 원한을 되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