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의식이 끝나자, 나뭇가지에 새로운 묘비와 희망이 걸렸다.
짐 다 챙겼어? 이제 출발할 준비해야 해.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지지직...] 지휘 [지지직...] 관님!
단말기에서 루시아의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들렸다.
[지지직...] 전방에 [지지직...] 적조와 대량의 이합 생물 [지지직...] 신호가 감지 됐어요!
적조가 [지지직...] 지휘관님 쪽으로 밀물처럼 [지지직...] 밀려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지지직...]
루시아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을 텐데 신호가 왜 이리 나쁜 것일까?
지휘관은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소식을 곧바로 리브와 율시에게 전했다.
시간이 없어요. 당장 이동해야 해요.
우리는 뒤에 있는 물자를 가지러 갈게.
율시는 익숙하다는 듯 임무를 가져갔다.
시간 없어!
지휘관에게 손을 흔든 율시는 곧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중상자, 노인, 아이들은 질서 있게 대형 차량에 올라탔고, 장년층은 대부분의 물자가 쌓여 있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지휘관은 루시아가 적조에서 이 노인을 구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직 감사 인사를 못했네. 너희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
가미라는 붕대를 감은 자신의 다리와 손바닥을 가리켰다. 그 붕대 아래는 얕은 적조에 접촉하면서 궤양이 발생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게 별 의미는 없지만, 숨은 쉬고 있으니 그걸로 위안 삼고 있어.
나한테 할 일 더 줄 수 있겠나? 난 중상을 입은 사람들과 달리 적어도 걸을 수는 있어.
가미라 님도 부상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세요.
에이, 괜찮아. 난 아직 걸을 수 있어.
이 물자는 여기에 둬. 내가 밀게.
하지만...
허, 그런 소리하지 마. 나 아직 걸을 수 있다니까.
우리가 빨리 앞으로 나아가면 게리를 만날 가능성이나 구할 가능성도 더 크잖아.
게리는 보기 드문 좋은 젊은이야. 내가 나중에 여자 친구도 소개해 주기로 약속했거든.
……
망설이지 말고 다른 일 보러 가. 난 괜찮으니까.
우린 구원받을 수 있어. 하지만 그냥 멍하니 앉아서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주길 기다릴 수는 없잖아.
이 땅은 너희들 것이기도 하고, 우리 것이기도 해. 지금 이런 세상에서 그 누구도 진정한 생존자라고 할 수 없어.
그러니 여긴 나한테 맡겨.
그리고 자네도 좀 쉬게나. 오랫동안 바빴잖아? 구조체라도 몸 챙기면서 해.
……
리브는 잠깐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선 젊고 건장한 유랑민들이 가져온 첫 번째 물자를 대형 차량에 싣고 있었다.
전방에서 길을 탐색하다가 급히 돌아온 루시아는 인간 지휘관과 함께 유랑민들의 첫 번째 물자와 부상자 이송을 도왔다.
이 유랑민들의 물자가 풍부해서였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구조 물자에 있는 압축 비스킷을 손가락 빨며 바라보는 여자아이의 갈망하는 눈빛은 거짓일 수 없었다.
지상의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적조가 범람하고, 이합 생물들이 밀려오면서 지상에 있는 인간의 생존 공간은 계속 압박받고 있었다.
이 세상에 생존자가 아무도 없어요…
리브는 중얼거리며 그 말을 반복했다.
지휘관님?
소녀의 눈빛은 확고하면서도 또렷했다.
아, 그 중상자분, 움직이시면 안 돼요. 다리를 고정해야겠어요!
말을 이어갈 새도 없이 그녀의 주의력은 옆에 있는 부상자에게 쏠렸다.
모든 사람의 협력 속에서 철수 작업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루시아가 안전한 위치를 탐색해 뒀다. 그리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적조가 예전 거주지를 덮치기 전에 이 유랑민 단체와 함께 적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자리 잡자마자 간소한 주둔지 외부에 새로운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여긴 안전해?
우리 일행은 13명인데, 잠시 이곳에서 쉬었다 가도 될까?
그냥 쉬기만 할 거야.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휴식이 끝나면 바로 떠날게.
노부인은 불안한 듯 흙투성이 치맛자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걱정 마. 적어도 지금은 이 구역이 안전해.
우리는 사람들을 보내 주위를 정찰하고 있으니, 여기선 마음 놓고 쉬어도 돼~
율시는 노부인에게 물자 텐트에서 멀리 떨어진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노부인 뒤 숲속에서 열몇 명의 초라한 모습을 한 유랑민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드디어 쉴 곳이 생겼네.
구조체?!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리브를 보자 그 유랑민이 펄쩍 뛰었다.
어. 그들이 구조하러 와준 덕분에...
왜 더 일찍 오지 않은 거야!
왜, 왜 주변에 있는 순찰대를 철수시킨 거야!
왜! 대체 왜!!!
너희가 그쪽에서부터 구조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왔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야!
키 큰 난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우리 엄마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적조 속에서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아. 난, 난 어떻게 해야 해.
기운이 다 빠진 듯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주둔지는 순식간에 죽은 듯 침묵에 빠졌다.
하... 내 남편도...
슬픔에 전염된 또 다른 난민이 지친 상태에서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공중 정원의 구조는 왜 항상 이렇게 늦는 거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누가 이런 세상에 태어나고 싶겠어.
……
이런 비난에 익숙해진 일행들은 지금 상황에선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순찰대를 철수시킨 이유는 구조체도 침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적조와 침식된 구조체를 동시에 상대하고 싶으신 건가요?
……
그래도 그게 공중 정원이 우리를 버린 이유가 되지는 못해!
분노에 차서 벌떡 일어난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누구를 향해 휘둘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봐! 그런 게 아니야..
그의 꽉 쥔 주먹을 잡은 율시는 흙투성이인 그의 굳은 손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아무도 버리지 않았어. 우리가 왔잖아?
울어도 돼. 슬픔은 신이 인간에게 준 권리이며, 눈물은 생명이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흔적이니까.
언젠간 해가 뜰 거니까. 안 그래?
이 세상에선 음식이 슬픔을 가장 잘 달랬다.
두 유랑민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빠르게 진정됐다. 그리고 그들은 곧 모닥불 옆에 앉아 따뜻한 야채수프 한 냄비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당신이... 리브인가요?
아, 네, 맞아요. 실례지만, 누구신지...
역시 당신이군요!
043호 보육 구역, 기억나세요? 당신이 절 구해줬었어요!
전 여러분과 함께 046호 보육 구역으로 갔었어요. 그 후 당신들이 그 두 괴물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043호 보육 구역으로 돌아가 찾아보고 싶었지만...
젊은 여성이 말을 멈췄다.
감사 인사하러 왔어요. 리브.
당신은 주신 마지막 혈청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이, 이거 드릴게요.
이건...
혈청병이에요. 그때 마지막 혈청을 쏟아낸 후, 생리식염수로 병을 한 번 더 씻어내셨죠. 그렇게 해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전 이 병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 지하실 흙으로 가득 채웠어요. 그리고 차 틈에서 찾은 씨앗 하나를 심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싹이 났다.
유리관에 심어진 작은 새싹이 떨리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약하고 바람에 쉽게 흔들릴 것 같았지만, 동시에 굉장히 강인해 보였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걸 받을 수는 없어요.
리브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 유랑민은 사람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
모닥불 옆에서 사람들이 서로 몸을 맞대며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지휘관이 찾고 있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그녀의 소중한 운송 장비를 정비하고 있을 거예요. 바로 저거예요.
일레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몇 발짝 가니,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송 장비의 먼지를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아... 적조에 부식된 흔적은 지워지지 않네?
매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라면 분명 방법이 있었을 거야.
어?!
깜짝이야.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구나!
와... 지휘관도 이름이 있어? 전부 지휘관1, 지휘관2 이렇게 부르는 줄 알았거든.
어? 뭐라고?
오늘 밤 저희를 도와줘서 고마워요.
저희는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게 익숙하지 않거든요.
아~ 그거. 별거 아니야.
누군가를 탓할 일은 아니잖아. 그들이 슬퍼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렇다고 너희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다만 이득을 본 입장에서 직접 나서서 너희들 편을 들어주기 어려웠을 뿐이야.
너희들 수송기가 저쪽에 착륙했다면, 이곳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였겠지.
아... 미안. 농담이 지나쳤지?
매카가 가끔 내가 분위기 파악 못 한다고 말했었거든. 하하.
참혹한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었하지만, 오늘의 장면을 보니 가슴을 무거운 돌덩이로 누르는 것만 같았다.
적조가 없었다면, 이합 생물이 없었다면...
퍼니싱이 처음부터 폭발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오래전 일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 없어. 이 세상에 "만약"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상에 있는 대부분의 유랑민 단체가 공중 정원에 적대적인 이유는 아카디아 대철수 때문이다.
내가 너무 어렸던 탓에 그때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이 바뀌지 않아서일 수도 있어.
난 공중 정원보다는 지상에서 지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듣기 좋은 말로 공중 정원이라고 하는데, 실제론 하늘에 떠 있는 감옥과 무슨 차이가 있어?
하지만 지상에는 침식체와 이합 생물이 있잖아요.
공중 정원이 절대적으로 안전할까?
선홍빛 나선탑이 기억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러자 침묵 속에서 대답을 느낀 율시가 미소를 지었다.
거봐.
이 세상에 생존자가 아무도 없어.
공중 정원은 공중 정원의 장점이 있고, 지상도 지상 나름의 장점이 있어.
구조체가 인간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데, 인간도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손과 머리 그리고 운송장비가 있으니, 스스로를 구할 수 있어. 그 누구의 동정도 필요 없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
우리의 문명은 이 지구에 영원히 뿌리내릴 거야.
율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소중한 운송 장비를 닦았다.
……
모닥불 쪽으로 돌아오니, 리브가 적조의 확산 속도와 방향을 계산하고 있었다.
규칙성이 전혀 없는 적조예요.
적조의 확산 속도는 예전에 비해 3~4배 빨라졌고, 확산 방향도 규칙성을 전혀 확인할 수 없어요.
지난번 "밀물" 패턴으로 봤을 때, 제가 오늘 아침에 탐측했던 그 길이 안전할 거예요.
하지만...
지휘관님께서 먼저 조사하도록 지시하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우리까지 갇혔을 거예요.
규칙성이 정말 없었다.
적조... 이합 재난 구역... 확산...
소름 끼치는 기시감, 의식의 바다, 이상 현상...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지만, 완벽하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지직...]
단말기에서 잡음 섞인 소리가 났다.
이상하네요. 신호 증폭기도 소용없어요.
공중 정원의 통신 위성이 고장 난 걸까요?
단말기가 간신히 잡음이 섞인 영상 통신을 띄우자, 다크서클 때문에 더욱 음침해 보이는 아시모프가 통신 화면에 나타났다.
농담할 시간 없어.
니콜라에게 전근 명령을 요청했으니, 인근 보육 구역에서 수송기가 출발했을 거야.
곧 받게 될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지휘관의 단말기에 새로운 임무 설명이 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역원 장치에 외부 인터페이스를 추가한 뒤, 이를 게슈탈트에 연결할 거야. 그래서 의식을 증폭시켜 역원 장치 CPU의 효과를 강화하는 계획을 진행하려고 해.
곡에게서 "도미니카의 초대장"을 받은 후, 지휘관은 아시모프와 장시간 암호화된 통신을 한 적이 있었다.
아시모프는 곡의 설명에 따라 "도미니카"가 게슈탈트에 저장된 일련의 데이터이며, 게슈탈트를 통해 화서의 연산에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래.
아시모프는 지휘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재까지 지휘관 중에서 게슈탈트에 침입해 작전을 수행한 건 너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네가 구조체와 함께 이 실험을 진행해 줬으면 해.
테스트 모형이 검증을 통과했어. 64.13%의 실현 가능성이 69.29%로 상승했어.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실현 가능성은 있어.
수송기가 약 5분 뒤 도착할 거니까, 준비해 둬.
다른 것들은 공중 정원에 돌아온 뒤에 자세히 설명해 줄게.
아시모프는 말을 간단히 마치고 통신을 끊었다.
새로운 임무 명령을 받았어요. 리브와 함께 유랑민들이 정화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지휘관님.
루시아와 리브의 걱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우린 다시 모일 거예요.
언젠간 해가 뜰 거니까.
공중 정원
실험 로비
한 단계의 실험이 종료된 후, 팀 내 다른 멤버들은 서둘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테디베어는 미완성된 프로토타입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 무표정하게 단말기를 보고 있었다.
쳇, 빅토리아한테도 지다니.
정말 형편없네.
아무리 어르신이 뒤에 있어도 그렇지.
시선을 아래로 한 테디베어는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 거기에 묻혀 있는 건 문명의 불씨야.
너의 아버지는 위대한 일을 하러 갔단다.
넌 그의 길을 따라가고 그의 발자취를 좇아서 그의 유산을 가져와야 해.
도미니카뿐이야. 오직 도미니카만이 인간을 데리고 지구로 돌아갈 수 있어.
미친...
피와 살을 뒤쫓는 신앙으로 진정한 신을 찾을 수 있을까?
도미니카가 한때 노르만 그룹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파란색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자, 분홍 머리 구조체가 스크린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네가 그들을 막을 방법을 찾길 바라.
그렇지 않으면...
단말기의 코드가 혼란스럽게 깜빡거렸고, 사전 설정된 차단 프로그램이 주인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가로채고 있었다.
어쨌든 사절 계획은 재개되어서는 안 돼.
터무니없는 신앙은 다시 언급돼서는 안 되고, 무의미한 희생도 크게 찬양되어서는 안 된다.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가로채고 잠시 생각에 잠긴 테디베어는 정보를 다른 이메일로 전송했다.